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8일 목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성모님의 탄신 축일은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5세기 말에 세워진 예루살렘의 ‘마리아 성당’의 봉헌일인 9월 8일을 성모님의 탄생일로 잡으면서 이 축일이 시작되었다. 성경에는 성모님의 탄생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성모님에 대한 신심은 초대 교회 때부터 믿어 온 중요한 신심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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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오 1,1-16.18-23)
Behold, the virgin shall be with child and bear a son, and they shall name him Emmanuel, which means “God is with us.”
말씀의 초대 새로운 메시아는 다윗처럼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의 뿌리는 아득한 시절로 올라가고, 여인에게서 메시아가 태어난 뒤,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그가 남은 자들의 목자로 나서게 될 것이다. 미카 예언자는 그가 바로 평화라고 외친다(제1독서). 예수님의 족보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예수님 안에서 이어지고, 또 절정에 이르게 됨을 보여 준다. 족보는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직계 후손이시며, 약속된 메시아이시고,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실 것을 예고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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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사가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실 것을 증언해 줍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잉태하여 낳게 되기까지는 남편인 요셉의 공로가 큽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가 혼인하여 함께 살기도 전에 아기를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남몰래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모든 것을 조용하게 해결하기로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요셉은 얼마나 많은 날들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은총으로 요셉의 고통을 감싸 안아 주시고, 요셉은 마리아를 감싸 줍니다. 이렇게 해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는 전적으로 요셉의 공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마리아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 하였듯이, 요셉 또한 말없이 주님의 종이 되기를 주님께 맹세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를 통하여 이루어진 주님의 탄생 신비가 결정적으로 요셉의 도움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은 요셉의 지극한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충직한 주님의 종,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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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려 합니다. 복음은 이 사실을 담담히 이야기합니다. 그런 결정이 있기까지 요셉은 고뇌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본인 스스로’ 떠날 결심을 했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파혼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은 ‘마음먹고’ 참아야 합니다. 요셉 성인에게 오셨던 천사를 기억하며 ‘속도’를 조절해야 합니다. 작은 생각이 ‘큰 생각’을 이해하려면 힘이 듭니다.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그렇게 해서 생겨납니다. 요셉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이끄심을 만나자, ‘하느님 중심’으로 전환했습니다. 이후 그는 사람이 바뀝니다. 오해는 저절로 없어졌습니다. 은총의 철저한 개입이었습니다. 지금 이해할 수 없으면 한 번쯤은 ‘건너뛰어 봐야’ 합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려 애쓰는 것이지요. 그것은 삶의 ‘닫힌 공간’을 여는 행동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변화를 가져오는 행위입니다. 시련을 견디어 냈기에 요셉은 성가정의 일원이 되셨습니다. 성숙한 신앙인 역시 먼저 고통을 겪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금방 천사를 보내 주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이 말씀을 하셨던 천사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오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프로야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막바지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응원하는 팀의 승패가 더욱 더 큰 관심사가 되었네요. 그런데 얼마 전의 일입니다. 비가 올 듯 말 듯 하다가 야구경기가 시작되었지요. 일기예보에서도 비가 온다고 했기에 빨리 경기를 진행해야 게임이 성립되는 5회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만약 5회가 되기 전에 비가 와서 경기를 할 수 없게 되면 이기고 있다 하더라도 무효 경기가 되거든요.
다행히 제가 응원하는 팀이 먼저 1회에 점수를 얻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랬지요. 또 혹시 모르니까 빨리 경기가 진행되길 원했습니다. 이제 경기가 성립되는 6회가 되면서 오히려 비가 오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고 있었고, 6회 이상이 되어 비가 많이 와서 경기를 할 수 없게 되면 강우 콜드 게임이라고 하면서 그때까지의 점수로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비 오길 원하지 않았다가 또 비가 쏟아지길 원했던 제 모습을 보면서, 조금 비겁하고 정당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이기적인 모습이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다른 이들을 이기고 짓눌러서 그 위에 올라가야 하는 치열한 경쟁사회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기도 역시도 남과 비교하는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신부님을 찾아가 “신부님, 제 여섯 형제가 잘 때, 저는 자지 않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라고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신부님께서는 “주님께 기도할 때, 형제들을 비방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아마 더 좋았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드러내고 확대하는 습관으로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이 건설적인 생각을 간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가 나를 통해서 조금 더 완성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예수님의 잉태를 거부하지 않으셨던 성모님께서 태어나신 날입니다. 성모님을 떠올리며 묵상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비겁하게 피하려 하지 않으시고, 정정 당당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사실 왜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주시냐고 따질 만도 합니다. 잘 살고 있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똑같은 대우를 요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비겁하게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공법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진정한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역시 주님 앞에 비겁한 모습은 갖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은 물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생각으로 주님의 뜻을 방해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성모님과 같은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결심과 믿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원한 젊음을 선물한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구원의 여성성
-정희완 신부-
사람은 누구나 다 이기적이지만, 지나온 제 삶의 시간에 비추어 볼 때 여성보다는 남성이, 일반 신자보다는 사제가 더 이기적인 것 같습니다. 괴테는 여성적인 것들이 우리를 구원하리라고 말합니다. 물론 괴테의 이 말에는 약간의 다른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지만, 남성으로 살아온 제 삶의 모습에 비추어 보면 볼수록, “여성적인 것들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라는 괴테의 말이 참 실감 나게 다가옵니다. 여성적인 것, 참다운 여성성, 어머니의 마음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세상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일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내 삶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무게가 여전히 크게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 자신이 체험하는 여러 사랑 중에 어머니의 사랑만큼 헌신적인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가끔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내 생이 참 풍요로워짐을 느낍니다. 이 이기적인 세상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결혼한 여성이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든, 더 나아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자기 자신 안에 참다운 여성성, 부드럽고 따뜻한 어머니의 마음을 간직한 모든 사람은 우리의 어머니들입니다. 이 땅에 어머니의 마음을 지닌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이 축하인사를 보냅니다.
사랑의 되돌림
-김찬선신부-
가톨릭교회는 어떻게 보면 참으로 집요하게도 마리아의 축일을 이것저것 챙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과 대칭적으로 성모 승천 축일이 있고 오늘 우리가 지내는 마리아의 탄생 축일은 틀림없이 예수 성탄 대축일에 대칭하는 축일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이런 것을 원하셨을까요? 아들을 잘 두었으니 나도 대접 좀 받아야겠다. 아들이 잘 되었으니 나도 영광 좀 받아야겠다. 아들의 탄생을 축일로 지내니 나의 탄생도 축일로 지내는 게 맞다. 뭐 이런 식으로 마리아가 말했을까요? 그럴 리 없지요.
마리아는 오히려 뒤에 숨었을 것입니다. 자식에게 누가 되게 하면서 자식 덕 보려는 어미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마리아의 축일을 많이 지내는 것은 예수의 형제들인 우리 아들들의 어머니께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자식들 생일 챙겨주고 자기 생일은 지내지 못한 어머니, 자식들 먹이느라 자기는 잘 먹지도 못한 어머니, 자식 사랑에 온 생애를 바친 어머니, 이 어머니 사랑을 뒤늦게 깨닫고 사랑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머니 기일에도 기억하고 어머니 생일에도 기억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자주 기억하는 것은 어머니 사랑을 오늘에 되돌리는 나의 행복입니다.
지난 주 젊은 한우리 월례회 때 행복에 대한 나눔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린 새터민 아이 하나가 말했습니다. 북에 두고 온 어머니가 옛날에 자기에 해준 사랑을 추억하는 것이 지금의 자기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와 함께 살면서 부모에게 투정이나 하는 이곳 아이들과 비교하니 어머니의 옛사랑을 현재화하는 그 아이의 사랑이 아리면서도 대견했습니다.
진주조개라고 있지요. 아름답고 영롱한 진주를 만들어내는 조개입니다. 그렇다면 이 진주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솔직히 제가 좀 무식해서 잘 몰랐습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진주인 줄 알았지요. 하지만 진주는 조개가 모래알 같은 자극물에 의해 몸속에 상처가 생겼을 때, 그에 대한 내부반응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랍니다. 즉, 상처 회복에 필요한 온갖 성분이 상처 입은 부분으로 급히 보내지고, 오랜 시간 동안 상처를 치유하다가 마지막으로 얻어지는 것이 바로 진주라는 것이지요.
상처 입은 조개가 그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영롱한 진주를 만들어낸다는 것에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상처 입은 조개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러나 그 아픔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겨내기 위한 노력이 있었고, 그 결과 진주라는 영광을 생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진주가 겪은 것과 같은 상처와 아픔이 삶 안에 분명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그 고통과 아픔을 과연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진주조개처럼 말없이 스스로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나요? 아니면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면서 결국은 남에 대한 불평과 불만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상처와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진주와 같은 영광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오늘 탄신 축일을 지내는 성모님의 삶에서 분명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도 나오듯이 성모님의 삶은 상처와 아픔이 계속된 삶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해야 했으며, 첫아기를 허름한 마구간에서 낳아야만 했지요. 또한 산후 조리도 하지 못하고 이집트로 피난가야 했고, 이집트 피난에서 돌아온 뒤에도 평생을 부유하고 안정되게 산 것이 아니라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며 힘들게 사셔야만 했습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서른 살이 되어 집을 나갔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미쳤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의 못 박혀 죽는 장면을 직접 보았고, 죽은 아들을 당신의 품으로 안아야 하는 아픔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아픔과 상처를 견디어 내기가 쉬울까요?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모두 이겨내셨습니다. 그래서 천상모후의 관을 쓰실 수 있었던 것이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불림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상처받고 아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 상처받고 아파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상처와 아픔이 나에게 진주와 같은 영광을 주기 때문에 끝까지 참고 견디어 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인내를 보여주신 성모님께서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모님과 함께 하면서 진주와 같은 영광을 만들어 내시길 바랍니다.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쉽고 게으른 자에게는 모든 것이 어려운 법이다.(벤자민 프랭클린)
예수님의 족보
-최성기 신부-
신약 성경에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3,23-38) 두 군데에 예수님의 족보가 소개됩니다.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에 소개된 족보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하느님 약속을 성취하실 분으로 이야기해줍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의 족보에는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밧 세바) 등 의외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말은 사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고 남편과 사별한 후 시아버지와 한자리에 들어 아들을 낳은 여인입니다. 라합 역시 이방인으로 예리코의 창녀였으며, 룻은 모압 출신으로서 보아즈를 유혹하여 자식을 얻었습니다. 밧 세바는 이방인인 우찌야의 아내였지만 다윗의 탐욕으로 족보에 이름이 올려진 여인입니다. 죄와 불륜의 흔적이 있는 이 역사를 그대로 족보 속에 둔 것은 인간의 죄와 불륜, 부끄러움을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변화시키시고 이끄시는 하느님의 힘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역사의 방향을 이끌어가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처럼 개인사 안에서 일어난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의 체험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루시려는 계획을 알아듣는 계기가 되고, 성모 마리아가 그러했듯이 내 작은 삶이 하느님 계획의 도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마리아의 삶
- 김석인 신부-
오늘은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님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주신 분이시다. 성모님의 탄생은 세상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의 탄생은 인류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의 삶 때문이리라. 그러기에 성모님의 탄생에 대해서보다 성모님의 삶을 조명해 보는 것이 나의 삶에 희망을 더하게 되리라고 본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읽어 내려가기조차 힘든 예수님의 족보를 나열하고 있다. 그 끝에 야곱의 아들인 요셉과 혼인한 마리아한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곧이어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요셉과 예수의 혈연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족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개입하시고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의 위대함을 볼 수 있다. 성모님은 성령께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어놓으신 분이시다. 그리하여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받은 하느님의 뜻을 즉시 수용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자 하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성모님께서 걸으신 길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완전히 바치신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언제나 아버지의 뜻만을 하신다.”라고 하셨으며, “아버지의 뜻이 자신의 양식”이라고까지 하셨다. 또 스승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얘기를 하기 위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을 때 나의 어머니, 형제자매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이처럼 성모님께서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만을 충실하게 행하신 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 외로이 서 계시면서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에 동참하시고 구원의 길을 함께하셨다. 그러기에 성모님의 탄생축일을 지내면서 성모님께서 계셨기에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는 길을 열어주셨음을 묵상하고, 또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양육하시면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완성하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동참하신 성모님의 삶을 닮아가도록 노력해야겠다.
<존재의 기반, 존재의 이유>
-양승국신부-
자녀를 위해 철저하게 헌신(獻身)하는 부모님들을 만납니다. 자신의 인생 안에 자신은 애당초 없습니다. 모든 안테나가 오로지 자녀에게로 맞춰져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에너지 전부를 자녀에게 쏟아 붓습니다.
‘도대체 인생 왜 저렇게 사나?’ 해도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녀 앞길 잘 풀리는 것만이 소원입니다. 자녀 인생만 잘 풀린다면 자신의 인생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문제없습니다.
약간은 어리석어 보이고, 약간은 무모해 보이는 그분들의 삶에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성모님, 그분 존재의 이유는 바로 아들 예수님이셨습니다. 성모님, 그분 존재의 기반 역시 아들 예수님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운명은 예수님의 운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자녀에게 목숨 바치는 부모님들, 자녀를 얼마나 끔찍이도 챙기는지, 자녀가 가는 곳 마다 따라다니는 어머니들이 계십니다.
어머니의 스케줄은 오직 자녀에게 달려있습니다. 등교시간이 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운전기사 노릇을 자처합니다. 학교 문 앞까지 태워줍니다. 끝나는 시간 맞춰 정문 앞에 차를 대령합니다. 곧바로 학원으로, 또 다시 집으로...자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 ‘척척’ 입니다. 이 세상에 하녀도 그런 하녀가 없습니다.
성모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모님은 그야말로 ‘주님의 종’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이나 고통도 달게 참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 어떤 노고도 힘들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의 Fiat(순명)은 단 한번으로 족하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상황에 따라 부단한 ‘예!’가 필요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성장해 가신 예수님에 따라 성모님 역시 성장해 가셔야 했습니다. 나자렛에서의 오랜 준비를 끝낸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위해 길 떠나실 때, 성모님 역시 또 다른 먼 신앙의 길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공생활을 무사히 마치신 예수님께서 지상생활을 마무리 짓고 아버지께로 향해 가실 때, 성모님 역시 또 다른 기약 없는 먼 길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한평생 요구되었던 지속적인 떠남의 삶, 수시로 요청되었던 지속적인 자기포기의 삶이 바로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단 한번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었던 Fiat(예!)의 삶, 끝도 없이 요구되었던 변화와 쇄신의 삶, 안주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았던 영원한 이방인의 삶이 바로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한 평생 아들 예수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깨어날 때나 잠이 들 때나, 길을 갈 때나 집에 있을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 언제든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과의 일치 속에 계셨던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어머니의 탄생, 위대한 탄생
-김찬선신부-
어머니의 탄생, 위대한 탄생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위대한 인물의 탄생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있었다. 문제의 인물 탄생에도 언제나 어머니가 있었다. 유전자를 이어 받았다는 뜻이라면 아버지도 있지만 유전자 아닌, 아니 유전자 이상의 의미로 어머니가 있다.
꽃이 이 꼴이 된 것은 유전자 때문만이랴! 햇빛을 주지 않고 물을 주지 않아도 그 꼴이 되었으랴!
위대한 어머니는 그저 유전자를 대물리지 않고 자기 무화와 수난으로 생명과 사랑을 대물린다. 그러니 세상에 초라한 어머니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위대한 어머니 중의 어머니는 하느님을 대물린다. 오늘 탄생하신 마리아도 하느님의 대물림이다. 그리고 예수께 하느님을 대물리실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탄생 축일에 자녀들에게 하느님을 대물리는 위대한 어머니들의 탄생이 수 없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 당신 아드님의 딸”
-전삼용신부-
오늘 조금 어렵거나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러나 차근차근 잘 묵상해보시면 성모님의 참 모습을 더 깨닫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그의 어머니 태중에서 마리아의 인사를 들었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차 기뻐 뛰놀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성령으로 가득 차니 태중의 아들도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이미 태중에서부터 누렸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미 당신 어머니의 태중에서 당신의 선구자로 선택된 요한을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 세례자는 이미 태중에서부터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 하느님께 봉헌된 나지르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태중에서는 예수님께서 요한을 영적으로 새로 나게 하셨지만 성장하셔서는 그 상황이 역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찾아가셔서 당신에게 세례를 베풀어 줄 것을 청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줌으로써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바로 그 때부터 요셉의 아들이 아닌 하느님의 아들로서 공생활이 시작됩니다. 이번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새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두 분이 서로 상대를 탄생시키는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 상상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닙니다.
먼저 삼위일체 안에서부터 이런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모든 인간관계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이렇게 서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삶이 아니라면 아직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령 안에서 성자를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자가 없었다면 아버지도 있을 수 없고 성령님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서로가 존재하기 위해 상대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서 당신의 모든 것인 성령님을 보낼 대상이 없다면, 또 아들이 아버지께 받은 성령님을 다시 아버지께 돌려드리지 않는다면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님도 존재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각자 혼자서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당신의 모든 것인 성령님을 보내심으로써 아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고, 또 아들이 당신이 받은 성령님을 다시 아버지께 보내심으로써 아버지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움직임입니다. 즉, 사랑 자체가 상대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원인이요 목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 아니라면 하느님도 세상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새로 태어나고 새로 탄생시키는 움직임이 없는 누구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생기기 전부터 자녀를 사랑합니다. 물리적 시간이 아닌, ‘이성적인 시간 안에서’ 아버지와 성령님은 성자께서 생기기 전부터 그 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자를 통해서만이 아버지는 참 아버지가 되고 성령님은 참 사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한 두 사람은 그 사랑 안에 충분한 행복을 누리지만 그 사랑의 열매를 바라고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앞으로 생기게 될 자녀를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께서도 성령 안에서 사랑하시며 새로 탄생될 열매를 이미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마치 하와가 아담에게서 나와 한 몸을 이루듯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해 태어나신 분이 계셨으니 바로 ‘마리아’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알고 있지만, 그 이전에 성자께로부터 마리아가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에 교회 안에서 자주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의 딸”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창조 이전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첫 열매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을 위해서 태어나게 하셨듯이 마리아도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창조된 것입니다.
마리아 또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룸으로써 교회를 탄생시키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 불립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열매로 탄생 이전부터 그분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교회는 마리아와 한 몸을 이룸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됩니다. 마치 마리아께서 성자와 한 몸을 이루어 아버지와 일치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 이사악은 야곱을 나았으며...’ 라고 끝까지 가다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끝을 맺습니다.
이스라엘 족보에서 여자는 빠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서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가 되어야 하는데 느닷없이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셨다.’고 여자가 족보에 들어가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태어나신 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수동적으로 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여자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와 성모님에게서 예수님이 탄생하시는데 요셉과의 부부관계에서 탄생하신 것이 아님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쓴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모님께서 하느님과 일치하여 나셨으며 성모님과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모든 교회의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며 성모님과 한 몸을 이루고 성모님과 한 몸을 이룸으로써 결국 성령 안에서 성자와 성부와 한 몸을 이룹니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 되기 위해 성자께서 마리아께로부터 육신을 취하신 분이십니다. 성자께서 성모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으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성모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참 성자를 만날 수 없습니다.
오늘 성모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마리아께서 요아킴과 안나를 부모님으로 두고 있지만 그 분의 참 부모님은 하느님이십니다. 그 분만이 성자께로부터 직접 창조된 첫 번째 열매이고 그래서 그 뒤에 오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 물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성자께로부터 태어나셨지만 다시 그리스도를 탄생시키십니다. 마치 예수님과 요한이 서로를 탄생시키셨던 것처럼 성자와 마리아는 서로를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부부가 혼인하여 살다보면 서로 변해갑니다. 한 사람만 변하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서로를 새로 태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안에서 이웃의 어머니가 되고 또 이웃의 자녀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관계가 중요하고 사랑으로만 새로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동네 공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공터 한쪽에서는 성당의 교우들이 ‘가톨릭을 소개합니다.’라는 홍보물을 들고서 열심히 전교를 하고 있었고, 맞은편에서는 약장사가 목청을 높여 약을 열심히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성당 교우들이 전교하는 곳에는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지만 약장사 주변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북적댄다는 것이었지요.
시간이 흘러 해가 지기 시작하자, 성당의 교우들과 약장사는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당 교우 중의 자매님 한 분이 약장사에게 가서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켜서 약을 잘 팔수가 있죠? 저희는 아무리 전교를 잘하려고 해도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던데요.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을 좀 가르쳐 주세요.”
이 질문에 약장사는 한참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자매님, 사실 이 약은 가짭니다. 하지만 난 이 가짜 약을 진짜처럼 팝니다. 나 같은 약장사도 가짜를 진짜처럼 파는데, 당신은 진짜를 어떻게 그리도 확신 없이 전하십니까? 그러니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는 것이지요.”
이 약장사의 말이 우리들의 가슴을 울립니다. 사실 많은 신앙인들이 전교를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하지를 않지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약장사의 말처럼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신을 갖게 하는 굳건한 믿음이 없기에, 주님을 증거하는데 자신 없어 하고 또한 이 세상을 자신 있게 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확신에 가득 찬 큰 믿음을 간직하고 사셨던 성모님의 탄신 축일을 기념합니다. 성모님이야말로 굳은 믿음, 큰 믿음을 보여주셨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어머니, 그리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하느님의 뜻을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세상의 구원은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이 말씀에 대한 믿음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역시 그러한 믿음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약장수의 말처럼 진짜를 가지고 가짜처럼 사람들에게 전하는 흐릿한 모습이 아닌, 진짜를 가지고 더욱 더 진짜처럼 사람들에게 전하는 확신에 찬 우리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모습이 성모님의 모습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세상에 증거하는데 확신을 갖고 합시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동정으로 잉태하여 나셨습니다. 계시의 원천은 성경과 성전입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처녀로 아기를 잉태한다는 사실, 또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성모님 역시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믿는다는 것처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이성적인 것이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신앙의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간혹 신의 존재를 부인하며 살아가지만 세상엔 인간이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것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모두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을까요?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을 지내며 신앙적으로 모범된 삶을 사셨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셨던 성모님처럼 우리 자신들도 오롯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만을 섬기며 항구하게 살아갑시다.
신앙의 족보 -이종진 신부-
마태오 복음사가가 그저 예수님의 ‘혈연상’의 족보를 전해 주는 데만 관심을 가졌을 리 만무하다. 예수님의 족보는 무엇보다도 ‘신앙’의 족보였다. 따라서 이 족보에 담긴 의미는 임마누엘 하느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은 신앙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존재하는 분이라는 고백일 것이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까지의 족보가 기껏 성경의 한 페이지에 다 담을 수 있는데 비해 어떤 불멸의 존재가 그 이후에 계속되는 신앙의 족보를 기록했더라면 아마도 이 세상 안에 있는 모든 책을 합한 분량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 이후의 신앙의 족보는 우리 각자에게까지 미치고 있지 않은가? 필시 전능하신 분의 기억 속에는 인간의 손으로는 기록할 수 없는 방대한 양의 족보가 다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편에서 기억할 수 있는 족보상의 이름도 더러 있다. 바로 성경의 족보에 거명된 이름과, 더 가까이는 200년 전 이 땅 위에 신앙을 정착시킨 한국 순교성인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는 나에게 직접 신앙을 전해 준 육의 부모나 영적 스승들이 그분들이다. 신앙의 족보에 올라 있는 수많은 영적 친지 중에 적어도 내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친밀한 분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늘 좋은 일이다.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니까. 몇몇 분들의 이름이 얼굴과 함께 떠오른다. 어머님, 수녀님, 수도회 선배들`…. 이제는 내 편에서 신앙을 전해 줄 사람을 낙점하고 공을 들일 차례다. 당장 눈앞에 떠오르는 대상이 하나 있다. 작년에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 연구실까지 따라와서 귀찮을 정도로 신앙에 관한 질문을 하던 새내기. 지금은 군생활을 하고 있는데 무척 정이 가는 친구다. ‘마음은 마음에게 말을 건네고’(뉴먼 추기경), 영은 영을 낳고…. 이렇게하느님의 정신 안에서 신앙의 족보는 계속 작성되고 있을 것이다.
새벽을 열며
어제 아침, 저의 동창 신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난데……. 내가 오늘 어느 본당에서 미사가 있거든? 그 미사 끝나고 너 보러 성지 갈게……. 그런데 생각해보니 네가 미사 하고 있을 시간인 것 같다. 그러니까 네 방 번호 좀 가르쳐줄래? 내가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저는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제 방 번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지에서 11시 미사와 성지 설명까지 모두 끝내고 동창 신부를 만나기 위해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깜짝 놀랄만한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글쎄 동창 신부가 냉장고에서 요플레를 꺼내 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큰 소리로 말했지요.
“너 그거 정말로 먹은 거야? 왜 먹었어?”
동창 신부가 깜짝 놀라더군요. 하긴 요플레 하나 먹었다고 큰 소리로 “왜 먹었어”라면서 다그치니 누가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혹시 아까워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사실 너무나 오래되었거든요. 즉, 유통기간 자그마치 넉 달이나 지난 요플레였습니다. 냉장고를 잘 열지 않다보니, 유통기간을 넘긴 음식들을 버리지 않고 그냥 두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동창 신부의 속이 괜찮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동창 신부에게는 “유통 기간이 얼마 안 지난 거야.”라면서 안심시켜주었지만, 그리고 “믿음만 있으면 절대로 탈나지 않아.”라는 말도 자신 있게 했지만 솔직히 걱정은 됩니다. 너무나 오래된 것이고, 더군다나 다른 것도 아닌 우유 성분이 들어 있는 요플레라서 말입니다.
‘유통기간이 지났으니까’ 하면서 얼른 버렸다면 어제와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니겠지요. 유통기간이 지난 것은 분명히 탈이 날 수 있으니 버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그대로 치우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 피해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겪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이렇지 않을까요? 버려야 하는 것들은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데 꼭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버리지 못함으로써 내가 상처를 받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아픔을 주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내 안에 있는 욕심들과 뒤로 미루는 게으름들이 이렇게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족보를 보여줄까요? 바로 족보를 통해서 내 것이라고 하면서 버리지 못하고 꼭 움켜잡으려고 했던 선조들이 어떠했었고, 반대로 욕심과 게으름을 버리고 주님께서 원하신 모습대로 살았던 선조들은 어떠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바로 선조들의 모습을 통해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요? 주님의 뜻과 반대로 나아가면서 자신의 것을 움켜잡고 있었던 미련한 선조들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예수님, 성모님, 그리고 주님의 뜻을 철저히 따르려 했던 많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의 모습을 따라야 할까요? 그 선택은 바로 여러분의 몫입니다.
유통기간이 지난 음식을 버립시다.
빠다킹신부
복된 존재
-최혜영 수녀-
예수님의 어머니를 ‘복되신 동정 마리아’라고 고백하는 것은 갈라짐 없이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인류 모두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오롯한 믿음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의 결합으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을 찾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원형이며 공동체입니다. 나자렛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탁월한 하느님의 딸, 구세주의 어머니 등으로 추앙을 받고 있지만, 우리와 거리가 먼 어떤 분이 아니라 구세주를 품은 여성으로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보편적 인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마리아와 같이 복된 존재, 선하신 하느님 가족의 일원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생동하는 신앙으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복된 존재인가를 천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
성모님처럼 주님을 잉태하게 하소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한만옥 신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에서부터 예언된 분이고, 4천 년 동안 준비되고 기다려 온 분이었듯이 성모 마리아도 그렇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써 그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되찾아 주실 구세주를 약속하셨다(창세 3,15 참조). 그 약속 중에는 구세주를 낳으실 어머니도 예언적으로 암시되어 있다. 오늘 독서인 미카서에도 구세주를 약속하면서 그분을 낳으실 어머니를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미카 5,2).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 지존하신 분을 잉태할 여인은 마땅히 순결하고 하자 없으신 분이어야 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 여인이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셨고, 죄에 물들지 않도록 준비시키셨다.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그 순결한 태중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여 열 달 동안 품어주셨고, 세상에 구세주를 전해주셨다.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주님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 주님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선 성모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순명으로 내 안에 주님을 받아들여 모셔야 한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어떻게 세상에 주님을 전할 수 있겠는가? 성모 마리아의 탄신을 경축하는 오늘, 나도 성모님처럼 주님을 잉태하여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성모님의 그 높은 겸손과 깊은 믿음을 청해야겠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양승국신부-
<그분 앞에 향기로운 꽃다발 한 아름>
‘어머니’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우선 드는 생각이 어떤 생각이십니까?
제 개인적으로 퍼뜩 떠오르는 생각은 ‘송구스러움’, ‘죄송스러움’ ‘안타까움’ ‘안쓰러움’입니다.
점점 병약해지시고 연로해져만 가시는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멀찍이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어머니이자 만민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떠올릴 때도 그런 생각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성모님의 생애, 아들 예수님의 생애를 어찌 그리도 꼭 빼닮았는지요? 성모님의 생애, 아드님 생애의 복사판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이 그리도 수동형이셨던 것처럼 성모님의 생애 역시 철저하게도 수동형이셨습니다.
‘처녀잉태’라는 그 감당하기 힘겨운 사건 앞에서 성모님은 그저 ‘예, 주님의 뜻이라면 그래야지요’하며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떠나라는 성령의 음성에 아무소리 없이 떠나셨습니다. 이제 그만 되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느님의 지시에 단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년 예수님의 비수 같은 돌출 발언이나 행동 앞에서도 그저 침묵하셨습니다. 아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떠나신다니 가슴이 허망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그저 아들 잘 되기만을 바라시며 눈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간간히 들려오는 예수님과 관련된 걱정스런 소식 앞에서도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하며 끝없는 신뢰를 보내셨습니다.
마침내 아들 예수님께서 모든 사명을 마치고 십자가 위에서 고개를 떨어트리는 순간에도 그저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이런 수동형 성모님은 우리와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떠나간다 할지라도 성모님께서는 절대로 길길이 뛰시지 않습니다. 그저 가슴 아파 어쩔 줄 몰라 하십니다. 우리가 방황을 거듭할 때도 ‘나쁜 자식’이라고 혼내지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가 안쓰러워 눈물 흘리십니다.
우리가 다시 마음을 잡고 그분께로 돌아갈 때면 ‘왜 이제 왔나, 그 동안 뭐했느냐’ 다그치지 않으십니다. 그저 말없이 우리를 안아주십니다. 조용히 우리의 등을 두드려주십니다.
오늘도 지독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시금 성모님께로 다가갑니다. 그분께로 다가갈 때 마다 느끼는 바지만 충만한 위로와 격려를 넘치도록 받습니다. 다가갈 때 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평생 풀지 못할 고민이나 숙제를 대신 풀어주십니다.
성모님의 일생을 묵상할 때 마다 그분께서는 제게 이렇게 타이르시더군요.
“그래, 사느라고 많이 힘들지? 사실 나도 많이 힘들었단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자유롭지. 그래서 행복하지. 자유로워지는 비결, 그리 어렵지 않단다. 단순해지는 것, 겸손해지는 것, 나를 버리는 것, 하느님만 생각하는 것, 모든 고뇌 자비로우신 하느님 손에 맡기는 것, 그것이란다.”
오늘 성모님의 생신이군요. 그분 앞에 향기로운 꽃다발이라도 한 아름 놓아드려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죄인인 우리를 향해 일방적인 위로만 주시는 성모님이시기에 오늘만큼이라도 우리가 그분께 기쁨과 감사를 드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언제나 주님과 함께 살아계신 성모님
-경규봉 신부-
교회가 예수님의 강생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면서 구세사 안에서 이루신 성모님의 업적에 대해서도 소중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성서에는 성모님의 성탄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야고보의 원복음서를 비롯한 몇몇 외경에는 성모님의 성탄에 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5세기 말부터 성모님은 모친이신 성 안나의 집에서 탄생하였으리라 생각하여 안나의 집터라고 추정되는 베짜타 못가를 거룩한 곳으로 여겼다. 또한 그 자리에 마리아 탄신 성당(오늘날의 성 안나 성당)을 건립하고, 성당 축성일인 9월 8일에 성모 탄신 축일을 지내왔다.
8세기에 동방교회의 크레타의 성 안드레아는 자신의 설교에서 이 축일을 증언하였다. 로마에서는 교황 성 세르지오 1세(재위: 687-679)가 언급한 바 있다. 젤라시오 전례서와 그레고리오 전례서에도 이 축일이 언급되어 있으며 이들 전례서를 통해 서부유럽으로 전해졌다. 11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이 축일을 일반적으로 지내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구원 업적과 끊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하느님의 모친 복되신 마리아를 특별한 애정으로 공경한다.”(전례헌장 103) 교회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까닭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하느님께 순명하심으로써 구세주 그리스도의 강생에 온전히 협력하셨다. 성모님은 참 천주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님을 낳으심으로써 예수님의 어머니요 동시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때문에 교회는 일찍부터 교회의 모범으로 성모님을 공경하였다. 더욱이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을 단죄하기 위하여 성모님은 인간 예수님의 어머니이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성모님에 대한 신심과 공경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처럼 성모님에 대한 공경의 배경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시며 참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심(1디모 2,5)을 굳게 믿으며, 이러한 주님을 더욱 공경하기 위하여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성모님의 삶은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또한 성모님은 주님에 관한 모든 일을 언제나 마음속 깊이 간직하셨다(루가 2,19.51). 성모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함께 고통을 나누셨을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뜻에 온전히 따르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이처럼 성모님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사시며 주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 성모님처럼 언제나 주님을 마음속 깊이 모시고,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과 깊은 친교를 이루는 신앙인이 되자. 성모님처럼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신앙인이 되자.
- 허인 신부-
교회전례 안에서 지상탄생축일을 지내는 분은 딱 세분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탄일일 성탄절! 그리고 세례자 요한과 성모님의 탄생축일을 지냅니다. 다른 모든 성인의 축일은 천상탄일, 곧 순교자인 경우 순교일이거나 순교자가 아닌 경우도 대부분 돌아가신 날에 축일을 지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의 축일을 그분들의 천상탄일에 지내면서 그분들의 지상에서의 삶을 기리고, 우리도 성인들을 본받을 것을 다짐하고, 성인들의 전구를 청합니다.
반면에 지상탄생축일을 지내는 세분! 그분들이 계심으로 해서, 우리의 구원이 가능해졌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는 세분의 지상탄생축일을 지냅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가장 기쁜 소식인 구세주의 탄생, 우리가 기뻐하지 않을 수 없고, 축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세주 탄생을 기뻐하는 연장선에서, 구세주가 오실 길을 미리 준비한 세례자 요한, 구세주를 이 세상에 낳아주신 성모님의 탄신축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탄신축일을 지내면서, 구세사 안에서 그분의 역할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묵상해봅니다. 성모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오실 수 있도록 자신을 바치신 분이 바로 성모님입니다. 이런 성모님의 탄생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바로 또 다른 성모님이 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소명을 되새겨 봅니다. 이 세상에 구세주의 모습,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우리의 소명을 되새겨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당신홀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을 구원하실 때에는 당신홀로 구원하시지 않고, 우리인간의 동의를 구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신비를 오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도,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이 신비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지만 당신홀로 구원하시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의 도움을 받아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우리는 가만히 있고, 하느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을 기도합니다. 자판기와 같은 하느님을 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느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고, 제대로 신앙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도록, 우리의 모델이신 성모님께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마음에 새겨둠으로써 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성모님에게서 우리는 신앙인의 참 모습을 봅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참 신앙인의 모습을 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홀로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당신홀로 구원하시지는 않습니다.
새벽을 열며
어느 젊은 수도자가 자신의 수도원에서 가장 존경과 사랑을 받던 수도자에게 이러한 부탁을 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비법을 전수 좀 해주십시오.”
이 말에 오랜 시간 동안 수도생활을 했던 수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7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해왔지만, 단 하루도 평화를 얻지 못했네.”
평화를 얻는다는 것. 오랜 기간의 수도생활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평생을 가도 그 평화를 얻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렇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바로 우리의 인간관계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사람들끼리 끊임없이 미워하고 싸우고 다투는 것이 아닐까요?
얼마 전, 성당의 헌화회 회원들이 제대 꽃 장식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꽃꽂이는 꽃을 그냥 대충 꽂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꽃을 꽂은 뒤에는 약간 뒤로 물러나서 전체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는 다시 부족한 꽃을 꽂고 또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맞춥니다. 바로 앞에서는 전체적인 구도와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지요.
생각해보니 가까이에서 보았을 때 아름다운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스코리아라고 불릴 만큼의 아름다운 자매가 있습니다. 피부가 정말로 백옥같이 희어서 뭇 남성의 선망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의 피부를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바라본다면 과연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 이 자매의 콧구멍만을 본다면 어떨까요? “콧구멍이 너무나 예뻐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모습을 보았을 때에 해당하는 것이지 어느 한 부분만을 가까이에서 보았을 때에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약간의 거리감은 아름다움을 보기 위한 비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어떠했나요? 항상 가까이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가 그 부정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고 확대하곤 합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 찰 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부정적인 모습만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필요한 것은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여유인 것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로, 예수님의 어머니이며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처럼 사람들을 가까이에 다가가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을 갖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철저히 뒤로 물러나서 긍정적인 모습을 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말이 안 된다고도 할 수 있는 예수님 잉태 소식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성모님을 닮아야 합니다. 즉,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뒤로 물러나서 전체적인 조화와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때 이 세상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으며, 그 어렵다는 인간관계의 발전도 가져올 것입니다.
가까이에서 판단하려 하지 말고, 조금 떨어져서 판단하도록 합시다.
빠다킹신부
의탁
-김인한 신부-
갈릴래아 나자렛 동네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태어났습니다. 대단할 것 없고, 남다를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아이로부터 구원은 시작되었습니다. 별반 대단해보일 것 없는 한 아이로부터 세상의 구원을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고 또한 이 아이는 여인들 가운데 가장 행복한 이가 됩니다. 보잘것없는 이 작은 아이가 주님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진정한 믿는 이로 자라게 됩니다. 저는 함께 사는 신학생을 통해서 미래 교회의 빛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나누는 작은 사랑으로 교회의 큰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어설퍼보이는 희생 속에 진정 그리스도를 닮은 미래의 사제들을 보게 됩니다. 성모님의 탄생 축일은 우리에게 희망의 소리를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작고 대단할 것 없는 나를 통해서 주님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심으시려 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 앞에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의 구원 사업에 초대받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모님의 축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미약한 우리들이지만 주님을 위해 자신을 내놓고 성모님처럼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피앗’(Fiat)의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왜 동정녀라 하는가?
-박기호 신부-
성모님의 생신을 경축한다. 스승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최후를 마칠 때 ‘다 이루었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는데 어머니보다 먼저 가는 불효의 문제였다. 그래서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했다. 우리의 모친이 되셨으니 어머니의 생신을 기념하고 챙겨야 하는 것은 제자의 도리다. 개신교 신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복음서 내용이 논쟁의 여지가 있을지라도 우리 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동정녀로 칭송한다. 이스라엘은 고난의 상황에서 늘 출애굽과 바빌론 포로 석방의 역사를 잊지 않았다. 예언자들은 지금이라도 야훼께 대한 믿음을 신실히 하라고 독려하며 구원자로 오실 분은 법통을 지니고(다윗의 후손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날 거라고 했다. 동정녀가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군밤을 심어 싹틀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막연하다. 왜 동정녀였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고살 만할 때나 이민족 지배시대에 우상과 잡신에게 기웃거리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예언자들은 그런 행태를 창녀에 비유했다. 창녀처럼 지조 없이 잡신을 섬기는 자들한테는 구세주를 보낼 수 없고, 처녀성처럼 순결한 믿음을 오직 야훼께만 바치는 백성들에게 보낼 것이라 했다. 이것이 동정녀 사상이다. 가난과 핍박 속에서도 오직 야훼께만 희망을 두고 살아가던 사람들을 ‘아나빔(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이라 부른다. 루카복음의 ‘마리아의 노래’는 당시 아나빔에게 구전되던 민요다. 복음서는 마리아를 아나빔의 대표 인물로 내세운다. 성모님의 축일을 경축하는 것은 신앙의 순결성을 성찰하는 것이다. 내 믿음의 순결성이 하느님께서 축복을 내리는 통로다. 오늘따라 우리 어머니가 보고 잡다.
- 강정웅 신부-
뉴욕에 ‘포옹카페’라는 곳이 있습니다. 복잡한 뉴욕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따뜻한 정이 그리워 찾는 카페입니다. 상대를 몰라도 이곳에선 누구나 서로 안아 줄 수 있습니다. 카펫 위에 푹신한 쿠션이 놓여 있어서 자연스럽게 서로 포옹할 수 있는 곳입니다. 껴안는다는 것은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느낌을 공유하겠다는 의사 표시이며, 포옹은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쌍둥이 중 한 아이가 심장에 큰 결함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대로 놔두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의사들이 말했습니다. 아이는 계속 증세가 악화되어 죽기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간호사가 쌍둥이를 같은 인큐베이터에 넣자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원래 인큐베이터는 한 아이씩 넣어야 하는 게 병원의 규정이어서 담당의사는 고민을 했습니다. 결국 엄마의 자궁처럼 두 아이를 한 인큐베이터에 나란히 눕히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건강한 형이 팔을 뻗어 아픈 동생을 감싸 안았습니다.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픈 동생의 심장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혈압이나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엔 체온이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얼마 후 쌍둥이는 건강한 상태로 인큐베이터에서 나와 정상적으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한 기자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서로 포옹하고 있는 쌍둥이의 사진을 찍어서 신문에 싣고는 ‘생명을 구하는 포옹’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어느 강사가 이 에피소드를 알게 된 후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숙제를 내주었다고 합니다. “부모님을 포옹해 드려라. 그리고 이렇게 말해 봐라. ‘사랑해요. 그리고 대학교에 보내주셔서 감사드려요. 나중에 성공해서 꼭 갚아드릴게요.’” 이런 숙제를 내주고 난 후에 그 다음 강의시간이 돌아와서 강사는 학생들에게 지난 주 내준 숙제를 했는지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더랍니다. “엄마가 처음으로 행복하시데요.” “아버지가 용돈을 더 주시던데요.” “엄마랑 같이 펑펑 울었어요.”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날입니다. 고통 가운데 번민하며 괴로워하는 우리를 어머니의 사랑으로 따스하게 감싸주고 안아주시는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커다란 축복이며 선물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묵주를 들고 자주 기도합니다. 우리 어머니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으면, 성모님의 따스한 사랑의 손길이 그대로 전해짐을 체험합니다. 상처입어 찢긴 마음을 성모님께서 어루만져 주심을 체험합니다. 너무 슬퍼 울고 싶은데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우리를 성모님께서 꼭 껴안아 주심으로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치유를 체험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모님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전해주려고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고통 중에 번민하는 우리를 포옹해주라고 성모님을 보내주셨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주변에 힘들어하고 있는 이웃들을 따뜻하게 안아줍시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시듯이 말입니다. ‘포옹의 힘’을 믿으십니까? 지금 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옆에 계신 분을 한 번 포옹해 보십시오. 성모님의 품 안에서 느끼는 평화로움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 탄생은 구원의 시작
-조욱현 신부-
오늘은 성모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교회가 성모님의 성탄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구원의 역사적 측면에서 마리아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리아에 관한 구약의 예언, 즉 창세기의 원복음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명히 하려는 그런 의미가 있다.그리고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시작이다. 마태오는 복음을 예수님의 족보(1,1-7)로 시작한다.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첫째, `다윗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되어 있는 인물이라는 점, 둘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로서의 합법성, 셋째, 구원 역사의 정점이며 종합이신 예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마태오의 이 족보는 우선 우리 나라의 족보가 장자 중심으로 되어있는 것과도 다르지만, 당시의 유다이즘에서도 여인들의 명단이 열거되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들은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바쎄바이다. 또 하나는 요셉과 관계없이 오직 마리아로부터의 예수님의 탄생이다. `요셉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가 아니라,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마태 1,16)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네 여인들은 죄인들이며, 예수께서는 그러한 죄인들까지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들은 이방인들이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셋째로는 이 여인들이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며,
넷째로 이 여인들의 결혼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결혼이 아니었다. 마리아의 경우도 요셉과 관계없이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이방인이건, 죄인이건, 또 평범하지 못한 결혼을 한 사람이건 상관없이, 인간적인 결함이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선택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리아 역시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 구원계획의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이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어떤 결함에도 상관없이 당신의 주도로서 이루어진다. 즉 선택된 마리아는 인간적 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하느님의 섭리의 표징이 되고 있다.
둘째, 예수의 족보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요셉과 예수 사이에 모종의 단절이 있 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가 출생하였다"(마태 1,16). 여기서 예수의 출생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개입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진정한 아버지가 신비롭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 족보는 예수를 다윗 가문에서 태어난 메시아로 제시하면서도, `예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역할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을 보증하는 요셉의 기능도 등한시하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더욱 중심이 되는 것은 마리아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또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면서 마리아에게서 동정으로 잉태되고 탄생된 사실을 명확히 한다. 요셉은 예수님의 탄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점은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에 그가 당황스러워하고 파혼까지도 생각하며 고민했던 모든 상황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그 탄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임마누엘로서(이사 7,14),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아라는 사실과 더불어 마리아는 일찍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지내는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구세주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기 위한 준비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이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 역시 작은 마리아로서 그리스도를 낳아 주어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잘 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성모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 이기양 신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탄생 축일을 지내는 분은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세례자 요한 이렇게 세 분이지요.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지내는 오늘 복음 말씀으로 신약성경에서 제일 재미가 없는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예수님의 족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 번 보고 들어도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 통 구분이 안될 뿐만 아니라 살펴보면 족보를 이어가는 인물이 거의 남자들로 짜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낳아 이어 가는 인물이 다 남자들이지요. 이렇게 무미건조한 족보가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의 서두에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면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신약성경의 첫째 권인 마태오 복음 그 첫 자리에 읽어도 잘 들어오지 않고 재미도 없는 족보가 죽 나열되고 있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 저자들이 별 생각 없이 집어넣었을 리가 없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죽 이어져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에 함께 하심과 때가 이르러 메시아를 보내셨음을 가르쳐줍니다. 다윗과 아브라함의 직계 후손인 예수님께서 약속된 나라를 세워 가시는 왕, 메시아이시라는 것이 족보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한 핵심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 저자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지금 태어난다는 것을 이렇게 족보를 통해서 밝히고 있지요.
그런데 비슷비슷하게 이어지는 족보의 내용 중에서 좀 색다른 구절이 보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1,16)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이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어야 맞을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낳았고 요셉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 요셉으로, 또 요셉이 아닌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다고 표현하고 있지요. 이 족보를 통해서 우리는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마침내 성취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그대로 마리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족보를 통해서 여실히 확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독서인 미카 예언서에는 구원자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예언되어 있고,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족보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요. 족보 뒷 부분에는 예수님의 탄생 경위와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해명이 되고 있습니다.
우선 처녀인 마리아가 임신하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는데 마리아의 인간적인 어려움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약혼자 요셉 또한 이 사건 앞에서 얼마나 난감하고 혼란스러웠는지가 사뭇 점잖게 표현되고 있지만 그 어려움은 능히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성모님의 탄신 축일인 오늘 복음의 중심은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이고, 요셉의 혼란스러움과 그것을 다시 하느님의 뜻으로 확인시켜 주는 천사의 등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모 성탄 축일이지만 성모님에 대한 내용으로 특별한 것이 없지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성모님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성모님의 사촌 엘리사벳은 유다 산골 마을로 자신을 찾아온 성모님을 보자마자 큰소리로 고백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1,42)
우리는 하느님의 모친이 되신 성모 마리아가 가장 복된 여인임을 믿고 또 알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께 축복을 받은 가장 복된 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탁월한 능력이나 어떤 사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고 또 하느님의 그 은총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긴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성모님의 일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하고서도 성모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고 표현되어 있지요.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1,18)
놀랍게도 성모님은 약혼자 요셉에게 하느님의 뜻을 굳이 구차하게 설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요셉 역시 자신의 일을 떠벌리거나 드러내는 성품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
성모님과 요셉은 똑같은 성품으로 하느님 안에서 묵묵히 어려움을 감내하며 갈등하고 기도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면으로 심사숙고하면서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드러내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드러내주신다는 것이지요.
교회에서는 성모님을 그 탄생에서 승천에 이르기까지 기억하고 신자들로 하여금 그 삶을 본 받기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삶에서 분명한 것을 하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혹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했을 때 오해와 인간적인 시련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성모님은 부정한 여인으로 오해를 받을 수가 있었고, 요셉 또한 사람들로부터 바보로 취급을 받을 정도로 어리석게 비추어졌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있어서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요. 오히려 쉽게 드러내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기도하고 간직할 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때를 택하여 적절히 드러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나머지는 덤으로 받게 됩니다. 신앙 생활에서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지요.
우리 시대에 큰 불행 중의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없는 것까지도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해가며 드러내고 싶어하지요. 또 너나없이 자신을 설명하러 듭니다. 내 뜻대로 따라오기를 요구하고 내 뜻과 다를 때는 쉽게 비판하고 공격하지요. 오늘 성모 성탄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심성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의 뜻에 올바르게 응답하고 산다면 어떤 오해가 있어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또 조금 가슴 아픈 일이 있다고 그것 때문에 의기소침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의 뜻은 때가 되면 드러나게 마련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신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너무나도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갈구합니다. 인정받고 싶어하고 알아주기를 원하지요. 바로 이것이 갈등이 생기는 요인입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해하고 좋은 의견만을 듣기를 원한다면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쉴 새 없이 불안하고 작은 소리에도 상처를 받으며 스스로 부대끼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심지가 굳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의 그런 성품을 우리는 닮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아가기를 노력한다면 설명하려들 필요가 없습니다. 주위의 작은 소리에 흔들릴 필요도 없지요.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이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참으로 큰 사건을 맞이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그렇게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하느님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돌에 맞을 위험에도, 약혼 관계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두 분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살폈고 간직했으며 한결같이 기도하셨지요.
오늘 성모님 탄생 축일에 우리는 예수님 탄생사화를 들었습니다. 성모님의 존재 의미는 전적으로 예수님에 의해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살았던 성모님의 바로 그 삶이 천주의 모친으로서 간택된 배경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 안에서 산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적인 반응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진실, 진리에 맞는 삶을 산다면 굳이 그런 반응에 상처받을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말 없이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혼란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매사를 하느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들에게도 성모님처럼 뿌리깊은 신앙이 자리잡혔으면 좋겠습니다. 굳은 신뢰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 뜻을 묵묵히 실천하는 모습이 바로 성모님의 삶을 따르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시원한 한줄기 가을바람>
-양승국신부-
비 오는 일요일 오후, 오랜만에 TV 앞에 앉았습니다. "이거다!"하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중 제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습니다. "매너 좋고 친절한" 시민을 소개하는 프로였지요.
주인공은 서울 문정동 아파트 단지에서 마을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님이었습니다. 화면에 비쳐진 기사님의 얼굴은 굳이 따로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마음씨 좋게 생긴 얼굴,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그런 얼굴이었습니다.
기사님은 특별히 노인들에게 얼마나 친절했던지, 아파트 노인정에 모인 할머니들은 한목소리로 기사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기사님은 마치 자신의 부모님을 대하듯이 버스를 타는 한 분 한 분 노인들에게 정겹게 인사를 올렸습니다. 무거운 짐이 있으면 다른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 바로 앞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 그런 때문인지 몇몇 골수 할머니 팬들은 기사님 옆을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참으로 마음 훈훈한 정경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사님은 버스가 종점에서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정류소 주변을 말끔히 청소하는가 하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은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그 기사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팍팍한 일상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한줄기 시원한 가을바람 같은 청량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 위에서 숨쉬며 살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는 저마다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내 한 몸 잘먹고 잘 챙기고 잘 살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데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저 그럭저럭 희희낙락하며 때로 동물처럼 지내다가 한평생을 마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색깔의 삶을 살든, 어떤 처지의 삶을 살아가든 자신의 삶을 최대한 성실히 살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임을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 역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삶을 마음 깊이 감사하면서 열심히 살아가셨습니다. 비록 갈등과 번민, 걱정과 두려움의 연속이었던 삶이었지만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셨습니다.
비록 모든 것이 불투명했지만 항구하게 하느님께 충실했던 삶, 그것이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세상만사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맡겼던 삶이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확실하게 제시된 미래를 위해 그 누군들 투신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모님은 전혀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가운데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노력하셨습니다. 언제나 이기적이고 인간적인 길을 버리고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난관 앞에 설 때마다 오직 하느님만을 신뢰하며 끊임없이 그분만을 선택합니다. 여기에 성모님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 예수님의 족보에 등재된 나의 이름
-박상대신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신을 기념하는 축일은 동방교회에서 먼저 지냈다. 이는 마리아가 탄생한 곳으로 여겨지는 예루살렘에 건축된 성녀 안나 성당의 축성기념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마리아의 탄생 장소가 나자렛임을 주장한다.
서방교회에서는 제84대 세르지오 교황의 재임기간(687-701) 중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4대축일을 정하고 우선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이를 경축하였다고 한다. 당시 마리아의 4대축일은 성모영보(주님탄생예고)축일, 성모승천축일, 성모성탄축일, 마리아 빛의 축일이다. 이들 축일들은 모두가 예수와 세례자 요한에 대한 성서상의 탄생예고와 출생, 그리고 마리아에 대한 초대교회의 신심에 근거한 것이다.
마리아의 4대축일 중 “마리아 빛의 축일”은 마리아의 입장에서 본 객관적인 축일이지 마리아 본인의 주관적인 축일은 아니다. 이 축일은 이미 동방교회에서 예수탄생 후 8일째 있었던 예수님의 명명(命名)과 예루살렘성전에서의 봉헌(루가 2,21-40)을 기념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었고 축일의 이름도 “예수와 이스라엘의 만남 축일”이었다. 이를 서방교회에서는 마리아의 축일로 받아들였고 후일 “초 축성과 촛불행렬”을 곁들였다. 1960년 가톨릭교회는 전례개혁을 통하여 이 축일을 “주님봉헌축일”(2월 2일)로 축일명을 변경하였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관한 장소와 일자에 대하여 정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서방교회에서 9월 8일인 오늘 이 축일을 기념하였던 것이다. 이 날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없지만 1854년 교황 비오 9세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9월 8일 성모의 탄신일에서 거꾸로 계산하여 12월 8일로 정하였다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즉 12월 8일 마리아의 잉태 후 9개월이 지난 9월 8일이 마리아의 탄생일이 되는 셈이다. 주님탄생예고축일(3월 25일)도 주님성탄대축일(12월 25일)에서 거꾸로 계산(9개월 전)하여 정해진 것이다.
[복음산책] : 예수님의 족보에 등재된 나의 이름.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신축일에 봉독되는 복음은 17절과 마지막 24~25절을 뺀 마태오복음 1장 전체로서 예수의 족보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의 족보는 마태오복음(1,1-17)과 루가복음(3,23-39)에만 기록되어있다. 둘은 다 구약성서를 토대로 족보를 편집하였지만 비교해보면 조상들의 이름에서 많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표기도 있고 누락된 조상도 있다. 아무튼 루가는 예수님부터 아담까지 77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마태오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2(14× 3)대를 내려가며 기록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두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족보 중 어느 것도 정확한 족보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두 족보는 모두 고고학적으로 조상들의 계보를 밝히기보다는 신학적으로 예수의 정체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밝히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후손으로서 약속된 메시아이시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모든 조상의 계보를 통틀어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
마태오가 편집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신학적으로 두 가지 특이할만한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① 첫째는 족보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고 부인 넷의 이름을 언급한 점이다. 여인들은 다말(3절), 라합(5절), 룻(5절),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6절)이다.
다말과 라합은 여호수아가 정복하게 되는 가나안의 원주민 출신이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인데 나중에 유다에게서 베레스와 제라를 낳게 된다.(창세 38,6; 1역대 2,4) 라합은 예리고를 정찰하러 나간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다고 해서 여호수아가 그녀와 가족들을 이스라엘 가문으로 받아들였다.(여호 6,25) 룻은 나오미의 며느리로서 모압 출신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들어가 보아즈를 만나서 아들 오벳을 낳게 된다.(룻기 참조) 우리야의 아내는 바쎄바로서 다윗이 우리야를 전장으로 내보내 죽게 한 다음 아내로 맞아 솔로몬을 낳는다.(2사무 11,3.15.17; 12,24)
이렇게 마태오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 넷은 모두 이방인 출신으로서 각각 기이한 인연으로 이스라엘 가문과 관계를 가지게 되어 가문의 혈통을 잇게 한다. 이 점은 언급된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를 고려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구원의 역사에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개입하는 하느님의 섭리를 밝히고, 예수님을 또한 이방인의 메시아로 소개하려는 마태오의 강한 의도로 보인다.
② 두 번째로 지적할 점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16절)는 대목에서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났다.”는 점이다. 족보의 모든 부분에, 또 등장하는 4명 여인의 경우에도 아버지가 “주격”으로 아들은 “목적격”으로 구사되지만 이 대목에서는 아들 예수가 “주격”으로 구사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의도를 더 가지고 있다. 하나는 마리아의 동정녀 잉태를 강조하는 것이고(1,18-25), 다른 하나는 예수님, 즉 하느님이 모든 구원역사를 계획하시고 실행하시고 성취하시는 주역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과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23절)께서 직접 자기 백성을 죄에서 해방시켜 구원하실 것(21절)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마태오가 기록한 예수의 족보(마태 1,1-17)를 일년 중 3번 미사복음으로 봉독한다. 대림시기의 12월 17일과 성탄시기를 시작하는 성탄전야미사, 그리고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신축일이다. 반면 루가가 기록한 예수의 족보(루가 3,23-38)는 성서를 공부하는 개인의 몫으로 돌렸다. 마태오는 족보에서 예수가 아브라함의 정통 후손인 다윗의 왕통을 이어받은 메시아임을 보여주며, 루가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가문이 다윗과 아브라함과 아담을 거쳐 하느님께 이름을 보여준다.
우리는 오늘 만이라도 예수님의 족보를 소리 내어 천천히 읽어가면서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계획을 묵상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 많은 인간이 사는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철저한 구원계획에 천지창조 때부터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태오와 루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역사에 꼭 필요했던 사람들, 그가 비록 여자라고 해도 초대해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성취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오늘까지 이어진 예수님의 족보에 바로 우리 각자의 이름도 등재(登載)되어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 1-17)
-유 광수신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족보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역대 상 1장에서는 아담과 아브라함의 족보가 2장에서는 유다의 족보가 3장에서는 다윗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룻기 4, 18- 22에서는 베레스의 족보가 기록. 마태오는 구약성서에서 영감을 받아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였다.
왜 마태오는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기술하였는가? 구약의 예언의 말씀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의 족보는 상당히 중요하다. 그것은 하느님이 역사 안에서 구원의 손길을 펼치시겠다고 나서신 그 순간에서부터 구원의 역사 안에서 이루시는 모든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예수 안에서 성취된다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마태오가 구약 성서를 인용한 것이다. 즉 구약의 구원의 역사가 예수에 의해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마태오 독자들은 유다인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이다. 유다인 신앙이란 율법에 충실하고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구원의 긴 역사 안에서 선민의식을 갖고 있고 그래서 구원은 자기들 안에서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던 사람들이다. 그 구원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었고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과거의 역사를 나열시킨 것이다.
인류 역사는 야훼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생명의 근원이 하느님께 있다. 아브라함에게 모래알 보다 더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다. 신앙의 아버지에게 언약된 것이 다윗 왕 시대에 구체화 되었고 예수에 의해 성취되었다. 이 역사 이외에 인류 역사 안에 존재하는 다른 구원의 역사는 없다. 긍극적으로 전해주고자 하는 역사는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시작하여 다윗에서 번창하고 예수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족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게네시스"라고 하고 그 뜻은 창조, 기원이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라 붙인 것은 예수의 메시아 성에 대한 신앙고백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것이 마태오의 의도이다. 사무 하 7, 8-16절에 나단 예언이 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역사를 완성하실 분은 바로 예수 메시아이시라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역사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개체적인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이 세상에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1,1절에서 신앙고백이 이루워 지고 있다. 2-16절까지는 예수님이 어떤 혈통 안에서 태어나셨는가를 밝히고 있다. 즉 예수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요, 하느님이 파견하신 메시아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이야 말로 이스라엘 역사의 종착지이고 이스라엘 역사를 완성시키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초기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인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고 자기들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태오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유다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가 크리스챤 공동체에 들어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긴 역사가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이것을 끊임없이 고백해야 했었다. 예수야 말로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 족보를 제시해 주고 있다.
족보 전체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보는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고 하느님께 불충했고 윤리적으로 문란한 것이 이스라엘 역사이다. 족보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거기에 있었다. 아담 이후에 우리가 살아 온 역사는 우상숭배, 복수, 불충 등이 뒤범벅이 된 역사이다.
마태오 복음은 그러한 역사를 족보라는 형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가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지상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러한 모든 것을 짊어지고 인류의 역사 안에 함께 하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오신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가장 큰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투쟁의 역사, 불안의 역사를 살아 온 인류 공동체 일원으로서 우리에게 들어오신다. 그리스도는 별개의 세계에 사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 인간 조건 속에 그대로 들어오신다. 예수님의 역사가 구체적인 역사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표명되고 있다. 마태오는 창세기와 같이 예수의 기원을 묘사하려고 하였다. 예수의 탄생은 또 하나의 새 창조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늘과 땅의 기원과 아담의 기원이 기록되어 있듯이 마태오도 예수의 기원을 전한다.
1장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기원과 신적인 기원을 제시해주고 있다. 즉 육적으로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과 신적으로는 성령으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18- 25)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시고 하느님의 역사 속에 인간이 들어간다.
마태오 복음서는 위대한 세 사람의 이름 즉 아브라함, 다윗,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성소의 인간이며 약속과 신앙의 인간이자 믿는 이들의 조상이다. 다윗의 군대는 주님의 이름으로 성전을 치뤘고 예루살렘을 성도로 하는 찬란한 왕국을 건립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종합이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불림을 받으신 분으로 온갖 약속의 실현자이시며 신앙의 세계를 가져오는 분이시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새 백성을 창건하신다. 다윗처럼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든 영적 원수들을 쳐 이기시는 분이고, 새로운 예루살렘을 창립하시고 하느님의 영적 왕국을 세우시는 분이시다. 아브라함은 축복의 상징이고( 복을 빌어 주는 이름) 아브라함의 이름을 특기한 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전 인류에 대한 축복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부여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갈라 3, 16)
마태오는 14세대가 3번이나 되풀이 되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메시아의 재림은 이스라엘의 몰락을 상관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나라는 준비 불충분 여하를 막론하고 이루어 진다. 족보 안에는 바빌론의 유배에 관한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모든 희망의 단절과 온갖 활동의 패망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주 하느님과의 유대관계가 끊겼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또 다시 유대 관계를 이어 놓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충실하지 않을 때도 성실하셨다. 이 연속은 세대의 교체는 주님의 메시지가 이루어지기를, 하느님의 햇불이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발하며 영원히 찬란하게 빛나기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바빌론 유배시의 가장 비참한 시기에도 예언자들은 새로운 예루살렘의 건립과 새로운 성전, 하느님의 새로운 왕국의 건립을 예언하였다.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고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광휘가 빛을 잃고 위대함이 사라지는 바로 그때에 하느님의 말씀은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시고 희망이시며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시고 이스라엘의 꿈이요, 이스라엘의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무미건조한 이 족보는 강렬한 빛을 내면서 이제 최초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죄와 잘못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라는 인성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다는 것이다. 어떠한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하느님은 인간을 사용하시고 이용하시는 것이다. 어두운 과거가 하느님을 제어하지 못하고 인간의 무능력이 방해가 되지 않는다. 작은 것은 모두 위대한 것 안에 흡수되고 불순한 것이 모두 순결의 기초가 된다. 또한 천하고 인간적인 것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적인 것이 되며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분이요, 기름 바름을 받으신 그분을 통해 하느님께 속하게 된다.
이제는 모든 인류의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지고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의 기원은 아브라함도 아니고 다윗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의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고 완성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시작이시고 마침이시며, 알파요 오메가이시기 때문이다.
비록 나의 구원의 역사가 항상 착하고 거룩하게 살아온 역사가 아니고 때로는 죄를 짖고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어둠의 세월을 보냈던 적도 있었겠지만 나를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는 멈추지 않으시고 한결 같으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와 시작할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러 오신 분이시고 바로 이런 나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구원의 역사는 나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해주러 오신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고 내가 그리스도의 구원 열차에 동승할 때만이 구원을 완성시킬 수 있다.
오늘도 나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분 안에서 나의 신앙여정이 완성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면서 우리의 신앙여정을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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