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견의 생각
이방주
초롱길을 혼자 걷는데 목줄도 없는 개가 나를 보며 ‘앙앙’ 짖어댄다. 달려들 기세이다. 개는 무엇으로 짖을까. 윤동주 시인은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라고 했다. 시인이 자신을 어둠으로 규정한 까닭은 지식인의 부끄러움 때문이다. 나도 어둠이라 부끄러워하면서 ‘가자, 가자’ 해야 하나. 어떤 이는 개가 짖는 것은 반가움의 표현이라 한다. 그럼 밝음이다. 개도 두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는 말이다. 누구나 어둠과 밝음이 있다. 이빨을 드러내고 앙앙거리는 초롱길의 개는 나에게서 어둠만을 본 것이다. 어둠 뒤의 밝음은 보지 못한 것이다.
청주대학교 박물관 앞에 가면 오래된 개 두 마리를 만난다. 고려견이다. 남석교 양쪽 머리 법수(法首) 상단에 조각되어 서 있었는데 어찌어찌해서 여기까지 왔다. 살아있는 고려 토종개처럼 꼬리로 몸을 살짝 감싸고 목에 달려 있는 방울을 앞다리 사이에 안고 있다.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고개를 약간 숙였다. 흡사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한 마리는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고 다른 한 마리는 지그시 눈을 감고 흘겨본다. 어둠을 쫓아 짖기도 하고 밝음이 반가워 꼬리를 치기도 한다고 생각하자.
남석교는 신라 초기에 세웠다고 한다. 법수 위에 고려견상은 고려시대에 태어났다고 한다. 궁궐 대문 난간에는 해태를 앉혀서 관원들의 정의와 공정을 살피는 의미를 지닌다는데 남석교 법수에는 왜 개를 앉혔을까. 남석교는 관원도 지나고 여항의 숫백성도 건너던 다리였다. 천년 세월 동안 고려견 네 마리는 법수 위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길이 81m, 너비 4m나 되는 남석교를 오고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밝음이라 반가운 이는 누구고, 어둠이라 쫓아내고 싶은 이는 누구였을까.
지금 고려견상은 뿔뿔이 흩어지는 신세가 되었다. 고려견상은 여항의 숫백성도, 청주라는 도읍도, 나라도 지켜내지 못하였다. 나라를 잃고 제 자리도 잃고 떠돌다 와우산 기슭 청주대학교까지 쫓겨 왔다. 여기 앉아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다. 젊은이들에게서 밝은 미래를 볼까, 아니면 초롱길에서 만난 개처럼 어둠밖에 볼 줄 모를까.
생각해보니 고려견상은 둘이지만 사실은 한몸이다. 세상은 하나이면서 둘일 수도 있고 둘이면서 한몸일 수도 있다. 흥부와 놀부는 딴 몸이지만 동기(同氣)를 타고 태어났기에 한 몸이다. 인간의 두 마음을 표상한다. 우리네 가슴에는 흥부도 살지만 놀부도 존재한다. 옛 사람들은 알 듯 말 듯 인간의 두 마음을 이토록 명징하게 표상했다. 그러니 내 마음이 둘이므로 남의 마음도 둘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겠다.
산책길을 따라 청주대학교까지 걷는다. 고려견을 만나는 순간, 부릅뜬 그의 눈에 가슴이 움찔한다. 내 가슴에 숨어 있는 놀부를 다 들켜버렸다. 나는 고려견상 앞에 고해성사를 하듯 나의 어둠을 고백한다. 탐욕, 치졸, 비겁했던 전과(前過)를 다 고백한다. 나의 불의, 불공정, 얄팍한 권력처럼 더러움을 고백한다. 눈을 바로 뜰 수가 없다. 때로 사시(斜視)가 되어 좌고우면하는 바로 어제를 고백한다.
고려견이 노려본다. 나를 보고 짖어댄다. 세상은 어둠보다 오히려 밝음이 앞에 있다. 영리한 고려견은 어둠 앞에 밝음이 있음을 모르는 나의 어둠을 짖는 것이다. 우리는 왜 어둠보다 앞에 있는 밝음은 보지 못하는가. 초롱길에서 만난 개처럼 자신에게는 밝음만 보려하고 남에게는 어둠만을 찾으려고 눈을 부릅뜬다. 미움, 질시, 음해로 세상은 점점 더 어둑어둑해진다.
양병산으로 해가 떨어진다. 나무관세음보살….
첫댓글 뿔뿔이 흩어진 고려견은 법수 위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어둠을 쫒는 탐욕과 밝음을 나타내는
사랑과 공정인 두 마음이 존재하기에
세상은 어둑어둑하지만
햇살로 번져 우리를 위로하고 힘있게
나아가는
두 모습으로
반기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어둠이 밝음을
이길 수 없기에
우리도 긍정의
힘을 가지고 늘
반가움으로 짖는
고려견을 배웠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멋진 글 고맙습니다.
원고지 9매로 제한된 글이라 자세한 묘사가 힘들었습니다.
고려견처럼 소중한 문화재를 짧은 글로 압축하여 쓰려니 문장력에 한계를 느낍니다.
내 안의 어둠을 쫒아내야 타인을 어둠으로 몰아가지 않고 나를 밝음으로 가두어야 타인을 밝음의 시선으로 마주하리라 '형태가 없는 것은 틈이 없는 곳으로도 들어간다'라는 노자의 철학, 내 자신의 실루엣에 갇혀 내 자신에게로도 들어갈 수 없는 가엾은 집착을 뚫고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기를~~~언젠가는 나도 자유로워지기를~~과거가 폐허가 되지 앓고 현재를 휘감는 건물로 복원 되어 철학적 아우라를 세우는 글 잘 읽었습니다
고려견을 보는 순간
우리네 마음에 숨어 있는 두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ㄱ러다 보니 흥부나 놀부도 한 사람의 두 마음의 표현이고
콩쥐랑 팥쥐도 한 사람의 두 마음이고
변사또는 누구에게나 숨어 있는 그런 마음의 표현이라 생각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어둠과 밝음, 인간의 두 마음, 나의 성찰 ~
철학적 사유가 깊은 글 저를 돌아보며 잘 읽었습니다.
결국 하나의 물체에서 어둠과 밝음이 나오니까요.
고려견은 시민들의 그런 마음을 일깨워주기 위해
남석교 법수 위에 앉아 추위와 더위를 견디었을 것이라 생각했죠.
너무 끌이 짧아서 표현력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남석교를 검색해 보았어요. 물에 잠긴 지금은 볼 수가 없네요.
모두 네 개였는데, 하나는 행방불명, 하나는 충북대학교 박물관 야외에 있다고 하네요. 선생님 덕분에 글 뿐이 아닌 우리 것도 찾아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수소문해서 찾으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하나이면서 둘일 수 있다.
어둠 앞에 밝음이 있듯이, 두 개의 하나...
그래서일까요?
때때로 하나의 상황, 대상에서도 양가적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요.
잠시 짬내어
작품 속에서 고려견을 만납니다.
고맙습니다~^^
결국 둘은 하나가 아니고 하나는 둘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석교 양단 교각 법수에 앉혀 놓은 고려견 네마리는 각각이지만
결국 하나를 둘, 둘로 표현할 줄 알았던 고려인들의 지혜였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물상(고려견)에서 깊은 사유를 끌어내시어 감동을 주시네요.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는 인간의 심성을 고려견은 다 알고 있겠지요.
선생님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잠시 자신을 돌아보게 될 것 같아요.
잠 들기 전 하루를 돌아봅니다.
언젠가 산책하느라 청주대 예술대를 거쳐 박물관 앞까지 걸었는데
거기서 고려견을 보고 놀랐습니다.
다시 생각나서 다시 가 보았는데 갈 때마다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대상을 보는 것은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보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