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25. 주일예배설교(요한복음 강해 59)
요한복음 16장 25절~33절
믿음은 더디지만 은혜는 풍성합니다.
■ 헤아려보니 선생 노릇한지가 꽤 됐습니다. 어림잡아 30년은 족히 넘은 듯 합니다. 처음 선생이 되었을 때는 지식이 제일 중요한줄 알았습니다. 선생은 지식을 가르치는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름 열심히 공부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인격적 성품이었습니다. 여러 성품 중에 사랑이 으뜸으로 보였습니다. 잘 짚어냈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식보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주 한참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무엇인 것 같습니까? ‘인내’, 오래 참음이었습니다. 견디고 참고 기다려주는 그런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자는 하루아침에 성장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준치/목표치에 다다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 동안 격려와 훈계, 그리고 동기부여 등이 있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선생이신 예수님은 이 사실을 진작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계십니다. 이를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어떻게 오래 참으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 중 12명의 사도들은 아예 예수님과 함께 숙식을 했습니다. 대략 3년여 정도의 시간을 함께 숙식을 했습니다. 이 정도면 예수님에 대해 알만한 것은 다 알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더욱이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실시간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니, 궁금한 것은 그때마다 질문하여 해결할 수 있었겠고, 혹시 다시라도 의문이 생기면 또 질문하여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의 이적의 현장을 볼 수 있었으니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신적인 권세와 권위에 확신을 가졌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 정도의 시간과 환경이었다면, 예수님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신앙도 충분히 깊어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계속 헤매고 헷갈려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행동에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일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왜 자기 발을 씻겨 주시려고 하느냐며 강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13장 7절) 14장에서 설명하신 하나님 나라에 우리들의 거처를 예비하기 위해 다녀오시겠다는 말씀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아예 예수님도 16장 12절에서는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말씀을 하심으로, 자신의 말씀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셨습니다. 이처럼 당장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있으셨습니다. 16장 5~6절입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함으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도다.” 사실 이해가 안 되면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알고 싶다면 질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근심만 했지,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알려고 하지 않고, 의문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가르치기 제일 힘든 학생이 궁금한데 질문 안하고, 알아야 하는데 궁금해 하지 않는 학생입니다. 저로서는 속을 모르니 나중에야 알고 서로 당황하지요. 그런데 다행히도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속내를 다 알고 계시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혹시 이 사실이 불안하십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감추고 싶은 속내가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들추시기 위해 우리의 속내를 알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연약함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신 이유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아닙니까?
■ 그런데 의도적으로 메시지를 감추어두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25절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비유라는 것은 무엇을 잘 이해시키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모든 의중을 드러내지 않고 싶을 때도 비유를 사용합니다. 또는 아직은 상대방이 메시지를 감당 못할 수준이지만 그래도 전달할 필요가 있을 때도 비유를 사용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해를 위해서도 사용하셨지만, 아직은 자신을 드러낼 때가 되지 않으셨기에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25절의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의 경우입니다. 그런데 25절 하반부를 보면, 더 이상은 이런 이유 때문에 비유를 사용하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드러내실 때가 되셨기에 비유 사용을 그만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가 아닌 직설적 언어로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의 반응이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29~30절입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시니 그때부터 제대로 알고 믿게 된 것일까요? 제자들의 이러한 태도가 의심쩍으시죠? 예수님도 31절에서 “이제는 너희가 믿으냐?”며 제자들의 고백에 질문을 하신 것을 보면 의심이 드셨다는 것일 텐데 말입니다. 과연 그러신 걸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너무도 반가워서 되물으신 것일까요? 반반입니다. 의심도 맞고, 반가움도 맞습니다. 반반치킨이 생각나는군요.
그렇다면 왜 반반일까요? 예수님이 이 질문을 하신 후 곧바로 충격적인 예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32절입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방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음에도 이렇게 말씀하시니, 이 예언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고백한 내용인 29~30절을 <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제 밝히어 말씀하여 주시고,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시니, 이제야 우리는, 선생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과, 누가 선생님께 물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환히 알려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습니다.’”
제자들의 고백은 “이것으로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습니다.”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또한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에 예수님은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고 맞받으신 것입니다.
솔직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줄 알면 결코 이렇게 도망가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오히려 담대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님 혼자 두고 모두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반인 것입니다. 혹시 반반도 너무 과분할까요? 해도 너무한다 싶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주시고, 다 보여주시고, 다 설명해 주셨는데 이렇게 도망을 간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제자들을 비판하는 우리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만 홀로 두고 도망갑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또 품으셨습니다. 우선은 이런 일을 이미 예상하셨기에 오히려 부담 갖지 말라며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혹시 이 말씀이 제자들의 배신, 혹은 도망침에 대해 섭섭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 하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섭섭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부담을 갖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오히려 위로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위로의 메시지였다는 것을 이어서 하신 33절을 통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은 32절에서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섭섭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형편을 이해하신다는 말씀이고, 힘내라고 용기를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더욱이 곧 제자들이 당할 환난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라는 환난을 당할 사정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33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분명하죠?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우리들의 믿음 증진에 있으시지만, 우리의 연약함에도 무심치 않으시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믿음의 삶에 불안해하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려하시는 것입니다. 이 평안은 자신감을 통해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분명 우리의 믿음은 더딥니다. 믿음의 세월이 제법 찼음에도 우리의 믿음은 민망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은혜는 풍성하십니다. 연약함이 안타까우셔서 용기를 주시며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 사실 환난의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환난을 쉽게 감당할 장사가 어디 많겠습니까? 있겠지만 대부분은 환난이 힘들 것입니다. 믿음의 연약함 탓이겠지만 환난은 쉽지 않은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은 우리를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질책하시더라도 은혜를 풍성히 내리십니다. 이 분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시절이 어렵습니다. 풀어가야 할 삶, 특히 믿음의 삶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 자신의 믿음에 침울해 하지 마시고 풍성한 은혜에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