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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담마의 꽃 인식과정 17단계, 담마와나선원 아비담마강좌
“매사에 알아차리십시오.”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듣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 차리십시오.”라는 말과 같습니다. 만일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면 막행막식(幕行幕食)하게 될 것입니다.
담마와나선원 탁발법회에서
2018년 12월 16일 담마와나선원 탁발법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오전에 글쓰기가 늦어지는 바람에 오전 법회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점심공양을 담마와나선원 도반들과 함께 하고 오후 아비담마강좌에 참석했습니다.
담마와나선원의 아비담마강좌는 들을 만 합니다. 떼자사미 스님(빅쿠)이 진행하는 강좌입니다. 오후 12시 반부터 3시까지 두 시간 반동안 밀도있게 진행됩니다. 듣다보면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습니다. 법문하는 것을 모두 받아 적다 보니 20페이지 가량 되었습니다. 마치 속기하듯이 본인만 아는 필체로 좀 과장하게 말하면 죽도록 받아 적었는데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였습니다.
아미담마의 꽃 인식과정 17단계
아비담마와 인연맺은 것은 2008년도의 일입니다. 그때 당시 ‘아비담마길라잡이’를 사서 보았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습니다. 초기경전을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맹목적으로 읽어 나갔지만 용어자체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오리무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관련 글을 읽고 동영상강좌도 듣는 등 다각도로 접근한 결과 어느 정도 어렴풋이 실마리는 잡혔습니다. 그리고 십년동안 종종 들여다 보았습니다.
아비담마 십년에 얻은 것이 많습니다. 아비담마는 마치 ‘마음의 지도’와 같은 책입니다. 또 법의 지도와 같습니다. 특히 마음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도표화 해 놓은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1700년 한국불교에서는 이런 마음의 지도와 같은 책이 있었다는 것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아비달마구사론이라 하여 논서가 있기는 있었으나 무척 어려운 것으로 특별한 사람들이나 보는 책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에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이라는 말이 회자된 것은 2000대 들어서의 일입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두 서적을 편찬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의 지도, 마음의 지도와 같은 두 서적으로 인하여 한국불교는 몇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이번 탁발법회에서 아비담마 강좌는 인식과정 17단계에 대한 것입니다. 어쩌면 인식과정 17단계는 아비담마의 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분석일 뿐만 아니라 업을 짓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동원됩니다.
왜 마음이 끊어져야 하는가
흔히 말하기를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고 합니다. 또 그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만약 마음의 대상이 없다면 마음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열반입니다. 마음이 있어야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데 마음이 없으면 세상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것은 마음이 조건발생함을 말합니다. 조건발생했으니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소멸하기 전의 이전의 마음은 다음 마음의 발생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이 상속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건발행하는 마음이 상속되었을 때 마음이 끊어 질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한마음(一心)이라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나와 남과도 연결되어 있고 나를 창조한 창조와도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한마음을 부정했습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배움이 없는 자의 경’(S12.61)에서 확인됩니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마음에 대하여 “예를 들면 원숭이가 삼림의 숲속으로 다니면서 한 가지를 붙잡았다가 그것을 놓아버리고 다른 가지를 붙잡는 것과 같다.”(S12.61)라 했습니다. 이는 마음의 속성을 잘 나타낸 말입니다. 원숭이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이동하듯이, 마음 역시 조건에 따라 이리 저리 생겨남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에 대하여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은 소멸한다.”(S12.61)라 했습니다.
모두 한마음이라면 해탈은 가능할지 몰라도 열반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마음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마음이 끊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조건발생 조건소멸하면서 상속되어야 합니다. 이전마음과 이후 마음이 다릅니다. 따라서 이후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이 끊어지기 때문에 열반이 실현됩니다.
마음은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한다
마음은 빠르게 일어났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함을 말합니다. 한순간에 행복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슬퍼집니다. 분명한 사실은 한순간에 행복과 슬픔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빨리 변하는 마음에 대하여 ‘찰나(khaṇa)’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일찰나는 어느 정도의 시간을 말할까? 인터넷백과 사전에 따르면 일찰나는 약 0.013초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일찰나는 75분의 1초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마음은 매우 빠르게 일어났다고 매우 빠르기 사라지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마음이 빠르게 변하는 것에 대하여 파옥사야도의 법문집 ‘업과 윤회의 법칙’에서는 “손가락을 한번 퉁기는 사이에 아주 많은 수억개의 마음들이 일어나서는 사라진다.”(288p)라 했습니다. 이를 인식과정과 결부하여 “수억개의 인식과정(citta-vithi)이 시리즈로 일어나서는 사라진다.”라 했습니다.
마음의 17단계 인식과정은 일어난 마음이 상속되는 과정을 시리즈로 엮은 것입니다. 이는 의문과정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억개의 의문인식과정이 넘쳐흐르는 강물처럼 일어나서는 사라진다.”라고 파옥 사야도의 법문집에서는 다소 낭만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발생, 유지, 소멸 세 단계로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강한 대상은 바왕가에 동요가 일어나 끊어져 인식과정이 전개 되지만 이전에 겪어 보지 못했던 대상은 훅하고 지나가기 때문에 바왕가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생멸하는 마음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생성, 유지, 소멸이라는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바왕가의 동요로 인하여 마음이 일어날 때 인식과정이 최대 17단계로 진행됩니다.이는 한물질의 존속지속시간과 같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마음은 다시 생성, 유지, 소멸의 세단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모두 합하면 51찰나가 됩니다.
흔히 말하기를 사람의 일생을 생, 노, 병, 사라 합니다. 우주를 성, 주, 괴, 공이라 하고, 마음을 생, 주, 이, 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을 발생, 유지, 소멸 이렇게 세 단계로 구분합니다. 이는 경전적 근거를 갖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아난다의 경’에 따르면 아난다는 “벗들이여, 물질에 대하여 발생이 시설되고 소멸이 시설되고 유지 될 때의 변화가 시설됩니다.”(S22.37)라 했습니다. 이는 오온 중에서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느낌, 지각, 형성,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마음에 대하여 ‘찰나생찰나멸’한다고 봅니다. 마음이 매우 빨리 변함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하여 동아시아에서는 생, 주, 이, 멸이라 하지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발생의 순간’과 ‘유지의 순간’과 ‘소멸의 순간’만이 있을 뿐이라 합니다. 이와 같은 세 단계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식과정 17단계 역시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마음은 제 멋대로이다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먹은 대로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마음대로 되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쩌면 자유의지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지은 업대로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마치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 대하여 “마음은 제 멋대로이다.”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제 멋대로의 마음은 경전적 근거를 갖습니다. 법구경에서는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Dhp.33)이라 했습니다.
초심자가 좌선을 하면 온갖 잡생각이 다 일어납니다. 집중을 하려고 해도 마음이 여기 저기로 돌아 다닙니다. 그 마음은 시장으로, 사무실로, 학교로 어디든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이 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Dhp.34)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변덕스런 마음은 한순간에 행복하다가도 한순간에 슬퍼지고, 한순간에 공손하다가도 또 한순간에 화를 냅니다. 이는 마음이 대상에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마음은 제멋대로이고, 마음은 길들이기 힘듭니다. 더구나 마음은 선한 것 보다는 불선한 것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 쿤달라 비왐사’의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행복한 숲)에 따르면 “그것은 수행자 개인의 성품이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 마음의 성품이 선하지 않은 행위를 좋아한다. 마음은 좋지 않은 것을 즐긴다. 마음을 내버려 두면, 마음은 대부분 선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하고 있다.”(251p)라 했습니다.
마음을 제어하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음을 자기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오온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배움이 없는 자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며 오온에서 몸,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하여 자아와 동일시 해 왔다는 것입니다.
가만 앉아서 마음을 관찰해 보면 온갖 잡생각에 휘둘리는 것을 보면 내 것이 아님에 분명합니다. 이는 의식과 관련하여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은 소멸한다.”(S12.61)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웃었다 울었다 하며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은 오온이 내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왜 첫인상이 중요할까?
아비담마 인식과정 17단계를 공부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변하는 마음의 구조를 밝히기 위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불선업을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멋대로의 마음은 내버려 두면 불선업을 짓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17단계는 크게 바왕가, 오문인식, 자와나, 여운(등록) 네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이 있어 보고 귀가 있어 듣습니다. 그러나 오감을 모두 다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 강한 대상을 인식합니다. 전에 보았던 것이나 들었던 것이 이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대상이 강하지 않으면 지나칩니다.
강한 대상을 접했을 때 바왕가가 동요하게 됩니다. ‘존재지속심’으로 알려져 있는 바왕가가 동요한다는 것은 마음이 대상으로 향함을 말합니다. 이때 바왕가는 끊어지고 본격적으로 대상에 대한 인식과정이 전개됩니다.
눈으로 강한 대상, 예를 들어 매혹적인 사람을 접하게 되었을 때 전향이 일어납니다. 이어서 안식이 일어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의 경험과 비교하여 조사가 일어납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대상에 대하여 계속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자와나’라 하여 최대 일곱번 속행이 일어납니다. 이어서 두 번의 등록 과정을 거쳐서 기억됩니다.
인식과정 17단계에서 7단계인 조사까지는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받아 들입니다. 마치 십이연기에서 느낌과 같은 것입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업을 짓듯이, 마찬가지로 17단계 인식과정에서도 조사단계에서 그치지 않으면 최대 일곱번의 속행이 일어나 업을 짓게 됩니다. 그 업은 선업일 수도 있고 악업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은 대개 불선한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내버려 두면 악업을 짓기 쉽습니다. 마음의 구조를 공부하는 것은 불선업을 짓지 않게 하는 목적도 있습니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면접할 때 잘 차려 입고 예의바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첫인상을 좋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떼자사미스님은 자와나로 설명했습니다. 강한 인상을 주어 일곱번의 속행이 발생하면 두 번의 등록과정을 거쳐서 바왕가라는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인식과정 4단계인 전향에서부터 8단계인 결정단계 까지는 아직 업이 만들어지지 않는 단계입니다. 만약 마음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둔다면 악업을 짓게 될 것입니다. 이는 동물적 삶과 같은 것입니다. 본능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능대로 산다면 수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속행은 카피하는 것과 같다
17단계 인식과정에는 크게 오문(五門)인식과 의문(意門)인식으로 나누어집니다. 오문인식은 현재 지금 여기에서 눈과 귀 등 오감에 따른 인식과정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의문은 생각의 문을 통해서 들어온 대상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의문인식은 오문인식과는 다르게 4단계인 전향에서부터 8단계인 결정단계가 생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일어나는 생각이 의문인식과정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조사 등의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곧바로 속행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업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업짓는 것에 대하여 떼자사미스님은 ‘카피(copy)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의문인식은 만들어진 기억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보기’ 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지 않은 생각이 떠 오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이 동물과 달리 수행하는 것은 악업을 짓지 않게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지혜로운 주의기울임(yoniso manasikāra)’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이숙에 의하여 불선한 마음이 일어났다면 선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사유중지의 경’에서 “그가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키면,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버려지고 사라진다.”(M20)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도제가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제거하는 것처럼”(M20)라 하여 ‘쐐기의 비유’로 설명됩니다.
떼자사미스님에 따르면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업(業)이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이는 의문이 과거 기억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최대 일곱번의 자와나가 일어나는 것에 것에 대하여 ‘카피’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후회가 일어났다면 일곱 번 자와나가 일어나기 때문에 일곱 번 카피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후회에 대한 업을 계속 짓는 것이 됩니다. 이는 두 번의 등록(여운) 과정을 거쳐서 과보심이 됩니다. 그러나 일어난 생각에 대하여 알아차려 지혜로운 주의기울임을 한다면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정공덕이 무량한 것은
인식과정 17단계에서 클라이막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삼매일 것입니다. 좌선을 한다는 것은 욕계의 세상을 끊고 색계의 세상에 들어 가기 위한 것인데, 이때 색계로 들어 가기 위해서는 ‘까시나’가 필요합니다. 까시나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그 이미지를 대상으로 하여 삼매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본삼매에서도 자와나(속행 또는 통각)과정이 있습니다. 욕계의 자와나는 최대 7개인 것에 비하여 색계의 본삼매에 있어서 자와나는 5개입니다. 이를 차례로 이름 붙이면 준비, 근접, 수순, 종성, 본삼매입니다. 여기서 종성단계에서 본삼매로 넘어가면 색계의 세상이 됩니다. 종성단계까지가 욕계세상입니다.
선정에 들면 엄청난 공덕을 쌓게 된다고 합니다. 욕계에서 보시와 지계 등을 하면 선업공덕을 쌓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좌선을 하여 선정삼매에 드는 것도 공덕을 쌓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는 공덕행이 보시와 지계 뿐만아니라 수행도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선한 마음을 내기 때문에 선업공덕이 됩니다. 그런데 선정에 들면 선정에 드는 시간만큼 공덕을 짓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한시간 선정에 들면 한시간동안 공덕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보시와 지계로 인하여 쌓는 순간적인 선업공덕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짓는데 있어서 선정에 드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고귀한 속행에 대하여
떼자사미스님에 따르면 네 번째 선정(4선정)에 대하여 세 가지 이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번째는 4무색처를 닦을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고, 두번째는 다섯 가지 신통을 개발 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세번째는 위빠사나 수행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세번째 항에 주목합니다. 사선정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며 도(道: magga)와 과(果: phala)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와 과는 선정 없이도 가능합니다. 선정 없이 지혜에 의한 해탈이 가능한 것에 대하여 ‘마른 위빠사나’라 합니다. 오로지 위빠사나 수행으로 통찰지를 얻은 자에 대하여 건관자(乾觀者: sukkhavipassata)라 합니다. 이는 경전적 근거를 갖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유행자 쑤시마의 경’(S12.70)에 따르면 유행자 쑤시마가 신통의 능력을 가진 자만이 해탈하는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이에 수행승들은 “벗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합니까? 벗이여 쑤씨마여, 우리들은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룬 것입니다.”(S12.70)라며 답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쑤시마여, 그대가 그것을 알거나 모르거나 사실에 대한 지혜만 앞서면 열반에 관한 지혜는 따라오는 것입니다.”(S12.70)라며 확인해 줍니다. 이는 선정을 닦지 않고서도 위빠사나 수행만으로도 지혜에 의한 해탈이 가능함을 말합니다.
도와 과는 자와나(속행 또는 통각)과정에서 일어납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선정수행으로 성취될 수 있고, 또 하나는 위빠사나수행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와나에 대하여 ‘고귀한 속행’이라 합니다.
도와 과의 고귀한 속행은 일곱 번 일어납니다. 순서대로 차례로 나열하면 준비, 근접, 수순, 종성, 도, 과, 과 입니다. 여기서 종성까지 단계가 범부이고 도의 단계는 성자입니다. 이와 같은 속행과정을 보면 종성까지는 선정에서의 속행과도 순서가 같습니다. 종성 이후에 선정에서는 본삼매로 들어가지만, 위빠사나 속행에서는 도가 일어납니다. 이후 두 단계는 과의 단계입니다.
위빠사나 속행에서 도(道)가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떼자사미스님은 “탐진치 등 어떤 것이 제거 되어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은 단계가 되었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예류자의 경우 유신견이 제거될 것입니다.
오염원이 얼마나 제거 되고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번뇌는 자신이 잘 알고 있어서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마음의 오염원이 나타난다면 도에 들어 갔다고 볼 수 없습니다. 도를 이루면 오염원이 제거 되기 전과 후가 다릅니다. 이런 상태를 (果)라 합니다.
열반이 행복인 이유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입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상수멸’이라 하여 멸진정으로 설명합니다. 사선정을 토대로 하여 네 가지 무색계 선정을 닦은 후에 멸진정에 들어갑니다. 이를 상수멸이라 하는데 불교에만 있는 것입니다.
멸진정에 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팔선정을 닦아야 하고 또 하나는 불환자나 아라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팔선정에 따른 마음에 의한 해탈과 위빠사나 지혜에 의한 해탈, 두 가지 해탈을 성취한 자에 대하여 ‘양면해탈자’라 합니다.
불교에서 상수멸은 열반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지각과 느낌마저 사라졌을 때 아무것도 지각할 수 없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열반에 대하여 사리뿟따는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A9.34)라 했습니다.
선정에 드는 것은 행복입니다. 설령 사선정에서 행복이 버려졌다고 해도 미세한 행복은 남아 있습니다. 이를 평온에 따른 중립적 행복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리뿟따가 열반도 행복이라 했을 때 이를 문제 삼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다인이 사리뿟따에게 “사리뿟따여, 어떻게 거기에 느낌이 없는데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A9.34)라고 물어 본 것입니다.
상수멸상태라면 지각과 느낌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열반이 행복이라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우다인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느낌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는 오욕락의 거친행복부터 시작하여 8선정까지 모두 행복이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팔선정에 대하여 모두 열반이라 지칭하며 “이러한 이유로 열반은 행복으로 자각될 수 있습니다.”(A9.34)라 했습니다.
오욕락도 행복이고 팔선정도 행복입니다. 사선정에서 행복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중립적인 평온함도 행복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팔선정의 행복이 모두 열반과 동의어라 했습니다. 마침내 사리뿟따는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라 했습니다. 사리뿟따는 상수멸에서 지각과 느낌이 사라져 느낄 수 없음에도 행복이라 했습니다. 이는 법구경에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Dhp.204)라는 구절과 일치합니다.
수행의 눈을 만들어야
불교는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렇다고 오욕락과 같은 감각적 쾌락에 따른 거친 행복이 아닙니다. 욕망을 내려 놓음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잔잔하고 미세한 행복입니다. 궁극적으로 지각과 느낌이 멸하는 멸진정도 행복이라 했습니다.
행복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함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동물처럼 아무 생각없이 살면 악업만 짓게 되어 있습니다. 인식과정 17단계에서는 악업을 짓지 않게 하기 위해 지혜로운 주의기울임이 요구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매사에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구조 내지 마음의 지도가 아비담마입니다.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것은 단지 이론으로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행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으로 완성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 대하여 떼자사미스님은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보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사띠를 말합니다. 매사에 사띠하면 불선업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또 거칠고 변하는 마음을 잘 보기 위해서는 ‘수행의 눈’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2018-12-19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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