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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검투사의 일생
▲ 검투사의 경기장 콜로세움
로마 제국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작품, 저서들은 주기적으로 나를 휘젓고 지나가는 것 같다.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지나가는 <벤허>나 <쿠오바디스> 같은 공중파의 로마 시대 배경 명화부터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영화 <글래디에이터>, 미드 <스파르타쿠스> 등등. 여기에 최근 읽은 책 <로마 검투사의 일생>(배은숙 지음, 글항아리 펴냄)도 추가해야겠다. 어떠한 특별한 사명감 없이 그저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찾아보았을 뿐인데, 즐겨왔던 매체들을 되짚어보니 어느새 로마제국과 관련된 것들이 내방 여기저기에서 쉽게 발견된다. 2002년 9월에는 본의 아니게 로마에만 일주일을 머물렀고, 콜로세움 뒤 주차장에서 술을 마시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 들어오는 차량들을 내쫓았던 기억도 있다.이렇게 엮여온 로마제국은 교회를 다녔던 어린 시절에는 선한 기독교인을 핍박하던 악마의 제국으로 알았지만, 시오노 나나미 여사를 통해 로마가 그저 악으로 치부할 수 없는 위대한 문명이었음을 재교육 받았다가, 이제는 로마 관련 도서나 영상물 구입, 시청에 들인 돈을 염두에 두고 과거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얻었다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그리고 금번 읽게 된 <로마 검투사의 일생>을 통해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로마 관련 팩트를 건졌다. "검투사를 빼놓고 로마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로마 검투사의 일생>은 이 팩트를 공언하고 다닐 만한 쐐기가 되는 책이다.최근 로마 검투사에 대한 한국인들의 흥미를 가장 북돋았던 매체는 역시 미드 <스파르타쿠스>일 것이다. 그 폭력성과 선정성 때문에 인터넷 다운로드를 통해 한 번, 케이블을 통해 또 한 번 한국 성인들을 사로잡은 이 작품은 미국드라마를 잘 안 본다는 이들에게서도 소문난 선정성에 낚여 본적이 있다는 증언을 이끌어낸 드라마였다. 나는 한때 미드 관련 글을 써서 돈 벌던 입장에서 화제의 미드를 체크한다는 의무감으로 시청했고, 초반에는 커크 더글러스가 주연하고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한 영화 <스팔타커스>(1960)의 감동에 비해 너무 폭력성과 선정성만 내세운 것이 아닌가 해서 반감이 컸다. 물론 에피소드를 거듭 시청하면서 스스로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라 이 드라마가 꽤 고증이 잘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인물의 대사나 사건의 밀도나 그런 추측을 부추겼다.
그리고 수년 뒤. <로마 검투사의 일생>을 읽게 되니 그 생각이 맞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검투사 경기와 검투사의 삶은 미드 <스파르타쿠스>만큼이나 폭력적이고 선정적이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매료되었고 국가적인 행사로까지 발전했으며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전환되면서 황제들은 이 검투사 경기를 독점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제아무리 거대한 로마제국의 황제일지라도 대중의 지지와 사랑 없이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중들이 가장 사랑하는 경기인 검투사 경기를 통제해야만 했다.
검투사와 황제 "관중들을 주인님들이라고 부르는 황제"
"황제들은 원형경기장에서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경기장에서 탄원하는 시민의 요구를 들어주어 온화한 황제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려 했다. (…)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관중을 '주인님들Domini'이라고 부르면서 아첨했다."" (474쪽)미드 <스파르타쿠스>뿐 아니라 로마 배경의 미드나 영화를 많이 본 이들에게 '주인님들'이란 의미의 '도미니(Domini)'라는 단어는 꽤 익숙할 터다. 노예들은 남자 주인을 부를 때는 주인님이란 의미로 남성형 도미누스(Dominus), 여자 주인을 부를 때는 주인마님이라는 의미로 여성형인 도미나(Dominus)라고 했다. 도미니는 도미누스와 도미나 모두를 일컫는 복수형이다. 즉 황제가 노예처럼, 관중을 주인님들이라고 부른 것이다.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되기 전인 공화정 시기에도 검투사 경기는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되기는 했지만, 귀족이나 부유한 평민 혹은 정복지에서 전리품을 얻은 군사 지도자들이 개인적으로 열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갈리아를 정복하고 원로원과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제정의 단서를 제공하고 암살당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가 갈리아, 이집트, 아프리카, 폰투스를 정복한 것을 기념해 로마 광장에서 검투사 경기를 벌였을 때 "카이사르는 관습적으로 하는 것처럼 로마 광장에서 한 쌍씩 싸우게 했다. 그러나 그는 대경주장에서는 여러 명씩 싸우게 했다." (192쪽)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도 검투사 경기의 정치적 가치를 모를 리 없었다.
"검투사 경기가 지닌 정치적 선전의 가치를 가장 잘 파악하고 이를 독점하려고 노력한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였다. 그는 검투사 경기를 정규적으로 개최하도록 만든 최호의 황제, 검투사 경기를 황제의 통제 하에 둔 최초의 황제였다. 황제 자신도 경기를 보는 데 열성적이어서 병이 났을 때는 들것에 실려 경기장에 들어갔을 정도다." (470쪽)
권력자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볼거리를 제공하고, 권력자 스스로 그 볼거리가 벌어지는 판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 대중에게 볼거리를 제공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행동. 한국의 프로스포츠와 거기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 관계자들께 어떠한 악감정도 없지만, 모 스포츠가 출범하게 된 계기와 과정이나 최초의 시구를 한 인물의 면모를 생각해보면 2000년 전 검투사 경기를 통제하고 독점하고자 했던 로마 황제들의 모습과 겹친다. 자신의 입지가 흔들린다고 판단될 때마다 경기장 관중석에 모습을 드러내 배우자와의 다정한 모습을 보이거나 잠깐 그 상서로운 옥체를 직접 움직여 경기장 위에 올라서 간단한 시연을 펼쳐 보이기도 하던 "로마 황제"들.그들 중에는 검투사 경기를 단지 정치적 목적으로만 이용하는 것을 넘어서, 진짜 검투사 경기를 사랑했던 황제들도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아우구스투스는 "병이 났을 때는 들것에 실려 경기장에 들어갔을 정도"로 경기를 열심히 보았고 "네로 황제는 물고기 검투사이자 해방 노예인 스피쿨루스에게 군사령관들이 개선식에서 벌어들이는 것과 똑같은 값어치의 돈과 집을 내렸다."(360쪽)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에서 막시무스(러셀 크로)를 핍박하던 황제 코모두스는 직접 검투사로서 경기장 위에 섰다. "반대로 황제가 많은 돈을 받아가는 특이한 경우도 있었다. 검투사 경기에 몰두했던 코모두스 황제는 다른 검투사들과 똑같이 맨발로 싸웠다 다만 일반 검투사들이 아주 적은 금액을 받은 반면 황제는 매일 100만 세스테르티우스(25만 데나리우스)를 받았다는 사실만 달랐다." (360쪽)모든 황제들이 아우구스투스, 네로, 코모두스처럼 검투사 경기에 열광했던 것은 아니었다. <글래디에이터>에서는 아들 코모두스에게 살해당한, 로마 5현제 중 마지막 황제이자 <명상록>의 저자이기도 한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검투사 경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검투사 경기에 취한 조치는 경기 개최로 인해 발생하는 상류층의 재정적 부담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검투사 경기에 열광하지 않았던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검투사와 관련된 세금을 폐지하고자 했다. 검투사 소유주가 검투사들을 판매해 얻는 수입에서 내는 25~33퍼센트의 세금이 매년 2000~3000만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했는데, 이 돈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검투사 가격이 비싸 경기를 개최하는 속주의 사제들과 상류층의 부담이 가중되었기 때문이다. 군사적 위기를 겪는 시기에 지배층의 지지를 필요로 했던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세금을 줄여줌으로써 경기 주최자와 양성소 운영자들의 호응을 얻고자 했다. 또 경기 개최로 인해 재정 부담을 느끼던 속주의 상류층들에게 세금 감소를 빌미로 사제직을 맡도록 종용할 수도 있었다. 황제가 제시한 안에 대해 원로원은 검투사들의 가격을 제한하고, 경기 개최 비용에 상한선을 둘 것을 결의했다." (351쪽)
철학자 황제라고 불렸던 아우렐리우스 역시 검투사 경기의 세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엄청난 국가 재정을 포기하면서까지 상류층을 비롯한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은 직접 검투사가 되어 아레나에 섰다. 로마의 역사에서 검투사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코모두스가 직접 아레나에 검투사로 선 것은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검투사에 대한 로망과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소위 말하는 '중2병'을 황제가 앓았던 셈이다. 그는 검투사 경기만큼 검투사들을 아끼지 않았다. 검투사들은 그의 허영을 채우기 위한 산 제물들이었던 셈이다.
"황제는 "오른손으로 방패를 잡고 왼손으로 목검을 들었다. 그는 왼손잡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다. 일급의 추격 검투사인 황제는 1만2000번 승리했다." 황제는 목검으로 싸우다 곧바로 진짜 무기를 들어 검투사들을 죽여버렸다." (486쪽)"192년 코모두스 황제는 같은 양성소 출신의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는 것을 꺼리자 모든 검투사에게 동시에 싸우도록 명령했다. 서로 봐주는 듯한 싸움에 분노한 황제가 상대를 죽일 때까지 치열하게 싸울 것을 명령한 것이다." (291쪽)
검투사에 대한 코모두스의 태도는 관중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코모두스의 엉터리 경기에 관중들은 억지로 열광하고 찬사를 보내야 했다. "황제가 일부 관중을 죽이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은 경기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487쪽)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에게 살해당했듯 코모두스가 암살당하자 "두려움 속에서 경기를 관람해야 했던 사람들은 코모두스 황제의 암살을 환호했다." (487쪽) 검투사 경기에 대한 비뚤어진 열광은 황제 자신의 목숨까지 앗아간 셈이다.
검투사들의 삶 "전쟁 노예에서 스포츠 스타로"
검투사 경기에 대한 로마인들의 열광은 황제와 정권까지 엮여있을 정도의 엄청난 것이었다. 당연히 검투사들에 대한 인식도 그에 준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검투사 경기는 "장례식날 무덤에서 전쟁포로나 구입한 노예들을 죽였다"(188쪽)는 고대인들의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초기 검투사 경기는 로마인들이 정복한 이민족들의 전쟁포로들을 서로 죽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검투사들의 명칭이나 유형은 대개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상대했던 적대 세력이나 부족들에서 따왔다. 삼니움과 갈리아, 트라키아 검투사들이 그들이다. 검투사 출신 노예로 로마 사회를 가장 큰 위기에 몰아넣었던 스파르타쿠스도 트라키아 출신의 검투사였다. 로마 시민들은 이들 이방인 부족 검투사들에게 자신들의 적개심을 표출하였다.
"'삼니움 검투사'는 제2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27~기원전 304)을 겪으면서 삼니움인에 대한 우월감과 증오심에서 유래되었다."(274쪽)"삼니움 다음으로 도입된 유형은 로마의 증오하는 적이었던 갈리아 검투사였다. 기원전 4세기 초 로마시를 약탈할 때부터 기원전 1세기 중순 로마에 완전히 정복될 때까지 갈리아는 로마의 주적이었다."(275쪽)"이국적인 포로를 검투사로 활용해 인기를 얻은 술라가 또 다른 포로를 데려왔는데, 바로 유명한 트라키아 검투사였다. 트라키아 포로들은 기원전 80년대 술라가 폰투스와의 전쟁에서 데려왔다고 전해진다."(276쪽)
로마에 패배한 굴욕도 모자라 아무런 개인적 원한도 없는 상대를 로마인들의 명령에 따라 죽여야 한다는 이중의 굴욕과 비인간적인 대우는 결국 스파르타쿠스의 반란(BC73~71)으로 이어진다. 검투사와 노예들이 일으킨 이 반란은 로마 사회를 거의 붕괴 위기 직전까지 몰아갔다.
"검투사가 로마인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살아가지만 언제든 로마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존재임을 여실히 보여준 사람이 바로 스파르타쿠스였다." (433쪽)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개인적으로 잘 해소가 되지 않았던 의문이 있었다. 왜 로마 사회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같은 치명적인 사건을 겪고도 검투사 경기를 폐지하지 않았을까. 폐지는커녕 검투사 경기는 이후로도 수백년간 활발하게 개최되지 않았는가. 그 해답은 다음과 같다.
"제정기 들어 검투사들은 소소한 반란은 일으켰지만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대규모 반란은 일으키지 않았다. 이는 검투사들의 출신 성분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도 그렇지만 공화중 후기에는 전쟁포로 출신의 검투사가 많았다. 이들에게는 로마에 졌다는 것 자체가, 검투사로 활동하다는 것 자체가 억울하고 불만이었다. 또 같은 포로 출신이 많았으므로 단결력도 있었다. 하층민이라도 자유민들은 검투사를 자원하지 않았다. 가난한 하층민들에게 군인이든 검투사든 모두가 어차피 위험한 직업이었으므로 돈을 더 벌 수 있는 직업을 택했다. 당시 검투사보다는 군인이 더 유익했다. (…)반면 제정기 들어서는 봉급 외에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많지 않았다. 가난한 게르만 족과 싸우니 전리품이 풍부할 리 없었다. (…) 입대의 장점이 사라지자 돈과 인기라는 측면에서 검투사라는 직업이 하층민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절반 이상의 검투사가 자유민 출신이라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로마인이고 스스로 검투사가 된 자원자들은 강요로 검투사가 된 사람들의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다." (453쪽)
검투사 경기가 융성해지고 검투사에 대한 대접이 좋아지자 인생 '막장'에 몰린 자유민들 중에서 검투사에 자원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노예 검투사로 자신의 몸값을 갚고 은퇴하여 자유민이 되었지만 검투사 시절의 영광과 짜릿함 때문에 다시 검투사가 되는 이들도 있었다.
"'자유 검투사'는 승리해서 목검을 받았으나(검투사 신분에서 해방되었으나) 다시 검투사로 나선 사람들이었다. 경험이 풍부해 흥미로운 경기를 끌어나가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이들은 관중의 인기를 한 몸에 얻었다." (306쪽)"운영자들이 가난한 자유민 중 가장 선호하는 사람은 '자유 검투사rudiarius'였다. 명예로운 은퇴의 상징인 목검을 받은 이들은 은퇴하면서 자유민이 되었지만 검투사로서의 삶에 대한 그리움과 높은 상금을 기대하고 자원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검투사 양성소의 훈련 과정, 아레나의 분위기, 사람들의 선호도를 알고 있으므로 운영자가 가르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특히 경험이 가져다주는 노련함은 시간이나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었다. (…) 전쟁포로나 범죄자 출신의 검투사보다 자유민 출신의 검투사의 싸움 근성이 더 강했기에 검투사 양성소 운영자들은 자유민 출신을 더 선호했다. 체격이 좋거나 근성이 보이는 전쟁포로들은 검투사로 발탁되기는 하지만 속박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므로 열정이 떨어졌다. 반면 자유민 출신의 검투사들은 사회에서 더는 희망이 없는 터에 마지막으로 택한 직업인만큼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그래서 관중은 포로로 잡혀와 검투사로 변신한 사람보다 자유민 지원자들의 싸움에 더 흥미를 느꼈고, 더 많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98~99쪽)
원형경기장인 아레나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자유 검투사들의 삶은 은퇴 후에도 자신의 운과 능력에 따라 명예와 부로 이어졌다. 모든 자유 검투사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유민으로 5년간의 계약을 끝낸 자유민 검투사들은 은퇴 후 큰 보수를 받고 재계약하거나 은퇴 뒤 프리랜서로 경기장에 초청되어 역시 큰 보수로 일회성으로 싸우는 경우도 있고 "일부 성공한 검투사는 엄청난 찬미와 칭찬 속에서 신분 상승의 줄을 붙잡기도 했다. 아일리우스는 검투사로서의 특기를 살려 경기장의 주심으로 활동했고, 여러 도시에서 명예시민으로 칭송되었다."(377쪽)"양성소의 교관으로 활동하는 전직 검투사들도 은퇴 후 잘된 편에 속했다."(377쪽)"황제나 귀족들의 경호원이나 군인으로 변신하는 검투사들도 있었다. 거리의 해결사 노릇도 했다. "돈이 없는 전직 검투사들은 양성소나 군대를 전전하다가 육체노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들면 양성소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구걸했다.""(380쪽)
검투사 경기가 대중의 인기를 누릴수록, 특정 검투사들이 대중의 인기를 누릴수록 검투사 개인의 몸값은 올라갔다. 반드시 패자가 죽어야한다는 규정은 검투사의 주인에게나 관중들에게나 득 될 것이 없는 규정이 되었다. 경기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경기 내용이 관중들 보기에 좋았다면 관중들은 패자 역시 살려주는 쪽을 선택했다. 황제도 직접 나섰다.
"패배한 검투사의 생사를 결정할 때 경기 주최자는 관중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결정권을 관중에게 준다는 의미를 띤 몸짓이었다. 이제부터 관중이 임의적이고도 거친 재판을 시작했다. 결정의 기준은 싸움에 임하는 자세, 즉 얼마나 용감하게,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가 하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손을 뻗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약하고 구걸하는 검투사를 싫어했다." 그들에게 "자신 있게 명부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싸움꾼은 자신의 피를 본 사람, 상대의 주먹에 맞아 자신의 이빨이 덜거덕거리는 것을 느낀 사람, 돌진한 상대의 거대한 힘을 느낀 사람, 육체는 무너졌으나 정신은 살아 있는 사람, 패배할 때마다 전보다 더 큰 도전정신으로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최선을 다한 검투사의 모습은 관중에게 재미를 넘어 아름다움과 경건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용감하게 패배하는 것은 이미 양성소에서부터 새겨 넣은 검투사의 기본 자질이었다. 검투사들은 그 기본을 지켜야 패배해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315쪽)"결정권을 쥔 관중은 패배한 검투사가 잘 싸웠다면 "보내라mitto"라고 외쳤다. 그러면 경기 주최자는 심판에게 패배한 검투사를 산채로 떠나보내라는 손짓을 했다. 구경거리에 종사하는 사람도 돌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산 채로 떠나는 것이 없는 sine missio' 검투사 경기를 금지했다. 패자가 살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유명한 검투사인 헤르메스는 "죽이기 위해서라 아니라 정복하기 위해 훈련한다"고 했다. 메일레시스의 비문에는 "나는 메일레시스라 불리고, 민간 이름은 메스트리아노스다. 나는 다섯 번 싸웠고,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이제 내가 부상당했다. 아내인 알렉산드라가 남편을 기억하여 자신의 돈으로 이 비를 세웠다. (이 비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안녕히!"라고 기록되어 있다. 승리했지만 상대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것은 죽이지 않는 싸움을 했다는 의미다." (316쪽)
멋진 경기를 펼친다면 패자도 존중받는다는 것. 많은 인기를 얻은 자유민 검투사는 승리를 통해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것. 패배가 죽음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을 제외하면, 검투사 경기는 오늘날의 프로스포츠와 어떤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검투사들의 실제 사망률은 어느 정도 되었을까.
"패자가 살 확률이 제정 초 75퍼센트에서 3세기에는 55퍼센트로 낮아졌다. 전체 5000~6000만 명에 달하는 제국 인구 중 매년 8000명이 아레나에서 사망했다는 말이다. 이는 전체 20세 남성 인구의 1.5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4세기 검투사의 사망률이 낮아졌다. 로마의 경제가 쇠퇴하고,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상황이라 검투사를 무한정 죽이지는 않았다. 검투사 한 사람을 키우는 데 드는 시간과 경비를 고려할 때 단지 관중의 즐거움을 위해 죽일 수는 없었다. 산 채로 떠나는 것이 일상적으로 허용되었고,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은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또 무딘 무기를 쓰거나 날카로운 무기라도 검투사가 처음 상처를 입었을 때 싸움을 종결지었다." (344쪽)
이렇게 검투사 경기가 전쟁포로로 발생한 노예를 처리하는 의식에서 프로스포츠의 성격을 확보하면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처럼 검투사들이 노예와 결탁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킬 확률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공화정 시기, 비참한 운명에 내몰렸던 "노예" 검투사들은 제정이 들어서고 황제가 정치적 목적으로 개입하면서 "스타" 검투사가 된 것이다. 도박꾼들은 자신의 돈을 불려줄 검투사에 열광하고 귀족들은 이들을 경호원으로 이용했다. 황제는 이들을 자신의 정치적 인기를 유지하는 데 동원했다. 심지어 스스로 검투사를 자처하던 황제도 생겨났다. 거리에는 검투사들을 사모하는 여성 팬들의 낙서가 나타났다. 강건한 육체를 지닌 검투사의 침소로 찾아가 동침하는 여성도 생겨났고 상류층의 귀부인들은 검투사를 자신의 침소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스스로 최고의 검투사로 자처한 코모두스 황제의 출생이 어머니 파우스티나 황후와 검투사 사이의 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검투사의 매력에 원로원 의원의 아내도 빠지는데 황후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로마 사람이라면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부인인 파우스티나의 방탕함과 불륜을 모두 알았다. 당연히 코모두스 황제의 출생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367쪽)
검투사로 보는 로마의 모든 것
587페이지에 달하는 <로마 검투사의 일생>은 검투사의 일생을 통해, 검투사 경기를 통해 그야말로 로마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검투사 경기와 로마 정치, 검투사 경기장 좌석의 배정을 통해 보는 로마 신분제의 변천사, 검투사 경기를 보러가는 로마인들의 복식, 경기장에서 이루어지는 로마 남녀의 연애 과정 등. 검투사 경기는 로마의 모든 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로마적인 것이었다.그리고 이렇게 검투사를 통해 로마의 모든 것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일등 공신은 "충실한 기록"이다. 이 책 <로마 검투사의 일생>만 해도 플루타르코스, 세네카, 케키로 등 당시의 역사가, 철학자들이 남긴 당시의 방대한 기록들(1차사료)과 그 1차사료를 바탕으로 한 여러 도서들(2차사료)을 바탕으로 쓰였다.로마 문명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1차사료가 풍부하다는 점은 언제나 부럽기만 하다. 표음문자인 알파벳을 기원전부터 사용해왔기 때문에 이렇게 풍부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이. 삼국시대의 죽간 같은 것이 발견되면 그것이 유교, 불교의 경전이나 공문서가 아닌 뭔가 색다른, 되도록이면 당시 사회상을 추적할 수 있을 만큼 민간의 삶과 밀접한 기록이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더욱 그렇다.
이렇게 풍부한 기록인 1차사료를 바탕으로, 고대 로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그 결과 우리는 스크린이나 모니터를 통해 더 생생한 로마를, 고대 문명 속에서 살아 숨쉬는 로마인들을 볼 수 있게 된다.미드 <스파르타쿠스>는 이런 1차, 2차사료 발굴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극적 재미를 위해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가공은 물론 이루어졌고 공화정 시기 전쟁포로와 노예들로 구성된 검투사들의 삶과 제정 이후 "스타" 검투사들의 삶이 구분 없이 섞여있기는 하지만 검투사 경기나 검투사들의 삶에 대한 고증엔 상당한 공이 들어갔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다양한 검투사들의 특징들이 자세히 설명된 챕터들을 통해 이제는 드라마나 영화 속 검투사들이 물고기 검투사인지 트라키아 검투사인지 구분할 수도 있게 되었다. 책 50~51쪽의 도판 '제롬의 폴리케 베르소'(polike verso, 뒤집힌 엄지)에서 상대방의 목을 발로 짓밟고 서서 관중을 바라 보는 이 검투사는? 물고기 검투사 무밀로(Murmillo)다. 무밀로 발에 짓밟힌 패자는? 그물 검투사 레티아리우스(Retiarius)다.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스파르타쿠스와 대적했던 흑인 상대 검투사가 레티아리우스였다.다양한 검투사의 유형이 궁금하다면, 우선 이 인터넷 페이지(☞바로 가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다양한 검투사들이 서로 어떻게 싸웠는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다 죽었으며 로마는 그 피를 자양분으로 어떻게 영광을 추구했는지 알고 싶다면, 바로 <로마 검투사의 일생>을 펼쳐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