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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에서 폭약담당반으로
증 언 자 : 양홍범(남)
생년월일 : 1960. 8. 10 (당시 나이 20세)
직 업 : 권투선수 (현재 농업)
조사일시 : 1989. 5
개 요
5월 19일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장갑차에 탄 공수가 쏜 총에 맞고 시민들이 쓰러지고 죽는 것을 보면서 이에 분노하여 시위에 가담.
5월 22일 도청에 들어가 폭약을 지키는 활동을 하게 된다.
권투선수 생활
내가 1980년 5월, 데모에 가담하게 된 것은 남들이 하라고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군중심리에 호응하여 가담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아마추어 스포츠정신이 뿌리깊이 박혀 있어서 무슨 일이든지 스스로 판단하여 옳지 않으면 절대로 하지 않고,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제아무리 말려도 하고야 마는 성미였다.
나는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운동신경이 남다르게 뛰어나 여러 가지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홍수환 권투를 보게 되면서 권투를 하기로 결정하고 광주로 올라왔다. 평소 나의 운동감각으로는 권투가 가장 제격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1980년 당시 광주고등학교 건너편 전일복싱체육관에서 아마추어 권투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집안 환경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화장품회사 외무사원 등 이것저것 불안정한 잡일을 하면서 권투를 배우고 있었다.
오로지 챔피언 선수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체육관에서 기거하며 어렵고 힘든 것도 견디었다.
장갑차가 할아버지를 치고
5월 19일 오전 월산동 쪽에서 자전거를 타고 제일고등학교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전경들이 진압할 때 쓰는 곤봉이 자전거 바퀴 밑으로 굴러왔다.
순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공수 2, 3명이 나를 때리기 위해 던진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운동선수라는 자긍심 때문에 그들이 두렵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무서울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공수들을 향해 가볍게 말했다.
"건방진 자식들, 왜 나한테 던져. 조심해!"
그러자 공수들은 나를 쫓아왔다. 나는 마음속으로 '흥! 녀석들, 내가 잡히나봐라' 하고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다.
계림동 체육관으로 무사히 돌아온 뒤 혼자서 운동을 하기도 하고 잠깐씩 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시내가 어수선해 점심시간 후 체육관 문을 닫았다.
얼마 후 체육관 앞 도로변이 시끄러워 밖을 내다보았다. 계림동 파출소 앞에는 1백여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고 시민들 사이로는 장갑차 한 대가 보였다. 궁금하여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장갑차가 광주고등학교 쪽으로 서서히 오더니 멈추었다.
이때 시민들은 장갑차 앞의 투시경을 깨기 위해 돌을 던지기도 하고 페인트 붓과 각목 등을 던져댔지만 그것은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민들은 계속 몰려들어 순식간에 계림동 파출소와 광주고등학교 앞을 가득 메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민들의 공격을 받던 장갑차 뚜껑이 열리며 M16총을 든 공수부대원 한 명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총구를 하늘에 대고 공포탄을 몇 발 쏘았다. 시민들은 순식간에 흩어져 골목으로 도망갔다. 공수는 계림동파출소 쪽으로 계속 총을 쏘아댔다. 계림동파출소 건너편에서 도망가던 3명의 시민들이 쓰러졌다.
한 명은 그대로 푹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는데 바로 죽은 것 같았다. 옆에 쓰러졌던 2명은 순간적으로 일어나 몇 발자국 걷더니 거듭 쓰러졌다. 그 주위에 있던 2, 3명의 사람들이 부축하여 데리고 갔다. 그사이 다시 속력을 내 달리던 장갑차가 갑자기 우측으로 90도 꺾어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지나가던 할아버지 한 분을 치어버렸다. 아마 그 도로변에 있던 가게도 조금은 파손되었을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나는 너무나 무서워 재빨리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한참 후 밖이 조용해진 후에도 나는 계속 체육관에 남아 있었다.
MBC 방송국이 불에 타고
5월 20일 저녁 무렵 체육관에서 제봉로 쪽으로 걸어나왔다. MBC 건물은 이미 불이 붙어 화염에 싸여있고 시민들은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둠 때문인지 사람들이 한번씩 소리를 지르면 굉장히 크게 울렸다.
처음에는 MBC 방송국이 왜 불에 타는지 몰랐다. 옆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방송국에서 사실대로 방송을 하지 않으니까 불에 태웠다는 말을 듣고 알게 되었다.
MBC 방송국이 불에 타는 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KBS 방송국도 불태워야 한다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람들 틈에 끼어 함께 KBS 방송국을 향해 갔다. 시위대들은 계속 구호를 외쳐댔다.
"전두환이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 해제하라."
"신현확 물러가라."
나는 뒷줄에 서 있었는데 키가 작기 때문에 시위대열 앞의 자세한 상황은 보지 못했다. 다만 누군가가 광주역 부근에 공수부대가 있다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공수부대를 몰아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시위대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을 지나서부터는 공수들 때문에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뒤로 밀렸다. 공수들이 최루탄을 쏘고 달려들면 흩어졌다가 조용하면 다시 모여들었다.
나는 최루가스에 눈이 퉁퉁 부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매워서 눈에 치약을 바르기도 했다. 밀고 당기는 싸움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가 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뒤로 물러났다. 나 역시 무서워 뒤로 물러나서 있다가 골목으로 돌아 즉시 집으로 돌아왔다. 총소리는 광주역 쪽에서 난 것 같았다.
공원에서 총을 받고
다음날 21일 오후 주위 사람들로부터 간밤에 광주세무서가 불에 탔다는 말을 들었다. 영문을 몰라 왜 세무서가 불에 탔는지 물어보았다. 우리가 세금을 내어 이렇게 피해를 당하는데 당연히 불에 태워야지 가만히 있겠느냐고 말해주었다.
나는 대강 이해가 되었다.
오후 5시경 체육관에서 나와 시내 쪽으로 걷고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광주공원에서 총을 나누어준다는 말을 듣고 광주공원으로 걸어갔다. 젊은 사람 한 명이 어떤 사람에게는 총을 나누어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총을 주지 않았다. 그 젊은이는 오발사고를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 밖에 총을 휴대하는 법, 총알은 여러 발 끼우지 말고 되도록이면 탄창을 빼고 갖고 다니라는 약간의 안전수칙을 설명했다.
그 무렵 공원내에서는 오발탄 총소리가 나기도 했다. 나는 총자루를 받아 들고 공원 앞에 있던 군용 트럭을 탔다.
군용 트럭에 탄 사람은 카빈을 제각기 한 정씩 든 젊은이들과 학생 등 20여 명은 될 것 같았다.
트럭은 광주공원 앞에서 출발하여 유동 삼거리를 거쳐 백운동으로 빠졌다. 백운동을 지나 남선연탄 앞에 있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다. 주유소 주인은 돈을 받지 않고 기름을 넣어주며 말했다.
"기름을 서로 많이만 채우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도 생각해서 서로 아껴 넣으시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더 줄 테니 제발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지 마시오."
우리는 기름을 넣은 뒤 다시 시내로 들어왔다. 가는 곳마다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과일, 음료수, 밥 등을 차에 실어주었는데 술은 보이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술이 없었던 것은 참 잘된 일이라 생각되었다.
해가 떨어질 무렵이었다. 우리가 탄 군용 트럭은 기독교병원을 거쳐 산수동 쪽으로 갔다. 산수동에서도 동네 아주머니들이 김밥과 음료수 등을 차에 실어주며 격려해 주었다.
산수동에서 다시 출발하여 아세아자동차공장 부근 천변을 따라가고 있었다. 일부 젊은이들은 더 가면 군인들이 있으므로 가지 말자고 하였다. 차를 막 돌리려는 순간 극락강 부근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밤도 되어 무서움이 일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가면 안 된다고 차를 돌려 시내 쪽으로 들어왔다. 나는 도중에 카빈총을 들고 차에서 내려 체육관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총 분류작업과 시체관리
5월 22일 아침 9시쯤 카빈총을 들고 계림동 체육관에서 나왔다.
"도청을 탈환했다."
"도청에서 총을 수거한다."
등의 이야기가 들렸다. 그 말을 듣고 도청으로 가보니 공수부대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도청 앞에는 총들이 몇 자루 들어와 있었다.
도청 안 넓은 공터 수위실 옆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일을 해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가져온 총을 내려놓고 그들에게 말했다.
"나도 같이 합시다."
하고 그들과 함께 M1은 M1대로, 카빈은 카빈대로, 폭탄은 폭탄대로 분류했다. 대 강 분류하고 보니 총들이 꽤 많이 쌓였다.
위험한 무기류는 이곳에 두지 말고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하는데, 도청 안팍이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무척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은 도청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애를 쓰며 달려들었다. 그 사람들을 보니 당장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 분류하던 것을 그만두고 전남 도청 정문으로 왔다. 정문 앞에는 간밤에 돌아오지 않은 자식과 친구들을 찾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문이 부서지려고 했다. 몇 사람들이 정문에 서서 지키고 있었다.
"형씨들, 뭐 하는 사람들이오?"
"별다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오."
나는 그 말을 듣고 누구든지 임의대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재차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지시하면 뭐든지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무질서하게 하면 안 되니까 일을 좀 체계적으로 합시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도청 안으로 들어오면 뭘 어떻게 한단 말이오? 그러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따르시오."
"일단 문을 닫고 총기를 가져오거나 시체를 싣고 오면 문을 열어주고 그 외에는 절대로 문을 열어주면 안 돼요."
그런 후 그들은 한쪽으로 불러서 총을 한 자루씩 들게 했다. 2명에게는 도청 양쪽 기둥 위로 올라가게 하고 1명은 수위실 위로, 4명에게는 도청 정문 앞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달려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3명의 젊은이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밖으로 나가서 줄을 치시오."
하고 말하고 있는데 갓을 쓴 할아버지가,
"내 자식 살려라."
하면서 구멍 뚫린 문틈으로 지팡이를 쑤셔대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 할아버지를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한동안은 멍하니 서 있다가 도청 정문 가까이에 다가가서 시민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들면 도저히 들어올 수 없습니다. 5분 동안의 시간을 줄 테니 10명씩 들어와 빨리 찾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 점 양해하시고 되도록이면 모두 가족들을 찾기 바랍니다."
우리는 곧 계획대로 몇 차례를 시도했지만 시간은 없고 점점 불어나는 사람들 때문에 더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정문 앞에서 줄을 치고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못 하느냐.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마라. 조금만 기다려라."
하고 지시하고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시체를 둔 곳은 도청과 민원상담실이 연결된 통로 바로 밑이었다.
그곳에는 50여 구의 관들이 한 구씩 질서정연하게 놓여있었고 그 사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찾기 위해 아우성이었다. 시신을 찾은 사람들은 처절하게 울고 있고 시신마저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정신없이 관을 휘젓고 다녔다. 누가 써놓았는지 관마다 매직과 사인펜 등으로 인상착의, 옷, 나이, 성별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곳 역시 흰 가운을 입은 2명의 남자와 2, 3명의 여자들이 이미 시체들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모두 학생들로 보였다. 그들은 시체마다 염을 하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신속하게 처리해 나갔다. 그 끔찍한 현장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난 한동안 감격했다.
시체의 숫자는 정확히 몇 구라고 말하기는 힘들고 또한 그곳에서 확인된 시체들은 수시로 상무관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이 붐비면 가끔씩 내가 직접 상무관으로 옮기기도 했다.
시체관리 하는 사람들을 도와 일하던 중 시신을 찾은 사람들 간에 서로 자기 자식이라고 우기는 난처한 일이 발생했다.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하다가 관 뚜껑을 모두 뜯어내고 난 뒤에 정확하게 확인하도록 했다. 나는 관 뜯는 것을 거들어주면서 여러 가지 사실을 목격하게 되었다. 현역 군인으로 보이는 시신이 3구, 어린 아이의 시신, 할아버지의 시신, 그 시체들은 한결같이 뼈가 한쪽으로 밀려 있고 얼굴에는 황토흙이 묻어 있었다.
날씨는 더워서 냄새가 진동했고 파리떼들이 모여들어 더욱 곤혹스러웠다. 더군다나 나는 비위가 약하여 그 광경을 보고 있기가 역겨웠다.
무선을 살려라
점심때가 지나 나는 시체관리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정문으로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나왔다. 도청 문 앞으로 오자 한 사람이 문에 바싹 붙어서서 꼭 들어가야 한다고 사정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꼭 들어가야 해요. 나와 얘기 좀 합시다."
"뭐 하는 사람인데 그러시오?"
그는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나에게 건네주었다. 문은 열어주지 않고 받아쥐고 보니 컬러사진이 부착된 신분증이었다.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임의적으로 만든 것 같지는 않았다.
"왜 꼭 들어와야 한다고 하시오?"
"통신이 다 죽었으니까 무선을 살려야 하지 않겠소?"
"나도 유선과 무선에 대해 약간은 아는 바가 있소. 당신 뭐 하는 사람이오?"
"나는 도청 무선국에 근무했던 사람이오."
나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신분증을 인정했다. 전화도 끊기고 통신이 두절된 가운데 정부와의 협상도 어려울 것 같아 일단은 무선을 살려야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간첩이었는지 역적모의를 하러 왔는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그와 그 일행 20여 명을 도청 안으로 들여보냈다. 당시 나의 생각으로는 협상이 진행중이라고 하여 통신을 살린다면 더욱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점점 불어나는 인파에 전남도청 정문은 미어질 듯했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 지 엄두가 나지 않아 나는 다시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코를 진동하는 시체 냣는 냄새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관 옆에는 드라이아이스와 얼음까지 쌓아두기도 했으나 관의 뚜껑을 모두 열어두었기 때문에 냄새는 더욱 심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 뚜껑을 닫자고 했다. 우리는 곧 관에 못질을 하고 뚜껑을 닫았다.
해질 무렵이 되었을까. 흰 가운을 입은 아가씨가 저녁을 먹으라고 했다. 그때서야 나는 점심을 먹지 않았음을 의식했다.
수문장이 최고
2층 강당에서 저녁을 먹고 1층 지하실 쪽으로 내려오던중이었다. 밤이 되어선지 갑자기 무서움이 일고 일행도 없이 혼자라는 생각에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지하실 입구 쪽을 지나칠 찰나에 보통 사람들과는 색다르게 옷을 입은 사람 한 명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언뜻 보기에 데모 진압할 때 입는 전경복으로 보였다.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뭐 하는 데요. 옷도 이상하게 입고 총도 이상한 걸 든 것으로 보아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는 갑소."
"알 것 없으니 가라. 몰라도 된다."
"이 양반아, 중요하면 같이 협조하여 해야 할 것 아니오. 같이 고생해야지 혼자하면 되겠소."
자꾸만 호기심이 생겨 가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알려고 캐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알았소. 잠깐 기다려보시오."
하고 지하실 밑으로 내려갔다.
얼마 후 그 사람은 한 명의 젊은 사람과 함께 나왔다. 그 젊은이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각기 모인 사람들이므로 뭐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뭐요?"
"폭약 담당하는 곳이다."
"그럼 내가 있을 곳이요. 누구의 지시라도 받고 일하는 곳이오?"
"그것은 아니다. 모두들 스스로 하고 있다."
"그럼 나도 있을 자리가 있겠구만요."
"좋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문을 좀 지켜주시오."
"뭔지는 몰라도 아무튼 중요하니까 수문장이 최고지. 수문장이 못 지키면 모두 죽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지키겠소."
그리하여 나는 다른 한 명과 교대로 지하실 문을 왔다갔다하면서 유리문을 통해 도청 안과 도청 밖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언뜻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는 말 구절이 떠올랐다. 만약 이곳에 간첩이 한 명이라도 들어와 총을 쏜다면 우리는 손가락 하나 못 찾고 엄청난 피해를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폭약담당
다음날 5월 23일 나를 포함하여 폭약담당 9명의 사람들은 처음으로 회의를 하기 위하여 지하실에 모였다. 지휘자는 없고 2명(문영동, 김영복)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갔다. 회의의 내용은 이러했다.
"이곳에는 자율적으로 모인 사람들끼리 폭약담당을 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안전하게 관리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이것 역시 국가의 재산이므로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그래서 사명감이 없이는 이 일을 할 수 없다. 2시간의 여유를 줄테니 나갈 사람은 나가라."
2시간 정도 지난 뒤 9명에서 2명이 빠져나가고 모두 7명이 남았다. 우리는 먼저 되도록이면 총기류는 밖으로 내놓자고 하였다. M1과 카빈 등은 지하실 건물 바로 앞마당에 쌓아두고 폭약과 실탄, 최루탄 그리고 TNT는 지하실 한쪽에 분류하여 리어커로 2, 3대 분량 정도를 쌓아두었다.
나는 계속 수문장의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또 한 차례 회의를 가졌다. 그 회의 내용 역시 "폭약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 사명감 없이는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7명에서 2명이 빠져나가고 최종적으로 남은 사람은 5명이었다.
우리는 서로 어렵게 만났으니, 또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모르니 이름이나 알고 지내자고 각자 소개를 했다. 나를 포함한 문영동, 김영복, 박선재, 이00(인천에서 온 대학생) 등 5명이었다. 모두들 끝까지 안전하게 폭약을 지켜야 한다고 결의했다.
나는 폭약관리를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는 외부와의 왕래를 막아야한다고 생각하고 지하실로 내려오는 계단을 책상과 의자 등으로 막아버렸다. 결국 우리는 도청 안에 있는 사람들과도 거의 왕래없이 차단되었다. 식사를 하는 경우에도 보초서듯 교대로 식당에서 밥만 먹었고 잠을 자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지하실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자곤 했다.
나를 죽이고 가져가라
5월 23일 이후부터 도청 안에서는 수습위원회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회의의 내용은 거의 알 수 없었고 다만 정부와 협상중이라고 문영동씨를 통해 전해 들었다.
내가 수문장의 임무를 맡고 보초를 서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수십 차례에 걸쳐 폭약을 가지러 왔다. 그때마다 똑같은 말로 그들을 돌려보내곤 했다.
23일쯤 2, 3명의 젊은이들이 폭약을 가지러 지하실로 왔다.
"폭약을 가져가려면 나를 쏘고 가져가라. 내 배를 가르고 가져가라."
하고는 옷을 걷어 배를 내보이기도 했다.
"당신이 나를 쏘면 나는 죽는다. 그러나 내가 왜 이러겠는가. 당신도 나도 아무 것도 아니다. 단지 위험하니까 내가 관리할 뿐이다. 자중해라."
하고 그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폭약을 주어야 할 경우에는 김영복씨와 상의하여 되도록이면 폭약량을 박스에 반 정도만 채워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책임자를 불러 말했다.
"질서를 지켜야 하니까 줄을 서시오. 너나 나나 모두 달라고 하면 줄 수 없소. 실탄은 많이 줄 수 없으니 이것으로 잘해보시오."
그 무렵 2, 3명이 상황실에서 두 차례 정도 상황파악을 하러 지하실로 내려왔다. 나는 지하실 문을 열어주고 들여보내주긴 했지만 그들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번은 문영동 씨가 밖을 나갔다 왔다고 했다. 처음에 나는 그가 무엇 때문에 어디를 다녀왔는지 모르고 있었다. 뒤늦게 알고 보니 문영동 씨는 우리가 보관해 두었던 다이너마이트 뇌관을 6백-7백여 개를 갖고 상무대로 갔다고 했다. 상무대에서 준장까지 만나서 뇌관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 폭약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없어서 폭약 관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수문장의 임무만 다하면 될 줄 알고 '왜 뇌관 분리를 하는 것이고 왜 상무대에 요청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안전하게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뇌관 분리 작업
5월 25일경 문영동씨의 지원요청을 받은 상무대에서는 문관 한 명을 폭약담당반으로 보내왔다. 지하실에는 상당량의 TNT 뇌관이 있었는데 25일 하루 동안 나를 제외한 4명은 문관과 함께 뇌관분리를 했다.
5월 26일 역시 나는 수문장의 임무를 다하고 있었고, 나의 동료들은 문관과 함께 뇌관분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 젊은이 한 사람이 지하실로 왔다. 그 젊은이는 내가 처음 이곳을 들어올려고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언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이 엿보였다. 그래서 나는 안에서 뇌관분리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이 사람은 뭔가 하려고 하는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안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 밖에서 일을 돕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리하여 모두 그렇게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나는 그 젊은이와 함께 보초를 섰다.
그 젊은이가 내게,
"이 총은 무슨 총입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처음 김영복 씨로부터 총 쏘는 법을 배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나는 문 앞의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M16 총을 세워놓은 뒤 탄창 끼우는 법, 안전 자물쇠 다루는 법, 노리쇠 사용법 등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총을 직접 쏴버렸다. 다행히 M16 총알은 천정에 박혀 아무 사고도 없었다. 나는 너무나 친절한 나머지 방아쇠 당기는 법까지 가르쳐 준 격이었다.
5월 26일 뇌관분리 작업이 대강 마무리되고 밤이 되어 정부와의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위험하다는 소식만 전해졌다. 그렇게 되자 우리는 밤 늦게까지 30분마다 회의를 가졌다.
"데모는 맨손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안전하게 할 만큼 했으니까 뇌관만 안전한 곳으로 버리든지 아니면 군대 갖다주든지 하고 나가자. 정부와의 협상이 안 되고 우리도 폭도라는 누명 아래 죽는 일밖에 더 있냐?"
우리의 회의는 27일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좋다. 뇌관은 가지고 나가자. 가장 안전하게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방법은 뇌관을 관에 넣어서 빠져나가는 것이다."
얘기가 다 끝나갈 무렵이었다.
남의 총에 죽느니 차라리...
바로 그때 갑자기 우리의 귓전을 때리며 무수히 많은 총알이 머리를 스치고 벽에 박혔다. 총소리는 세 차례나 계속되었다.
한참 후 "나오면 살려준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위층에서 정적을 깨고 '타다닥' 귓전을 때리며 달려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가 멈추더니 '악' 하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나는 누군지 모르지만 즉사했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 소리를 듣고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지하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모두들 순간적으로 식당 주방을 뛰어넘어 도경 사무실 맨 끝방으로 갔다. 나는 "우리가 싸우려고 한 게 아니니까 총을 버리자"고 캐비닛 속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난 후 모두,
"다음에 만날 수 있겠지. 다음에 보자."
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도 앞으로 나간 4명을 따라 문을 차고 나오는데 총알이 발밑의 흙을 튀면서 쏟아졌다. 겁이 더럭 나서 더 이상 계속 나가지 못하고 나의 뒤를 따라오던 문선재 씨를 밀면서 다시 들어왔다. 계속 뛰었다면 아마도 나는 총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문선재 씨와 나는 식당 바닥에서 서로 마주보고 엎드려 있었다. 밖에서는 계속해서 콩볶는 듯한 총성이 들렸고 문만 건드리면 '빠바방'하고 우리 둘을 향해 쉴 새 없이 총알이 쏟아졌다. 나는 문선재 씨에게 말했다.
"우리는 나쁜 짓 하지 않았으니까 남의 총에 맞아 죽느니 차라리 자살하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문선재씨의 벌벌 떠는 모습이 느껴졌다. 한참 후에야 문선재 씨는,
"조금 있다 죽자."
고 간신이 말했다.
"내가 죽자고 했으니까, 네가 먼저 나를 쏘아라. 총소리만 듣고 나도 방아쇠를 당기겠다."
그러는 사이 밖에서 자꾸만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2명은 빨리 나와라."
하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놈들은 우리를 알고 있는 듯 했다. 그 와중에도 '도대체 그들이 캄캄한 곳에 있는 우리를 어떻게 알겠는가' 싶었다.
계속해서 밖에서는 "안 나오면 죽인다. 빨리 나와라" 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와 긴장이 더해갔다.
"너는 살고 싶으면 소리를 지르고 나가라. 나는 이곳에서 죽을란다."
하고 문선재 씨에게 말하자 그는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겁을 먹었는지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소리를 지를 테니 따라서 해라 하고 소리를 지르자 또다시 한차례 사격이 가해졌다. 나는 더욱 크게 소리를 쳤다.
"총을 쏘지 말든지 나오지 말라고 하든지."
그러자 총을 쏘지 않았다. 밖에서도 달려나오라고 떠들어댔다.
우리 둘은 일어서서 밖으로 나왔다. 군인들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몇 발자국 더 걸어나왔을 때 일부 군인들이 보였다. 도청 뒤쪽 뼈대만 있는 건물에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고 도청 건물 옥상에도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얼마 걷지 않아 우리는 군인들에게 잡혔다. 군인들이 나와 문선재 씨의 한쪽 손을 수갑으로 채우더니 '호'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끌고가던 중에도 현역군인 한 명은 우리의 발밑으로 사격을 가했다. 문선재 씨는 놀라서 넘어졌고 나도 함께 넘어지며 나뒹구는 바람에 팔에 채워진 수갑이 점점 강하게 죄어들었다. 둘의 손목에서는 피가 질질 흘러내렸다.
수갑으로 인한 고통은 군인들에게 곤봉으로 두들겨맞고 군화발에 짓밟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군인들에게 두들겨맞은 것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다. 그 고통과 치욕을 말로는 도저히 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무대로
도청 정문 우측에는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조그마한 건물이 있었는데 현역군인들이 한 줄로 서 있었다. 그 주위에는 이미 잡혀온 사람들이 모두 땅에 엎드려 있었다. 군인들은 우리에게도 고개를 숙이고 가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맞아죽더라도 볼 것은 다 보고 죽자는 생각으로 고개를 숙인 척하며 쳐다보았다. 엎드려 있는 사람들 곁으로 우리도 엎드렸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났고, 나는 총소리에 기가 죽어 '여기에서 모두 죽이는가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군인 한 명이 군화를 신은 채 엎드려 있는 사람 등으로 올라가 밟고 다니면서 매직 같은 것으로 뭐라고 쓰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사람들이 죽지 않았는가보다' 생각하는데 갑자기 "엎드려" 하고 날카로게 소리쳤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고 엎드려 있었다.
군인이 다가오더니 "너희는 아주 엄청난 폭약담당을 했구만"하면서 계속 두들겨팼다. 우리 둘은 폭약담당반이었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맞았다.
그 사이에도 사람들은 계속 잡혀왔다. 1백여 명은 넘을 것 같았다. 한참동안을 부동자세로 엎드려 있는데 일어서라고 지시했다. 서서 보니 현역 군인들은 도청 분수대 앞까지 양쪽으로 인간 담을 쌓았다. 100미터 정도 되는 길이에 2줄로 선 군인들은 2백여 명은 더 될 것 같았다.
그 사이를 우리에게 고개를 숙인 채 통과하라고 했다. 모두들 한 명씩 군인들 사이로 걸어가면서 계속 발에 채이고 두들겨맞았다. 군인들이 한 대씩만 때린다해도 2백대를 맞아야만 통과되었다.
나와 문선재 씨는 함께 수갑을 찼기 때문에 군인들 사이를 같이 걸어야 했다.
비좁은 틈으로 둘이서 끼어 걷자 군인들이 "너희들은 뭐여"하고 두들겨팼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수갑은 손목을 죄어왔고 군인들은 한 명도 그냥 통과시켜 주지 않고 군화발로 차고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짓이겼다.
군인들 사이를 빠져나와 대기된 군용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 탄 뒤에도 여전히 고개를 숙이도록 강요했고 한 좌석에 한 명씩, 그리고 가운데 바닥에 한두 명씩 앉게 했다.
군용 버스에 사람들이 가득 차자 차가 출발했다. 차가 도착하고 보니 상무대 연병장이었다. 그곳에는 벌써 잡혀온 사람들이 2백여 명은 넘게 보였다. 다시 머리를 처박고 무릎꿇고 앉아 있는데 계속해서 군용 버스가 들어왔다. 모두 나처럼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보안대로
현역군인들은 잡혀온 사람들 주위로 줄줄이 서 있었다. 형사로 보이는 사람 한명이 폭약담당 일행 중 한 명을 불렀다. 그 다음에는 "이홍범"하고 불렀다. 나는 손을 들고 "이홍범이 아니고 양홍범입니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군인들이 두들겨팼다.
얼마 후 문선재 씨는 나와 조금 떨어진 앞쪽에 있었다. 나는 '저 사람들은 살려주고 이쪽 사람들은 모두 죽이는가보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 "양홍범"하고 고쳐 불렀다. 대답하자 앞쪽의 의자를 지시하며 앉으라 했다. 나는 그 의자에 가서 앉았다. 의자에 앉게 되자 초가삼간 다 쓰러진 곳에서 살다가 호텔에 누워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이제 살려주는 갑다.' 또 한차례 종이 하나를 들고 형사 한 명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박준위라는 사람이 김상사와 박상사에게 지시했다.
"폭약 담당한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손대지 말고 두들겨패지도 마라."
그러나 박준위가 나가고 난 뒤 나는 군인들에게 엄청나게 두들겨맞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버스에 가 있으라고 하며 담배를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담배를 피면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냄새가 옷에 배이도록 피워댔다.
그러다가도 우리를 지키는 근무자가 바뀔 때면 진탕 두들겨맞고 벌을 받아야 했다. 버스 밑으로, 의자 밑으로 기어다니는 벌을 받았다. 기막히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군인들은 갑자기 우리 일행과 다른 사람들 20여 명을 버스에 태웠다. 차가 어디론가 달렸다. 가보니 보안대라고 했다.
보안대에 도착하자마자 군인들은 4열 종대로 줄을 서라고 지시했다. 나는 좌측 맨 앞줄에 서 있었다. 군인이 내게 단상 같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하여 시키는 대로 했다. 단상에 올라가 보니 30-40 명 되어 보였다.
"내가 먼저 가요. 손이나 한번 흔들어봅시다."
고 말했더니 사람들은 모두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는 순간 갑자기 억압적인 소리로,
"뭐 하냐, 빨리 가. 앞으로 가란 말이야."
하고 말하는 찰나에 총소리가 났다. 나는 정말로 죽는 줄만 알았다.
"죽이려면 여기서 죽이시오. 또 어디로 가요."
하고 말했더니 모두 보안대 안 체육관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보안대 체육관으로 들어가자 CAC 형사들이 씻고 이발을 하라고 했다. 이발이 끝나자 밥을 주려고 했는데 밥이 없다며 라면을 주었다. 다만 그것들이 수사계의 작전이었는지 모르지만 조금은 편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몸집이 굉장히 큰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위협을 주는 것이었다. 책상이 여러 개 보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지시했다. 머리를 처박고 앉아 있으면 큰 몽둥이로 온몸을 휘둘렀다.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으면 무릎이 끊어질 듯 아프고 감각이 죽어버렸다.
일어서면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누군가가 잡아주어도 비틀거렸다. 다리가 어느 정도 풀리고 난 후 우리를 거꾸로 세워놓고 발바닥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견디다 못해 발바닥이 동그랗게 부어 땅바닥을 딛고 설 수가 없었다. 기합을 받는 도중 나도 모르게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또 원산폭격 기합을 받았다. 조아라 씨도 제외되지 않고 우리와 똑같은 기합을 받았다. 나도 원산폭격을 받던 도중 아스타일 바닥에서 미끄러져 머리가 찢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왜 넘어지냐" 하면서 다시 두들겨팼다. 그때 허리를 다쳤다.
머리의 상처도 치료를 받지 못하여 머리에서는 썩은 냄새가 풍겨왔다. 그때에야 형사들은 나를 통합병원으로 보내주었다. 3, 4일 정도의 치료를 받고 다시 보안대로 돌아왔다.
어느 날인가 한참동안 기합을 받고 있는데 형사 한 명이 허겁지겁 뛰어들어왔다. 나는 그 사람에게 "나 좀 살려주시오" 하고 말했다. 그는 나를 꼭 살려줄 것만 같았다. 그는 우리에게 "너희들 왜 여기 있어" 하고 물었다. 나는 전후사정을 얘기하며 이렇게 두들겨 맞았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우리 일행 4명을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안에서는 계속 몽둥이 휘두르는 소리와 두들겨맞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보안대로 잡혀온 이후에 형사들의 집중조사를 받지는 않았다. 형사들은 우리가 잡혀왔을 때 이미 폭약 담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만 도청 안에서 무기를 담당했기 때문에 막강한 힘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보안대에서 32일 동안을 지내는 사이 밤과 낮이 바뀔 때마다, 근무자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일반 사람들과 분류되어 두들겨맞았다.
더군다나 우리는 체육관 바닥에서 모포만 깔고 남녀 구분없이 기합과 곤봉 세례를 받았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수시로 불어났다.
나는 너무 지긋지긋한 생활에 도망갈 생각을 했다. 동료들에게는 말리지도 마라고 했다. 내게 한 사람만 동의를 했어도 나는 도망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박중위에게 "죄가 없으면 우리를 보내주시오"하고 소리치곤 했다.
7월 초순경 폭약 담당한 일행과 함께 나는 보안대에서 풀려났다. 챔피언의 꿈은 산산이 조각났고 허리를 다쳤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무안으로 내려온 나는 몸에 좋다는 약은 다 먹었다. 그러나 몸의 상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매일 나는 방에서 벽을 잡고 울었다. 밖에서는 개구리가 울어댔지만 내가 살아 있는 것인지, 죽어 있는 것인지 딴 세계에 있는 듯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것인지 마음 한구석에는 죄인 같은 생각 밖에 없었다. 도청에서 폭약을 맡고 일하면서 시민군들이 폭약을 주라고 했을 때 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부와 내통했다는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5월 27일 새벽 우리가 잡혔을 때에도 군인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뇌관분리를 하기 위해 상무대에서 온 문관 때문에 우리들이 정부에 알려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폭약담당반이었다는 것으로 5월 27일 새벽 우리를 죽이기 위해 애를 썼다. 그 결과 일행 중 문영동 씨가 총상으로 사망했다.
광주특위 청문회가 열렸지만 우리들이 했던 폭약담당에 대한 일은 전혀 이야기되지 않았다. 우리는 끝까지 폭약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군에게 불신을 받았다. 그 점에 대해서도 누명을 벗어야 한다. 우리는 그 상황에서 그 방법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광주 시민과 우리들의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이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현재 나는 무안에서 농군으로 일하고 있지만 정부에서 하는 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비록 몸은 건강하지 않지만 젊은 시절의 기백은 살아 있어서 항상 무언가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보상의 문제들이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지만 광주문제는 보상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부에서 보상을 해주고 싶다면 그 전에 '민주주의'를 하라고 말하고 싶다.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는 보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조사.정리 안은정) [5.18연구소]
첫댓글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