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문화를 걷다] 시칠리아, 유럽문명의 모자이크
슬픈 ‘칸타타’ 혹은 문명의 용광로
시칠리아. 유럽,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문명들이 교차하던 곳. 고대에는 ‘식씰리아(Sixilia)’로도 불렸던 지주애의 고도(孤島). 바람에 흘러 지중해를 떠다니다 이탈리아 장화의 코에 걸려 그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서유럽, 아랍—무슬림, 비잔틴 그리고 이들에 의해 매개된 동방의 문화도 교차했다. 특히 12-16세기에는 한편에서는 종교와 이념에 의한 전쟁이, 다른 한편에서는 해상교역과 인적교류가 지중해를 거대한 문화접변의 소용돌이로 휘감았다. 오늘날에는 9개 주(州)에 390개의 자치도시들이 삶을 꾸려가는 지중해의 가장 큰 섬이지만, 고독과 침묵의 공명은 아직가지도 과거 슬픈 역사의 숨결을 토해내고 있다.
불통(不通)의 세월에 굳어버린 문화퇴적층
흔히 유럽여행의 마지막 여정은 이탈리아라고 한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을 나중에 봐야 한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중에서도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여정에 있어 최후의 방문지 혹은 상상 속 여행에 머물기 일쑤이다. 시간과 비용의 문제겠지만, 무엇보다 낯선 이미지의 선입관도 적지 않게 작용한다. 하지만 여기 시칠리아는 유럽문명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기회의 시공간으로 그 파노라마의 시작과 끝은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현재에 이른다.
문명의 다양성은 곧 문명 간 교류의 역사를 의미한다. 유럽문명에 대한 시칠리아 역사의 프랙탈 구조는 서로의 공존을 위한 상통(相通)이 아니라, 지중해를 둘러싼 외부세력들의 일방적인 지배(그리스-로마, 고트족과 비잔틴, 이슬람과 노르만, 프랑스 앙주 가문과 스페인의 아라곤 왕조, 오스트리아의 부르봉 왕조와 통일 이탈리아 왕국), 즉 불통의 세월에 굳어버린 문화퇴적층에 가깝다.
오늘날 자치주로서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음에도 여전히 종속의 그물은 람페두사(<가토파르도>)의 말처럼 “우리와 같은 종교를 갖지 않고, 우리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통치자의 오랜 지배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소 (……) 우리는 2천 500년 전부터 식민지외다”를 반복하고 있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고독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의 삶이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닮아가는 아름답고 슬픈 ‘칸타타’이며 동시에 복수 문명의 흔적들을 품어 녹이는 용광로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에드워드 테일러는 저서 <1871년의 원시문화>에서 “시칠리아가 없는 이탈리아는 그 어떤 이미지도 남지 않은 영혼일 뿐이다. 시칠리아는 모든 것의 열쇠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시칠리아는 지중해 문명의 아고라로 이어지는 통로이다.
로마의 테르미니 기차역에서 시작된 시칠리아 여정은 가을의 초엽, 어둠이 찬기를 끌어들이는 늦은 오후에 시작된다. 멀리 암스테르담에서 달려온 기차가 10번 플랫폼에 들어선다. 잠시 후 로마를 벗어난 기차는 다시, 나폴리를 지나 종착역인 팔레르모를 향해 내달린다. 벌써 날은 저물어 차창에는 나의 모습이 드리운다. 침대에 누워 뒤처이기를 몇 번…이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쇠 마찰 소리가 자명종을 대신한다. 본능처럼 창밖을 쳐다보지만 아직 어둠이 가시지는 않은 것 같다. 시끄러운 소리가 또 얼마간 이어진다. 하지만 기차가 달릴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 이유를 얼마 후 또 한 번의 새벽 여명과 함께 알게 됐다. 창밖으로 잔잔한 회색빛 바다가 보이더니 기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차가 새벽 무렵 배로 옮겨진 채 시칠리아에 상륙한 것이다.
여권을 돌려받고 내릴 준비를 마치자, 기차는 팔레르모 중앙기차역의 한 선로에 멈춰 선다. 아침도 먹고 세수라도 할 요량으로 기차역내에 들어선다. 이른 시간이지만 달콤한 카푸치노의 향, 이국적인 나무들의 신기한 모습, 신선한 아침 공기, 이른 아침부터 시끄럽게 느껴지는 사람 사는 소리들, 그리고 무엇보다 강가의 작은 조약돌처럼 다양한 모양과 화려한 색감의 과자들이 나의 미각을 긴장시킨다. 유혹에 나를 내맞긴 채 씻는 것도 포기하고 바로 달려간다. 우유를 넉넉히 넣은 카푸치노에 과자 하나를 골라 한 입 베어무니 주변 사람들의 사투리 사이로, 그것도 입안으로부터 “앗 쌀라무 알라이쿰”이 들려온다. 이 섬이 살아온 역사의 한 조각을 맛보았으니 “안녕하세요”라고 말했으리라.
한 번도 이탈리아였던 적이 없는 이방(異邦)
오늘날 시칠리아는 베니스와 함께 이탈리아 영토이지만, 역사에서만큼은 단 한 번도 이탈리아가 아니었다. 단지 한 집안일 뿐, 사실상 낯선 이방인이라 해도 무방할 듯싶다. 베니스가 소금과 생선 그리고 고리대금업과 해상무역으로 나 홀로의 고도를 건설했다면, 시칠리아는 척박한 자연환경, 안(전통적인 지주계층)과 밖(외부의 지배 세력)으로부터 이루어진 수탈과 착취로 불통의 역사를 연출했다.
굴욕의 역사는 이 섬의 건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심지어 전문적인 식견이 없어도 조금의 눈치만 있다면 풍부한 색과 형태, 명암을 달리하는 이질적인 선들이 연출하는 다양한 시대와 양식들을 직감할 수 있다. 그리스 신전들의 도시 아크라가스(아그리젠토)에는 디오스쿠리 신전과 콘코르디아 신전이 현존하며, 주피터 신전은 투박하지만 견고한 로마제국의 위용을 드러낸다. 또한 몬레알레 성당과 제수 교회는 각각 아랍과 노르만의 건축적 공존과 비잔틴 양식을 뽐낸다. 뿐만이 아니다. 근대에 접어들면, 특히 조각의 영역에서 바로크와 로코코 등 화려함과 세심함의 예술성이 작품들의 금빛 음영에 그대로 묻어난다. 시칠리아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시대의 작품성이 시대를 초월한 채, 한 건축물에 공존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칠리아의 역사는 지우고 쓰는 것을 되풀이 하는 반복의 역사가 아니라 사용된 공간을 또다시 사용하는 중첩의 역사라고 한다.
고독과 정체된 느낌……바다 끝자락에 주저앉아 넋을 놓아버린 듯한 적막감…..간간이 들려오는 올리브 나뭇가지들의 바람소리들. 돌아오지 않을 남편을 기다리는 과부의 검은 옷에 배어나는 아픔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이 슬픔. 지중해 먼바다 코발트-프러시안 블루에 닫혀버린 비극-희극의 그리스적인 역심리로 이해하면 안 될까.
또 한 번의 비극, 람페두사를 물들이다.
2013년 10월 3일. 지중해의 몰타 섬과 튀니지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행정적으로는 시칠리아에 속한 람페두사는 또 한 번의 비극으로 우울한 아침을 맞이햇다. 이번에는 111명의 주검이 확인됐다. 리비아를 떠난 몇 평 남짓한 작은 배에는 본국의 절망적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탈출을 감행한 440명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비극은 처음이 아니었듯이, 관계자에 따르면 확고한 대책이 취해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람페두사의 비극은 무엇보다 유럽연합 차원의 정치적인 노력이 경주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사태의 중심에 죽음을 무릅쓰고 북아프리카로부터 불법입국을 감행하는 가난한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반복 앞에서 이탈리아는 그 어떤 법적조치도 취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 한편에서는 불법 입국자들에 대한 법적인 대책이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바다로부터의 불법입국에 온정만을 베풀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탈리아의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불법이민의 대부분이 노동을 위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들을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볼멘소리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이탈리아는 지속적으로 변화를 거듭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적절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 불법이민의 범죄를 재정의하고 극복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피해 도망하거나 정의를 위해 노력한 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명분도 지켜져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이민이 세계ㅗ하의 자연스런 결과로 발생하듯이, 국가의 법도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적극 수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