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공산 오득린 호랑가시나무
오득린(1564~1637)은 고려 때 사정공인 오경진의 7세손이며 나주시 공산면 상방리에서 오숭수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암, 해남, 목포, 진도를 두루 다니며 전황을 살피고 의병을 일으켜 마을을 지키다, 송희립의 천거로 이순신의 수군이 되었다. 정유재란에 옥포, 당포, 명량, 노량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나고 역시 송희립의 상소로 1605년 선무원종일등공신의 녹훈을 받았다.
1598년 노량해전을 앞둔 때이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왜군에게 철수령이 내려졌다. 이를 알고 조명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 왜교성을 수륙으로 포위했다. 이때 명의 진린은 왜군과 전면전보다 화의 협상을 하면서 뇌물까지 받았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왜선 한 척이 왜교성을 빠져나가는 것도 눈감아 주었다. 그 결과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의 다치바나 무네시게,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자 대마도주인 남해의 소 요시토시가 5백여 척의 왜선을 이끌고 순천 왜교성으로 몰려왔다. 자칫 조명연합군이 왜군에게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이에 이순신은 1598년 11월 18일의 노량해전 하루 전날 몇 척의 전선으로 순천 왜교성을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그리고 2백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물목이 좁은 노량해협에서 왜군 선단을 기다렸다. 이때 명과 왜의 화의 협상, 구원을 요청하는 왜의 연락선 등을 탐망하여 이순신이 작전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공을 세운 장수가 바로 오득린이다. 또 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오득린은 송희립과 함께 끝까지 전투를 이끌었다. 그리고 왜탄에 크게 다쳐 고향으로 왔다. 이 오득린을 기리는 나주오씨 재실이 고향 마을 앞 각궁산의 경승재이다.
여기 오득린의 고향 마을 상방리 남쪽으로 삼포강이 흘러 영산강으로 들어간다. 이 삼포강으로 거북이가 내려가서 하리, 다시 올라와서 상리인데 지금은 두 마을을 상구마을이라 한다. 또 이 상방리의 거북이 마을 들머리 방풍림은 마을을 보호하는 비보풍수로 오득린이 심었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정월 그믐에 당산제를 지내며 소원을 빌고 음식을 나누며 나무 밑에도 묻었다. 또 당숲의 나무가 다칠까 싶어 가지를 꺾으면 큰 병이 든다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초상집 상여와 혼례를 치른 신랑신부도 나무 사이로는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 상구마을 들머리의 아름드리 호랑가시나무는 오득린이 암수한그루가 되게 심은 연리목이다. 늘푸른 상록수인 호랑가시나무는 암수딴그루로 암나무에만 열매가 열린다. 그래서 여기 호랑가시나무 수그루 쪽은 꽃만 피고 암그루 쪽은 가을이 깊어가면서 빨갛게 열매가 익는다.
호랑가시나무는 잎이 호랑이 발톱처럼 날카로워서 얻은 이름이다. 또 호랑이등긁개나무라고도 한다. 한자어 묘아자는 고양이 새끼발톱 같아서고, 구골목은 나뭇가지가 개뼈다귀 같아서다. 그리고 구골목은 초가을에 꽃이 피고 호랑가시나무는 늦봄에 꽃이 핀다. 열매도 구골목은 검고 호랑가시나무는 붉다. 서양 이름 ‘홀리(holly)’는 성스럽다의 ‘홀리(holy)’와 뜻이 같고 잎을 성탄절 장식에 쓴다. 예수의 가시관나무였다고 하며, 이때 예수의 머리에 박힌 가시를 뽑으려다 죽은 작은 새는 ‘로빈’이다.
오득린이 이 호랑가시나무를 암수 한 그루가 되게 연리목으로 심은 것은 마을 사람들이 단결하여 사이좋게 살라는 뜻이었다. 나무 한 그루에도 선열의 깊은 뜻과 얼이 깃들어 있으니, 이는 끝없는 사랑이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연유이다. 겨울을 앞두고 어김없이 대를 이어갈 빨간 열매를 매단 호랑가시나무 앞에서 새삼 몸가짐을 다시 살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