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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론의 새로운 개혁주의적 고찰
1. 연구 목적과 이해
성령님의 대한 바른 신학의 교육을 통한 인식이 있어야 우리는 올바른 영적인 생활과 교회생활, 사회생활, 개인적인 생활도 주님이 원하시는 데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령님의 대한 바른 이해 부족으로 인하여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은 신학적으로도 말세의 때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더욱더 성경적이며 바른 영적이며 신학적인 바른 정립이 있어야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악한 영들의 속임수를 우리는 분별하여 알고 대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요즘 신학적 바른 이해 부족으로 인하여 이단들이 난무하고 거짓 그리스도가 한국에는 너무나 많다. 물론 전 세계의 어디를 가나 이 문제는 항상 산제되어 있다. 그렇다고 이제 더 이상 방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필자는 이 논문을 준비하게 되었고 논문을 준비하면서 필자 역시도 성령님의 대한 바른 이해 부족을 느끼며 회개하게 되었다.
진실로 지금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과 우리 목회자들이 정통적인 신학을 기초로 하여 성령님을 이해하는 일에 다시 한 번 노력을 기울이고 지나치지 않으며 샤머니즘의 미혹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성령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계기를 삶기를 바라여 이 논문을 준비하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교파가 매우 많이 있다. 문제는 교리적인 부분을 인정하는 문제에 있어 같은 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나 깊이 있게 신학을 연구하다 보면 상당히 많은 인식적 차이가 있고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성령님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서로 추구하는 것의 많은 차이를 갖고 있으므로 한국 교회는 여전히 성령님의 대한 이해도 교파마다 매우 이견 차이가 크므로 인해 더욱더 영적인 면에서 많은 문제들을 발견하고 이러한 문제들로 인하여 교회, 가정, 사회생활의 까지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논문을 상고하면서 조금 이나마 성령님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도움이 되 시길 바라여서 연구하게 되었다.
2. 본체론적 이해
1) 본체론적이라 함은 성령의 본체(substance)와 본질(essence) 등이 문제의 초점이 되는 경우이다. 여기에서 주로 논의된 것은 성령이 신성을 가진 한 위격으로서 '하나님'으로 인정될 수 있느냐는 문제와 성령이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 그 출처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 등이었다.
2) 사실 초대 교회에서는 성령론이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니케아 회의에서는 삼위일체적 형식이 확정되고 성령도 신자들의 믿음의 대상으로 인정되었으나 주 관심은 기독론이었지 성령론이 아니었다.
이러한 경향이 계속되면서 한편으로 기독론 논쟁에 부수적으로 성령론도 차츰 강화되어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는 니케아 신조의 성령에 관한 짧은 언급을 보강하여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광과 예배를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주님이시며, 생명의 수여자"라는 구절을 첨가하였다.
3) 서방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성령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으로 이해되면서 성령이 동시에 성부의 영이요 또한 성자의 영으로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는 방향으로 이해되었다.
이에 반하여 동방에서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는 입장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오래된 것이었으나 이것이 격렬한 논쟁으로 비화한 것은 9세기에 샤를레망대제가 filioque(그리고 아들로부터도) 라는 구절을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에 삽입하려고 시도한데서 시작되어 결국 동서교회가 분열되는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4) 이러한 논쟁과 교리적 발전의 뒤에는 서양철학에서 모든 존재의 본체와 본질과 그 유래 및 존재들 간의 서열을 문제 삼는 사고의 틀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단적인 예는 중세 스콜라 신학의 '은혜' 개념이다.
중세 스콜라신학에서 성령의 구체적 활동은 '은혜(gratia)라는 말로 대치되었다. 거기에서 은혜는 여러 가지 복잡한 분류에 따라 이해되었는데 거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습성적 은혜(habitual grace)'의 개념이다.
여기서 습성적 은혜는 하나님에 의해 우리 안에 '주입되는 어떤 것이요. 우리 안에 머물러 있어 실제로 우리가 선행을 하게하는 잠재적 습성으로 이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성령의 은혜는 단순히 하나님이 친히 가지시는 태도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 따로 존재하는 '피조 된 은혜'요 우리 안에 '어떤 것' 이다. 이런 식으로 성령의 활동에 대한 이해마저도 본체론적 사고에 지배되어진 것이다.
3. 주지주의
1) 주지주의라 함은 성령의 본성이나 우리와의 관계를 '이성' 혹은 '지성'이라는 틀 속에서 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성령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오순절주의적인 경향 즉 권능 주의적 이해를 가진 사람들 혹은 성령은 언제든지 비이성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유럽의 철학에 있어서 영은 본래 인간의 지성활동과 쉽게 연관이 되었던 것이다.
2) 그러한 사상적 전통에서는 인간의 본질적 부분은 영혼이요 영혼의 가장 고귀한 부분을 이성으로 여기는 대 아무런 거부감도 없었었다. 또 한 하나님을 가장 높은 이성적 존재라고 이해함에도 별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전통을 따르는 기독교 신학에서 성령을 이성과 연관되는 존재로 생각해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3) 여기에는 물론 인간 영의 이성적 능력을 신뢰하여 자연신학의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과 인간 이성의 영적 능력의 부패성을 심각히 인정하며 오직 하나님의 특별계시만을 고집하는 계시신학의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이러한 경향에서는 성령 혹은 영을 이성과 혹은 지성과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4) 중세 스콜라 신학,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주지주의적 경향을 뛰고 있으며 자연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최고의 이성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경우에 있어서도 신앙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선하심을 아는 지식이라는 면에서 설명한다. 물론 여기서 성령의 역사가 단순히 자연적 인간이성과 동일시되거나 성령이 인간 이성의 활동으로 해소되어진다고 보지는 않는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써 지성을 가진 인간의 영을 무한히 초월한다.
그러나 여전히 성령이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하나님 인식론과 관련되며 성령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하나의 해석학적 통로로 간주되기도 한다. 성령에 대한 이해와 이러한 경향에서 자주 강조되는 주제는 말씀이다.
4. 주지 주의적 이해
1) 성령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전통은 성령을 의지와 관련짓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의 의지와 또한 성령이 인간과 관계를 맞을 때에 인간의 의지와 종종 연결된다.
성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의 위치를 의지와 연결시켜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대개 성령을 지성이나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비유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면 그는 삼위일체를 기억, 지성, 사랑 등으로 설명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 혹은 의지로 비유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이 의지로 이해될 때는 흔히 동시에 성령이 사랑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에 의하면 성령은 사랑하시는 자 성부와 사랑 받는 자 성자 사이에서 그 두 분을 연합시키는 사랑 자체이다.
2) 성령이 사랑과 의지와 연관될 때 자연히 인간에게 역사 하시는 초점은 윤리적 문제가 된다. 이러한 경향은 흔히 성령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윤리적으로 거룩한 삶, 즉 사랑으로 대표되는 삶을 살도록 변화시켜주며 행하게 하는 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우리는 흔히 "성령 받았다는 것이 무엇이냐?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아니냐?" 는 말을 듣는데 이것은 바로 주의 주의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3) 주의 주의적 예의 또 다른 예는 죠나단 에드워즈이다. 그는 참되게 성령을 받은 표로서 즉 성령 받은 열매로써 선한 행실의 윤리적 열매를 맺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런 것은 주의 주의적 경향의 특징이다. 대표적인 신학자로서는 라인홀드 제베크와 본회퍼가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 사랑이나 윤리 일변도로 나가는 것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도덕주의적으로 축소시키거나 성령의 하나님 인식에 관한 역사나 성령의 권능적 역사를 간과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위험도 있다.
5. 감정 주의적 이해
1) 성령에 대한 이해 중에서 아마도 가장 비난을 많이 받고 오해되는 것이 바로 감정 주의적 견해이다. 주지 주의적 견해를 가진 쪽에서는 열성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며 어떤 신비현상을 추구하는 것을 흔히 감정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감정의 요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과연 성경은 성령이 하나님의 인격적인 영으로서 그 자신이 어떤 감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시는 영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또한 성령은 인간의 감정적인 측면과도 어떤 관계를 맺는다고 볼 수 있다.
2)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이성적이고 형이상적인 이론이나 도덕적 행위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감정의 면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 혹은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을 명백히 감정적 역사라고 정의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부흥사들이나 부흥운동을 추구하는 신학자들 중에서는 방법론적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감정적 흥분 상태로 인간의 영혼을 뒤흔들어 복종치 않는 장애물들을 극복하여 회개하고 믿게 한다.
성령은 이 감정적 흥분상태를 이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을 방법론적으로 흥분시키는 것이 성령의 사역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은 성서적으로 명백한 근거가 없다.
3) 최근에 성령에 의한 치유를 생각하는 관심이 높아지면서 '내적 치유'라는 사역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성령과 인간의 감정의 직접적 관계를 긍정적으로 드러내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내적 치유란 단순히 신체적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의 병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령의 정서적인 사역은 이러한 치유를 가져오고 사람을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분명히 감정, 올바른 근거를 가지고 있고 그 표현이 건전한 감정, 그리고 정서적 치유는 참된 신앙생활의 일면이요 성령의 역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과 질서의 영인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에서 바른 분별이 없이 감정에 치우치면 헛된 망상에 빠질 위험이 있다.
6. 공동체를 세우시는 성령
1) 신약성서에서 성령은 교회를 세우신 영이요 그 교회 안에서 성도들로 하여금 유무상통하며 공동생활을 하게 한 영이다. 바울도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성령의 전임을 말하였다. 그러나 너무 자주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축복만이 강조되고 각 개인이 받은 은사들과 그 신비함만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은사는 그 신비스러움에 그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공동체를 위한 겸손한 섬김에 그 의미가 있다.
2) 한 개인의 영적인 복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축복의 도구이다. 한 개인의 구원은 목적인 동시에 도구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개신교 안에는 개인주의적 경향이 자라나게 되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교회나 공동체와의 관계보다는 개인이 믿고 구원받는 것과의 관련이 관건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해명함에 있어서 교회와 성령의 관계 혹은 성령의 역사의 공동체적 차원은 철저히 규명되지 않았다.
3) 성령의 공동체적 차원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 새롭게 강조되고 발전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에서 성령에 대한 이해가 종종 개인주의적 편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구원은 우리를 한 추상적 개인으로서 구원하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인 하나님의 나라에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적 차원에 대한 강조가 지나쳐서 성령을 인간 집단 안에 내재하는 한낱 공동체정신으로 전락시키거나 이 세상에서 사회 변혁을 일으키는 단순한 혁명 정신으로 치부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령이 인간들만의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공동체를 새롭게 갱신하는 영은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출처 / 개혁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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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먹을게 없어요,,,아무리 애써도 후원이 없습니다
본 카페의 후원을 부탁 드리는 글입니다
후원을 부탁드립니다..굶어 죽을 처지입니다
카페지기는 살기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1만원 이라도 도와주시면 카페지기는 큰힘을 얻습니다
건강문제로 박스나 고물도 줍지 못합니다
앿값이 없는데 먹을것을 사야합니다 오늘은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먹을것도 못사고 공과금도 밀리고 치료비도 없습니다
공지글에 수급자에서 탈락되는 이유를 올렸습니다
요즘은 건강문제로 병원에 다니고 있어 카페일을 많이 못합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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