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당 마을.
(7)새마을 금고.
울산에 살다 안태고향으로 이사를 갔지만,
먹고사는 의식주가 해결이 잘되지 않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을 하지 않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런 자리에
갔더니 나보고 마을 금고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망설이다 가입은 했는데 상세한 가입 절차는 기억에 없다.
해마다 1월5일쯤 마을 금고 결산 총회를 하는데 그날 참석을 하였더니
회원 가입 승인과 동시에 이사(理事)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겼다.
이사는 여러명이었고 이금고를 총괄하는 이사를 위원장으로 불리웠고
이사를 한해를 하고나니 서기(총무)를 맡겼다.
1994년 이장도 겸직하고 간이 상수도 위원장도 겸직했다.
몇년째 하고있는 중년회 총무까지 한꺼번에 마을의 중책(重責)
4가지 맡았다.
그래도,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공금(公金)의 개념은 확실했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다.
언양 장날이 2일.7일. 1년에 72번인데 매년 1월 2일은 결산 준비 때문에
항상 업무를 보지 않았다.
마을회관 2층에서 방송을 하면 회원님들이 이장소로 저금을 하러오고
금액에 관계없이 모두 받아줬다.
처음 이업무를 맡았을 때에는 생소한 일이라 서툴고 힘들었지만,
한해를 해보니 업무가 대충 눈에 들어왔다.
8년을 한결같이 같은 일을 했는데 하루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다음날 저금을 받고 나머지 장날은 날자를 어기지 않은걸로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철저히 업무를 봐주니 마을 회원님들이 나를 굉장히 신뢰도 해주었다.
특히,
마을 아줌마들이 회원이다 보니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을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
대강 감을 잡았다.
이마을 금고는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상세히 알수는 없으나 고금리인 사채를
없애려는 목적에서 1967년(삼남지 보증판 참고)설립 되었다.
해산하게된 동기는,
가입때 30세 후반 또는 40세되든 회원님이 2001년 해산 할때에는 35년의 세월이 흘러
70세가 거의 넘었다.
1997년 12월3일 I.M.F가 오니 객지에 나가살던 자식들이 어려워 엄마에게 절박한
돈 이야기를 하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회원인 엄마가 빌려가고 돈은 자식이
사용하고 돈을 갚지 않으니 원금과 이자 모두를 부모가 짊어지고 가는 짐이 되었다.
이사회에서 내가 안건을 상정해 강력히 주장을 해 해산 하는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회원은 126명.회원 1인에게 최고 대출금액 오백만원. 총자산은 일억(億)이천만원 정도였다.
그때당시 총 대출금액은 일억 천오백만원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원금 대출과 이자를 받는 업무는 내가 모두했다"
이자는 년말 결산 총회에서 결정해주기 때문에 그이율에 맞게 이자를 산정하면 되었다.
해산하는 예정 년수는 5년으로 정했놓고 1년에 백만원씩 회수를 목표로 했다.
추가 대출은 아예 없는 것으로 일을 추진했다.
3년이 지나니 원금이 거의 회수 되었고 못받은 한집(삼백만원)은 언제까지 갚겠다는
각서를 받고 해산을 하게 되었다.
결국 1집은 도산을 해 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결손 충담금에서 대체했고
살아있는 통장에 오만원씩 출자금 형식으로 일괄적으로 올려 주었다.
2001년 결산 총회후 해산을 했으며 관광차를 두대 대절해 여수 오동도에 관광을 갔다.
점심때 횟를 시켰는데 회원님들이 먹고 남도록 많은 양으로 실컷 먹도록 하였다.
정말 동네 돈이 무서웠다.
삼백만원도 그해 삼월달에 받아 백암 온천을 갔다 오면서 최종적으로 해산 되었다.
해산을 발표하고 며칠후 금고에 깊숙히 관여했던 원로 한분(김성준)이 찿아왔다.
자기가 멋진곳에 가서 술을 한잔 대접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왜 그러냐구 여쭈어 보니 "어떻게 하다보니 설립은 했는데 마무리를 잡음없이
할수 있을까? 노심초사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하며 깔끔하게 정리되어 기분이 좋아
한잔 사겠다"는 이야기 였다.
"나는 어르신 대접을 받은걸로 하겠다"고 사양을 했다.
몇년후 회관에 있던 서류는 정월 대보름 행사때 불에 태워버려 모든게 끝을 맺게
되었다.
東方 徐希京
※강당마을 (8)정주권 도로를 기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