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한반도의 북반부 지역을 일컫는 말로서, 구체적으로는 1953년의 정전협정에 의하여 설정된 군사분계선(그 이전은 북위 38도선) 이북의 지역을 지칭하는 동시에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정권을 지칭한다.
북한의 지역적 경계선은 남쪽으로 군사분계선 155마일을 경계로 남한과 접경해 있는 한편, 북쪽으로 중국 및 러시아와 각각 1,360km, 17.2km를 접경하고 있다. 그 동단(東端)은 동경 130°41′32″인 나진·선봉시 선봉군 우암리(광복 당시 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 서단은 동경 124°18′41″인 평안북도 용천군 진흥노동자구(광복 당시 평안북도 용천군 마안도), 남단은 북위 37°41′00″인 황해남도 강령군 등암리(광복 당시 황해도 옹진군 봉강리), 북단은 북위 43°00′36″인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광복 당시 현재와 같음)이다.
북한의 면적은 12만2762㎢로서 우리 나라 전체면적의 55%에 해당한다. 북한지역은 전체면적의 약 80%가 산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0m 이상의 산이 약 60여 개에 달한다. 북한의 기후는 연평균 8∼12℃의 비교적 온화한 기온분포를 보여주고 있으며, 강우량은 연평균 1,000mm 정도로서 그 중 50∼60%가 6∼8월의 3개월 사이에 내린다. 최근에는 한랭전선의 영향으로 여름철 장마현상이 없어지고 가뭄이 심한 것이 특징이다.
북한의 정권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主體思想)’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를 실시하고 있는 사회주의 정권이다. 외형상으로 삼권분립의 권력구조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모든 국가권력이 당(조선노동당)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국가기관이나 조직, 단체가 당의 지도 밑에 그 기능을 수행한다.
북한에서는 특히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건설’이라는 체제적 목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수령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이 ‘사활적 의의를 갖는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면서 수령의 유일적 영도(領導)가 제도화되어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따라서 생존시의 김일성(金日成)이나 그의 지위를 계승한 김정일(金正日)은 수령으로서 어느 국가기관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 절대권력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북한이 통활하고 있는 행정구역은 1945년 광복 당시에는 강원도 일부를 포함하여 6개 도, 9개 시, 89개 군, 810개 읍·면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단독정권 수립 이전인 1946년 9월 평양시를 평안남도에서 분리하여 특별시로 승격시켜 임시수도로서의 성격을 부여하는 등 한반도 분단을 기정사실화 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어 경기도 연천군 일부와 함경남도 원산시와 문천군을 포함시켜 강원도를 신설한 것을 필두로 여러 차례에 걸쳐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특히, 1952년 12월에는 행정단위 가운데 면(面)을 폐지하여 도(특별시·직할시)·시(군·구역)·이(읍·노동자구)의 3단계 행정구역체제로 개편하고 군지역을 재분할하여 그 수를 증가시키는 한편으로, 400명 이상의 임금노동자가 거주하는 광산·어촌·공장지대에 ‘노동자구’로 지칭되는 행정단위를 별도로 설치하였다.
북한은 광복 이래 50여차례의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1999년 현재 9개 도, 1개 특별시, 2개 직할시, 25개 시, 38개 구역, 147개 군, 3,311개 리, 896개 동, 251개 노동자구의 편제를 가지고 있다〔표 1〕.
북한 당국의 통계자료(1987년)에 의하면, 북한의 총인구는 1934만6000명(인민군 제외)이나, 1999년 말 현재 인민군을 포함하여 총 2208만2000명으로 추정되며, 인구증가율은 대략 1.4%이다〔표 2〕. 북한의 지역별 인구분포는 평양시 및 평안남·북도에 전체인구의 40% 이상이 거주, 이 지역의 인구집중도가 가장 높으며, 북부내륙지방인 자강도·양강도에는 8.7%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한, 북한은 주민의 평균수명을 1998년 현재 74.5세로 발표한 바 있으나, 식량난으로 인한 영아사망률 증가, 아사자 발생사실과 보건·의료시설의 미비 등 열악한 사회문화적 환경을 고려할 때 이러한 주장은 신빙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의 통화 단위는 ‘원’이다.
정치1
1. 정 치 〔정권수립과정〕
1945년 8월 광복과 더불어 북한지역에서는 소련군의 점령 아래 혁명의 원천지라고 할 수 있는 민족기지건설 작업이 일관되게 추진되었다. 그 첫 작업은 소련군이 북한지역에 진주하기에 앞서서 구성된 각 도의 건국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노동자·농민이 중심이 된 진보적인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는 작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처음에 이를 거부하였으나 소련군정의 압력에 의하여 결국 인민위원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어 소련군정은 1945년 10월 8일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20일 뒤에는 이를 ‘북조선5도행정국’으로 개편하여 북한에서의 중앙정부 수립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 무렵 소련군정은 또한 10월 10일 북한지역의 민주기지화를 추진할 지도핵심체로서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1946년 4월경부터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을 발족시켰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영·소 3개국 외상회의에서의 한반도 신탁통치 결정을 둘러싸고 북한에서도 찬반 양론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조만식(曺晩植)과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중심으로 한 우익진영이 반탁운동을 전개한 반면에, 좌익진영은 찬탁운동을 벌일 뿐만 아니라 소련점령군과 함께 우익세력을 탄압하였다.
그 결과 북한에서는 우익진영이 대거 월남하거나 숙청 당하여 표면적이나마 유지되었던 좌·우익의 연립은 깨지고, 좌익진보 세력이 행정기관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6년 2월 8일에는 김일성을 책임자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족되어 민주개혁이라는 이름 밑에 토지개혁, 중요산업의 국유화 등 일련의 체제개혁 작업을 서둘렀다. 이는 봉건 및 일제 식민지 잔재의 청산과도 관련이 있었다.
또 8월 30일에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동하여 대중정당을 표방하는 북조선노동당을 창립하였다. 1946년 말 도·시·군 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실시하여 각급 인민회의와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함으로써 종전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서 ‘임시’라는 용어를 없앤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유엔총회가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실시와 유엔 한국감시위원단의 설치를 제의하자,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서둘렀다.
1948년 8월 25일 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흑백투표함 방식으로(남한지역은 간접선거) 실시하고 9월 2일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였다. 최고인민회의는 1947년 11월부터 제정에 착수해 온 헌법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였고,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이 수립되었다. 소련 점령군은 북한 진주 3년이 되는 1948년 12월 친소적인 정권을 출범시킨 뒤 북한에서 철수하였다.
〔통치과정〕
북한 정권은 그 수립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법제의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줄곧 김일성 중심체제 구축으로 일관된 과정이었다. 정권 초기의 권력구조는 파벌간의 연립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소련군을 따라 들어온 갑산파의 김일성이 당위원장이면서 내각 수상이었고, 중국에서 공산주의운동을 하다가 귀국한 연안파의 김두봉(金枓奉)이 국가원수의 지위에 있었다.
또 남한에서 남로당(南勞黨)을 조직했다가 월북한 남로당파의 박헌영(朴憲永)이 부수상 겸 외상이었다. 그리고 허가이(許可而)를 중심으로 한 소련파가 당과 정권기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복 전 북한지역에서 지하공산당 활동을 했던 국내파는 현준혁(玄俊赫)의 암살로 그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이들 세력 가운데 가장 대립적인 존재는 김일성과 박헌영이었다. 1950년의 6·25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 간의 갈등에서 김일성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김일성은 패전으로 인해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남로당 지도부의 반당·반혁명적 언행을 문제 삼아 1952∼1955년에 걸쳐 박헌영·이승엽(李承燁)·이강국(李康國) 등 남로당계 지도급 인물들을 ‘미제국주의의 고용간첩’으로 단죄하였다.
1956년에 접어들며 북한에서는 군수공업을 위주로 한 중공업 우선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발이 팽배하였다. 또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과 개인숭배 반대연설에 고무받은 소련파·연안파로부터 김일성 중심체제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는 등 김일성은 또 한 차례 정치적 혼란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중소대립이란 상황을 이용하여 반종파투쟁을 전개, 김두봉·최창익(崔昌益)·박창옥(朴昌玉) 등 연안파와 소련파의 핵심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전지역적으로 ‘중앙당 집중지도사업’이란 이름으로 주민들에 대한 사상검토작업을 전개하여 김일성중심체제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김일성의 권력강화는 1960년대 말 자기파의 하나인 갑산파에 대한 숙청으로 보다 확고해졌다. 군사력강화보다 경제건설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박금철(朴金喆)·이효순(李孝淳) 등이 숙청되었고, ‘김일성사상’을 당의 유일사상으로 규정할 것을 공식선언하였다. 또 대남전략에서 이견을 나타낸 김창봉(金昌奉)·허봉학(許鳳學) 등 군부파를 숙청함으로써 1970년대에 들어와 명실공히 유일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1972년 12월 채택된 〈사회주의헌법〉은 이처럼 강화된 김일성의 역할과 지위, 그리고 통제수단을 공식화하였다. 김일성은 ‘국가주석’의 새 직위에 추대되었고, 신설된 주권의 최고지도기관인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73년 9월 당5기 7차전원회의에서 김정일(金正日)은 조직사상담당비서로 선출되고, 다음해인 1974년 2월에 개최된 당5기 8차전원회의에서 정치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이는 그가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음을 말해 주며, 김정일은 이러한 당적 지위를 통해서 후계체제의 권력기반을 구축하는 길에 들어섰다. 1980년 10월 당 6차대회에서 김정일은 정치위원·당비서·정치국 상무위원·당 군사위원 등으로 선출됨으로써 김일성의 후계자로서의 당적 지위가 공식화되었다.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사회주의를 고수해 나가는 문제와 함께 김정일에 의한 권력이양 작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1990년 5월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에서는 사회주의체제 수호를 위한 권력 개편이 있었는데, 이때 국방위원회가 신설되어 군부를 전면에 내세우는 비상체제로 전환되었다.
김정일은 실질적인 비상체제의 총수로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1993년 4월에는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 직책을 이양받았다. 그에 앞서 1991년 12월에는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어 권력의 부분승계가 이루어졌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급작스러운 사망은 북한 정치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20여 년간 권력승계 준비를 굳혀온 김정일에 의해 자연스럽게 권력이 승계되어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게 되었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후 사실상의 영도자로서 모든 권력을 행사하였는데 당의 총비서와 국가주석에는 취임하지 않고 국방위원장과 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직책으로 통치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만 3년상이 끝난 1997년 10월에 당 총비서로 추대되었으며 국가주석직은 공석으로 남겨두었다. 1998년 9월 5일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에서 ‘국가의 최고직책’으로 역할과 권한이 확대된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됨으로써 김일성 사망 4년여 만에 공식적인 권력승계가 이루어졌다.
〔통치구조〕
북한에서의 모든 국가권력은 당(조선노동당)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같은 당 우위체계는 공산국가의 일반적 특징인데, 북한에서도 헌법과 당 규약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계가 제도화되어 40년 동안 지속되어 옴에 따라 ‘일인수령영도체계’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조선노동당은 1945년 10월 10일 김일성·김용범(金鎔範)·오기섭(吳琪燮) 등을 중심으로 창설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모체였다. 이 분국은 형식상 박헌영이 1945년 9월 11일 서울에서 창당한 조선공산당을 ‘중앙당’으로 삼고 있었다. 북조선분국은 그 뒤 ‘북조선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1946년 8월 중국 연안에서 돌아온 조선독립동맹계의 ‘조선신민당’과 합당, ‘북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게 된다.
1949년 6월 24일에는 남북노동당중앙위원회 연석회의가 개최되어 남조선노동당과 통합하여 조선노동당으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노동당은 창당 이래로 이념과 목표, 조직 및 운영체계 등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당대회는 1946년 8월의 1차대회 이후 모두 6차례 열렸으나 당 규약에 규정된 기간대로 열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1980년 10월, 10년 만에 제6차 당대회가 열렸는데 제7차 당대회는 1998년 4월 현재 아직까지도 열리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중앙당의 운영체계는 당대회→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비서국으로 이어지며, 군사위원회·검열위원회 등을 설치하고 있다. 당의 기층조직인 ‘당세포’는 공장·협동조합·기업체와 각급 기관·단체에 5명 이상으로 조직되며, 당원은 1년의 후보당원 생활을 거쳐 까다로운 입당절차를 밟게 된다. 1997년 현재 당원은 350만 명으로 추산되며, 총인구 대비 16%이다. 조선노동당은 교육기관으로 김일성고급당학교를, 언론매체로 ≪노동신문≫과 노동당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북한의 통치제도를 헌법에 규정하고 있는 권력구조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한은 50년 정치사에서 모두 6차례 개헌했는데, 1948년 제정된 헌법(11장 104조)의 골격이 1960년대 말까지 유지되었다. 즉 입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휴회중일 때에는 상임위원회), 행정기관인 수상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 사법기관으로 최고재판소, 그리고 지방자치단체로서 지방인민회의와 지방인민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최고인민회의가 주요정책 결정과 국가대표 및 권력층의 임면권을 가짐으로써 행정부나 사법부의 상위에 존재하여 대체로 변형된 ‘회의체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 뒤 1972년 12월 새로운 〈사회주의헌법〉(11장 149조)을 채택하고 통치구조에 대폭적인 변화를 가져오면서 신대통령제적 요소를 강하게 가미하였다.
즉, 국가원수로서의 국가주석제도가 신설되는 대신 최고인민회의의 지위가 추인기관으로 약화되었으며, 국가주권의 최고지도기관인 중앙인민위원회가 신설되었다. 동시에 내각은 정무원(政務院)이란 이름의 단순집행기관으로 바뀌면서 그 권한이 크게 약화되었다. 지방 자치단체의 권한은 강화되었고 사법·검찰 기구의 독립성이 폐지되었다.
1992년 4월에는 종래의 〈사회주의헌법〉을 새로 개정하여 권력구조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국가의 지도적 지침을 주체사상으로 명시하고 당의 영도하에 모든 것이 집행된다는 점을 조항으로 규제한 것이 특징이다. 구 헌법의 기본골격을 유지하면서 새 환경에 대처하는 개정헌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사망 4년 후인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에서 다시 대폭적으로 개정하였는데, 이는 최초 헌법 제정 이후 제8차 개정에 해당한다. 이 개정헌법은 ‘김일성 헌법’이라는 헌법 서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정권이 이미 출범한 상황에서 김정일의 통치스타일을 헌법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개정된 ‘김정일식 헌법’이라는 기본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구사회주의헌법과 비교한 개정헌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권력구조의 대폭개편이다. 주석직과 중앙인민위원회를 폐지하는 대신 내각제를 채택하고, 국방위원장·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내각 총리 3인에게 권력이 분립되는 듯한 형식을 취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종전의 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의 기능을 통합 수행하게 되어 권한이 강화되었고, 국방위원장은 국가를 대표하는 권한을 가진다. 전반적 국가관리기관으로 종전에 비해 권한이 강화된 내각의 총리는 북한 정부를 대표하는 권한을 갖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방위원장이 “나라의 정치, 군사, 경제 역량의 총체를 통솔지휘하는 국가 최고의 직책”으로 격상되었고, 여기에 김정일을 추대함으로써 김정일이 국가의 최고수위가 되도록 하였다.
둘째, 헌법 서문의 신설이다. 서문은 김일성을 ‘공화국의 창건자’, ‘사회주의 조국의 시조’로 규정하며 개정헌법을 ‘김일성헌법’으로 명명하였고,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셋째, 경제부문의 변화이다. 사경제범위의 확대 등 현실을 인정하면서 제한적이나마 실용주의적 정책방향으로 나갈 것임을 시사하였다. 즉, 개인소유의 범위를 확대하였고, 대외무역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였으며 가격·원가·수익성 등 시장경제 개념의 일부를 도입하였다.
최고인민회의는 헌법상 최고주권기관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입법권을 행사한다. 일반적, 평등적, 직접적 선거원칙에 의하여 비밀투표로 선출되는 임기 5년의 대의원으로 구성된다. 1998년 7월의 선거로 선출된 현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의 수는 687명이다. 최고인민회의는 연 1, 2회 정기회의를 소집하며, 예산 심의·확정, 주요기관 간부 선출, 법규 확정 등을 논의한다.
국방위원회는 국방부문에서의 상설적인 최고 주권 및 행정기관으로서 북한의 중추적 기관이다.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으로 위원장, 제1부위원장, 부위원장, 위원들로 구성되며, 위원장은 일체의 무력을 지휘 통솔한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 휴회중에 최고주권기관으로 위원장, 부위원장, 서기장, 위원들로 구성된다. 위원장은 상임위원회 사업을 조직 지도하고, 국가를 대표하며 외국 사신의 신임장 소환장을 접수한다.
내각은 최고주권의 행정적 집행기관이며 전반적 국가관리기관으로 총리, 부총리, 위원장, 상과 그 밖의 필요한 성원들로 구성된다. 내각은 2위원회, 27성, 1원, 1은행 등 33개 부서로 구성되어 있다. 내각 총리는 내각사업을 조직 지도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대표한다.
지방인민회의는 도(직할시)·시(구역)·군 인민회의로 지방주권기관이며, 임기 4년의 일반적, 평등적, 직접적 선거원칙에 의하여 비밀투표로 선출된 대의원으로 구성된다.
지방인민위원회는 도·시·군 단위의 행정집행기구이자 내각 격으로 되었으며, 개정헌법에서 중앙인민위원회가 폐지됨으로써 그 지도도 받지 않게 되었다. 인민회의 휴회중에 지방주권기관이며, 해당 지방주권의 행정적 집행기관이다. 지방인민위원회는 위원장, 부위원장, 사무장, 위원들로 구성되며 그 임기는 4년이다.
검찰사업은 중앙검찰소, 도(직할시)·시(구역)·군 검찰소와 특별검찰소가 하며, 중앙검찰소 소장의 임기는 5년이다. 검찰사업은 중앙검찰소의 통일적 지도하에 이루어지며, 모든 검찰소는 상급검찰소와 중앙검찰소에 복종해야 한다.
사법제도는 정권수립과 더불어 최고재판소가 설치되고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사법성(司法省)이 내각의 한 부서로 설치되면서 비롯되었다. 사법성은 사법행정 업무만을 관장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북한의 모든 사법권을 통제하게 됨으로써 사법은 행정의 연장선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일반재판소로는 최고재판소, 도(평양특별시)재판소, 시·군(구역)인민재판소가 있었고, 특별재판소로 군(軍)재판소·철도재판소·내무재판소를 두었으며, 검찰소는 재판소에 상응하여 조직되었다. 그 뒤 1959년 사법성과 최고재판소를 통합하고 최고재판소가 사법성 소관 업무까지 관장해 오다가 1972년 신헌법 채택을 통하여 재판·검찰기관이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재판기관으로는 중앙재판소, 도(직할시)재판소, 인민재판소, 특별재판소가 있고, 중앙재판소 소장의 임기는 5년이다. 특별재판소의 소장과 판사는 중앙재판소에서 임명 또는 해임하며, 특별재판소의 인민참심원은 해당 군무자회의 또는 종업원회의 등에서 선출한다. 재판은 판사 1명(특별한 경우 3명)과 인민참심원 2명이 수행하며, 재판의 형식적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으나 최고재판기관인 중앙재판소가 자기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와 그 휴회중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앞에 책임진다 하는 등 정권기관이 재판과정에 개입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
〔정당·사회단체〕
조선노동당을 제외한 북한의 정당으로는 조선사회민주당(朝鮮社會民主黨)과 천도교청우당(天道敎靑友黨)이 있다. 조선사회민주당은 1981년 조선민주당이 개칭된 것으로서, 조선민주당은 1945년 11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기독교세력을 기반으로 창당되었다. 그러나 1946년 1월 신탁통치 반대문제로 조만식이 당직을 사임당하고 최용건이 새 당수로 선출되면서 조선노동당의 우당(友黨)으로 변신하였다.
천도교청우당은 김달현(金達鉉)을 당수로 하여 1946년 2월 창당되었으나 창당 초기부터 소련군정과 공산당에 대해 조선민주당보다 앞장서서 적극적인 협력을 하였다. 조선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은 그 동안 여섯 차례 당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중앙조직만 있을 뿐 하부조직이 없는 취약한 정당조직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각종 대남성명을 발표할 때나 통일문제 등 주로 남북한관계와 관련된 ‘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개최를 주장할 때에만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사회단체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비롯하여 조선직업총동맹·조선농업근로자동맹·김일성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조선민주여성동맹 등 1996년 말 현재 100여개가 있다. 이 가운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조선노동당을 비롯한 71개의 정당·사회단체가 총망라되어 있는 단체로서, 주로 노동당의 통일을 비롯한 남북관계와 관련된 정책들을 실행하기 위한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은 1949년 6월에 결성된 조직으로서 1958년 10월 이후 지방조직은 해체되고 중앙조직만이 운영되고 있다.
1998년 현재 주요 사회단체 회원수는 조선민주여성동맹이 270만명, 조선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이 270만명, 조선농업근로자동맹이 350만명, 조선직업총동맹이 250만명 등 1,100만명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북한의 14세 이상의 인구 1,100만명 가운데 노동당원 350만명을 제외한 숫자보다 넘쳐 북한주민은 누구나 이들 4개 조직 가운데 1개 이상에 가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대외관계 〔정책변천〕
북한정권은 유엔에 의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대한민국과 정통성을 경쟁하는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대외정책은 정통성 획득, 국제적 지위 향상을 꾀하는 노력으로 일관하여 왔다. 동시에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통일을 위한 ‘국제혁명역량과의 연대성’ 강화에도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북한은 정권수립 이후 1953년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는 우선 사회주의 진영 내의 외교에 머물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유엔을 비롯하여 30여개국으로부터 승인 받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데 비해, 북한은 소련·중국·동구 사회주의국가 등 12개국으로부터 승인 받았고, 대외활동 또한 소련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사회주의국가에 국한되었다.
특히, 6·25전쟁으로 유엔에서 침략자로 낙인 찍힌 뒤 전후복구를 위하여 소련·중국에 의존하면서 이들로부터의 군사적·경제적 지원과 외교적 지지를 획득하는 데 보다 주력하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사회주의 진영에 국한되었던 진영외교(陣營外交)에서 탈피하여 국제사회에의 진출을 꾀하는 등 다변외교(多邊外交)로 전환하였다.
1955년 아시아지역의 신생독립국 29개국이 참가한 반둥회의에서 ‘평화5원칙’이 채택되고 1956년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정책이 발표되는 등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제3세계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중·소분쟁의 와중에 휘말려 그 성과는 극히 미약하였다.
북한은 1962년의 중·소 국경분쟁과 쿠바사태 이후 악화된 중·소관계의 환경 속에서 초기에는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을 수정주의(修正主義)로 비난하고 소련의 반중국정책을 비판하면서 중국과의 연대를 중요시하자 소련과의 관계냉각에 따른 경제·군사협력 중단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1964년 흐루시초프가 실각하자 다시 소련에 접근하는 자세를 보였다.
1966년 8월 북한은 내정 불간섭과 상호평등을 표방한 ‘자주노선’을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내적으로는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 노선에 따라, 외적으로는 중·소 등거리외교에서 활로를 찾고, 또한 1961년의 비동맹정상회담 이후 급증하고 있는 비동맹회원국에의 접근을 겨냥한 방안이었다. 그 뒤 제3세계국가에 대한 다변외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나타내어 북한의 대외관계는 넓어져 갔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고 미국·중국 관계개선과 일본·중국의 국교정상화 등 국제적 화해분위기가 성숙됨에 따라 북한은 제3세계에 대한 초청·방문외교를 보다 활발하게 전개하는 한편, 서방 제국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접근정책을 폈다. 유엔 및 기타 국제기구에서의 남북한 대결에 대비한 지지국가 확보와 서방과의 경제협력을 통한 자본·기술도입의 필요성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1973년 한국의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이 발표되자 ‘남북한의 공존은 2개의 한국을 고정화하고 분단을 영구화한다’는 반대입장을 천명하면서도 서방국가로 하여금 남북한 평등정책을 펴도록 유도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스웨덴·핀란드·노르웨이 등 북구 제국(北歐諸國)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경제협력도 발전시켰던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는 미국에 대해서도 ‘인민외교’를 시도하는 한편,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하여 한미 사이의 이간을 꾀하기도 하였다. 또 중립국외교를 적극 전개하여 1975년 리마비동맹회의에서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그 결과 제30차 유엔총회에서는 유엔사상 처음으로 한국문제에 대한 서방측 결의안과 공산측 결의안이 동시에 통과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는 남북대화의 중단, 외채상환문제, 외교관 밀수사건 등으로 국제적 신뢰도가 크게 손상되어 대서방외교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1980년에 접어들며 북한은 조선노동당 6차대회를 통하여 ‘자주·친선·평화’를 대외정책의 기본이념으로 표방하면서 우호적인 서방국가와도 친선관계를 맺겠다는 대서방외교 강화를 천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3세계국가들의 반서방·반미 경향이 약화되고 실리우선정책의 추구, 그리고 서방권 안에서 화해조류의 퇴조현상이 보임에 따라 북한의 외교정책은 침체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1983년 버마암살폭파사건과 1987년 대한항공기 공중폭파사건으로 서방 제국으로부터 외교적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북한은 중국의 경제개방 움직임의 여파와 북한경제의 지속적인 침체를 탈피하기 위해 1984년 〈합영법〉을 제정하고 서방측의 선진기술과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경제외교를 적극 전개하였다. 그러나 서방권과의 경제적 통상관계가 확대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합작투자사업의 실적은 저조하고 서방측으로부터 기대한 만큼 호응은 받지 못하였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소련·동구권의 붕괴로 북한의 외교는 과거 그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자주노선이라는 기본입장을 견지하면서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을 주축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면서 일본과의 수교회담을 서두르고 미국과의 관계개선이라는 획기적인 정책전환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 급격한 대외환경의 변화로 인한 국제적 고립 탈피와 내부의 심각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미국·일본을 비롯한 서구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한 접근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북한은 6·25전쟁 이후 최악의 위기상황을 맞았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군부중시의 비상위기관리체제를 통해 체제 안정을 꾀하
1990년 9월 일본 자민당 가네마루(金丸信) 총재와 사회당 다나베(田邊) 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양당 대표단의 평양 방문은 북일수교회담의 기본정신과 방향을 설정하고 회담 개최의 길을 열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92년 11월까지 8차에 걸쳐 회담이 진행되었는데 쌍방 입장의 차이와 핵문제와 같은 안보상의 문제 등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1988년 12월에 시작된 북경에서의 북미간의 참사관급회담은 1992년 1월 뉴욕에서 김용순 노동당국제부장 겸 비서와 아놀드 캔터 미국무차관 간의 차관급 고위회담으로 이어졌다. 이 회담에서는 관계개선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의견이 교환되었다. 이후 북한에서는 6·25반미행사가 취소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시설 사찰을 허용하였다.
북한의 핵개발 문제와 관련 1994년 10월에는 북미간의 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다. 기본합의서는 북한의 핵시설 동결과 경수로에 의한 200만㎾의 핵발전소 건설, 북미간의 연락사무소 설치 및 관계 정상화 등이 기본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1995년부터는 이 기본합의서의 실행단계로 넘어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쌍방간의 인적 교류가 활발해졌으며,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유해 공동발굴과 유해 송환사업도 상당 수준 진행되었다.
북한의 대유엔외교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하나의 국호로만 유엔 가입을 주장하고 남북한이 각기 유엔 가입하는 것을 ‘두 개의 조선 책동’이라고 거부해 왔던 북한이, 정식으로 유엔가입을 신청함으로써 1991년 9월 18일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남북한이 유엔에 가입하게 되었다. 남과 북은 정부수립 후 43년 만에 유엔의 회원국이 된 것이다. 유엔 가입과 함께 유엔에 대표부를 설치하여 상임대표를 상주시키고 있다.
〔현 황〕
1997년 12월 현재 북한이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의 수는 모두 139개국이다. 이 가운데 남북한 동시수교국은 122개국이다. 139개국 가운데 136개국과는 대사관계를 맺고 있고 1개 소에 총영사관, 2개 소에 대표부가 개설되어 있다. 지역별로는 아시아·대양주 29개국, 중동 11개국, 아프리카 50개국, 유럽 25개국, 미주지역 21개국과 수교하고 있다. 이 밖에 북한은 유엔직속기구 2개국, 유엔전문기구 12개국, 정부간 국제기구 10개국에 가입하고 있다.
〔교민정책〕
우리 나라의 분단상황은 재일동포사회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광복 직후 200만 명에 이르는 재일동포들은 귀국알선, 생활상담을 위한 자치단체로 재일조선인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는 곧 일본공산당에 의한 좌경화와 더불어 정치단체로 탈바꿈되었기 때문에 우익진영계 인사들은 탈퇴하여 재일조선거류민단을 발족시켰다.
이때부터 8년 동안 좌익계는 민단계에 대한 폭력과 내부 주도권 다툼을 거듭하다가 1955년 북한을 지지하는 한덕수(韓德銖)를 중심으로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를 결성,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은 조총련이 결성된 직후 정치·사상·경제적인 연계를 적극화하였다. 먼저 조총련을 북한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편성된 단체로 간주하고, 1962년 이래 핵심간부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참가시키는 등 북한과의 일체감 부여에 주력하여 왔다. 또 1957년부터 133회(1996.2. 현재)에 걸쳐 교육원조비 명목으로 426억 엔을 송금하였고, 1959년 재일동포 북송사업을 벌여 1987년까지 187차에 걸쳐 9만3360명을 송환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 조총련은 서방측의 선진기술 및 자본도입을 서두르는 북한의 합작투자에 적극 협력하고 있다. 1985년 문을 연 평양의 창광여관 커피점, 낙원백화점 등이 합작투자의 결과로 나타났다. 1986년 8월 북한의 합영사업추진위원회와 조총련 합영사업연구회가 각각 60만 불씩 공동출자하여 조선국제합영 총회사를 설립하고 매년 1회씩 이사회를 개최하여 합영사업의 확대방향을 협의해 오고 있다.
현재 조총련 회원수는 20만 명(민단은 40만 명)이며 중앙의장단을 중심으로 한 중앙조직과 49개의 지방본부, 300여 개의 지부, 지역학교 및 직장 등의 단위로 조직된 2,800여 개의 분회가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청년·상공인·교육자 등 18개 산하단체와 조선신보사 등 23개의 사업체를 보유하고 있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조선대학교가 있다.
한편, 북한은 헌법규정과 〈국적법〉에 의하여 모든 해외동포들을 ‘공민’이라고 주장하면서 친북교포로 포섭, 조직화하려는 교포정책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1970년 이후 교포사회가 남북한 관계에서 점차 비중을 갖는 제3세력으로 등장하는 추세에 따라 해외교포의 친북세력화에 주력하였다.
즉 1971년 해외동포를 민족이라는 의식적 집단의 한 단위로 규정한 데 이어, 1976년 이래 김일성의 ‘신년사’에서 해외동포들이 통일을 위한 투쟁을 적극 전개할 것을 호소했는가 하면, ‘대민족회의’·‘전민족대회’ 등 통일방안 제의와 관련된 집회에 참석할 것을 주장하여 왔다. 이를 위하여 북한은 해외교포의 방북초청 및 반한통일전선 공작, 반한·친북여론의 조성에 주력하고 있다.
한편, 최근에는 조총련 조직을 통하여 3세, 4세를 비롯한 광범한 동포를 상대로 주체사상 교육을 강화하고 김일성 사망 후에는 김정일에 대한 충성과 함께 그를 충효일심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교육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교민정책을 담당하는 행정기관으로는 정무원 산하 해외동포원호위원회와 교포사업총국이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조선노동당연락부와 통일전선부, 그리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업무를 주도하고 있다.
정치2
3. 군 사 〔정책 및 전략〕
북한의 군은 소련군정 아래 1945년 10월 조직된 보안대로 출발하였다. 소련군정은 이어 평양학원을 세워 정치·군사 간부를 양성하였다. 보안대의 규모가 확대되자 1946년 8월 평양에 이를 통합, 지도하는 보안간부훈련대대부를 창설하고 개천·나남·평양에 보안간부훈련소를, 강서에 간부훈련학교를 설치하였다. 곧이어 보안간부훈련대대부는 인민집단군총사령부로 개칭되었다.
이들 군사기관들은 1947∼1948년 소련의 집중적인 군사원조와 교육·훈련·지도를 거쳐 1948년 2월 8일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으로 창건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북한의 군은 정치적·사상적인 면뿐만 아니라 군사전략이나 군사체제·조직이 거의 소련을 모방하고 있다. 북한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혁명전쟁론’을 좇아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 ‘정의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정권이 수립된 해인 1948년 12월 말 소련군은 철수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일방적인 군사지원은 계속되었고 1949년에는 군사고문단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북한의 6·25전쟁의 실패와 중국지원군의 참전은 소련의존 일변도의 군사정책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하여 소련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군사적으로 의존하게 하였다.
휴전 직후부터 북한은 중국·소련의 원조를 받아 병기 생산시설을 확장하는 한편, 화력 위주와 기동력 전력을 강화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특히 북한은 소련군으로부터 무상군사원조를 받아 공군력과 해군력의 증강에 주력하였다. 이는 6·25전쟁에서 미국의 공군력에 속수무책이었던 쓰라린 경험의 결과였던 것이다. 1958년 10월 중국공산군이 철수하자 민병조직인 노농적위대(勞農赤衛隊)를 창설하여 전민적(全民的)인 동원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일안보조약이 조인되고, 1954년 11월 이미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함께 극동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방위체계가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1961년 5월 대한민국에서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북한은 김일성이 직접 모스크바와 북경을 방문하여 1961년 7월 소련·중국과 각각 ‘상호우호협력 및 원조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어느 한쪽의 당사국이 무력침공을 당하여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면, 다른 한쪽은 지체없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조약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북한의 안보체제를 북방삼각관계에 묶어두는 기초가 되고 있다.
1962년 쿠바사태와 중소국경분쟁에 따른 소련의 대북한군원중단은 북한의 군사정책에 일대전환을 가져왔다. 북한은 ‘국방에서의 자위원칙’을 천명하고 그 실천방침으로 ‘전인민의 무장화’·‘전국토의 요새화’·‘전군의 간부화’·‘무기의 현대화’라는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하였다.
이때부터 북한은 군사력 증강을 서두르면서 전체 GNP의 30% 이상을 군사비로 설정하고 그 군사예산의 25∼30%를 무기제조산업에 투자하였다. 그 결과 북한의 대남 군사력 우위는 확고해졌으며 오늘날까지도 4대 군사노선의 기조 밑에 군사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이 무렵 군사전략에서도 독자적인 정립이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북한의 군사전략은 당초 속공기동공세전략과 포위섬멸전략을 내용으로 하는 소련의 전통적인 전쟁전략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의 실패 경험과 월남전의 교훈을 적용하여 ‘현대전과 유격전의 배합’을 기본전략전술로 채택하는 변화를 보였다. 즉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전략전술’에 입각하여 대량기습 선제공격과 속전속결 등 3대 군사행동의 연계작전을 구사하는 독자적 군사전략을 정립시켰다.
1960년대 후반, 북한은 군사정책에서 새로운 국면을 전개하였다. 먼저 대남전략에서 청와대 기습, 미 푸에블로호 납치, 울진·삼척 무장특수부대침투 등 한미 양국에 대한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하였다. 이는 당시 치열해진 월남전에서 월맹의 호지명 정권을 측면 지원한다는 복합적인 목적이 있었다. 아울러 붉은청년근위대를 창설하여 유사시 군의 하급간부 보완을 겨냥하는 등 군사동원체제를 강화하였다.
또 군에 정치위원제를 도입하고 모든 군령(軍令)에는 정치위원의 서명이 있어야 효력을 발생하도록 제도화시켜 군에 대한 당의 지도와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군의 당군적(黨軍的) 특성은 1972년 채택한 신헌법에서 군사기구를 당조직을 통한 정치지도체계와 정권기관을 통한 군사지휘체계로 이원화한 데 이어 1982년 인민무력부를 정무원에서 분리시킴에 따라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었다.
1970년대 초 7·4남북공동성명의 발표에서 비롯된 남북한 해빙기류 속에서도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의 공세전략과 과도한 군사력 증강정책은 계속되었다. 먼저 헌법개정을 통하여 군사기구를 평시체제에서 전시체제로 전환하였고, 남북대화를 진행하는 기간 동안에도 남침용 지하터널(땅굴)을 팠는가 하면, 서해 5개 도서를 군사적으로 위협하기도 하였다. 특히 1975년 월남 패망이 확실시되자 한국 내에서 북한에의 동조혁명역량을 기대하는 ‘결정적 시기’ 조성을 군사전략 차원에서 추구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와 4대 군사노선에 입각한 북한의 군사력 증강은 당시까지의 전략물자 비축과 군수공업기지 완성을 토대로 군의 현대화를 보다 촉진시켰다. 중화기 등 군사장비의 자체개발 및 양산체제를 확장하고 항공기·정밀유도무기의 개발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화전(和戰) 양면을 구사하는 대남군사전략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하고 있다.
즉, 1983년 이래 한미 양국이 실시하는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에 대처한다는 구실로 ‘준전시상태명령’ 등을 해마다 선포하고 군축협상 제의, 주한미군철수 주장, 한미 양국에 대한 평화공세를 취했다. 뿐만 아니라 소련으로부터 신예 미그 23기를 도입하고, 1981년 45% 수준이던 전방배치 병력규모를 65% 수준으로 전환해 놓고 있는가 하면, 27개 보병사단 중 32%를 기갑화, 기계화시키는 등 기동전력 증강을 서둘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상체제로 전환한 북한은 군사우위정책과 함께 군인들의 사기진작에 주력하였다. 1992년 4월 25일 인민군 창건 60주년을 앞두고 김일성에게는 대원수, 김정일·오진우는 원수 칭호를, 그 밖에 차수 칭호 등 660명의 군장령들에게 진급된 계급장을 수여하였다.
한편, 최고사령관인 김정일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당의 군사노선을 관철하며 북한사회에 군사를 중시하는 기풍을 세우는 방향으로 군사정책이 전개되었다. 1995년 10월 김정일이 당의 총비서로 추대되기 전까지는 김정일은 국방위원장과 최고사령관의 직책으로 명령과 지시를 통해 북한사회를 통치하였으며 현재도 군부가 전면에 나서는 군사중시정책은 계속되고 있다.
1994년부터는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평화공세를 적극 전개하였다. 군사정전위원회로부터 북한이 먼저 탈퇴하고 중국대표도 소환토록 하였으며, 북한측 중립국 감독위원회를 강제 철수시키는 한편, 1996년 4월 휴전선과 비무장지대 관리를 포기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는 휴전협정을 대신할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여건 조성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996년 4월 16일 제주도의 한미정상회담에서 항구적인 평화구축을 위한 4자회담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제의에 의해, 두 정상의 이름으로 제안하게 되었다. 4자회담은 예비회담을 거쳐 2차에 걸쳐 본회담이 개최되었는데 의제설정 문제에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편제 및 현황〕
오늘날 북한의 군조직은 인민군총참모장이 지상군(육군)·해군·공군을 총괄 지휘하는 단일통합군체제를 골간으로 하고 있다. 평시에 군정(軍政)은 국방위원회와 인민무력부, 군령(軍令)은 군총참모장이 행사하나, 전시에는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군최고사령관이 직접 군총참모장을 통해 군과 노농적위대 등 예비병력을 포함한 무력 일체를 지휘하도록 되어 있다.
군은 총참모장 예하에 13개 군단, 특수8군단·포병사령부·기계화사령부·해군사령부·공군사령부·평양방위사령부로 편성되어 있다. 북한의 군병력은 1997년 현재 총인구의 5% 수준인 100만 명을 넘으며, 예비병력으로는 교도대 124만 명, 노농적위대 380만 명, 붉은청년근위대 81만 명, 인민경비대 14만 명 등 600만 명에 달한다. 이와 함께 병기생산에 있어서는 전차를 비롯한 장갑차·화포·공용화기 및 소화기, 그리고 각종 탄약을 자급자족하고 있으며, 잠수함 등 전함을 건조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군 복무연령은 17세 이상이며 복무기간은 연령제로서 병종(兵種)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10년이 일반적이다. 군지휘관 양성기관으로는 3∼4년 과정의 김일성군사종합대학·강건종합군관학교 등이 있다. 북한의 군사비는 GNP의 24%(1990년 현재) 수준이다.
한편 1961년 이래 유지해 온 소련·중국과의 쌍무적인 군사동맹체제는 소련의 붕괴와 중국·한국의 수교 등으로 인하여 본질적으로 그 내용이 퇴색되었는데, 특히 러시아의 군사동맹조약은 그 효력이 이미 상실되고 새로운 조약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 북한은 1982년 리비아와 우호협력동맹조약을, 1986년 쿠바와 친선 및 협조조약을 체결하여 준군사동맹을 맺고 있다.
4. 통일 〔통일정책〕
북한은 노동당 창건 및 정권수립과 더불어 전한반도의 공산화를 기본정책목표로 민주기지노선을 내세웠다. 이를 위하여 ‘3대 혁명역량’ 강화를 기본전략으로 삼고 ① 남조선혁명의 여건 조성, ② 대한민국에서의 연공정권(聯共政權) 수립, ③ 남북합작을 통한 한반도의 공산화혁명을 실현하는 이른바 ‘인민민주주의혁명’ 전략단계를 추구하게 되었다.
여기서 3대 혁명역량 강화란, 첫째 북한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잘 하여 대남혁명역량을 강화하고, 둘째 대한민국 내의 모순을 최대한 첨예화시켜 사회혼란을 유도함으로써 ‘밑으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나가며, 셋째 이 같은 남북한의 혁명역량 활동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국제적 여건을 달성하기 위해 ‘국제혁명역량’과의 단결을 강화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북한은 통일문제를 ‘민족해방’이라는 시각에서 인식하고 줄곧 이 입장을 이루려는 노력을 전개하여 왔다. 북한은 1949년 결성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명의로 대한민국에서의 미군 철수와 유엔한국위원단의 철퇴, 그리고 남북한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할 것을 주장했다. 또 1950년 6월 19일에는 남북한 국회의 통합에 의한 단일입법기관 구성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이와 같은 일련의 통일제의는 하나의 전술적 평화공세였음이 드러났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전면남침을 통해 남한의 무력해방을 기도하였다. 이 전쟁에서 북한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한 무력해방이 어렵다는 교훈을 얻었다.
휴전 후 1954년 4∼6월 제네바에서는 한국문제 토의를 위한 국제정치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북한은 6·25전쟁 이전과 비슷한 평화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골자는 남북한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전조선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기구를 통하여 외세의 간섭 없는 총선거를 실시, 통일한다는 것이었다.
이 제의를 중심으로 북한은 1960년 남한에서 정치변혁이 있기까지 계속하여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통일공세를 거듭해 왔다. 미군 철수와 감군(減軍), 남북대표자회의와 국제회의 개최, 경제·문화 교류 및 통행·서신교환 등이 그것이었다. 1958년 중국지원군의 철수를 전후해서는 중립국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주장하고, ‘선 미군철수 후 총선거통일’을 요구하였다.
1960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4·19혁명과 더불어 북한의 통일정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그때까지 주장해 오던 유관국회 또는 중립국 감시하의 총선거 대신에 ‘조선인에 의한 조선문제 해결’을 내세웠다. 그 해 8월 15일 북한은 남북연방제를 제의했고,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통한 남북간의 직접협상을 주장하였다.
연방제안의 핵심 내용은 남북한 정부의 독자적 활동을 보장하고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경제·문화발전을 도모한다는 과도기적 조처였다. 북한은 그 뒤 이 안을 구체화하면서 계속 제의해 왔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통일의 기본방안으로 삼고 있다.
1961년 대한민국에 강력한 반공정권이 들어서자 북한은 남북협상론을 후퇴시키고 무력통일노선을 적극화하였다. 4대 군사노선에 입각한 군비증강을 토대로 하여 대한민국 내에서 ‘남조선혁명’이 성공하고 이른바 친공인민정권이 수립되면 그 정권과 합작하여 통일한다는 선혁명 후통일론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3대 혁명역량’을 본격화시켰다. 따라서 북한은 대한민국 내에 혁명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1960년대 후반에 일련의 대남무력도발에 치중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미국·중국의 접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8·15평화통일구상’ 천명 등이 있은 뒤 남북한관계는 극적인 변화 조짐을 나타냈다. 특히 대한적십자사의 이산가족찾기운동 제의에 의해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게 되어 공식적인 남북한 접촉의 문호가 열렸다.
곧이어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3대원칙하에 통일을 추진한다는 ‘7·4공동성명’이 발표되었으며 남북조절위원회를 통한 정치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남북회담 진행과정에서 북한은 ‘남북정치협상회의’·‘대민족회의’ 개최 등을 주장하면서 통일에 대해 군사문제 선결론에 따른 정치적 해결을 강조하였다. 1973년 6월 23일 대한민국에서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이 천명되자, 북한은 같은 날 ‘평화통일5대강령’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① 남북한간의 군사적 대치 및 긴장 해소, ② 다방면적 합작과 교류 실현, ③ 대민족회의 소집, ④ 고려연방제 실시, ⑤ 고려연방의 단일국호에 의한 유엔 가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1973년 8월 북한은 돌연 남북대화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를 대화의 상대로 하는 것을 거부하고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통한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를 제외한 어떠한 대북한 협상에도 응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대신 4자회담·3당국자회담 등을 제의하였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북한의 대남전략의 골격은 1970년대와 다름없었다. 오히려 1970년대보다 더 적극적인 대남평화공세와 더불어 전쟁능력을 계속 강화하는 화전 양면전략을 병행하였다. 1980년 10월 북한은 조선노동당 6차대회를 통하여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란 이름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1970년대에 제의한 통일까지의 과도기적 조처로서의 연방제가 아니라 완성된 통일국가 형태로서의 연방제였다.
그 내용은 ① 국호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② 남북한의 사상과 제도 인정, ③ 남북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민족통일정부와 그 아래에서 동등한 권한과 의무를 갖는 지역자치제 실시, ④ 이념은 민주주의, ⑤ 노선은 비동맹중립, ⑥ 최고기구로서 남북한 동수와 해외동포로 구성되는 ‘최고민족연방회의’ 구성 등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 같은 연방제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에서의 〈반공법〉·〈국가보안법〉 폐지와 ‘통일혁명당’(1985년 7월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칭)을 포함한 정당·사회단체 및 개별인사들의 정치활동 합법화, 현 대한민국 정권의 민주주의적 정권(인민정권)으로의 교체, 그리고 미국·북한과의 평화협정 체결 및 주한미군 철수 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제안과 함께 북한은 연방국의 성격을 밝히는 10개의 시정방침을 천명하였는데, 여기서 외형상으로는 대한민국의 정치·사회제도를 존속시킨다고 하면서 오직 북한체제에 상응할 수 있는 체제만을 허용하겠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결국 북한의 통일방안은 주한미군 철수→연공정권 수립→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10대시정방침 시행이란 도식으로 예정되어, 남북한간의 교류·협력을 선행하고 긴장완화와 신뢰조성을 먼저 도모하려는 남한측 입장과 정면 대립하고 있다.
한편, 1983년 10월 9일 북한에 의해 자행된 버마암살폭파사건은 남북한관계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왔다. 그러나 남한 정부는 통일문제에 대한 민족자결원칙과 남북한 당사자회담을 계속 천명하였다. 이 사건 직후 북한은 국제여론을 감안하여 1984년에 대남 태도를 많이 누그러뜨렸다. 그리하여 1984년 수재물자 인수·인도를 계기로 적십자회담의 재개와 경제회담 개최가 있었고, 1985년에는 체육회담·국회실무자회담까지 이루어졌다. 또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이 서울·평양을 내왕하였다.
그러나 1986년 팀스피리트 한미합동군사훈련을 구실로 남북대화를 또다시 중단시켰으나, 1988년 대한민국의 ‘7·7선언’ 이후 한때 쌍방간에는 대화제의가 활발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되자 북한은 수세적인 남북간 공존전략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991년 9월 유엔 가입으로 ‘하나의 조선’정책을 사실상 포기하였으며, 1993년 4월에는 남북이 공존·공영·공리를 추구하는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연방제통일방안을 수정하여 국가연합식 느슨한 연방제통일방안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는 중앙정부의 권한이 거의 없고 남북한 지역정부에 권력을 집중시킨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편, 사회주의 개정헌법에서는 정권의 당면과제 중에서 종래의 대남 공세적인 조항을 삭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현재 북한은 7·4남북공동성명의 ‘통일 3대원칙’과 ‘민족대단결 10대원칙’, 그리고 ‘연방제 통일방안’을 통일정책의 3대 지주라고 주장하고 있다.
〔남북대화〕
남북한의 공식적인 첫 대화는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으로 시작되었다. 이어 ‘7·4공동성명’의 합의에 따라 남북조절위원회회의가 적십자회담과 함께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되었다. 그 뒤 남북대화는 북한의 일방적인 중단(연기)→재개→중단(연기)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가 제의한 남북한이산가족찾기운동을 북한측이 받아들임으로써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서 북한은 인도주의문제는 조국통일이란 민족문제가 해결되어야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여 회담성격을 정치회담으로 변질시키려 하였다.
자유내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먼저 반공법규 철폐, 반공단체 해체, 반공활동 중지 등 법률적·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적십자 본연의 인도주의원칙 및 단계적인 해결원칙에 충실할 것을 주장한 남한측과 크게 어긋난 입장을 취하였다.
이 같은 입장의 차이는 세 차례 열린 남북조절위원회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군사문제의 우선해결을 주장하면서 남북한의 이념·체제의 상이(相異), 그리고 적대감·불신의 상존이라는 현실을 무시하려고 하였다. 또 주한미군 철수, 반공정책 중지 등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웠고, 정치협상회의와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북한은 1973년 8월 28일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회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성명을 발표, 사실상 남북대화를 교착시켰다. 이 두 회담은 그 뒤 몇 차례 실무회의 형식으로 계속되다가 남북조절위원회회의는 1975년 3월, 남북적십자회담은 1977년 12월에 각각 단절되었다.
1979년 1월 북한은 남한의 전제조건 없는 남북한 당국간 대화제의에 대하여 책임 있는 당국의 반응을 유보한 채 사회단체(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명의로 ‘전민족대회’의 소집을 위한 민족통일준비위원회 결성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남북한은 접촉의 성격과 목적이 서로 다른 변칙대화를 세 차례 갖게 되었다. 이 접촉에서 북한은 정부 차원의 조절위원회를 거부하고 그 존재마저 일체 부정함으로써 남북간의 공식합의문서를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다.
1979년 10·26사태로 인한 남한사회의 혼란을 계기로 하여 북한은 정무원총리와 조국평화통일위원장 명의로 그들이 임의 선정한 대한민국 내의 인사 21명과 총리에게 편지를 발송하는 등 대남 편지공세를 전개하였다. 이에 남한은 남북총리회담을 제의하여 남북한 실무대표 접촉이 1980년 2월 6일부터 8월 20일까지 열 차례 진행되었으나 쌍방간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였다.
이 접촉에서 북한은 총리회담을 정당·사회단체의 다각적 접촉의 일환으로서 정치협상회의로 이끌어가려 하였다. 의제에서도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합작과 단결의 단일의제만을 고집하여 실질적인 진전을 교착시켰다.
제5공화국 출범 이후 남한이 제의한 남북한당국 최고책임자회담을 외면한 북한은 1982년 2월에 남북정치인연합회의를 제의하면서 대한민국측의 대표명단을 지명하기도 하였다. 1983년 버마암살폭파사건 이후 북한은 남한 정부와 대화를 갖지 않겠다는 종래의 태도를 바꾸었다. 즉, 1984년 1월 미국을 포함한 남북한의 3자회담 개최를 주장했고, 로스앤젤레스올림픽대회와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 등 국제대회에 참가할 단일팀 구성협의를 위한 체육회담을 제의하는 등 평화공세로 전환하였다.
그 해 8월 남한은 남북한 물자교역과 경제협력을 제의하면서 생활필수품을 무상원조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남한지역 수재민에게 물자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남북간에는 제2의 대화시대를 맞아 경제회담·적십자회담·국회회담·예비접촉체육회담이 잇따라 열렸다.
1984년 11월 15일 열린 남북경제회담에서 북한은 교역품목을 제시하고 자연자원 개발, 남북공동어로구역 설정, 철도 연결(경의선), 남북경제협력위원회 설치 등에 있어 대한민국측 제안을 수용, 회담의 전망을 밝게 하였다. 그러나 2차회담부터 북한은 남북간의 제도와 정책의 차이를 무시하고 경제협력의 고차적 단계인 합작과 교류를 함께 실시하자고 주장함으로써 실질적인 진전을 가로막았다.
남북적십자회담은 1985년 5월 27일 서울에서 재개되었다. 이 회담에서 남북한은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을 합의하였고, 1985년 9월 적십자총재를 단장으로 하는 151명 규모의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이 남북한을 동시에 교환 방문했다.
북한은 여러 갈래의 남북대화를 진행시키면서 국회회담 예비접촉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 회담은 1985년 4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가 남북한간 불가침에 관한 공동선언문제를 협의하자고 제의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를 위한 첫 예비접촉은 1985년 7월 23일에 열렸다. 이 접촉에서 북한은 ‘불가침공동선언’ 문제를 최우선적 의제로 다룰 것을 주장하는 한편, 회담형식으로는 남북한 국회의 연석회의방식을 제의하고 1984년부터 주장해 온 3자회담의 내용을 국회회담을 통해 성취하려는 의도를 나타냈다.
한편,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와 관련하여 남북체육회담이 1985년 10월 스위스 로잔(Lausanne)에서 열렸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중재로 열린 이 회담에서 북한은 서울올림픽의 공동주최와 경기종목의 절반 이상 배당을 주장하는 등 대회명칭과 기구·운영 등에 많은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회담은 그 뒤 3년 동안 네 차례 계속되었으나 북한은 시종일관 IOC의 중재안(한국은 수락)을 거부하면서 ‘공동주최안’만을 거듭 고집하였다.
1986년에 들어와 북한은 팀스피리트86을 구실로 남북대화를 또다시 중단시켰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거듭된 대화재개 촉구를 외면한 채 1988년에 들어와 남북연석회의(1.1.)·남북국회연석회의(7.17.)·남북한고위급정치군사회담(11.16.)·3자회담(12.20.)·남북한체육회담(12.21.)·남북한학생회담(12.26.) 등 많은 대화제의를 하였다.
한편, 1988년 12월 남한측에서 남북고위당국자회담을 제의한 데 이어 북한측에서는 1989년 1월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남북고위급정치군사회담을 역제의하였다. 그리하여 1989년 2월부터 판문점 평화의 집과 통일각에서 8차에 걸치는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 9월 총리를 대표로 하는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었으며, 2차는 평양, 3차는 서울, 4차는 평양 등 서울과 평양을 오고가며 개최되었는데, 1991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제5차 회담에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다. 그리고 1992년 2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6차 고위급회담에서 이를 정식으로 발효시키는 절차를 밟았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서문에 이어 제1장 남북화해, 제2장 남북불가침, 제3장 남북교류협력, 제4장 수정 및 발효 등 4장 25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어 1992년 5월에 제7차(서울), 9월에 제8차(평양) 고위급회담에서도 부속합의서와 실천기구로서의 공동위원회 구성에 합의하였다.
남북고위급회담에서 기본합의서와 그 실천기구까지 합의한 것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함께 남북 당국이 분단극복과 통일을 성취해 나감에 있어서 쟁취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92년 10월 대선을 앞두고 간첩단사건의 발표와 팀스피리트훈련 실시문제가 거론되자 예정된 제9차 고위급회담이 북한측에 의해 무산되었으며, 기본합의서의 실천이 불가능해졌다.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조건 없는 정상회담을 제의한 데 대해 4월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에서 ‘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을 채택하고, 5월에 강성산(姜成山) 총리 명의로 된 서신에서 통일문제를 담당해 온 부총리급의 특사교환을 제의하였다. 그 후 특사 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이 8차에 걸쳐 진행되었으나 북한의 핵문제 해결과 관련 쌍방의 견해 차이로 결렬되고 말았다.
1994년 6월 카터(Carter,J.E.) 전미국대통령이 평양을 방문,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하게 되어 그 실현을 위해 부총리급 예비접촉이 성사되어 7월 25일∼27일 평양에서 개최한다는 것과 그에 따르는 대표단 구성, 회담형식, 체류일정, 신변안전보장, 편의보장 문제 등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사망으로 정상회담은 무기 연기되고 말았다.
그 후 김일성 조문문제와 관련, 남북간에는 새로운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당사자 회담은 개최될 수가 없었다. 다만 북한의 식량난을 지원하기 위해 인도적 차원에서 남북적십자간의 회담이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경제
1. 시기별 변천과정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기반구축〕
8·15광복과 더불어 북한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정은 북한경제를 일본의 식민지경제로부터 사회주의경제체제로 개편하는 작업을 서둘렀다. 우선 식민지경제의 일반적 취약점을 시정하기 위하여 ‘민주개혁’이란 이름 아래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단행, 20여일 만에 완결지었다.
약 200만 정보에 이르는 북한 총 농경지의 52%를 무상으로 몰수했고 그 중 90%를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하였으며, 일본인이 소유했던 토지는 대부분 국유화하였다. 그리하여 지주제 및 소작제를 폐지하는 대신 경작권지제(耕作權地制)를 신설하여 노동농민적 토지소유제를 확립하였다.
또 그 해 8월에는 주요 공장시설을 포함하여 광산·철도·발전소·운수·체신·은행·상업 등 북한지역 산업시설의 90% 이상에 해당되는 1,034개 소를 국유화하였다. 개인이 경영하는 소규모의 공장·기업체와 상업은 생활필수품의 원활한 생산과 유통을 위하여 제외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 뒤 장려→이용→제한이라는 정책단계를 밟아 1958년에는 모두 국유 및 공유화하였다.
이와 같이,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조정책의 결과, 1949년 말 국영 및 협동조합기업은 공업 총생산에서 90.2%를 차지하였고, 국민총생산에서는 1946년의 14.6%에서 1949년에 44.5%로 크게 증대되어 사회주의경제체제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일련의 경제개혁을 통하여 소련형의 계획경제체제를 정비한 북한은 최초로 1947년과 1948년에 각각 1년간의 경제계획을 수립, 실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의 지배권 확립을 촉진하는 정치적 의의를 고려한 탓으로 경제계획의 골자는 개인경제를 점차 축소하고 협동·국영 부문을 확대하는 데 초점이 두어졌을 뿐 경제발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1948년 정권을 수립한 이후 북한은 2개년경제계획(1949∼1950)을 발표하고 일제식민지유산인 산업의 파행적 성격을 제거하고 낙후된 산업과 농업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소련과 차관협정을 체결하여 본격적인 경제건설에 착수, 자립적 민족경제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남침 준비를 위한 물자 동원이 주요 목표였다는 것이 6·25전쟁으로 드러났다.
6·25전쟁은 북한경제를 폐허로 만들었다. 각종 산업시설의 파괴로 인하여 공업 총생산액은 64% 감소되고, 특히 경공업 부문은 91% 감소되어 그 피해액만도 약 17억 달러에 달했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되자 그 이듬해 4월 북한은 최초의 중기 경제개발계획인 ‘인민경제복구 3개년계획(1954∼1956)’을 수립하고 소련·중국의 경제원조에 힙입어 파괴된 산업시설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북한은 단순히 전전(戰前)의 생산수단을 회복하는 데 역점을 두지 않고, 농업경제를 중공업경제로 전환한다는 방식으로 복구사업을 펼쳤다.
즉, 소련으로부터 10억 루블, 중국으로부터 8억 원(元)을 지원받았고(예산의 23.4%), 이 경제원조를 포함한 총투자 806억 원의 73%를 생산 부문, 27%는 비생산 부문에 투자하는 등 중공업 부문을 우선적으로 삼는 기초 위에서 경제계획을 편성하였다. 그에 따라 1957년 말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공산품 생산량이 1949년 수준으로 만회되었고, 공업 총생산액도 1953년 대비 2.8배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석탄·시멘트·곡물 등은 전반적으로 계획에 미달되었다.
이 시기에는 또 협동농장(농업집단화)을 조직하기 시작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했던 토지를 다시 환수하였다. 즉 농업의 협동조합화를 비롯, 개인 상공업을 포함한 모든 경제 부문의 협동화가 촉진되어, 1958년 말에는 모든 농민이 협동조합에 편입되고 개인의 자유의사에 의한 생산활동이 일체 부정되는 등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형성되었다.
기업의 생산 및 유통액에서도 1953년 말 공업 96.1%, 농업 32%, 상업 67%이었으나 4년 뒤인 1957년에는 공업 98.7%, 농업 95.6%, 상업 87.9%, 그리고 1958년에는 각각 100%로 전면적인 협동화 내지 국영화가 완성되었다. 이때부터 북한경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경제관리체제에 돌입하여 자유시장이나 경쟁가격을 부인하고 생산자원의 할당제 또는 소비재의 배급제도 밑에서 모든 경제활동이 중앙으로부터 명령형태로 추진되는 지령경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경제계획의 실시〕
북한이 중앙집권적인 경제계획기구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경제계획을 실천한 것은 1957년부터였다. 그 뒤 1993년까지 3차 7개년계획 등 5차에 걸쳐 실시하였고, 1994년부터 2∼3년간을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위한 조정기간으로 설정하여 추진하였으나 1998년 현재 이에 대한 아무런 평가가 없음은 물론, 차기 경제기획도 발표하지 않고 있다.
그 중에서 1960년대의 7개년계획은 3년 연장되었으며, 1970년대의 6개년계획과 1980년대의 제2차 7개년계획은 각기 2년의 완충기간을 설정하기도 하였다. 북한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실시된 5개년계획을 통하여는 전후(戰後) 복구사업을 완결짓고 공업화를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즉,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병행하여 발전시킨다는 경제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했는데, 이 같은 정책기조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 시기에 북한은 외국원조의 감축, 농업협동화 시행으로 인한 농민의 생산의욕 감퇴, 그리고 농업인구의 공업 부문에의 대량 이동에 따라 ‘천리마운동’·‘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 등 사회주의 노력경쟁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노동력 강화를 통한 생산증대를 도모하였다. 이 같은 사회주의 노력경쟁운동은 그 뒤에도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속도전’·‘80년대속도창조운동’으로 이어져 왔다.
북한은 또 1959년 2월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사회주의체제의 공고화를 시도하였다. 이 5개년계획은 1년 앞당겨 조기달성했다는 발표와는 달리 1960년 1년간을 완충기로 설정하여 미비한 사항을 시정, 조정할 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중공업에의 편중으로 누적된 산업부문간 불균형의 폐단을 해소시킴으로써 산업화의 실제적인 출발점으로 삼기 위하여 제1차 7개년계획(1961∼1967)을 수립, 실천하였다. 그 동안 소홀했던 경공업시설을 정비하면서 경공업원료를 확보하기 위한 농업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기계제작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시설 확장과 기술도입 및 기술혁신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61년 7월 쿠바사태를 계기로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함에 따라 군사 부문에 대한 투자가 증대되었는가 하면, 중·소의 이념분쟁 격화에 따른 대북한 경제지원의 격감까지 겹쳐 당초 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이로써 북한은 처음으로 전면적인 경제침체와 후퇴현상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결과 경제계획기간을 3년 연장하여 1970년에 종결지었다.
연장기간 동안에는 중공업과 군수공업 발전에 주력하면서 지방공업을 중심으로 경공업 시설을 확장, 자립적 공업경제체제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힘썼다.
1970년 시행된 6개년계획(1971∼1976)에서는 1960년대에 기계공업을 중심으로 이룩한 기술혁명을 전체 산업 부문에 적용하고, 원자재의 자급과 전력 및 광업의 개발에 역점을 두어 산업의 체질개선을 꾀하였다. 특히 모든 산업 부문에 걸쳐 원료의 국산화가 60∼70% 수준이 되도록 높은 자급도를 강조하였다. 또 소련·동구권에 치우쳤던 종래의 대외경제협력을 다변화하여 197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로부터 차관을 대거 도입, 선진기술과 장비 도입을 서둘렀다.
그러나 노동력의 부족과 만성적인 수송난, 석유·석탄 부족으로 인한 화학공업의 부진, 그리고 외채의 과도한 누적까지 겹친 북한은 1975년에 이 계획의 조기종료를 발표하고, 부진한 부문에 대해 2년간의 완충기를 설정함으로써 6개년계획은 사실상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북한 당국이 발표한 실적에 따르면 중공업 부문은 8∼14%까지 침체하고 있으며, 기본건설사업에서는 대부분 1960년대의 7개년계획에서 이월된 대단위건설을 매듭짓는 데 머물렀던 것이다.
이어 북한은 1978년부터 ‘주체화·현대화·과학화’에 기초를 둔 제2차 7개년계획(1978∼1984)을 실시하였다. 이 계획에서는 1977년에 비하여 국민소득 1.9배, 공업총생산 2.2배, 알곡 1000만t 생산 등을 주요 목표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목표연도인 1984년이 지나도록 동 계획의 추진결과에 대해 일체의 발표가 없다가 1985년 2월 16일 국가계획위원회 중앙통계국이 1984년 말을 기해 동 계획이 완료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이 발표에 의하면, 동 계획기간의 주요 성장지수는 기준연도에 비해 공업생산액 2.2배, 전력 178%, 석탄 150%, 강철 185%, 공작기계 167%, 트랙터 150%, 자동차 120%, 채탄기 4.2배, 화학비료 156%, 화학섬유 180%, 시멘트 180%, 천 145% 등으로 생산이 증가되었다.
한편,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건설 10대 전망목표’, ‘4대 자연개조사업’ 등 별도의 목표를 정하고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제2차 7개년계획 역시 당초 목표달성에는 실패하였으며 동 계획이 종료된 이후 제3차 7개년계획에 착수하기까지 2년간의 조정기간을 거쳐야 했다. 이 시기에 주목할 점은 제2차 7개년계획 후반기부터 북한에서도 주민들의 소비생활에 대한 욕구충족 문제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주요한 과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7년부터 시행된 제3차 7개년계획(1987∼1993)은 제2차 7개년계획과 마찬가지로 인민경제의 주체화·현대화·과학화를 기본과업으로 제시하였으며, 국민소득 1.7배(연평균 7.9%), 공업생산 1.9배, 농업생산 1.4배, 10대 전망목표 실현 등을 계획목표로 설정하였다. 동계획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기술혁신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제기하면서 무역과 대외경제협력의 확대 발전을 크게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기술혁신을 경제발전의 관건으로 보고 기술혁신을 위해 무역과 대외경제협력에 주력해야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북한은 제3차 7개년계획 기간 중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연평균 7.9%로 설정하였으나 실적은 마이너스 1.7%로 평가되고 있다. 북한 당국도 1993년 12월 8일 당 중앙위원회 제6기 21차 전원회의를 통해 제3차 7개년계획이 목표에 미달하였음을 시인하였다.
제3차 7개년계획이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경제권의 붕괴로 이들 국가와 맺었던 장단기 무역협정의 이행이 중단되고, 이들 국가와의 경제협력과 무역거래가 부진함을 들었다. 따라서 앞으로 2, 3년간을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위한 조정기간으로 설정하고 ‘농업 제일주의, 경공업 제일주의, 무역 제일주의’로 나아갈 전략적 방침을 추진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특히 수출생산기지를 정비하고 수출품 생산을 확대 강화하며 해외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여 대외무역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경제는 매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즉 1990년 -3.7%, 1991년 -5.2%, 1992년 -7.6%, 1993년 -4.3%, 1994년 -1.7%, 1995년 -4.5%, 1996년 -3.7%, 1997년 -6.3%, 의 1998년 -1.1%, 계속 마이너스 성장으로 인해 북한 경제력은 크게 잠식되었으며, 1999년대에 들어와 6.2%의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부(負)의 성장으로 인해 북한에는 이른바 3난(難)이라는 에너지난, 식량난, 외화난이 가중되고 있고 공장가동율도 30%이하로 떨어졌다.
북한 경제의 개발전략은 한마디로 자기완결적 자립경제(autarky)를 지향하고 있으나 1984년 대외개방에 필요한 〈조선합작경영법〉을 제정, 대외개방을 조심스럽게 추진하면서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의 설치 등 개방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대외개방의 조건이 미비하고 내수시장과의 연계성도 부족하며 경제개혁의 동시적 추진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대외개방정책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현황 및 경제관리〕
1947년 제1차 1개년경제계획이 실시된 이래 북한경제는 규모의 확대와 더불어 파생된 많은 구조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60년 120달러에서 1965년에는 162달러로 남한의 105달러를 앞섰다.
그러나 1990년에는 1,064달러로 남한의 5,883달러의 5분의 1 수준으로 크게 떨어졌다. 1990년 이래 계속해서 마이너스 성장에 시달리며 1995년대는 957달러로, 그리고 1996년에는 910달러로 다소 떨어지고 있으나 1997년에 811달러, 1998년에는 573달러까지 떨어졌으나 1999년에는 다소 증가 714달러로 1970년대 수준으로 후퇴하고 있다.
1999년 현재 북한의 주요 경제지표를 보면 국민총생산은 158억 달러, 1인당 국민총생산은 714달러이고, 무역총액은 14.8억 달러로 1990년 47.2억 달러를 정점으로 계속 떨어지고 있으며 1995년 20.5억 달러보다 더 떨어지고 있다. 대한민국과의 경제총량 규모를 대비해서 보면, GNP 면에서 25.5 대 1이라는 남고북저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국민총생산 규모에 비하여 과중하게 책정된 군사비가 경제개발 재원을 잠식하여 이 때문에 계획경제의 효율을 증대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 폐쇄경제체제로 말미암아 선진공업국과의 자본 및 기술협력을 어렵게 하여 개발재원의 조달과 기술혁신의 차질을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부족한 자원과 협소한 시장을 무시한 채 중공업 우선정책을 계속 추진해 옴에 따라 산업간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김정일 총비서는 2000년 중국 방문에 이어 2001년 고위층을 인솔하여 다시 상하이 푸딩지구를 사찰, 중국의 개방정책을 거울 삼아 조심스러운 개방을 시도하고 있다. 더구나 2001년대에 들어와 ‘신사고(新思考)’가 강조되고 있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식’이 신사고라고 하고 있어 중국식의 대담한 개방이 아닌 제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북한의 경제관리는 정경불가분(政經不可分)의 원칙하에 당의 전반적인 지도와 통제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경제관리조직은 상당히 세분화되어 있고 경제부서의 기능과 임무는 폭넓게 규정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00년 현재 경제·산업 분야의 부서가 23개나 되며, 각 도(직할시)에는 지방인민위원회가 지방경제실무를 총괄하고 있다.
경영관리체계는 농업관리체계와 공업관리체계로 대별된다. 농업관리체계는 ‘청산리방법’을 기본으로 하고, 군 협동농장위원회를 농촌경제의 말단 단위로 삼아 중앙에서 군까지 획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청산리방법’은 모든 영농활동에서 정치사업을 앞세우고 농민을 혁명과업 수행의 차원으로 조직, 동원하는 것을 말한다.
공업관리체계는 ‘대안의 사업체계’를 기본으로 하되 독립채산제 또는 반(半)독립채산제 실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대안의 사업체계’란 공장·기업을 당위원회를 중심으로 관리, 운영하여 당의 역할을 강화하고 노동자에 대한 정치사업을 우선하는 관리체계를 가리킨다. 현재 북한의 통용화폐로는 1전권·5전권·10전권·50전권·1원권 주화가 있으며, 지폐로는 1원권·5원권·10원권·50원권·100원권이 있다.
2. 산업부문별 변천과정 〔산업구조의 변화〕
8·15광복 당시 우리 나라는 남북한이 다같이 농업국이었다. 상대적으로 북한이 더 많은 공장시설과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당시 북한사회 역시 기본적으로 농업사회였다. 그러나 1947년 경제계획의 실시 이후 전체 산업에서 농업의 비중이 저하됨에 따라 공업생산 중심의 산업구조 개편이 이루어졌다.
국민총생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946년 59.1%에서 1960년 28.9%, 1970년 21.5%로 점차 감소한 반면에, 공업은 1946년 23.1%에서 41.3%, 57.3%로 점차 증가하였다. 취업인구구성비를 보더라도 1946년 취업인구의 12.5%였던 노동자비율이 1972년 45.9%로 늘어났다. 그러나 공업생산 가운데에서도 중공업 부문의 확대, 기술장비 강화 등 주로 중공업 건설에 치중하고 군수관련 공업에 투자가 집중되어 경공업 분야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왔다.
북한의 연평균투자액 가운데 광공업 부문이 차지하는 투자비중은 1954∼1956년에는 49.6%, 1957∼1960년에는 51.3%, 1961∼1970년에는 60%에 달하였고, 이 같은 광공업투자액의 구성에서는 중공업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총공업투자액 중 중공업과 경공업의 상대적 비율을 보면 1960년대 이전에는 중공업이 81∼85%였고, 1960년대에는 64∼74%로 나타났다가 1970년대 이후부터 88.8%가 중공업 부문 확대에 투자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현재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