대개의 명당들이 가문의 積德으로 점지되고, 그 덕분에 후손들이 번창하여 명문을 낳는 善(선)순환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 특별한 사례 몇 가지를 들어 보고자 한다.
한반도의 척추인 白頭大幹(백두대간)이 南으로 흘러내리다가 중간에 소백산맥으로 갈라져 지리산에 이르고 한 줄기는 그대로 南下하여 부산 서쪽에서 낙동강을 만나 마침내 멈춘다. 백두대간의 龍脈(용맥)이 멈추어 기상이 한 자리에 뭉쳐 있는 부산 인근의 지형 중에 東萊(동래)는 가히 압권이다.
백두대간이 千聖山(천성산)을 빚고 천성산의 용맥이 金井山(금정산)과 華池山(화지산)을 지나면서 두 갈래로 벌어지는데, 왼쪽은 靑龍(청룡)이 되어 荒嶺山(황령산)에서 불끈 솟았다가 바다로 떨어지고, 오른쪽은 白虎(백호)가 되어 九德山(구덕산)·天馬山(천마산)을 지나 역시 바다와 만난다. 靑龍과 白虎가 갈라지는 어간에 동래가 들어 있다.
조선 500년, 가장 크게 發福한 땅
동래를 감싸고 있는 금정산과 금정봉을 각각 太祖山(태조산)과 中祖山(중조산)으로 하고, 화지산을 主山으로 하여 겹겹이 펼쳐진 白虎脈(백호맥)이 한 줄기 靑龍脈(청룡맥)을 감싸안는 也字形(야자형) 지세를 만든 후 생기가 한 곳에 모인 진혈처에 자리 잡은 묘소가 있다. 東萊鄭氏(동래정씨) 中始祖(중시조) 戶長公(호장공) 鄭文道(정문도)의 묘소이다.
外靑龍과 外白虎에 못지않게 화지산 자체도 內靑龍과 內白虎로 갈라지면서 야자형의 名局(명국)을 빚으니 그 사이에 천하 명당이 만들어졌다. 東北 방향에서 100리를 꿈틀거리며 내려온 龍脈이 西北 방향으로 머리를 돌렸다가 北北東에서 入首(입수)하니 무덤은 南向으로 앉았다. 지세만 명당 大局인 것이 아니라 생기가 솟아나는 眞穴(진혈)에 壙中(광중)이 정확하게 들어가 있었다.
東萊鄭氏 문중의 묘소로는 호장공 정문도의 묘소와 함께 경북 예천군 지보면 익장마을에 있는 鄭賜(정사)의 묘소가 兩大(양대)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鄭氏 문중 대발복의 근원으로 동래에 있는 야자형 명당을 꼽는 데 이견이 없다. 이 묘소는 휴전선 너머 황해도 구월산에 있는 문화柳氏 시조산과 함께 조선조 500여 년 동안 가장 크게 발복한 땅으로 알려져 있다.
東萊鄭氏는 조선시대에 文科(문과)급제 198명, 정승 17명을 배출했다. 이는 왕실인 전주李氏와 외척세도를 부렸던 안동金氏 다음으로 많은 수였다. 그 외에 대제학 2명, 공신 4명, 판서 20여 명을 배출했다.
府使에게 명당자리 양보받아
東萊鄭氏 중시조 정문도의 묘소. |
東萊鄭氏는 왕비는 한 사람도 배출하지 않았는데, 외척으로 행세한 적이 없으면서 이만 한 인물을 배출해 낸 것이 특이하다. 이 문중에서는 조선조 500년 동안 그 많은 벼슬을 했으면서도 賜死者(사사자: 사약을 받고 죽은 사람)나 유배당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진기록을 남겼다.
東萊鄭氏는 신라의 6부 촌장 가운데 자산진부 촌장 智白虎(지백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시조는 신라 때 安逸戶長(안일호장)을 지낸 鄭繪文(정회문)이나 기록이 분명하지 않아 고려 때 戶長이었던 鄭之遠(정지원)을 1세로, 정지원의 아들로 戶長을 지낸 鄭文道를 中始祖로 삼고 있다.
戶長이란 鄕職(향직)의 우두머리로 신라 때부터 지방에 세력을 펴고 있던 城主(성주)나 豪族(호족)을 말한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이들을 戶長 또는 副戶長이라는 명칭으로 재편하여 고려 王權에 협조하도록 유도했다. 조선조에 와서 戶長이라는 직분은 고을의 수령 밑에 있는 衙前(아전)으로 전락했지만, 신라·고려 때의 戶長은 지방의 土豪(토호)들이었다.
戶長 정문도는 청빈한 사람으로 동래 부사 고익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부사 고익호는 유명 地師(지사)가 점지해 준 화지산의 야자형 명당을 답사하는 길에 정문도와 아전 한 사람을 대동했다. 혈처와 국세를 살펴본 후 부사는 그 자리에 날달걀 하나를 묻어 두고 내려왔다.
다음날 새벽,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생기가 있는 혈처에 달걀을 묻어 두면 부화하여 닭 울음소리를 낸다는 것은 옛 사람들이 명당을 가리는 하나의 징조로 원용됐다. 달걀이 하룻밤 사이에 부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설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이야기다.
실망한 부사가 여러 원인을 생각해 본 결과, 명당은 분명하나 흉석이 많은 앞산(황령산)이 너무 험산이라 그 때문에 닭이 울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명당에 조상을 묻기를 단념해 버렸다. 이후 부사가 영전하여 송도로 올라갈 때 정문도는 『그 명당 자리를 저에게 주십시오』 간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때 아들 鄭穆(정목)에게 『나를 그 자리에 묻으라』고 명했다.
金棺 대신 보리짚으로 棺을 싸서 장사
정문도의 묘소에서 내려다본 부산 시가지(양정동). |
정목이 유언대로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다음날 가보니 누군가 무덤을 파헤쳐 놓았다. 다시 봉분을 만들어 놓은 후에 다음날 가보면 역시 누군가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져 있었다.
격분한 정목은 밤을 새워 무덤을 지켜보았다. 한밤중이 되자 도깨비들이 나타나 무덤을 파헤치며 말하기를 『金棺(금관)이 들어갈 자리에 누가 함부로 들어가』 하는 것이었다.
金棺이라면 金으로 만든 棺이라는 뜻인데 가난하게 살던 정목으로서는 언감생심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상심하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황금빛 나는 보리짚으로 棺을 싸서 덮으면 도깨비들이 金棺일 줄 알 것이니 그대로 해보라』 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노인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날 밤 천지를 뒤흔드는 뇌성벽력이 일어났다. 자고 나서 보니 앞산(황령산)의 흉석이 지난밤의 벼락에 깨져 버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무덤이 무사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金棺 대신 보리짚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삼척에 있는 이성계의 조상 무덤에 얽힌 설화와 비슷하다. 필요할 때마다 「노인」 또는 「고승」이 등장했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것도 많은 명당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 구조다.
어쨌든 정문도의 아들 정목은 아버지를 화지산에 장사 지낸 후 수도인 송도로 올라갔다. 그는 송도에서 아버지 정문도가 모셨던 前 부사 고익호의 집에서 11년이나 기거하면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익호의 사위가 되었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조상의 무덤 하나를 제대로 쓰기 위해 후손들이 기울이는 지극한 정성이다.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모의 장지를 구하지 못하여 거적에 시신을 싸서 짊어지고 야산에 내다 버린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세태 속에서 비록 가난하지만 부모의 장지를 좋은 곳에 마련하지 못하여 노심초사하는 자식들에게 문득 어디선가 도움의 손길이 왔다는 설정은 사실 여부를 떠나 오늘날까지 교훈을 준다.
道詵國師가 예견하고 懶翁禪師가 점지한 長水黃氏 묘소
황희 정승 |
후삼국시대에 「秘記(비기)」를 남겼던 玉龍子(옥룡자) 道詵國師(도선국사)와 고려 말 공민왕의 王師(왕사)로 指空(지공)·無學(무학)과 더불어 3大 和尙(화상)으로 불렸던 懶翁禪師(나옹선사)가 50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을 두고 점지한 명당이 있다. 전남 남원읍 대강면 풍산리 산촌마을의 鴻鵠斷風形(홍곡단풍형) 묘소, 즉 黃喜(황희·1363~1452) 정승의 祖父(조부) 黃均庇(황균비)의 묘소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鼻祖(비조)인 도선국사는 남원 풍악산의 飛鴻峙(비홍치)에 이르러 탄식하여 말하기를 『홍곡단풍형은 여긴데 淸相(청상: 청빈한 재상)은 어디 있는가』 했다고 한다. 그 후 『비홍치에는 청빈한 재상을 낳을 명당이 있다』는 입소문이 퍼졌으나 누구도 그 명당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수년 동안 남원의 山寺(산사)에 머문 적이 있었다. 화상은 계획한 불사를 위하여 시주가 필요했고, 때마침 화상의 이름을 듣고 비홍치에 있다는 명당을 점지받을 욕심을 지니고 있던 윤진사가 나옹화상에게 1000냥을 시주했다.
나옹화상이 윤진사와 함께 비홍치를 찾아갈 때마다 고개 위에는 짙은 안개가 끼거나 비가 내려 도무지 혈처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다급해지고 의심이 생긴 윤진사는 홧김에 나옹화상을 묶어 놓고 심한 매질을 한 후 시한을 주고 『홍곡단풍형 명당을 찾아내라』고 엄포를 놓았다.
매질을 당하고 死境(사경)에 이른 나옹화상이 지금의 광한루 부근을 지나갈 때 황군서가 화상을 모시고 가서 치료해 주었다. 황군서는 더 나아가 1000냥을 윤진사에게 대납했다.
윤진사의 빚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나옹화상은 어느 화창한 날 황군서와 함께 비홍치에 올랐다. 이상하게도 윤진사와 함께 올 때는 안개가 자욱했던 비홍치는 거울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나옹은 그 자리에서 명당의 혈처를 잡아 주었고, 황군서는 일찍 타계한 부친 황균비의 묘소를 이곳으로 옮겼다.
나옹화상은 황군서에게 두 가지를 일렀다. 하나는 『홍곡단풍형 혈처가 큰 인물을 배출할(出大貴之地·출대귀지지) 명당이기는 하나 후손이 가난하게 살게 될 형세(貧局·빈국)이므로 富局之地(부국지지)인 宿虎形(숙호형) 자리를 하나 더 봐줄 터이니 다른 조상 묘를 그곳으로 옮기라』고 했다. 또 그는 『하루 빨리 송악으로 이사를 가라. 2代 후에는 名재상 둘이 나오고 충장 하나가 나올 것이다. 그 후사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황군서는 나옹화상의 말을 고스란히 실천에 옮겼다. 화상이 추가로 잡아준 순창군 동계면 현포리 황골의 숙호형 명당에는 황균비의 부인 묘를 쓴 후 황군서는 남원골을 떠나 송악으로 이사를 했다. 그 뒤 세상에 나온 황균비의 손자가 黃喜였다.
그렇다면 빈국을 보완하기 위하여 부국을 하나 더 얻었는데 어찌하여 황희 정승은 생전에 반찬 세 가지 이상을 상에 올려놓지 않았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黃정승이 청빈하게 살았던 것은 선비의 道를 실행하기 위함이지 가난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황희의 아들 黃守身(황수신·1407~1467)도 父子 2代에 걸쳐 정승을 지냈다. 2代 정승을 낳은 집안이 어찌 가난하기만 했겠는가. 다른 관리들처럼 부정한 방법으로 富를 축적하지 않았고 스스로 백성들과 같이 살고자 몸을 낮추었을 뿐이었다.
黃喜 父子 이후 인물 배출 못 해
풍악산 비홍치는 글자 그대로 「기러기가 날아가는 고개」라는 뜻이다. 이 산에는 비홍치말고도 실안치(시라재)·안치(그럭재) 등 기러기와 관련된 명칭의 고개가 두 개 더 있다. 산이 깊고 기맥이 넘쳐 예부터 명산으로 알려졌고 많은 풍수가들의 발길을 끌어온 곳이다.
鴻鵠斷風(홍곡단풍)이란 『기러기가 크게 날갯짓을 하여 비상하면서 바람을 끊는다』는 뜻으로 바람을 거스르며 비상하는 기러기의 모습을 형상화한 표현이다. 다른 말로 「鳴鴻漕風形(명홍조풍형)」이라고 하는데 「기러기가 울면서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다」는 뜻에서 비슷한 표현이다.
풍악산의 주봉은 鷹峰(응봉)이다. 주봉에서 흘러온 용맥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첩첩한 白虎가 앞으로 휘돌고 靑龍이 힘차게 뻗었으며 멀리 일자문성의 안산이 名局(명국)을 빚어 놓은 한가운데로 온 산의 지기를 한데 모아 위험할 정도로 좁게 불끈 솟아오른 용맥이 있으니 그 좁은 용맥 위에 계단식으로 상하 7기의 무덤들이 들어서 있었다.
맨 아래쪽부터 황전의 무덤, 그 위로 陳公(진공)의 무덤, 光州金氏(광주김씨)의 무덤, 黃廷彦(황정언)과 남원 양씨의 합장 무덤, 黃進(황진)의 부인 晉州蘇氏(진주소씨)의 무덤, 陳夢日(진몽일)의 무덤을 차례로 지나 마침내 무덤군의 맨 위쪽에 닿으니 황균비의 묘소가 나타났다. 西向(서향)이다.
명당의 요소 못 갖춘 黃喜 父子의 묘
황희 정승의 조부 무덤(맨 위쪽). |
여기에 이르러 바라보니 비로소 靑龍 白虎와 안산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고, 풍악산의 용혈이 이 한 곳에 뭉쳐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덤에서는 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강한 생기가 솟았다. 아쉬운 것은 나옹화상이 말했듯이 外局(외국)의 局勢(국세)가 좋고 용혈이 강한 생기를 지니고 있으나 앞의 破口(파구: 물이 흘러가는 방향)가 直去水(직거수: 물이 직선으로 흘러 빠져버리는 형상)라 貧局이라는 점이었다.
나옹화상은 이 무덤이 후세에 끼칠 영향에 대해 한마디 더 이르기를 『赤城江(적성강)의 흐름이 화산에서 멀어진 이후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무덤을 쓴 지 600여 년 세월이 흘렀다. 처음 장사 지낼 때는 적성강 물이 華山(화산) 바로 밑으로 흘렀으나 그 사이 토사가 밀려 적성강 한가운데 섬이 생기면서 물줄기가 바뀌어 화산에서 1km 쯤 밖으로 물러나 흐르고 있다. 몇백 년 후의 일을 내다본 나옹화상의 밝은 눈이 두렵기만 하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는 黃정승과 아들 황수신 2代 정승의 묘소가 서로 건너다보는 산록에 묻혀 있다. 그러나 두 묘소 모두 失穴(실혈)하거나 명당의 요소를 갖추지 못한 자리였다. 따라서 장수黃氏 문중은 부자 2代 정승을 배출하고도 그 뒤로는 그에 버금할 만한 영화를 누리지 못하였다. 나옹화상이 『적성강 물이 화산에서 멀어진 후의 일은 알 수 없다』고 했던 것이 이를 두고 말함이었던가. 안타까운 일이다.
현청 안에 무덤을 쓴 李穡의 조상
한산李氏 시조 무덤. 솔숲 저쪽에 면사무소(옛 현청)가 있다. |
우리나라에 풍수사상을 본격 도입하여 한국적 풍토에 접목시킨 인물은 도선국사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고려조와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풍수사상의 근저에 자리 잡은 것이 「조상을 명당에 모시면 후손이 번영을 누린다」는 發福(발복)신앙이었다. 발복신앙이 도를 넘어 이미 발복한 명문가의 묘소 인근이나 묘소 위에 몰래 투장하거나 무덤을 쓸 수 없는 자리에 무덤을 쓰는 경우도 있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이런 풍습은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다. 명당으로 알려진 東萊鄭氏 중시조 정문도의 묘소 부근에는 문중에서 2~3년마다 몰래 쓴 무덤을 「청소」하는데 대개 10여 구의 偸葬(투장) 사례가 적발된다고 한다. 필자도 답산을 하다 보면 봉분이 함몰된 흔적을 자주 발견하는데, 이는 누군가 남의 묘소 한가운데의 봉분을 뚫고 몰래 투장했다는 증거이다.
우리나라의 무덤은 대개 산에 쓴다. 가끔 들판이나 전답의 한가운데, 또는 마을 가운데나 부근에 쓰는 경우도 있다. 局勢가 다소 모자라더라도 생기가 넘쳐나는 眞穴이라면 그곳이 마을 가운데든 집 안이든 상관 않고 조상의 葬地(장지)로 활용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 있는 한산李氏 시조 李允卿(이윤경)의 묘소는 묘지를 山野(산야)가 아닌 人家(인가)에 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것도 보통 인가가 아닌 縣廳(현청) 안에 偸葬(유장)한 것이다. 후일 그 사실이 알려졌으나, 무덤을 옮기는 대신 현청을 옮겼다. 그 묘를 쓰고 태어난 후손이 크게 출세하여 임금을 설득할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高麗 戶長 李公之墓」의 비문을 보자.
<옛 노인의 전하는 말에 따르면 호장공의 묘소가 한산 고읍의 오른쪽에 있었는데 관부를 옮겨 세울 때 그 담 안으로 들어갔노라고 하였다. 일찍이 거기 세운 지석을 보았으나 이를 숨기는 자가 있어 드디어 자취가 없어지고 말았다. 고을에 아직 살아 있는 노인이 그곳을 가리키며 슬퍼한 지 오래였으나 이제껏 찾아내지 못한 것은 대개 관아의 청사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병자년에 관아의 안채가 무너졌는데 이듬해에 여러 종족들이 현감 승우를 보내어 나흘 동안이나 파헤쳐 해좌지점에서 석곽을 찾아내니 이곳은 바로 관아의 청사 터로서 과연 족보에 기재되어 있었던 바와 같았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칭송하며 이르기를 이는 틀림없는 한산이씨 묘소라 하니 전해 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겠다. 이리하여 왼쪽 수십 보 되는 곳으로 군청사를 옮기고 묘소를 고쳐 봉분을 쌓았는데…>
비문을 요약하면 호장공 이윤경은 한산 고읍의 관청 내부에 묻혔으나(일설에는 현청 마루 밑이었다고 전한다) 몰래 쓴 무덤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가면서 소문만 전해 내려 올 뿐 무덤의 흔적도 없었다. 그러다가 관청이 무너진 것을 계기로 때마침 현감이 한산李氏 이승우였으므로 문중이 모여 나흘 밤낮을 파헤친 결과 마침내 석곽을 찾게 되었다. 관청 안에서 몰래 쓴 무덤의 석곽을 찾아냈다면 당연히 무덤을 옮기는 것이 순리이겠으나, 거꾸로 관청을 옮기고 무덤은 봉분을 제대로 쌓아 그 자리에 두었다는 내용이다.
文科 급제자 195명 배출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윤경의 무덤 때문에 한산고을의 관청을 바로 옆으로 옮기게 한 사람은 고려 말 文臣(문신)이자 三隱(3은) 중의 한 사람인 牧隱 李穡(목은 이색·1328~1396)이었다고 한다.
이윤경의 무덤 자리를 관청 내부에 점찍어 준 지사(풍수)는 고려 말 名師(명사)였던 金仁西(김인서)로 알려져 있다.
「고려 호장공 이공지묘」는 현재의 한산면사무소 바로 옆에 있었다. 한산면 사무소는 지난날 한산군이 서천군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한산군청이었고, 그 이전에는 한산현청이었다. 이윤경의 비문에 새겨진 대로 옛날에는 이윤경의 묘소가 있는 자리에 군청이 있었으나 관아 내부에서 한산李氏의 무덤이 발견된 이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乾芝山(건지산) 來龍(내룡)이 서쪽으로 흘러와 결인속기한 후 地氣를 모아 놓은 眞穴에 정확하게 앉았다. 무덤의 坐向(좌향)은 東南向으로 「金鷄抱卵形(금계포란형)」이다. 전면으로 안산은 매우 수려하고 생기는 있으나 좌우에 靑龍·白虎가 뚜렷하지 않은 것이 흠이었다. 局勢는 이루지 못했으나 생기가 넘치는 眞穴에 들어간 경우이다.
이 무덤의 發蔭(발음) 때문일까. 한산李氏는 조선조에 문과 급제 195명에다 정승 4명, 대제학 2명을 배출한 굴지의 명문으로 자리매김했다. 문중 인사 중에는 이색 말고도 「土亭秘訣(토정비결)」로 유명한 李之?(이지함)이 있다.
사위에게 명당을 양보한 장인
맨 위쪽부터 장인 박예, 朴씨 부인, 앞쪽이 김극유의 묘. |
명문 또는 명가를 논의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 光山金氏(광산김씨) 문중이다. 巨儒(거유)인 沙溪 金長生(사계 김장생)을 필두로 석학과 거유를 줄줄이 낳은 집안으로 조선조에 265명의 문과 급제자(본관별 서열 5위)와 정승 5명, 대제학 7명, 왕비 1명, 청백리 4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靑丘永言(청구영언)」의 金天澤(김천택), 「九雲夢(구운몽)」의 金萬重(김만중)이 김장생의 후손이다.
沙溪의 후손들은 부귀를 겸전하여 다른 문중의 부러움을 샀는데 풍수가들은 일찍부터 光金 발복의 근원을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 沙溪의 증조부 大司諫(대사간) 金克?(김극유)의 「天馬東走形(천마동주형)」 명당의 發蔭으로 보았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묘소는 「300년 大發福(대발복)에 萬年香火之地(만년향화지지)」라 한다. 김극유의 묘소와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는 이렇다.
<김극유는 咸陽朴氏(함양박씨 11세손인 朴隸(박예)의 사위였다. 박예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뿐이었다. 박예는 유명한 지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신후지지를 마흘리의 천마동주형 명당에 정해 놓고 있었는데 아들이 없었던 까닭에 고심 끝에 마음을 바꾸어 그 자리를 사위인 극유에게 주기로 하고 자신은 명당으로 꼽은 자리의 위쪽에 장사 지내 주도록 부탁했다. 장인 박예가 먼저 세상을 뜨자 유언대로 명당 자리 위쪽에 묻었고, 장인과 사위의 중간에 박예의 딸이 묻혔다. 그리고 맨 아래쪽 眞穴로 알고 있던 자리에 사위 극유가 들어갔다. 그 은공으로 박예는 400년 동안 外孫奉祀(외손봉사)를 받아 왔다>
마흘리의 천마동주형 명당을 찾아보니 전해 오는 말 그대로 맨 아래쪽에 극유의 무덤이 있고, 가운데 朴씨 부인(극유보다 17년 전 사망), 그리고 맨 위쪽에 사위에게 명당을 양보하고 스스로 穴이 아닌 곳에 들어갔다는 박예의 무덤이 층층으로 있었다.
극유의 묘소는 풍수가들 사이에 『驚天之賢(경천지현)이 나올 자리』라고 회자되어 왔다. 경천지현이란, 沙溪 김장생을 염두에 두고 후세 사람이 꾸며낸 말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필자가 살펴보니 명당 地穴에 누웠다는 극유의 묘소는 眞穴이 아닌 虛穴(허혈)이었다. 반대로 사위에게 眞穴을 주고 스스로 명당 아닌 곳에 누웠다는 박예의 무덤은 眞穴이었다.
대개 眞穴은 결인 지점에서 결인의 높이만큼 상거한 곳에 맺혀지는 것이 지금까지 증명된 풍수의 상식인데, 박예의 무덤은 이 상식에도 부합한 거리에 南南東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무덤 중앙의 壙中 위치에서 강한 생기가 지금도 발산되고 있었다.
선익은 적은 편이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선익의 흙을 무덤 조성 때 혹은 중수 때 봉분을 돋우는 데 사용한 흔적이 있으니 선익이 없었다거나 약하다고 할 수만은 없는 지세였다. 그리고 亥坐(해좌)는 兩性發福地(양성발복지)라 아들이든 딸이든 가리지 않고 음덕을 입히니, 결국 박예의 무덤이 스스로 외손에게 음덕을 입힌 것이지, 사위의 음덕으로 외손봉사를 받아온 것이 아니었다. 결과는 같다 하겠지만 발복의 근원은 이처럼 달랐다.
광산金氏의 묘소들은 극유의 무덤 말고도 명당이 허다하다. 광산金氏는 신라 말 왕자였던 金興光(김흥광)이 광산에 거주하면서 시작되는데, 오늘날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있는 시조 김흥광의 묘소는 「飛鳳抱卵形(비봉포란형)」의 명당이다. 이 무덤으로 인하여 고려 때 平章事(평장사)를 배출하였기에 마을 이름이 지금도 「평장동」이다. 그러나 역시 光金의 묘소들 중 가장 명당에 자리 잡은 것은 마흘리의 천마동주형이고 그중에서도 眞穴은 극유의 장인 박예의 무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