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윤영숙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여전히 부끄럼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에도 누가 묻는 말에 수줍어서 제대로 대답도 못 했다. 심지어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의 질문에 답을 알면서도 손을 못 들었다. 내가 손을 들고 말하면, 모두의 눈이 내게 쏠렸고 그럼 나는 가슴이 벌렁벌렁 뛰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난 손도 못 들고, 나도 모르게 모기만 한 소리가 튀어나오곤 했다. 그러면 옆 짝꿍이나 앞에 앉은 아이가 듣고, 손을 번쩍 들고 대답해서 칭찬을 듣기도 했다. 난 그 애들의 거리낌 없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난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눈치를 보면서 자란 1남 5녀 중 큰 딸이었다.
난 초등학교 시절에 우리 집이 빚이 많아서 중학교도 못 들어갈 형편인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쁜 엄마와 아버지께 중학교 입학통지서는 보여주지도 않았다. 어느 날 마당에서 동생을 업고 콩 타작 도리깨질을 하는 부모님 옆에서 돕고 있는데 6학년 담임선생님이 잦아오셨다. 깜짝 놀랐다. 아버지와 함께 말씀을 나누신 선생님께서 내 머리를 쓰다듬고 가셨다. 아버지는 ‘아무려면 내가 널 중학교도 못 가르칠까봐 그랬냐’고 하시면서 중학교는 보낸다고 하셨다. 난 알파벳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소심한 나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말이 없고 부끄럼이 많았다. 그런 내가 중학교에서 아주 특별한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영어선생님이다. 키가 크고 잘생긴 영어 선생님은 나처럼 부끄럼이 많아서 얼굴이 잘 빨개졌던 분이었다. 처음 교직을 시작한 풋풋한 선생님은, 수업 중에 아이들이 짓궂은 질문을 하면, 들고 있던 교과서로 빨개진 얼굴을 가렸다. 귀까지 붉어진 얼굴을 보면서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부끄럼쟁이여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그 영어 선생님이 좋았다. 그러나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만 좋아했다. 다만 수업을 할 때마다 아이들이 수줍음 많은 선생님을 힘들게 놀리지 않기를 바랐다. 느닷없는 아이들의 얄궂은 질문에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책으로 얼굴을 가리는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영어 수업 시간이 시작되면 먼저 영어단어 시험을 보았다. 항상 받아쓰기 영어단어 시험을 보고 나서, 시험지를 앞뒤로 바꾸고 이어서 짝꿍끼리 또 시험지를 바꿨다. 그렇게 시험지를 바꾼 뒤에 채점했고, 시험지를 주인에게 돌려준 뒤에 본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 시작과 끝에서 5분 동안 단어시험과 채벌을 한 것이다. 수업이 끝나는 멜로디가 울리기 5분 전에 선생님은 틀린 단어 수만큼 손바닥을 때렸다. 영어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으면서 부끄럽고 자존심도 상했다. 나는 자존감을 높이고 싶어졌다.
중학교에 들어와서 처음 보게 된 알파벳은 내게 쉽게 익혀지지 않았다. 처음엔 읽기도 어려운 단어를 외우려니 생소해서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좋아하는 선생님께 부끄럽지 않기 위해 어려운 영어단어를 열심히 외웠다. 착한 선생님의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수업을 열심히 듣고 단어도 외웠다. 단어의 발음기호와 연결해서 자꾸 읽으니까 저절로 영어단어 시냅스가 연결되었다. 내가 영어단어를 틀려서 손바닥을 맞을 때면,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 처음엔 매번 매를 맞았지만 갈수록 횟수가 줄어들었다. 선생님이 좋아야 공부도 잘된다는 걸 그때 확실히 느꼈다. 소풍 가서 줄 서 있다가 선생님과 찍은 사진 속의 선생님 얼굴과 내 얼굴은 둘 다 빨갛다.
십리 길을 걸어서 여자중학교에 가는 동안 나는 메모한 두루마리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공부했다. 물길을 따라 걸어가는 길은 봄이면 버들가지와 할미꽃 제비꽃이 피고 산에는 진달래 조팝꽃 철쭉꽃이 피어서 학교에 가는 나를 응원해 주었다. 그러나 겨울이면 빈 들판 사이로 난 천변길은 시베리아 벌판을 연상하게 했다. 아버지께서는 아침마다 아궁이에 운동화를 넣었다가 내주어 따뜻하게 신고 갈 수 있었다. 아침 등굣길은 바람이 잔잔했지만, 오후에 집으로 가는 길에는 칼바람에 맞서 걸어야 했다. 십리 길을 걸어서 가야 하는 중학교 등하굣길은 대부분 영어단어를 외우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영어는 어휘력의 싸움이라고 하시면서 많은 단어를 외우는 것은 필수라고 했다. 그리고 영어를 배우면 말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영어 회화를 외우게 했다. 기말시험을 앞두고 교과서의 다이얼로그를 다 외우면 30점을 준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한 학기가 끝나는 기말고사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 다이얼로그를 외워서 30점을 확보하고 필기시험을 보았다. 그걸 외우지 않으면 30점이 마이너스니까 무조건 해야 했다. 그리고 기말 시험성적은 70점 만점으로 채점했다. 그때 외웠던 다이얼로그는 고등학교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다니던 때에도 줄줄이 기억을 뚫고 일어났다. 그만큼 단단한 저장고였다.
내 머릿속에서 오랜 기간 살아있던 그 다이얼로그가 지금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없다. 그 많은 기억의 저장고가 어느 순간 새기 시작해서 이제는 세월의 무게에 털려버린 듯 남은 게 거의 없다. 하이! 하이! 하면서 만나는 인사부터 시작했던 던 거 같다.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긴 이 나이에도 수많은 기억 중에 영어를 가르쳐 주었던 그 때 그 옛 선생님을 떠올려 보면 두근두근 가슴이 뛴다. 그 풋풋했던 시절이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첫댓글 옛 선생님을 추억하는
영숙님의 수필이 감동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