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직손씨 집성촌 다원 마을
송하 전명수
우리나라에는 각 지방의 고을마다 고관 양반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그곳에는 의례히 고래 등 같은 고택들이 들어서 있기도 하다. 그 고택들은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보존하며 다듬고 가꾸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가깝게는 성주 한개 마을이나 경주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을 꼽을 수 있겠다. 밀양에서 표충사 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일직손씨 집성촌이 이름나 있다고 하기에 들려 보기로 하였다. 경남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다원(茶院)마을이다. 고려시대의 장군인 손간(孫幹)은 경북 안동시 일직면 송리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본관을 일직으로 하였다. 그의 6세손인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이 고려 충렬왕 14년(1287년)에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충정왕 3년(1350년)에 재상직에 올랐으며 우왕 6년까지 92세까지 살면서 여섯 명의 임금을 섬기는 등 최장수의 명신으로 이름을 날려 가문을 크게 일으켜 세웠다. 조선조에 내려 와서는 손홍량의 증손인 손관(孫寬)이 1410년에 이곳 밀양으로 옮겨와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니 600년이 지난 유서 깊은 마을이다. 그의 후손들은 이곳 다원 마을과 밀양시 산내면 송백리, 경북 청도군 청도읍 원정리, 의성군 춘산면 식흥리, 대구시 동구 도동에도 일족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다원마을은 밀양시청에서 표충사 방향으로 가는 길옆 약 13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밀양에서 표충사, 얼음골로 가는 2차로 구 길이 있고 그 옆으로 4차로의 대로가 새로 개설되어 있다. 다원마을은 산외면 소재지 인근에 넉넉하게 터를 잡고 있으며 마을 뒤의 산세도 우람하여 예사롭지 아니하고 도로건너 들판도 넓어 마을 사람들은 대대로 풍족한 생활을 해왔을 것으로 짐작이 되어 진다. 그래서 일찍이 이곳에 터를 잡은 혜안이 돋보인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큼지막한 자연석 받침위에 잘생기고 높은 자연석에 茶院(다원)이라 세로로 새겨 놓았다. 마을 안 공터에 차량을 세워두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이곳 일직손씨들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재실인 동산정(東山亭)을 바라보고 다죽리 손씨고가로 향하였다.
이 마을에는 일직손씨들의 많은 고택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중에 손병사고택(孫兵使古宅)으로 통하는 이 집은 영조 때의 병사 손진민(孫鎭民)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아들 병사 손상용(孫相龍)이 택지를 확장하고 증축하여 지금과 같은 저택이 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배치는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하여 담장과 중문으로 경계를 지어 놓았다. 안채는 북쪽에 정침이 남향으로 앉았고 좌우에 곡간과 행랑방을 둔 별채가 배치되어 있다. 정침의 구조는 7칸 2열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의 대청마루와 큰방이 있으며 부엌과 건너 방이 있다. 축대는 장대석으로 쌓았고 세군데 돌계단을 두었다. 사랑채도 팔작지붕에 4칸 2열의 남향으로 앉아 있고 그 건너편 입구에는 행랑방이 좌우에 붙은 대문채가 있고 마당에는 수석이 조화를 이룬 정원이 꾸며져 있다. 사랑채에는 죽계서당(竹溪書堂)과 모연재(慕蓮齋)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다음은 혜산서원(惠山書院에 들렸다. 이 마을에 세거하는 일직손씨의 5현을 모시는 서원으로 본래는 영조 29년(1753년)에 창건한 격재 손조서(孫肇瑞)의 서산서원이 있던 자리이다. 손조서(1412-1473)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횡포에 분개하여 낙향하여 뛰어난 절조와 충의로 두문불출, 오로지 도학에만 전념한 학자였다. 후일에 사림의 추앙을 받아 이곳에 서원을 세웠으나 고종 5년(1868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된 후 서산고택 또는 철운재로 편액하였다. 1971년에 서원의 영역을 확장 정비하고 일직손씨의 명현 5분을 각처의 서원에서 분산하여 모시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즉 안동 타향서원의 손홍량, 밀양 서산서원의 손조서, 대구 청호서원의 손처눌, 대구 봉산서원의 손린, 영천 입암서원의 손우남 등을 모셔 와서 복설하고 혜산서원으로 중건하였다. 이곳은 약 1,300여 평의 넓은 부지 위에 사우(祠宇), 강당, 동재, 서재, 상례문(尙禮門), 신문(神門), 중문, 전사당, 신도비각, 다원서당, 이이정(怡怡亭), 고사(庫舍), 대문 등 13동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경내에는 두 아름도 넘을 만큼 우람한 소나무가 버티고 서있고 서재 앞마당에는 수백 년이 넘었을 차(茶)나무에 흰 꽃을 피워 천리향처럼 그 향기가 퍼져나가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을 다원마을이라 한 듯하다. 여기저기에는 향나무가 서 있는데 희한하게도 나무가 곧지 아니하고 굽어 자라고 있어 자꾸만 눈길이 가게 된다.
마을 뒤쪽 묶은 밭뙈기를 지나 산 중턱으로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풍수지리학은 잘 모르지만 산이 좋고 마을 앞에는 넓은 들녘이 평탄하며 단장천의 맑은 물이 풍부하게 흐르고 있어 부농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마을 또한 넓은 터로 넉넉하게 자리 잡고 있으니 명문세가의 부유하고 평화로운 삶이 느껴진다. 마을 전체가 고풍스럽고 고즈넉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손 대대로 주눅 들지 아니하고 힘차게 살아온 기상이 엿보인다. (201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