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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
민 병 삼
나는 종일 누워만 있었다. 더위가 구월에 들어섰지만 그래도 덥기는 한여름과 마찬가지인 이 한낮에 창문이랑 방문을 틈없이 닫아버린 늘 습한 좁은 방에서 등짝에 잔물이 진진하제 번지고 있는데도 나는 꼼짝않고 천정만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할멈은 내가 기진해 죽기라도 했는가 싶어 가끔씩 방문을 열고 얼굴만 삐죽 들여밀었다가는 내가 숨 쉬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문을 짜증스럽게 닫아버리곤 했다. 하숙비를 두 달이나 주지 못했으니 밥상을 들이기는 심통이 나고 넣지 않자니 종일 끼니를 굶고 누워만 있으니 혹 송장이라도 치를까 싶어 겁이 나기는 나는 모양이었다.
밀린 하숙비랑 등록금을 타겠다고 고향으로 내려간 경철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도무지 소식이 없다. 하긴 저놈이 고향에 가봤자 뾰족한 수 없는데도 한숨을 토하며 목을 꺾고 내려가더니 역시 별수 없는 듯 온다던 날로부터 열흘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다. 어쨌든 어디서 목 매달아 죽지 않은 한 추가등록이 내일까지니까 등록을 하든 휴학을 하든 오늘 못 오면 내일 중으로는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놈은 놈이고 나는 나다. 지깐 놈의 형편에 내 등록금까지 걱정할 새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놈은 나를 위할 생각으로 네 등록금도 힘써 볼 테니 너도 백방으로 뛰어봐라 하며 내 등을 쓸어주고 떠났었다. 나는 돌아서가는 놈의 등에 대고 피식 웃고 말았지만 어쩐지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에 앞서 놈의 뒷모습에서 한없는 슬픔을 느꼈다.
나는 놈의 말대로 등록금 마련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봤지만 이 땅에 어느 골빈 인간이 나같은 충청도 무지렁이에게 그같은 고액의 등록금을 빌려주겠는가. 은행에서 학자금을 융자해 준다길래 신청했더니 이것저것 서류가 여간 복잡한 게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보증인의 인감증명과 과세증명이었다. 서울에 친척이 몇 있긴 하나 하나같이 제집없이 전세사는 너절한 사람들 뿐이라 아예 과세증명 같은 것은 뗄 수가 없는 형편이었고 산다하는 친구놈들에게 청을 넣었으나 모두가 외면을 하였다. 다달이 삼만여 원을 분할 납부해야 한다는 조건인 것을 알기 때문에 내꼬라지를 잘 아는 그들이라 그냥 등을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어머니 말대로 집에 주저앉아 밭이나 갈며 똥통이나 짊어져야 했을 것을 주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대학에 들어와 학기가 바뀔 때마다 한숨을 쉬거나 이를 갈며 하늘에 대고 주먹이나 홀떡까는 추태를 익히고 있지 않은가. 부모를 원망하거나 세상을 원망하는 일은 결국 부질없는 것일 줄 알아 차라리 땅만 보고 걷기로 했던 내가 그만 깜박깜박 잊어 꺾었던 목을 발딱 제껴 하늘에 대고 에라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주먹으로는 성이 안 차 아예 팔뚝을 훌떡 까제끼곤 했다.
나는 이궁리 저궁리 끝에 신문구직란에 조그맣게 광고를 내었다.
〈대학등록금 내주실 독지가 구함
무슨 일이든지 함 724-14 × 5〉
처음엔 〈장난삼아〉 였지만 그래도 이것이 마지막 희망이다 싶어 내내 방구석에 누위 주인집 마루에 놓인 전화벨이 울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는 네 군데서 전화가 왔었다. 그러나 자전거를 사기 위해 모으고 있는 돈이 있다는 한 국민학생의 전화를 제외하고는 모두 장난이었다.
전라도 말씨의 한 사내는 그렇게 대학 다닐 바에는 차라리 오물통에 머리나 박고 죽는 편이 낫다고 했고 등록금을 대줄 테니 제발 보기싫은 우리 여편네 좀 들쳐업고 갈 수 있겠냐는 사내도 있었다. 또 한 놈은 간첩을 잡아라 그러면 오천만 원의 상금이 있느니라 하는 혀 꼬부라진 헛소리를 뱉으며 좆도 씨팔 소리로 수화기를 짤깍 내려놓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욕을 퍼붓지는 않았다. 그들도 어지간히 삶에 지쳐 나처럼 허공에 대고 주먹이나 까는 치들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사람들 중에는 그런 구석진 곳에 버려진 광고를 읽는 이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단념하지 않고 전화 쪽에 귀를 모으고 있었다.
등짝에서 뿌리가 돋아 방바닥에 박히기 전에 전화가 와야 할 텐데 하며 나는 허리를 들어 슬쩍 손을 넣어보기도 했다.
전화가 고장인가 싶더니 저녁 때가 되어서야 전화벨이 울렸다. 할멈이 뭣이 요? 뭣이요? 하며 악 쓰는 소리가 저쪽의 목소리가 가늘거나 아니면 시외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계속 귀를 모았다.
“충청도 학새앵.”
할멈이 내 쪽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한태식입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엔 ‘삼십 칠만 팔천 원입니다.’ 하는 수자만이 꽉 차 있었다. 수화기 속의 목소리는 젊은 여자였다.
“신문을 보고 전화 했는데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만큼은 장난이 아니길 빌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등록금이 얼마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매우 차분한 것으로 보아 분명 장난은 아닐 거라고 자신했다.
“삼, 삼십 칠만 팔천 원입니다.”
나는 가슴을 떨며 하마터면 〈삼십〉을 삼백으로 뱉을 뻔하였다.
“언제까진가요?”
“내일이 추가등록 마감입니다.”
“내가 제시할 조건을 들어주신다면 등록금을 내드릴 수 있는데요.”
여자는 〈조건〉에 힘주어 말했다.
“어떤 조건입니까?”
“직접 만나봐야 결정할 수 있겠는데요. 전화로는…….”
“그 지요.”
“광화문에 있는 〈차타레〉다방을 아시나요?”
“네.”
“지금 나오실 수 있나요?”
“언제라도.”
“그럼, 일곱시에 카운터에서 한태식 씨를 찾겠읍니다.”
나는 그녀가 틀림없이 구원의 여신일 거라고 생각하며, 〈달동네〉 같은 골목을 내달렸다.
나는 숨을 모아 쉬고 다방 층계를 밟았다. 나는 마치 천국의 목자를 만나러가는 심정으로 한층계 한층계 발목을 멀며 올랐다.
도대체 구원의 여신은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이내 〈자유의 여신〉의 호수같이 그윽한 얼굴을 그리며 내내 가슴을 떨었다.
나는 벽쪽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제시할 조건이란 무엇일까. 혹 나를 곤혹의 수렁 속에 처넣어 구원의 횡포를 휘둘러 재미나는 웃음으로 깔깔대는 짓궂은 여자는 아닐는지. 그러나 이미 각오했던 바가 아닌가. 이 형편에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어쨌든 이번 학기만 등록하면 졸업할 것을. 그녀가 무좀난 발바닥을 핥으라 한들 싫다고 할 것인가. 무좀난 발바닥이 아니라 문둥이 발바닥이라도 핥으라면 못할 내가 아니다. 난 아무래도 좋다. 그저 내일까지 등록만하게 해준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견 어디까지나 상상데、 그녀가 모종의 임무를 띠고 나를 포섭하여 간첩의 딱지를 붙여놓을 흉악한 여자라면? 나는 갑자기 TV 수사극 〈추적〉의 한 장면을 더듬으며 무서운 공포속에서 허위적거렸다. 나 같은 가난한 대학생만을 골라 포섭의 대상으로 찍어올리는 음흉한 미모의 여간첩? 나는 덜미를 잡혀 끌러다니다가 종래에는 독침 앞에서 공포에 떠는 나. 아아 무서운 여자.
나는 감자기 온몸의 피가 무릎 밑으로 빠지며 등골에 식은땀이 홀렀다. 안된다. 차라리 휴학을 해버리자. 똥통이나 짊어질 촌놈이 대학은 무슨 놈의 대학.
그녀가 오기 전에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일단 그녀의 시선 안에 들어갔다가는 나는 꼼짝없이 그녀의 포로가 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지체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때 “한태식씨 계세요?” 하는 카운터 목소리가 비수처럼 내 안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한 여인이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나는 그만 철봉으르 머리통을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태식씨 계세요?” 두번째 소리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나는 그제서야 겨우 정신을 차려 눈을 뜰 수가 있었다. 나는 공포에 떨어온 창백한 얼굴로 간신히 걸음을 옮겨 그녀 앞에 섰다.
“내가 한태식인데요.”
“안녕하세요. 아까 전화한…….”
그녀는 조금 작은 키로 나를 올려다보며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감사합니다. 전화 주셔서.”
나는 그녀를 자리로 안내해 마주앉았다. 그녀는 목과 소매 끝에 하얀 레이스가 달린 자주색 바탕에 노랑색 무늬가 든 실크 원피스의 화려한 옷차림을 하였다. 그리고 약간 갈색빛이 도는 결이 고운 머리가 레이스를 덮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마시기 위해 잠시 말을 끊고 있었다. 나는 찻잔을 올릴 때마다 그녀의 얼굴을 조금씩 훔쳐 보았다. 흠잡을 곳이 없는 미인이었다.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매우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특히 가늘고 짙은 눈썹 밑에 수정 같이 맑게 들앉은 눈길이 내 가슴을 설레이게 하였다.
나는 다시 내 상상의 공포가 마음 구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그녀의 눈길이 나를 포로로 잡아놓고 말 것 같았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간첩일 수 있다니……·나는 점점 그녀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녀를 피할 수 없는 시간 속에 있었다.
“그냥 도와드리지 못하고 조건을 달게 되어 미안해요.”
그녀가 찻잔을 내러놓으며 가는 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어느 대학에 다니세요?”
“K대학 국문과 사학년입니다.”
“마지막 등록이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조건이란…….”
나는 마음이 조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혹, 운동 같은 거 하시나요? ¨
“운동이라뇨?”
“예를 들어 태권도나 권투 같은 거.”
“조건과 관계가 있나요?”
“네에, 그래요.”
“내가 혹 불량청년처럼 보이셨나요?”
“그런 게 아네요. 내가 필요해서 그래요.”
“묘한 조건을 제시할 모양이군요. 궁금합니다.”
“혹 싸움 잘하시나요?”
“천성이 누구랑 싸움 같은 것은 안해봤지만 고등학교 때 태권도 좀 했지요.”
“어머, 그래요? 몇 단인데요?”
“단까지는 따지 못했지만 일방적으로 얻어맞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뭔가 그녀가 원하는 쪽으로 접근해야 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강해 보이질 않는데요.”
“도대체 조건이 뭔지 차세하게 얘기해주십쇼.”
“조건이 좀 치사해서…….”
그녀는 한참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두 달 동안만 내 약혼자 노릇을 해줬으면 하는 건데요…….”
그녀는 말끝에 얼굴이 연시처럼 붉게 물들었다.
“약혼자라뇨?”
“오래전부터 나를 추근추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깡패가 하나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꼭 제 손아귀에 넣겠다고 협박을 하는 거예요. 정말이지 죽으면 죽었지 그따위 깡패하곤 말도 하기 싫거든요. 그리고 실은 나한테는 깊이 사귀고 있는 남자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도 나까지 또 약혼자로 삼아요?”
“그 깡패를 따돌리기 위한 위장이지요.”
“묘한 조건도 다 있군요.”
“어렵습니까?”
우물쭈물하다가는 “이 새끼야, 싫으면 관둬라.” 할 것 같아 반색을 하며,
“어렵긴요. 아가씨 같은 미인에게 하루도 아닌 두 달씩이나 약혼자라니, 나에겐 큰 영광이지요, 하도 기이한 얘기라…….”
그녀는 대전에서 조그맣게 구멍가게를 하는 노모와 중학교에 다니는 동생을 두고 여의도에 있는 삼십사 평짜리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녀는 D대학 음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다가 삼학년 때 휴학을 했다. 학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다. 노모 옆에 쪼그리고 앉아 구멍가게를 지키고 앉았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휴학기간 동안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었다. 그녀는 호텔 레스토랑에 가서 피아노와 전자오르간을 연주했다. 낮에는 S호텔에서 피아노를, 저녁에는 B호텔에 가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큰 수입은 아니지만 흔자 살며 용돈을 쪼개쓰기에는 별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가 나가는 호텔에는 대개가 외국 관광객이나 해외동포들이 투숙하였다. 연주하는 동안 팁이라는 명목으로 과외돈도 받아썼다.
그렇게 한 육 개월을 지내는 동안 그녀는 귀국할 때마다 B호텔에 단골로 투숙하는 중년의 재미동포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눈치 없게도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B호텔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그는 고국을 자주 왕래하였다.
그는 그녀가 노는 날이면 자기와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는 지척이면서도 다정다감한 신사였다. 그녀로 하여금 젊음을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갖지 못하게 하는 이상한 힘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중년신사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자주했다.
그러면서도 그와 마주하고 있으면 꼼짝없이 포로가 되고 말아 그로부터의 탈출의 의미는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그녀로 하여금 부족한 것이 없게끔 그는 모든 것을 마련해주었다. 지금의 아파트도 그가 장만해준 것이다.
그녀는 비로소 마음속에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오히러 그를 알게 된 것이 천만행운이었음을 절감하며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이제 그녀의 나이 스물셋인메도 그가 중년임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럴 즈음에 그녀 앞에 아주 거추장스러운 놈이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S호텔에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을 때부터 귀찮게 굴던 놈이었다. 놈은 나이트크럽에서 어깨를 재던 깡패로서 주로 여자들만 골라 협박하면서 용돈이나 뜯어 쓰는 아주 좀스런 빈대 같은 놈이었다. 그녀도 한 달에 두 번은 놈에게 용돈을 빼앗겼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엔 노골적으로 몸까지 요구하는 파렴치한이었다. S호텔을 그만두면서 놈과도 인연을 끊는가 싶었는데 놈은 B 호텔에까지 따라와 추근대는 것이었다.
자기말을 끝내 듣지 않으면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근래에는 어처구니없게도 결혼하자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는 놈이었다. 그녀는 교포에게도 놈의 얘기를 대충했으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놈의 정도를 자세히는 말하지 못했다. 괜히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였다. 더구나 두 달만 있으면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마당에 놈에게 당한 자세한 얘기를 한다면 그가 자기를 어면 여자로 보겠는가 싶어 더는 고해바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놈을 어떻게든 피할 생각으로 진작부터 약혼자가 있기 때문에 협박에 응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놈은 약혼자와 직접 담판을 짓겠다고 으르렁대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렇게 꾸며대긴 했으나 마땅하게 보여줄 사람이 없섰던 것이다. 그때 마침 신문광고를 본 것이다.
“그럼 요즘 말하는 현지천가요?”
나는 삼가했어야 할 말을 그만 불쑥 내뱉고 말았다.
“그 표현은 매우 불쾌한데요.”
그녀의 표정이 이내 싸늘해지는 것이었다.
“미안합니다. 취소하겠읍니다.”
그리곤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가 말하는 담판이란 어떤 건가요?”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 깡패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글쎄요. 낸들 그 속셈을 알 수 있나요.”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겠군요.”
나는 이미 얻어맞고 있는 기분으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를 저질예요.”
“그와 담판이 끝나면요?”
“담판에 이겨야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래야겠지요.”
“그래도 쉼게 물러서진 않을 거예요. 어쨌든 내가 미극으로 갈 때까지만 내 방페가 되어주면 임무는 끝나는 거예요.”
나는 등록을 마친 다음 날 차타레다방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녀는 그 깡패를 데리고 나오겠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멀리고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두 달 동안 그녀의 발바닥을 핥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보기나 할 걸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마치 무슨 전쟁터에 나가는 초년병처럼 그녀와 약속한 시간이 될 때까지 내내 불안하고 초조하였다. 놈의 한방 주먹에 면상을 얻어맞고 푹 고꾸라지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다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녀 혼자만 앉아 있었다.
나는 우선 마음이 놓였다. 오늘만이라도 한시름 놓는가 싶었다.
“혼자십니까?”
난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 앞에 가 앉았다.
“나온다고 했어요.”
그녀는 전혀 걱정 없는 표정이었다.
“그렇군요.”
나는 다시 가슴을 떨기 시작했다. 철퇴같이 생겼을 그의 주먹을 그리고 있자니 혀 밑으로 자꾸 신물이 고였다.
“우리는 약혼한 사이라는 걸 절대 잊지마세요.”
“자라리 결혼한 사이라고 할 것을 잘못했군요. 그래야 그가 빨리 단념할 것이 아니겠어요.”
그때 입구 쪽에 시선을 옮기며 그녀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곤 이내 우리 옆으로 건장한 사내가 풀어진 옷차림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옆자리로 옮겨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떡판같이 넓고 각진 얼굴에 콧수염을 기르고 넓은 어깨로 버티고 앉아 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입끝에 흐르는 웃음이 나의 좁은 어깨를 비소하는 듯했다.
“태식씨, 인사하세요. "
나는 엉덩이를 떼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태식입니다. 말씀들었움니다.”
“이명수 올시다.”
그는 앉은 채로 꼭 쓰레받기만한 손으로 내 가냘픈 손을 덥석 물었다.
“희사에 다니슈?”
그는 내 창백한 몰골과 너절한 옷차림을 훑으며 거칠게 물었다.
“네.”
나는 되도록 살을 달지 않고 짤막하게 대꾸할 생각이었다.
“어느 희사요?”
“그냥 조그만 회삽니다.”
“약혼을 했다구요? 오래된 사이요?”
“네에, 저어·…….”
“지난 삼월에 했다고 그랬잖아요.”
내가 우물쭈물하자 그녀가 얼른 말을 이어주었다.
“언제 결혼허슈?”
그는 마치 수사관처럼 계속 거칠게 물어왔다. 무슨 낌새라도 빼낼까 싶어 이
것저것을 묻는 것 같았다.
“글쎄……·금년 안에는 해버릴 생각입니다.”
그리곤 나는 이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옳지, 잘한다.’ 하는 눈치로 안도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스터 리, 제발 귀찮게 하지 말고 단념해요."
그녀는 애원하였다.
“미쓰 김은 가만 있어요. 난 이친구랑 얘기하고 싶어서 나온 거니까.”
그는 그녀에게 눈을 부라리며 검을 주었다. 그녀 말대로 무지한 놈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분명히 내가 약혼자요 했는데도 보는 앞에서 그토록 거친 행동을 하는 겻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시달림을 받고 있었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진짜 약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만 보고만 있었다.
“형씨, 우리 어디 가서 조용히 얘기좀 합시다.”
그는 내 의견은 전혀 들어보지도 않고 이미 몸을 세워 문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넋을 잃고 가만 앉아만 있었다.
“형 씨, 나갑시다.”
그는 문을 잡고 서서 큰소리로 재촉했다.
“절대 기 죽으면 안돼요. 저럴수록 강하게 나와야 해요. 알았지요?”
이번엔 그녀가 내 등을 밀어냈다.
나는 결국 한낮의 땡볕을 받으며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그의 뒤를 지척지척 따라갔다. 나는 행인들을 향해 ‘사람살려어.’ 하고 소리를 쳐서 구원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골목에 들어서자 그는 돼지족이 수북하게 쌓인 소주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밖에서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는 다시 큰소리로 “들어오슈.” 했다.
나는 그와 마주앉았다. 술과 안주가 놓일 때까지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말 약혼한 사이요?”
그는 내 잔에 철철거리도록 술을 따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안 보입니까?”
“어째, 좀 어울리지 않아.”
그는 아예 말을 놓을 셈 같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듭니까?”
나는 조금 눈을 부릅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자, 우선 한잔 꺾읍시다.”
그는 단숨에 술을 털어부었다.
“드슈.”
하고는 내 앞에 제 잔을 던쳤다.
“미안하지만 나는 낮술은 먹지 않습니다.”
나는 그의 잔을 다시 보냈다.
“술꾼은 원래 낮술부터요. 드슈.”
그는 다시 술잔을 밀어 술을 부었다.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소주는 못 마셔요.”
“내 손을 부끄럽게 할 거요? ”
그의 짙은 눈썹이 조금씩 율동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나는 소주는 마셔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막걸리나 몇잔 마실 따름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단숨에 들이켰다. 마치 돼지 쓸개를 씹은 것 같았다. 가슴에선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소주 한잔도 못해가지고 어떻게 미쓰 김 같은 여자를 다스리고 산단 말이요.”
그는 나를 비양대면서 연거퍼 두 잔을 털어 마셨다.
“그래도 우린 약혼을 했어요. 그리고 결혼도 곧 할 겁니다.”
나는 술 마신 용기로 아주 단호하게 끊어 말했다.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그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리곤 입 안에 잔뜩 빨아넣은 연기를 몽땅 내 얼굴에 덮어씌웠다.
“형씨, 미쓰 킴을 나한테 양보허슈. 얘기 들었겠지만 나 승질이 좀 좆같은 놈이요. 난 한다면 하는 놈 올시다. 내 마음만 먹으면 미쓰 킴쯤은 벌써 조질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마음 구석에 순정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서……·내딴엔 완전히 내사람 만들라고 아껴두었던 거요. 그런데 김새게 형씨 같은 인물이 내 승질을 긁고 있잖소.”
그는 또 술을 마셨다. 그리곤 김치쪽을 입에 넣고 마치 나를 씹듯이 자각자각 힘주어 씹었다.
나는 순간 ‘에라, 씨팔. 너 가져라.’ 하는 말이 목구멍을 기어올랐다. 그러나
“절대 기죽으면 안돼요. 저럴수록 강하게 나와야 해요.” 하고 속삭이던 그녀의
말이 귓속을 간질간질 파고들었다.
“내, 당신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그러나 약혼자가 확실하니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어요.”
나는 그에게 침착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일부러 느린 어조로 말했다.
“정말요?”
“그래요.”
“내 승질 건드리면 손 좀 볼 텐데?”
그는 정말 철퇴만한 주먹을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시위를 했다.
“손 아니라 발을 보여줘도 할 수 없소. 그리고 나도 한마디 하겠는데, 이건 공갈이 아니요. 내 형님이 시경에 간부로 있어요. 당신이 계속 거칠게 나오면 당신 하나쯤 잡아넣는 것은 식은죽 먹기요. 내 말을 명심하는 게 신상에 좋을 거요. 결코 공갈이 아니니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람이 날 정도로 휙하니 빠져나왔다.
“아쭈……·야아, 너 피 좀 볼 거다.”
그는 등에 대고 알아듣지 못할 내용으로 욕을 퍼부었다.
나는 도망치듯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그가 곧장 따라와 술병을 깨서 내 잔등을 찍어버릴 것 같은 무서움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형님이 시경 간부라고? 내가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생각해낼 수 있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에겐 아주 적절한 엄포였다. 내 엄포에 그의 낯색이 조금은 변한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여하튼 내가 다소나마 그의 거친 기를 꺾을 수 있었다는 것은 통쾌한 일이었다.
그녀 말을 들으면 그 후 한번도 그녀 앞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물론 나도 아무련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는 생각보다는 꽤나 머저리였다. 그저 어깨나 좀 재고 말이나 거칠게 할 뿐인 급이 낮은 깡패인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미국에 들어갈 때까지 자기가 나오는 날에 맞춰 일 주일에 두번씩만 호텔에 나와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의 요구는 어디까지나 계약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나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저 맥주나 한 병 시켜놓고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깡패가 나타나지 않는 한 우리는 분명히 무관한 사이인데도 그는 늘 불안하다고 말했다. 이제 다음주 일 주일만 지나면 그녀는 미국으로 떠날 것이고 나는 그녀와의 계약이 만료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오늘은 그 깡패가 나타나 구석진 자리에서 다른 두 사내와 술을 마시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놈이 오늘은 끝장을 보려고 패거리까지 몰고온 모양이다. 그녀도 이미 알고 있는 듯 자꾸 내쪽에 눈을 보내며 건반을 두드렸다.
그녀는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해 급히 내 앞에 와 앉았다.
“깡패가 또 왔어요.”
떠는 목소리였다.
“나도 봤읍니다.”
“우리는 약혼한 사이니까 현관 밖에서 잠깐 팔짱을 끼고 가야해요. 알았죠?”
오늘이 아무래도 내 생애가 끝나는 날인가보다 하는 불안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열시 반이 되어서야 그녀는 오르간을 덮었다. 그래도 깡패는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얘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 말대로 우리는 다정한 약혼자 사이가 되어 현관을 ˙나와 그녀는 내 팔을 끼었다. 그러나 놈은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다.
“안 따라오는데요.”
“아네요. 틀림없이 우릴 미행할 거예요. 이 정원만 빠져나가면 바로 택시가 있으니까, 거기까지만 팔짱을 끼면 돼요.”
호텔의 넓고 아름다운 녹색의 정원이 수은등 불빛을 받아 여간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호텔 정문으로부터 큰 세단이 우리가 있는 정원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저 호텔로 들어오는 일상의 관광객 차려니 하고 조금 비켜섰었다. 그러나 차는 우리 앞에서 멈춘 채 움직이질 않았다. 그리곤 이내 문을 열고 흰
양복의 중년사내가 내리는 것이었다.
“어머!”
그녀는 놀라서 나로부터 팔도 뽑지 못한 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중년사내가 우리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언제 오셨어요? 연락도 없이.”
그제서야 그녀는 나에서 얼른 떨어져 사내 앞으로 토끼처럼 깡총 뛰어가 달라붙었다.
“이놈은 누구야?”
그는 화가 난 목소리로 턱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비로소 나는 그가 재미동포라는 것을 눈치챘다.
“저…….”
그녀는 얼른 대담을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바로 이놈야? 너를 귀찮게 한다는 그 깡팬가, 뭔가 하는 놈이?”
“네. 저새끼예요.”
그리곤 그녀는 얼른 차안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것이었다.
“어? 여보세요, 미쓰 김.”
그러나 그녀를 잡으려는 내팔은 허공만 저을 뿐이었다.
“이봐, 박 기사. 이새끼 혼 좀 내.”
“이것 보세요, 내가 아녜요. ”
소용없는 애원이었다. 나는 이미 체격이 건장한 운전사에게 덜미를 잡힌 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1981년 9횔
2016년 3월 28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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