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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라 에바다 막7:16-37
우리들이 주 하나님을 잘 믿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알아야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교회에서 자주 듣는 언어지만 무심코 지날적이 있는데 성경은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된 것을 또 번역된 성경사본을 또 우리말로 번역되다보니 어느 사본으로 번역된 것을 우리말로 번역되었는가도 중요하고 본래 사본중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예수님당시 자주 쓰던 아람어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죠.
오늘은 마라나타, 에바다, 달리다굼, 고르반 등의 아람어로된 단어들의 뜻과 이 단어들이 나오는 성경구절과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호산나 할렐루야 헵시바 등을 살펴보겠습니다. 자 그러면 성경이 무슨 언어로 기록되었는지도 살펴보겠습니다.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지만 구약성경은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졌습니다. 단 에스라서 에레미야서 다니엘서 등에 일부 아람어로 기록된 구절이 있기는 합니다. 히브리어는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언어입니다. 이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BC3세기와 BC2세기에 걸쳐서 헬라어(Greek)로 번역됩니다. 헬라어는 고대 그리스어인데 그리스의 옛 이름이 헬라입니다.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BC323 마케도냐의 알렉산더대왕이 죽으면서 넓은 영토를 네명의 부하에게 분할합니다. 그 중 프톨레미(Ptolemy)라는 장군이 이집트와 유대지방(팔레스타인)을 통치하게 됩니다. 이 후 이집트왕조를 프톨레미왕조라 부릅니다. 프톨레미 2세의 지시와 후원으로 예루살렘에서 알렉산드리아로 72명의 유대인의 학자들이 파견됩니다. 이들은 당시 세계공용어인 헬라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합니다. 프톨레미가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을 지원한 이유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비치해 두기 위함이었으나 놀라우신 하나님의 섭리로 이 헬라어 구약성경은 나중에 복음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신약시대 기독교도인들이 구약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헬라어 사용권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전파의 용이한 도구로 쓰이게 된 것이었죠. 칠십명이 번역한 성경을 칠십인역이라 부릅니다. 라틴어(로마어)로 LXX로 표기합니다. L=50, X=10, 70인역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번역본입니다.
신약시대 때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아람어는 옛 수리아와 그 인근에서 사용한 언어인데 수리아는 지금 시리아와 유프라테스강 부근으로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의 거점지역이 바로 이 근처입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히브리어는 사어가 되었고 포로 귀환 후에 자신들이 사용했던 아람어를 자신들 나름의 언어로 발전시켜서 팔레스틴아람어로 사용하게 됩니다.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에 아람어가 가끔씩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랍오니, 달리다굼, 라가, 에바다, 골고다 마라나타 등의 단어가 그러합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일부 아람어를 봅시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아람어
(1) 마라나타
마라나타는 아람어로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우리 한글성경에 마라나타라는 말이 직접 나오지 않습니만 그 말을 우리말로 번역해 두었습니다. 영어성경엔 Come Lord라고 되어 있네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들어 있고 종말에 있을 심판의 개념도 들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와 요한계시록에 마라나타의 의미가 나옵니다.
(고전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계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2) 고르반
고르반은 히브리어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곧 헌물이라는 뜻입니다.
(레1: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가 주께 헌물을 가져오려거든 너희는 가축에서 곧 소떼나 양과 염소 떼에서 너희 헌물을 가져올지니라.
(민7:12) 첫째 날에 헌물을 드린 자는 유다지파에 속한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더라.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유대지도자들을 야단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권위있는 것으로 여기고 그 전통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이유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랍비들은 하나님의 여러 계명에다가 세세한 조항들을 만들어 붙이고는 유대인들에게 정성들여 가르칩니다. 예를들면 정결 예식에 대한 내용이 구약성경에 나오는데 랍비들은 하나님은 더러운 것을 싫어하시고 정결한 것을 좋아하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정결하게 씻는 것에 대한 규례를 조목조목 만들어 전통으로 전수합니다.
(막7:3-5) 3 이는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4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씻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또 다른 것들을 물려받아 지키는데 잔과 놋그릇과 상을 씻는 것이라 5 이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하매
눈에 보이는 청결만을 강조합니다. 더 자주 더 깨끗하게 씻는 사람이 더 경건한 사람인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7:18-23) 18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그렇게 깨닫지 못하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9 그것은 그의 마음속이 아니라 배속으로 들어가 모든 음식을 깨끗하게 하고 뒤로 나가느니라, 하시니라. 20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에 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들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 간음, 음행, 살인 22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 악한눈, 신성모독, 교만, 어리석음이 나오는데 23 이 모든 것이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하시니라.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예수님의 시대에는 장로들의 전통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를 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서 사람이 만든 전통인데 말입니다. 심지어는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 말씀을 위반까지 합니다.
(마15:3)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느냐?
(막7: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잘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잘 저버리는도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즉 ‘고르반’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는데 부모 봉양대신에 재물을 움켜쥐고 있으려고 어떤 사람들은 경건을 가장한 고르반을 합니다. 혹시 마음을 돌이켜서 부모를 섬기려하나 ‘고르반’으로 맹세한 것은 사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며 장로들이 막습니다. 사람이 만든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막7:11-13)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게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니라.
(마15:8-9)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나를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3) 달리다굼
달리다굼은 아람어인데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구합니다. 어린 딸이 죽게 되었는데 오셔서 손을 얹어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안식일 마다 모이는 집회장소인데 회당에는 태생적인 유대인들도 있지만 개종한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마13:54)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능력이 어디에서 났느냐?
(행14: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행18: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
예수님께서 야이로와 같이 가실 때 큰 무리가 뒤따릅니다. 이 때 12해 혈류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고침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과 대화하시는 중에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어떤사람이 와서 딸이 죽었나이다고 소식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곁에서 들으시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만 데리시고 회당장의 집에 들어 가십니다. 사람들이 심히 통곡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가 죽은게 아니라 잔다고 하시니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아이를 살려내십니다.
(막5:41-42)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즉시 소녀가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님은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분으로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성경에서 구원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그분의 이름 자체가 ‘구원하실 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메시아뿐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되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재치 있는 대답에 회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이방인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잘 보여줍니다.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달라는 가나안 족속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예수님은 개보다 자녀에게 먼저 떡을 주어 배부르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로 거절하셨어요.
구원은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먼저 임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유대인이 예수를 거절하여 그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된 것은 구원이 혈통 아닌 믿음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예수의 구원 경륜을 듣고 자신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만으로도 만족하겠다고 대답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어요.
부스러기 은혜만으로도 자기 딸이 온전해 질 수 있다고 믿은 그녀의 믿음은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있는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어떤 수치도 감수하겠다는 겸손함과 간절함,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딸의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신학 용어를 차용하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예수를 믿는 믿음)이 딸의 구원을 가져온 것입니다.
(4) 에바다
침례요한을 죽였던 헤롯 아그립바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분간 조용히 보내시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았지만 결국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 삼으려 하는 것을 피하여 이방인의 땅 ‘두로’로 피하셨다가 다시 갈리리지방으로 오십니다.
가버나움 성읍을 떠난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북쪽 지중해 연안 도시들인 두로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귀들린 딸을 고쳐주신 후에는 시돈을 두루 돌아다니며 전도하신 후 데가볼리 지역을 거쳐 갈릴리 호수로 돌아오신다. 데가볼리는 ‘10개의 도시’란 뜻인데, 이 도시들은 갈릴리 호수 동편과 요단강 근처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와 인접한 마을에 이르자 사람들이 병자를 하나 데리고 와서 고쳐주시기를 간구한다.
(막7:31-3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와 시돈지방에서 떠나 데가볼리 지방 한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청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무리에서 떼어 따로 데리고 가사 자신의 손가락들을 그의 두 귀에 넣고 침을 뱉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라 35 즉시 그의 두 귀가 열리고 혀를 묶는 줄이 풀려 그가 분명하게 말을 하더라. 36 그분께서 그들에게 명하사 그들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시되 그분께서 그들에게 명하면 명할수록 그들이 더욱더 그것을 알리고 37 또 한량없이 놀라 이르되 그분께서 모든 것을 잘 하셨도다. 그분께서 귀먹은 자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자도 말하게 하신다 하니라.
그 때 갈릴리지방에서 만났던 사람은 어두움가운데 사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은 눈은 보이지만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농아인”이라고 부르는, 청각과 언어의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귀가 먹어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당연히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고 말 또한 어눌한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닫혀진 삶을 살고 있음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병자도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의 손가락을 병자의 양쪽 귀에 넣고, 그 손가락에 침을 묻혀 병자의 혀에 대는 직접적인 접촉 방식을 통해 치유하시는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니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묶인 것이 풀려 곧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에바다는 아람어로 ‘열리라’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Be opened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까? 혀를 묶는 줄이 풀려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는 '사단이나 마귀에게 매어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35). 그러니까 이 사람이 선천적으로 귀머거리가 아니라 살다가 보니 어느 순간 마귀가 이 사람에게 들어와 귀를 막아버리고 혀를 묶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원인도 모르고 이러한 현상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사는 인간의 현실을 보며 탄식하십니다(34).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행동이 좀 특이합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33).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의미가 있는 행동입니다. 이 사람은 듣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사가 통하지 않는 암흑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 배려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행동은 일종의 수화 즉 ‘touching communication'을 하신 것입니다. 손을 대어서 의사소통을 하신 것입니다. 접촉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을 심으신 것입니다. 위로를 주시고, 확신을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셨다고 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희랍의 교부들은 예수님이 개인적인 능력을 과시하고 싶지 않으셔서 그렇게 하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다른 기적을 보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른 때에는 대중 앞에서 거리낌 없이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라는 신학자는 예수님께서 당황하기 쉬운 장애자의 공포심리나 신경질적인 반응을 고려하신 행위라고 해석합니다.
저는 이 해석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자발적으로 온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데리고 왔다(32). 거의 끌려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황해 하고 두려워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심리적 안정과 평안을 회복하고 나아가 일대일로 만나시기 위해 개인적인 접촉을 시도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섬세하신 배려와 자상하신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면입니다.
솔직히 본문을 읽다가 굼금한 것은 왜 공개적인 장소에서 고치시지 않고 그를 격리시키셨을까? 왜 말씀만으로도 고치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 그런 귀에 손가락을 집어 놓고 침 뱉은 더러운 손을 입에 대는 행위를 하셨을까? 마가는 왜 다른 복음서에 전혀 소개되지 않은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했을까? 하지만 오늘 마가는 이 사건을 메시야의 자기계시라는 관점에서 진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자신의 메시야적 신분을 증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37절을 보면 마가는 이 사건의 결과에 대해 “사람들이 심히 놀랐다”고 말씀합니다. 무리들로부터 떨어져 행해졌고 유일한 참관자가 제자들이었으며 또한 이 시기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일반 대중으로부터 떨어져 지내던 시기였는데 도대체 누가 놀랐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적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무언가를 가르치시고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700여 년 전, 이사야의 예언대로 메시야의 날이 오면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메시야의 등장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35:5-6) 5 그때에는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먹은 자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때에 다리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자들 또한 그렇게 믿고 있었을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 구약을 성취하는 메시야의 모습을 보이면서 구원의 시대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확인시켜 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귀머거리처럼 제자들의 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닫혀 버렸고 그 입도 어느새 어눌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마가복음 7장이 시작되면서 시작되는 정결례에 관한 논쟁을 다시 한 번 떠 올려 보겠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물이 몸 밖으로 배설되어 나오듯이 우리들의 마음에 품은 것들은 생각으로 배설되어 나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입력해도 마음속에 세속을 품고 있으면 세속이 배설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을 통해 마가는 마음에 세속이 가득 차 있으면 귀가 막힌 사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세속적인 생각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말하려 하고 있습니다.
3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해서 함구령(아무에게도 이르지말라)을 내리십니다. 왜 이왕이면 이러한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라 하지 않으시고 함구령을 내리셨을까?
저들의 마음속에 세속으로 가득 차있다면 이 사건 또한 하나님 나라와
메시야를 드러내는 표적이 아니라 자칫 사람들의 말거리가 되고 제자들을 교만한 자리에 이르게 하는 무용담 중 하나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었고 주님의 나라에서 누가 크냐 하는 환상에 빠져 틈만 나면 그 일로 논쟁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경고하실수록 이 일은 더욱 널리 전파되어 갔습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대로 한 것입니다.
34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탄식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시고’라는 말은 기도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주님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할 때마다.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 사람의 고통을 보며 불쌍히 보시며 탄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에 고통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자의 아픔에 공감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아픔을 아셨고, 그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웃들과 더불어 고통을 함께 느낄 수가 있을 바로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치료하는 도구로 쓰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늘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아버지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것 그리고 탄식하며 함께 아파하는 것, 이 두 가지는 기적을 일으킨 중요한 모티브입니다.
미국 심리학자 ‘레오 버스카글리아’라는 사람의 글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답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암 진단을 받은 그 날부터 이 할아버지 성격이 갑자기 난폭해진 것입니다. 식구들을 향해서 욕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욕을 퍼 붓고. 병원에 입원해서도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간호원과 의사들에게도 포악하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가족들이 할아버지의 옛날 친구들을 들여보냈습니다만 친구들도 도움이 되지 못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절친하게 지냈던 은사님이나 전문 카운슬러를 들여보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동네에서 이 할아버지가 가끔 만나던 동네 꼬마가 하나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이 삼 십분 동안 이 어린 소년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오더니 이 할아버지가 변한 겁니다. 태도가 갑자기 누그러지고 부드러워지고 사람들도 만나시고 얘기도 하시고 변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그 어린 소년을 붙들고 사람들이 물어 보았답니다.
‘너, 할아버지하고 무슨 얘기를 했니?’ 그러자 그 소년은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러면 할아버지하고 그 이 삼십분 도대체 뭘했니?’ 라고 다시 물어보았더니 그 어린 소년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요, 그냥 할아버지하고 같이 울었어요.’
할아버지와 그냥 함께 울었다는 것 바로 할아버지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면서 더불어 껴안고 울던 그 눈물 속에서 이 할아버지의 마음의 아픔이 치유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드리신 것입니다.
(5) 에바다라는 말씀의 능력을 적용하자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향해 분명한 목소리로 “에바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가 듣지 못하는 사람인대도 말입니다. 여기 “에바다”란 ‘열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람어입니다.
예> 하긴 꼭 소리를 들어야 기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셨을 때 나사로가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듣든지 말든지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에바다라고 명령했을 때 곧 그의 귀가 열리고 그의 혀의 묵혔있던 것이 풀렸습니다. 빛의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묶여 있던 혀가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35).
‘에바다’라고 주님께서 명령하자 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이 사람이 듣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인생이 그의 앞에 열려졌습니다.
2. 말씀을 나 자신에게 적용해보자
에바다는 “열려라!”는 뜻이에요. 그러자 즉시 그의 닫혔던 귀가 열렸어요. 그리고 억눌렸던 그의 혀가 풀려 제대로 말을 하게 되었어요.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랐어요.
“와~정말 대단한데!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다니!”
오늘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따로 데리고 가셔서 그의 두 귀에 손가락을 넣고, 또 손가락으로 그의 혀를 만지시며 "에바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랬더니 벙어리의 혀가 풀리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는 '에바다'의 축복이 임했죠.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이 하신 그대로 따라하면 막혔던 것들이 열리지 않을까요? 그럼 내 귀에 손가락을 넣어 다같이 명령해 볼까요?"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내 귀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열릴지어다!"
자 그리고 손을 입에다 대고 힘있게 선포해 볼까요?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을 외치지 못하게 하는 나의 어눌한 혀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풀릴지어다!"
그렇게 하면 우리 몸에 어둠으로 덮여있던 창세기 3장 흑암의 분위기가 바뀌고, 질병이 떠나가는 에바다의 축복이 임하죠. 우리 사람을 빚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영적인 존재로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창세기 3장15절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몸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이제부터 "열려라!" 명령하면 열려요. 그런데 '귀먹고 혀가 억눌려 있다'는 말은 창세기 3장 원죄로, 어둠으로, 흑암으로 덮여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죄의 권세, 사망 권세, 지옥 권세에 묶여서 그리스도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부르지 못하는 벙어리의 혀가 풀리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뿐입니다. 오늘부터 하나님이 주신 복음언약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사용하여 귀먹고 눈멀고 말 못하게 억누르고 있는 더러운 마귀들을 쫓아내면 막혔던 것이 뚫리는 에바다의 축복이 임하여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영적인 길에서 벗어나도록 우리를 유혹해요. 그래서 마귀의 일을 멸하신 참 왕, 모든 죄와 저주와 재앙을 다 해결하신 참 제사장, 하나님 만나는 길을 여신 참 선지자 그리스도의 3중직을 소유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는 것에 집중해야 해요. 그렇게 하면 예배가 기뻐지고,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는 영적 싸움이 행복해져요. 이번 한 주도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과 권세를 가지고, 그리스도 이름을 나 스스로 사용하여 모든 막혔던 것이 뚫리고 열리는 에바다의 축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날 에바다는 종교적인 맥락을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 이해와 소통의 문을 여는 데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에바다’라는 말을 사용하여 긍정적인 시작과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쓰일 수 있습니다.
에바다를 사용하는 예시
소통과 이해: 서로의 마음에 에바다가 되어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긍정적인 변화: 새로운 프로젝트에 에바다가 되어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길 바란다.
에바다는 그 자체로 강력한 의미를 지니며, 사람들이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함으로써 그 의미가 더욱 풍부해집니다. 이 단어는 개인의 내면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며, 긍정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말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날에도 암흑의 세계에서 헤매이는 육적, 영적 장애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닫혀진 삶, 곧 절망 가운데 사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에바다’를 명령하십니다. 그들의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님들의 귀가 열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성도님들의 혀가 풀어져서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께서 모든 것을 열어주시기 원합니다. 세속적인 세계관으로 인해 꽉 막혀 버린 귀가 뚫리고 세상 염려와 근심들로 인해 닫혀 버린 영안이 열려 하늘의 비밀이 보여 지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성도님들의 삶을 터치하시며 ‘에바다’ 하고 명령 하실 때 우리의 가리웠던 눈이 밝아지고 우리의 닫혔던 귀가 열리며 맺혔던 우리들의 혀가 풀려 분명한 소리로 주님을 증거 하는 역사가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의미있는 언어들
(1) 헵시바(Hepzibah)
헵시바는 히브리어로 “나의 기쁨은 그녀 안에 있다”는 뜻을 가진 여성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구약성경 이사야 62장 4절에서 예루살렘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사62:4) 사람들이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폐한 땅이라 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주께서 너를 기뻐하시며 네 땅이 결혼할 것이기 때문이라.
성경에서 헵시바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에게 주신 새로운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받는 도시를 의미합니다. 이 이름은 예루살렘의 회복과 하나님의 보호 약속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여러 관계 중에 신부로 부르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남편으로 우리를 아내로, 혹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우리를 예수님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신랑과 신부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성경은 결혼 이야기로 시작해서 결혼 이야기로 마칩니다.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의 혼인에서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에서 우리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으로 마쳐집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셔서 첫 번째 행하신 기적이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기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구약을 읽으며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부분들이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기도의 차원이 달라지게 됩니다.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차원에서 어린양의 신부로서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주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땅에서 찬송이 되게 하실때까지 그로 안식하지 못하시게 할지니라”(사 62:7)는 말씀을 읽는데 제 눈이 확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헵시바와 쁄라’라고 부르십니다.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라는 뜻이고, ‘쁄라’는 “결혼한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렇구나. 쉬지 않고 성벽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기 위해서는 헵시바요 쁄라가 먼저 되어야 하는구나.” 6-7절이 이루어지려면 4-5절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주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4-5). 결혼한 부부는 집을 지켜야 한다고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내 집이니 당연히 지킵니다. 밤에는 문을 잠그고 식구들과 소유를 보호합니다. 누가 지키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힘들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이니까 그렇지요.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면서, 남편과의 관계가 행복하면, 가족을 위해 수고하는 일들이 기쁨이 됩니다. 기도의 파수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중보기도자는 먼저 ‘주님의 신부’가 되어 “헵시바와 쁄라”라고 하시는 주님과의 사이에서 사랑을 누려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부는 남편과의 친밀함으로 부르시는 초대입니다. 신랑과 신부의 관점으로 보니 구약의 많은 부분, 특히 어렵게 여겨지는 예언서의 많은 부분들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음행한 여인으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아내로 대우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어리석게도 남편 되신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갔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불같이 화를 내시는 모습으로 묘사된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말씀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이 왜 그러시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읽으면 달리 읽힙니다. 어떤 아내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데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면서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어떤 남편이 아내가 외도를 하는데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까. 부부관계란 독점적인 관계입니다. “나는 당신만을 사랑하니 당신도 나만을 사랑하라”고 서로 언약을 맺는 배타적인 관계입니다. 다른 사람이 절대 끼어들 수 없는 한몸의 관계입니다. 그런 사랑의 관계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는데 “하나님이 너무 무섭다”, “심하다” 이렇게 반응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모르는 것입니다. 고멜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호세아 선지자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음란함을 버리고 본 남편에게로 돌아오라는 에스겔, 이사야, 예레미야의 호소는 주님의 안타까운 음성이었습니다.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주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헵시바라는 이름은 성경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상징하는 매우 의미 깊은 이름입니다.
(2) 할렐루야הַלְּלוּיָהּ (Hallelluyah, 할렐루야)
할렐루야הַלְּלוּיָהּ (Hallelluyah, 할렐루야) 알렐루야(Alleluia)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의 말로, 예배때 공동체가 바치는 복음 환호송이다. 알렐루야의 어원을 살피면 ‘찬양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할렐’의 명령형 ‘할렐루’와 하나님을 의미하는 ‘야훼’의 약자 ‘야’의 합성어다. 따라서 히브리어로 ‘할렐루야’는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이다. 구약성경 중 시편에서 ‘할렐루야’가 두드러지게 언급된다. 특히 104~106편, 111~117편 135편, 146~150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하거나 끝을 맺고 있어 ‘할렐루야 시편’이라고도 불린다. 유대인들도 회당의 예식 등에서 응답으로 할렐루야를 사용했다고 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승리와 어린 양의 혼인 잔치 등의 장면에서 ‘할렐루야’라고 응답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할렐루야’는 히브리어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알렐루야’가 됐고, 교회 전례 안에서는 라틴어 발음으로 정착됐다. 교회의 전례 안에서는 이미 4세기경에 ‘알렐루야’의 노래가 자리 잡았다. 선포된 하나님 말씀에 대한 공동체의 화답이자, 복음을 선포하러 오시는 주님을 환영하는 노래다. 히브리어로는 원래 '할렐루야'가 맞다. 할렐루야어근을 차지하는 부분이 הַלְּלוּ(Hallelu, 할렐루)가 된다. 이것은 원래 '찬미하다, 칭송하다, 칭찬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הלל (Hillel, 힐렐)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러면 왜 힐렐에서 할렐이 되었을까? 이 '힐렐'이라는 동사원형이 히브리어 문법상 'Piel(피엘)' 동사변형을 거치면서 '할렐'이 된다. 이 '피엘' 형태의 2인칭 복수 명령법이 되면, 그제서야 'Hallelu' (할렐루)로 발음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따라붙는 Yah(야)는 '야훼 하나님'을 축약해서 표현하는 형태이다. '엘리야 등이 이에 해당된다. 엘리야 는 히브리어로 "나의 하나님은 야훼이시다" 히브리어의 원어적 표기와 뜻을 우선해서 생각한다면 '할렐루야'라고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현대 유럽 5대언어로 변화되면서 그 표기법이 바뀌었다. 그리스어로 음역을 해오면서 알릴루이아(Αλληλούια)가 되었고, 이것이 다시 라틴어로 오면서 알렐루야(Alleluia)로 변화되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리스어에는 원래 'h', 즉 'ㅎ' 소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이 '할'이 아니라 '알'이 되었다. 의미는 동일하게 유지되면서 표기와 발음이 변화되었던 것이다. 히브리어 성서의 여러 시편에서 대개 첫머리나 끝에, 또는 두 곳 모두에 나온다. 고대 유대교에서 레위인 성가대가 송가로 부른 듯하며, 〈신약성서〉에는 〈요한의 묵시록〉 19장에만 4번 나온다. 70인역 성서(유대인들이 번역한 그리스어역 〈구약성서〉)에 음역되었고, 불가타 성서(4세기에 그리스도교도들이 만든 라틴어역 성서)에 'alleluia'로 음역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이 이 표현을 예배에 채택한 이래 그리스 정교회, 로마 가톨릭, 영국성공회, 일부 개신교 전례와 찬송가에 사용되었다.
호산나
모든 감사송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인간을 위해 행하신 것, 그리고 매일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하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바치신 감사의 기도를 본받아 행하는 것으로, 축일의 성격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감사송을 마친 후 ‘거룩하시도다!(Sanctus:상투스)’를 노래하거나 낭송합니다. 이는 ‘이사야가 소명을 받을 때, 하늘의 천사가 불렀던 환호’(사6:3)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히브리 백성들이 환영했던 환호’말씀에서 따온 것입니다.
(막11:9-10) 9 앞에서 가던 자들과 뒤에서 따르던 자들이 외쳐 이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임하는 우리 조상 다윗의 왕국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호산나(Hosanna)는 구원자에 대한 환호로 “주님 비오니, 저를 구원하소서!”(시118:25)라는 뜻입니다. 호산나는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입니다. 성경에는 모두 5번에 걸쳐 사용되지만 시간적 배경은 예수님이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기 위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들어가시는 날 사람들이 환영하며 외친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 9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그 외에도 마21:15, 막11:9, 막11:10, 요12:13에 사용되지만 모두 동일한 사건 속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단어의 출처는 시편118:25에 사용된 히브리어입니다. 시118:25 주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주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26절을 함께 읽으면 마태복음의 내용과 거의 흡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시118:26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주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호산나는 아람어인 ‘아샤(יָשַׁע)’를 그대로 헬라어로 적은 것입니다.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사용된 언어는 아람어(히브리어 방언 정도)였으며, 성경으로 기록할 때 당신 공용어인 헬라어로 적으면서 ‘호산나’가 된 것입니다. 마21:9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를 헬라어로 그대로 옮겨 봅니다. 호산나(ὡσαννὰ)는 종려가지를 흔든다는 것은 제2성전기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결국 호산나는 샬롬이 목적이며, 샬롬은 평안의 히브리어입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달라는 간절함은 메시아를 통해 회복하게 될 이스라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곧 평안으로 가는 방법이기에 구원과 평안이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에서 나오는 아람어와 구약에서 나왔던 언어들이 현재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알아봤습니다. 이런 사랑과 관계있는 언어를 바로 사용할 때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늘 찬양과 기도와 말씀으로 구원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지기를 진정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