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시아누크(Nordom Sihanouk) 공은 베트남전에 대하여 중립을 표방하여 북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영내 작전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묵인하고 있었으며 미군이 캄보디아 영내까지 추격전을 전개하여도 반대할 입장은 못되었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Phnom Penh)에는 북베트남 대사관은 물론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NLF)의 대표부까지 있어 캄보디아는 사실상 북베트남을 지지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의 위치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의 마지막 왕으로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 국가원수가 되었다.
북베트남은 1965년 8월부터 남베트남 해안지역에 대한 미군의 감시활동이 시작되어 해상보급이 어렵게 되자 캄보디아의 시아누크빌(Sihanoukvile) 항구를 이용하여 군수물자를 남베트남으로 반입하기 시작하면서 남베트남 국경지대에서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들의 활동이 급격히 증가되었다. 1970년 초에 미군 정보기관이 판단한 바로는 캄보디아 내 북베트남의 상주병력은 5,000명의 전투부대, 수천 명의 보충병, 40,000여 명의 지원부대 등이며, 국경지대인 낚시 바늘(Fish Hook) 지역 일대에는 남베트남에서 철수한 북베트남 노동당 남부 위원회(COSVN), 민족 해방 전선(NLF)과 임시 혁명정부(PRG)의 본부가 위치하고 있었고 북베트남군 제5, 7, 9사단의 전투회피 장소나 재편성 기지로 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낚시 바늘과 앵무새 부리 지역

캄보디아 주둔 북베트남군의 위치
이와 같이 많은 병력이 주둔하게 되자 그들은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캄보디아 인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고 식량을 탈취하는 등, 마치 점령군처럼 행세하기 시작하여 캄보디아 인들의 원성이 높아갔다. 시아누크도 1969년에 들어서부터는 이에 대해서 북베트남에 강력히 항의하기 시작하였고, 닉슨도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1969년 3월부터 이 지역에 B-52폭격을 개시하도록 하였었다.

북베트남의 쌀을 나르기 위해 잡혀온 캄보디아 인들
1970년에 들어서 시아누크가 장기간 외유중일 때 프놈펜에서는 민중들의 폭동이 일어나 북베트남 대사관을 방화하는 등 반베트남 운동이 벌어지자 수상 론놀(Lon Nol) 장군은 의회로 하여금 시아누크 축출을 결의하도록 하여 자기가 전권을 장악하였다. 론놀은 우익을 표방하여 남베트남과 미국의 지지를 선언하고 북베트남군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북베트남에 대하여 시아누크빌 항구를 폐쇄하였다.

론 놀
작전기지가 위협을 받게 된 북베트남군은 4월 1일부터 캄보디아군에 대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미약한 캄보디아군은 전투에 단련된 북베트남군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프놈펜이 위협당하자 론놀은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남베트남은 즉각 노획한 AK-47 소총 등의 무기를 캄보디아에 지원하였고 4월 14일에는 천사의 날개(Angel's Wing)라고 명명된 지역에 월경(越境)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와 같은 캄보디아 사태는 미국의 개입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군은 적의 캄보디아 성역을 제거하는 작전을 원했기 때문에 항상 우발 작전계획을 준비하고 있었고 4월에 들어서 에이브럼스(Abrams) 대장은 캄보디아 월경 작전을 워싱턴에 건의하였다. 이제 론놀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서도 이 작전은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닉슨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국내여론이었고 의회의 반응이었다.
4월 19일 닉슨은 호놀루루에서 태평양 사령관 맥케인(John McCain) 제독으로부터 캄보디아 월경 작전의 필요성과 계획에 대하여 보고를 받았다. 4월 20일 닉슨은 1971년 4월까지 주베트남 미군 15만 명을 철수시키는 제4차 철군계획을 공표하면서 만일 북베트남이 이러한 미군의 철수조치를 악용하여 남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군사 활동을 증대시키고 미군의 안전을 위협하면 북베트남군은 중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존 매케인 제독.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존 매케인의 아버지이다.
닉슨은 국가안보회의(NSC)를 소집시켜 이 문제를 검토시켰으며 키신저(Kissinger)도 위기조치반(WSAG, 1969년 4월 15일 EC-121 정찰기가 북한에 의해 격추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와 유사한 사태에 신속히 대처하고 기타 현안 외교문제를 검토하기 위하여 만든 기구. 그 구성은 키신저가 위원장이고 위원은 국무차관, 국방차관, 해당지역 국무 차관보, 합참의장, CIA 대표 등이다. 이 기구는 1973년 8월 22일 키신저가 국무장관이 된 후에도 계속 존속하였다가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해체되었다.)을 소집하여 이 작전의 득실을 검토시켰다. 키신저와 마찰을 빚고 있던 로저스(Rogers) 국무장관과 레어드(Laird) 국방장관이 반대하였으나 미군의 보호와 베트남화의 효율적인 추진 그리고 론놀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서 작전의 필요성을 인정하였고, 최초에는 미군의 항공 지원 하에 남베트남군 단독으로 앵무새 부리(Parrot's Beak) 지역으로 공격을 개시하고 추후에 미군이 낚시 바늘 지역으로 공격하는 방안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4월 22일 닉슨은 결심은 하지 않았으나 세부 작전계획을 수립하도록 인가하였다. 이것은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이 작전을 실시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앵무새 부리 지역의 위치
닉슨은 키신저에게 의회의 반응을 떠보도록 하였다. 몇몇 의회 지도자들과 접촉이 이루어졌으나 반응은 신통치 못하였다. 4월 24일 닉슨은 앵무새 부리지역에 대한 남베트남군의 월경 작전을 승인하였고 4일후에야 미군의 낚시 바늘 지역에 대한 작전을 승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