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까지 끝까지
감사함으로 섬기는 학급을 기대하며
예년 같으면 각 학급에 흩어져 있어야 할 아이들을 금년에 묶어 한 반으로 묶어 놓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한 학급인데 직업위탁생을 포함한 49명이라는 숫자는 또한 다른 학급에 비해 많은 수인 것은 틀림없다.
작년까지만 해도 각 반에 흩어져 있어서 학급에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아이들, 한편으로는 학급에서 말썽을 많이 피우던 아이들, 또한 선생님과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속칭 문제아로 찍힌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아이들을 한 학급에 묶어 놓는 것은 매우 염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여러 개의 폭탄을 한꺼번에 엮어 놓은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아이들을 한 반으로 묶어 좀 더 좋게 발전시킬 수 있을 수 있다면, 그에 따라 오는 힘든 점은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다른 것보다 아이들의 삶이 좋게 변화된다면, 그래서 세상을 당당히 기쁘고 감사하게 살아간다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자기 멋대로인 아이들
그렇지만 이런 나의 생각을 깨뜨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아이들은 나의 말을 잘 따라 주지 않았다. 아이들과 대화중 나온 얘기지만 아이들은 스스로를 체념하고 있었다. 자기들을 쓰레기라고까지 표현하였다. 그래서 자기들에게는 현재의 삶이 중요하고, 지금 가장 즐거운 것을 누리면 된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타난 현상 중의 하나는 비슷한 아이들끼리 욕을 하며 대화하는 것이다. 말에서 ‘ㅅ’과 ‘ㅂ’이 빠지지 않는다. 얼굴을 보며 하는 대화에서만이 아니라, 학급 단톡방에서조차 이 말이 빠지지 않는다. 아니 이 말이 없으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 화장을 하는 여학생들은 아예 얼굴에 떡칠을 한다.
“수진아, 너희 때는 생얼굴이 가장 예쁠 때야, 너무 화장을 많이 하면 더 안 예뻐.”
진심으로 말하는 것인데 수진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아니, 화장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수진이는 받아들이는 것 같다.
문제가 있긴 해요
이 아이들을 담임으로 맡은 지 4개월이 지나고 있지만, 쉽사리 눈에 띄게 아이들이 변화된 것 같지는 않다. 담배 피는 아이들, 성적인 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들, 새피(새벽 피시방)로 달려가는 아이들, 욕 빼면 실어증에 걸릴 것 같은 아이들, 무단 결석에 거의 매일 지각, 학교에 와도 수업보다는 잡담이나, 먹는 것, 자는 것 그리고 무단 이탈 등.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지난 주에는 마음이 많이 힘들었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아이들 때문이라기보다는 동료교사들의 인식 때문인 것도 있었다. 일반적인 생각보다 더, 교사 공동체는 배타적인 면이 있다. 자신과 다른 방법으로 다른 분이 아이들을 대하면 그것은 이해 못할 일이 되는 것과, 또한 나쁜 일로 평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 반은 주목 대상인 것이 틀림없다. 사실 이런 학급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문제가 있는 학급인 것은 틀림없다.
같은 대상 다른 시각
몇몇의 선생님들이 우리 학급을 보는 눈은 이런 것 같다.
자를 것은 잘라버려야 한다는 시각이다. 더 잘못되기 전에 싹부터 잘라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된 말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러나 옳은 말이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라도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동료교사들의 보는 시각, 물론 나를 바라보는 그들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대체로 갖고 있는 듯 싶지만, ‘나 같으면 저렇게는 안 할텐데’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도 일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금년 졸업하기 전에 이 아이들이 변화된다면, 아니, 졸업한 이후에라도 이 아이들의 삶이 변화된다면 현재 뿌리고 있는 작은 사랑의 수고에 따른 씨앗의 의미는 분명히 있다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이렇게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희생과 수고에 따른 결실은 꼭 있는 법을 믿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편 126:5)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 녀석들, 정말 이렇게 계속 갈건가?’
‘하나님, 몸이 참 피곤하네요. 집에만 가면 쓰러져 자는 것 안 보이십니까?’
‘아이들 지금쯤이면 변화시켜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께 기도를 해도 아이들은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이 안 보인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의 생각과 나의 분량대로 기도했을 때 응답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용량에 차야 응답으로 축복하신다는 것을.
그래서 말씀하셨을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우리 아이들을 보면 항상 기뻐하기도 힘들고, 범사에 감사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쉬지 말고 기도할 때 아이들로 인해 힘든 것, 감사의 제목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 힘든 아이들을 감당케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기도할 때 나의 삶은 힘든 것이 아닌, 소망을 품은 행복감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시각으로 대상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프레임으로 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
자녀같은 아이들
오늘은 항상 늦게 오던 서영이가 무척 일찍 왔다.
교복도 단정히 입었다. 평소처럼 화장도 하지 않았다. 교실에 일찍 들어서는 서영이를 보며 무척 즐거워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후에 오는 아이들 지각생들을 보면서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침 일찍 출근해 말씀을 보며 묵상하고 아이들의 명렬표를 보며 기도했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공동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나는 축복의 통로이며, 축복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기도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선생님, 모기에 팔이 물렸어요. 아파요.”
“선생님, 배가 아픈데요. 휴지 좀 주세요.”
“선생님, 저 조퇴요. 가슴이 답답해요.”
“선생님, 어지러운 것 같아요. 체육 시간 쉴래요.”
오늘도 한 명 결석, 세 명 조퇴를 했다. 그래도 분명히 이유를 대고 안 오고 조퇴하는 아이들이어서 대견스럽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하고 부르는 이 아이들의 외침이 나를 피곤하게 하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나를 도와주세요. 나를 잊지 마세요. 나를 사랑해주세요.”라는 목소리로 들린다. 아이들의 소리가 더욱 크게 큰 외침으로 들려온다.
더욱 낮아지기를
아이들은 지금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지만, 나는 아이들이 변화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변화는 무엇일까?
그것은 나 자신이 진정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아이들을 대하라는 것이다. 더욱 큰 진정한 사랑, 진정한 감사, 진정한 마음으로 다가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아이들은 변화될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조금도 의심하거나 포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조금도 미워하지 않고, 조금도 탓하지 않고, 조금도 비판하지 않으며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가가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힘겨움이 계속될수록 나의 낮아짐은 더 낮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걸고 나를 구원하셨듯이,
예수님께서 목숨을 걸고 인류를 구원하셨듯이~~.
이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를 드린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귀한 사명을 주신 예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길을 허락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피곤해도 피하지 않고, 눈물이 나도 소망을 버리지 않는 믿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을 만나주시옵소서. 그들의 인생 가운데 예수님 거하여 주옵소서. 이 사명을 감당하는 저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동료교사들에게도 주님의 영으로 거하여주시옵소서. 현재의 씨뿌림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아름다운 열매 맺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영훈고에서 울보선생(010-6264-5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