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에는 무슨 좋은 것이 있고 또한 무슨 귀한 것이 있으며 세상 사람이 즐겨 마지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아로새기고 흥얼거려서 사람을 한때 웃기거나 감탄케 하는 데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일찍이 시인(詩人)과 우인(優人.광대)을 풀벌레[草蟲]의 무리라고 하였다. 시인은 생각으로써 울리고, 우인은 입으로써 울리는데, 벌레들의 기량으로 말하자면 목[脰]으로 우는 놈, 날개로 우는 놈, 넓적다리로 우는 놈, 가슴으로 우는 놈이 각각 있으니, 우는 것은 비록 서로 다르나, 그 기량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한 가지이다. 그런데 수고로움과 편안함으로 말하자면 벌레가 가장 편안하고, 우인이 그 다음이고, 시인이 가장 수고롭다.
벌레가 우는 것은 때가 이르면 천기자동(天機自動)으로 되는 것이요 울기를 일삼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인은 술을 가지고 귀인의 좌우에서 방긋방긋 웃으면서 종일토록 축복을 하노라면 입술이 타고 혀가 굳어도 마음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이니, 그 입은 비록 수고로우나 그 마음은 편안할 뿐이다. 그리고 시인은 위장(胃腸),신장(腎腸)을 뽑아 내어 입으로 뱉어 내고 손으로 쓰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서야 겨우 일구(一句)를 이루게 되니, 오관육착(五官六鑿) 가운데서 노고하여 부지런히 힘쓴 것이 3분의 2를 차지한다.
(註: 오관은 사람의 5가지 감각 기관인 이(耳),목(目),비(鼻),구(口),형(形)을 말하고, 육착은 육정(六情)과 같은 뜻으로, 사람의 6가지 정(情)인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를 가리킨다.)
그러나 세상에서 이 세 가지에 서열을 매기는 것으로 말하자면, 시인은 당(堂) 위에 모셔서 예우하고, 우인은 뜨락에 있게 하며, 벌레의 경우는 막 나서부터 종신토록 잔디밭이나 섬돌 사이를 떠나지 못하게 되니,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은 수고로움을 귀히 여기고 편안함을 천히 여겨서인가? 옛말에 이르기를, “귀한 자는 남을 부리고, 천한 자는 남에게 부림을 받는다.”고 하였으니, 물(物)은 어찌 그리 평등하지 않은 것인가? 나는 늦게야 그러한 것을 깨닫고 마침내 손가락을 깨물며 시(詩)를 말하기를 꺼려하였다. 그러나 시를 만나기만 하면 매양 좋아하여 마치 술병이 나서 술을 절제하는 사람이 이내 해장술을 마시려 드는 것과 같은 실정이다.
지금 허군(許君.許筠을 가리킴)은 삼교(三敎.즉 儒佛道)를 비롯하여 백가(百家)에 이르기까지 통관(洞觀)하였고, 더욱 축어(竺語.축은 불교 발상지인 인도의 옛 이름이니 불교를 말함)를 독실히 믿는데다 시로써 외관(外觀)을 장식하였다. 그래서 이는 장차 아름다운 벼를 뽑아 버리고 잡초를 배양함으로써 수고롭고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 도리어 우인이나 벌레보다 그 밑에 있게 될 것이니, 심하도다, 깨닫기 어려움이여! 혹자는 말하기를, “마음은 거북의 껍데기와 같으니, 한가운데를 지지면 밖으로 조짐이 나타나는 것이 마치 생각이 움직이어 시를 읊게 되는 것과 같다.” 한다. 나는, ‘생각은 비유하자면 물과 같고, 시는 비유하자면 얼음과 같으니, 물이 얼면 얼음이 되었다가 얼음이 녹으면 다시 물로 환원되는 것이 마치 생각이 움직이면 시를 이루고 시를 읊다 보면 다시 생각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슬기롭지 않으면 시가 좋지 못하고,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생각 또한 슬기로워질 수가 없기 때문에, 밝고 슬기로운 생각으로 느끼어 읊은 것이라야 사람들을 흥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그막에 와서 심하게 끊어 버린 것이 바로 시이다. 그런데 지금 마침 저물게 돌아가다가 허군이 사냥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수레에서 내리었으니, 누가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단 말인가. 시는 과연 좋아하여 귀히 여길 만한 것인가? (끝)
첫댓글 교산(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는 학산초담,호민론,도문대작,누실명,소인론,사명집서문등이 실려있음. 이 문장들은 우리 카페에서 검색(화면 왼쪽아래)하여 읽을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