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강릉 안목 해변을 소개한 적이 있다.
멋진 커피숍이 많아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는 거다.
바다와 커피의 조화가 아주 근사하게 느껴졌었는데 1박 2일 신혼(?)여행을 가자는 남편의 말에 문득 안목에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곳엔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예쁘고 깔끔한 호텔이 있다던데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면 좋을 것 같았다.
계획은 거기까지 그냥 발길 닿는대로 가보자고 길을 나섰다.
동해안을 끼고 가는 7번 국도를 통해 가기로 했다. 바닷가 휴게소에서 차도 마시고 또 편광 선글래스를 파는 아저씨의 적극적인 상술에 못이기는 척 선글래스도 하나씩 사끼었다. 수학 여행을 떠나온 아이들처럼 낄낄대며 쓰잘 데 없는 짓거리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점심 식사는 후포에 가서 거창하게 대게로 먹자 해놓고는 어느 낯선 휴게소에서 청국장으로 떼웠다.
길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삼척을 지나면서부터는 도로가 1차선 뿐이라 뒤에서 오는 차량들이 우리 차 뒤로 꼬리를 물고 있는데 남편은 어찌나 규정 속도를 잘 지키는지 국도라고 절대 시속 60을 넘지 않는거다. 괜히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가 뭔 일을 당할지 몰라 애가 쓰여도 참고 있는데 창 밖 가을 풍경을 가리키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천진함에는 그만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도착한 안목 바닷가는 소문대로 여기 저기 건물 전체가 커피숍인 곳이 있고 평일임에도 젊은 커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우리가 찾은 호텔은 그럴듯한 유럽풍의 이름과 달리 모텔급 정도의 작은 곳이라 처음엔 좀 실망스러웠지만 룸에 들어서자 소품 하나 하나 세심하게 신경을 쓴 거며 깨끗하고 쾌적한 분위기가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베란다 밖이 바로 바다라 누워서도 밀려드는 파도의 포말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치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밤새 철썩이는 파도 소리며 희뿌옇게 밝아 오는 새벽녘 베란다에 서서 바라본 일출 광경은 오랜 만에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하루라도 일상에서 벗어나 푹 쉬고 싶었는데 남편의 왕성한 호기심은 한시도 가만 있질 못하게 만든다.
방을 정하자 마자 빨리 움직여야 많은 걸 볼 수 있다며 서둘러 대기 시작했다.
실적 위주의 한국형 관광의 전형이라 하겠다. 하기사 나도 근처 참소리 박물관은 꼭 구경하고 싶었던 차다.
입장료가 7천원이나 된다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 박물관을 더러 보았지만 그저 고만 고만 특별한 볼거리도 없었기에 어떨 때는 입장료 천원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입장을 해보니 입이 떡 벌어졌다. 소장품의 30%만 전시되었다는데 그 방대한 양에 기가 질렸다. 에디슨이 축음기나 전구 뿐 아니라 아내를 위해 가전제품인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커피포트 다리미 등 그렇게 다양한 걸 발명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딸을 위해 말하는 인형을 발명하기도 했다니 의외로 가정적인 분이었나보다.
세계에서 하나 뿐인 큰 벽시계처럼 생긴 축음기도 전시되어 있는데 그 구입과정에서 관장이 강도에게 총상을 입기도 했단다. 이제 에디슨을 만나려면 미국이 아니라 한국의 강릉으로 와야 할지도 모르겠다. 전구의 필라멘트를 만들기 위해 1500가지로 실험을 했다는 에디슨 만큼이나 그의 발명품을 수집하기 위한 관장의 집요한 노력과 정열도 대단하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지금은 보기 힘든 팝송 가수들의 공연 실황을 감상했는데 내가 좋아했던 잉글버트 험퍼딩크의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도 들을 수 있어 기뻤다. 나오는 길에 기념품점에서 책자와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흑인 인형을 하나 샀다. 내겐 좀 부담스런 액수였지만 너무 마음에 들어 두눈 질끈 감고 사버렸다.
강릉에 올 때 또 하나 바리스타 박이추 선생의 커피를 한잔 마셔보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커피숍 이름을 정확히 몰라 재일교포가 하는 커피숍을 찾으니 아는 사람이 없는거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어렵게 찾아 냈는데, 이번엔 집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갔지만 같은 자리를 몇번씩이나 돌게 되니 그만 포기하려 했다. 나중에 찾고 보니 주소가 산등성이 숲속길이라 써있을 정도로 외진 곳에 있었다. 그런데 그 산등성이에 추어탕집도 있었는데 평일 점심에 차가 즐비하고 계속 사람들이 모여드는 걸 보니 이름 난 맛집인 듯 싶어 커피도 커피지만 우선 배부터 채우고 보자고 들어가 보았다.
추어탕은 서울식, 경상도식, 전라도식 등 모두 먹어봤지만 강원도 추어탕은 처음이다.
즉석에서 계란이랑 방아잎 같은 것을 넣고 끓여 주는데 수저를 놓을 수 없게하는 묘한 맛에 빨려 들어 한참을 정신없이 먹었다.
남편은 뜨거운 걸 너무 빨리 먹는다고 잔소리를 해댔지만 그 만큼 맛있었다.
그 집 맞은 편 숲길을 내려가면 내가 찾던 보헤미안 커피숍이 있다.
집밖에서도 커피 볶는 짙은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집은 약간 낡고 별 꾸밈이 없어 바닷가의 화려한 찻집에 비하면 차라리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커피맛은 내가 여지껏 맛보지 못한 기막힌 맛이었다. 내 자신 인스턴트 커피에 길들여 있고 그런 면에서는 문외한이지만 짙으면서도 속을 편하게 하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맛에 완전 매료되었다. 그 여운이 오래 입안에 남아 있었다.
이게 바로 커피의 맛인가 보구나.
약제실 처럼 생긴 방엔 원두 커피 자루가 쌓여있고 커피 이름이 쓰여 있는 병들이 줄서있는데 주인장이 혼자서 여러 가지 커피를 볶고 조제하는 모습이 남편은 시골 한약방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가게 한켠엔 택배로 나가는 커피 박스들을 포장하는 손들이 바빴다.
전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보헤미안 커피를 한잔 마시고 나니 정식으로 커피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된다.
커피 한잔만 달랑 마시고 돌아서 나오자니 너무 아쉬웠지만 인연이 닿으면 다시 올 날이 있겠거니 마음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고수의 커피를 한잔 마셨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의 목적을 달성한듯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첫댓글 아~!!! 글을 읽는 동안 행복해집니다.^^
초겨울에 20주년인데 나도 한번 가 볼까나
근데 너무 멀다...
울진에 살때 자주 강릉을 갔었고 참소리 박물관은 두어번 간것 같은데 울진을 떠나온지 10여년이 지났네요 벌써...보헤미안커피숍 다음에 한번 가봐야겠어요. 경주에는 어제 슈만과 클라라라는 성건동 커피전문전에 갔었는데 나름 커피 맛이 괘안았어요. 독일식빵도 직접 만들어서 팔고 있더라구요. 특히 여자들이 좋아하는 커피잔 구경이 저는 좋았어요 팔지는 않는다고 하길래 그냥 눈으로만,...........값은 좀 비쌌지만 맛은 좋았어요 부드러우면서 찐한맛....한번 가 보세요
슈만과 클라라.. 커피맛이 진하고 달콤할 것 같네요. 한번 가봐야지. 고맙습니다.
강릉..그곳에 그런 곳..커피집이며 추어탕집이며..가보고 싶어집니다. 서방님이랑 신혼여행?을 아주 알차게 보냈군요. 부럽습니다. 나도 울영감이랑 신혼여행을 함 가봐!?
됐다구 하세유..ㅎㅎ
멋드러진 풍광에..그윽한 커피향을 찾아 여행의 여정속에 한쪽을 남겨둔다는 여유로움에 ..그 맛 ..예까지 전해오는듯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