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황하의 영웅 (53)
제 1권 난세의 강
제8장 천자를 활로 쏘다 (2)
노(魯)나라에서 공자 휘가 노은공을 살해한 사건은 다른 제후국들에게도 전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군주를 살해한 공자 휘를 비방하는 소리와
노환공(魯桓公)의 계승에 대한 정통성 시비로 시끄러웠을 것이나,
이미 도덕과 정의가 상실된 시대였던 탓일까.
약속이나 한 듯 모두들 함묵(含默)했다.
자신들과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노은공(魯隱公)과 두터운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정장공만은 다소 고민했다.
- 노나라를 칠 것인가. 아니면 계속 화평을 유지할 것인가?
그 무렵, 새로 군위에 오른 노환공(魯桓公)이 사자를 보내왔다.
자신의 즉위를 인정받으려는 외교사절 이었다
정장공(鄭莊公)이 그 사절단을 접견하지 않는다면 정, 노의 밀월시대는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장공의 고민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 노나라와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다.
정장공(鄭莊公)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랬다. 그는 국익에 도움이 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노나라 사신을 들게 하라.“
이로써 정나라와 노나라 사이에는 예전처럼 외교사절단이 끊임없이 왕래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 송(宋)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정장공과 매년 싸움을 벌이다시피 하던 송상공이 신하의 손에 살해당한 것이었다.
송상공은 정장공과는 악연이었다.
앞서 기술했듯이 위나라 임금이었던 주우의 꼬드김에 넘어가 정(鄭)나라를 친 것에서부터 그 악연은 시작되었다.
그 뒤로 매년 송상공은 군사를 징집하고 조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툭 하면 정장공이 지난날의 복수를 빌미로 침공해왔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송상공은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정장공을 견제하기 위해 늘 주변의 나라들과 전쟁을 벌였다.
어느덧 정장공과 송상공은 세력을 다투는 라이벌 관계가 되어 있었다.
재위 10년에 열한 번의 전쟁을 치러 백성들이 군주의 명을 견디지 못하다.
<사기>와 <춘추좌전> 모두 이때의 송(宋)나라 사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성들의 고통과 불만이 어느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문장이다.
당시 송(宋)나라에는 두 명의 실세가 있었다.
한 사람은 병권을 맡은 대사마 공보가(公父嘉)였고, 다른 한 사람은 내정을 담당한 태재 화독(華督)이었다.
조직 특성상 권세를 가진 자가 두 명 이상 있으면 그들은 서로 견제하고 다투게 마련이다.
공보가와 화독도 예외는 아니었다.
송상공이 즉위한 이래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병권을 쥔 공보가(公父嘉)는 국정에 대한 영향력이 높아진반면,
내정을 맡은 태재 화독(華督)은 위축되었다.
'이 상태로 나가다간 송나라는 망한다.‘
화독(華督)의 눈에는 이렇게 비쳤다.
날이 갈수록 공보가(公父嘉)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으며,
마침내는 그를 제거하리라 마음까지 먹게 되었다.
어느 날, 화독(華督)은 길을 가다가 비단 수레를 타고 가는 한 여인과 마주쳤다.
그는 첫 눈에 그 여인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곁을 따르는 가재(家宰)에게 물었다.
"저 여인이 누구냐?“
"사마 공보가의 아내 위씨(魏氏)입니다.“
"공보가의 아내?“
화독(華督)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그가 공보(公父嘉)가를 제거하고 그 아내 위씨를 빼앗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무렵, 공보가(公父嘉)는 정장공과의 한판 싸움에서 크게 패해 돌아온 후 이를 갈며 복수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대대적인 징집을 벌였고, 연일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사방에서 원망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일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과부와 아비 없는 자식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또 전쟁을 일으키려하니 도무지 살 수가 없다."
내정을 책임지고 있는 화독(華督)이 이런 원망의 소리를 듣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기회다 싶어 심복 부하를 군대 안에 풀어 병사들의 불만을 부추겼다.
- 지금까지의 전쟁은 모두 공사마가 일으킨 것이다.
내달에 또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칠 것이라고 한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는 동안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날이 갈수록 병사들 사이에는 두려움이 일었고 공보가(公父嘉)를 원망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태재 화독(華督)이라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
화독 어른의 집을 찾아가 공보가(公父嘉)를 만류해달라고 부탁해보자!"
누군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좋은 방법이다. 지금 당장 태재 화독(華督) 어른의 집으로 가자.“
병사들은 떼를 지어 화독의 집으로 몰려갔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들은 문을 두드리며 외쳐대기 시작했다.
"이제 전쟁이라면 진저리가 납니다.
태재께서는 저희들의 괴로운 심정을 헤아리시어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 해주십시오.
칼과 창도 날을 벼를 틈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독(華督)은 방 안에 들어앉아 가재(家宰)에게 명했다.
"대문을 열어주지 말고, 문틈으로만 군사들을 위로해주어라.“
가재가 마당으로 나가 대문 안에서만 그들을 적당히 위로하자 병사들은 더욱 간절히 호소했다.
"태재를 한 번만 뵙게 해주십시오.“
시간이 지날수록 대문 밖의 병사들 숫자는 늘어갔다.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병사들은 그 곳을 떠나지 않고 계속 농성을 벌였다.
"아무래도 나리께서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재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저들의 분위기는 어떤가?“
"대문이라도 부술 기세입니다.“
화독(華督)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느때와 달리 갑옷을 걸쳤다.
특별히 칼도 꺼내어 허리에 찼다.
밖으로 나가 문지기에 명했다.
"대문을 열되, 병사들에게 오와 열을 맞추어 정렬하게 하라.“
문지기가 전하는 말에 병사들은 환호성을 올린 후 일제히 대열을 갖추었다.
이윽고 화독(華督)이 대문 밖으로 나갔다. 3백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화독의 입을 주시했다.
화독(華督)은 병사들이 잔뜩 흥분해 있음을 확인하고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송나라의 병사들이여!“
화독은 첫마디를 이렇게 토했다.
그 외침 소리는 뜨거웠다.
"................."
"우리 송나라는 은왕조의 후예로서 예부터 평화를 사랑하였다.
주왕조에 들어와서도 행복과 안정의 땅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지금의 주공이 공보가(公父嘉)를 총애하면서부터 우리 송나라는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는 저주의 땅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것이 공보가(公父嘉)가 병권을 제 마음대로 휘두르기 때문이다.
우리 송나라는 10년 사이에 열한 번의 전쟁을 치렀다. 이 어찌 백성들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맞습니다.“
"옳소!“
병사들은 두 손을 흔들며 열광했다.
화독(華督)은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나는 이러한 불행을 막기 위해 수차 주공에게 간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공께서 공보가(公父嘉)의 말만 편협하게 들으시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음달이면 공보가는 또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치러 갈 것이다.
여러분이 무슨 죄가 있기에 아무 이득도 없는 전쟁터에 끌려나가 목숨을 빼앗겨야 한단 말인가.
여러분의 가족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가장(家長)을 전쟁터로 내보내고 불안과 근심과 초조에 몸을 떨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웅변이었다.
아니 선동이었다.
그는 달변가는 아니었으나 흥분해 있는 병사들을 격정 속으로 몰아 가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나다를까, 화독(華督)의 연설을 듣고 난 병사들은 두 주먹을 움켜쥐며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국적(國賊) 공보가를 죽이자!“
"태재를 모시고 가서 백성을 못살게 구는 도적을 해치워버리자.“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어 이제는 화독조차도 그들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송나라의 용사들이여, 내 말을 들어라!"
화독(華督)은 겨우 그들을 진정시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공보가(公父嘉)가 비록 악독하기는 하지만 주공께서 사랑하는 신하이다.
이대로 몰려갔다가는 금방 소문이 나서 궁으로 달아날 것이다.
그리되면 도적을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게 되며, 오히려 여러분만 아까운 목숨을 잃게 된다.“
"태재께서는 저희들을 위해 좋은 계첵을 내어주십시오."
화독(華督)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병사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모두들 입을 다물고 공보가의 집으로 가라.
가는 도중에 절대로 흥분하거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공보가의 집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소리 없이 집을 에워싼 후 내가 공보가(公父嘉)를 불러내면 그때 그대들이 나서서 나라의 큰 도적을 해치워라.
이것만이 나라를 구하고 그대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다.
내 말대로 할 수 있겠는가?“
"태재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화독 앞에는 수레가 대령해 있었다.
화독(華督)은 병사들에 떠받들려 수레 위로 올랐다.
수레는 공보가(公父嘉)의 집을 향해 달렸다.
수백 명의 병사들이 소리없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