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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표적
제목 : 갈릴리에서의 두 번째 표적
성경 : 요 4:43~54
찬송 : 543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40721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요 4: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요 4: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요 4: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요 4: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요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요 4: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요 4: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요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요 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요 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요 4: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요 4: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사흘 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첫 번째 표적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표적으로 오늘은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에서만 아니라 고향에서도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7:5). 사실 예수님이 세상을 지으셨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당신의 땅에 오셨으나 당신의 백성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1:10~11). 그런 점에서 믿음은 개인적 연고나 친분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2:23), 맞아들였지만(4:45), 그들이 실제로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표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정작 그 표적을 행한 사람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을 못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주시고자 했지만, 사마리아 여자는 마시는 물을 기대했고(15절; 참조 6:34),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으로 썩지 않는 생명의 떡을 주시는 분임을 보여 주고자 했지만, 그들은 그저 먹는 떡만 생각해서 주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6:26~27). 그러므로 표적이 올바른 믿음으로 인도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마리아 여자와 사마리아인들에서(4:42) 확인되듯이, 예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시는 것이 바로 표적을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 곧 예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작품도, 전문가의 눈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믿음과 바른 믿음을 정확히 구분하시는 전문가이십니다. 주님은 어떤 믿음을 원하실까요?
√보이는 것을 따라 가는 신앙(43~45절)
예수님은 말씀 사역을 통해 많은 믿음의 열매를 얻게 된 사마리아 땅을 떠나 고향 갈릴리로 돌아오십니다.
√요 4: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요 4: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요 4: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갈릴리로 가시는 중에 예수님은 친히 증언하셨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속담을 인용하시며 당신의 상황을 설명하십니다. 여기에서 그분의 선지자적 자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그를 환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호의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까닭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그것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릴리 사람들의 반응은 아무런 표적 없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했던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를 볼 때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성도는 보이는 기적을 바라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표적 없이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어떤 표적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도 그분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 때문에 은근히 그런 기적을 바라면서 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믿음의 근거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표적만 바라는 사람들의 믿음을 기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보고 믿는’ 믿음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필요를 위한 믿음으로 그칠 수 있으며 입증을 요구하는 종류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기적에 근거한 믿음이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 그분을 믿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우리의 필요 때문에 갖게 된 믿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때문에 갖게 된 믿음입니까? 예수님의 능력의 손만 바라십니까? 아니면 예수님 그분의 얼굴을 사모하며 간절히 보고자 하십니까? 성도는 기적을 요구하는 믿음이 아니라 에수님 그분을 향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말로 하나님께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요구하지 말고, 예수님 그분을 바라는 인격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개인에게 거짓 위안과 만족을 주시는 교회가 되지 말고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신앙(46~53절)
예수님이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가나에 이르셨을 때 왕의 신하가 찾아왔습니다. 자기 아들이 병들었음을 고하면서 가버나움에 오셔서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가 살던 곳이고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주하여 사셨던 동네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아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새카맣게 타들어 갈까요? 그는 죽어 가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가진 권력과 재력으로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아들을 고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일본 대지진으로 마음 아픈 사연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밀려오는 쓰나미에 잡았던 손을 놓쳐 딸을 떠내려 보냈다는 어머니의 사연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차마 그 딸의 모습을 볼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 어머니는 평생 딸의 손을 놓친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죽은 딸보다도 더 모진 산 죽음을 경험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자식이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여러 표적과 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신하는 갈릴리 가나에 오신 예수님께 아들의 치유를 부탁하기 위해 부지런히 길을 떠납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가려면 32km 정도 이동해야 합니다. 태인에서 전주 가까이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왕의 신하는 그 먼 거리를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위해 간청하는 아버지의 부탁을 예수님은 바로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요 4: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요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요 4: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표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문맥상 어색한 점이 있습니다. 왕의 신하가 거의 죽게 된 그의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을 뿐인데, 마치 표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고집한 것처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 ‘너희’를 사용하셔서 누구를 향해 하신 말씀인지 불분명합니다. 사실 문맥상 47절에서 49절로 넘어가면 연결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48절은 이 표적과 관련해 예수님이 특별한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덧붙이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이나 기사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직접 만져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고집했던 도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유사합니다. 예수님은 봐야만 믿겠다는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예수님 떠나가신 후 남은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제자들(17:20), 곧 요한복음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신 것으로 보입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신 사건은 바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보여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책망받는 ‘너희에는 왕의 신하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요 4: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요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해서 다시 한 번 아들의 치유를 간청합니다. 예수님이 치유해 주시지 않으면 그 아이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그 왕의 신하의 태도를 보시고 그 아들의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났다.”(유대인 신약성경)
왕의 신하는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가서 보시지도 않고, 심지어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시지도 않고 너무 쉽게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그리고 발걸음을 집을 향해 돌렸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나병이 걸려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 엘리사가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났습니다. 일국의 군대 장관이 찾아왔는데 그래도 나와서 직접 안수 기도라도 해서 병을 고쳐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는 아람 나라에는 요단강보다 더 깨끗하고 좋은 강물이 많은데 하필이면 진흙탕과 같은 요단강에서 씻으라고 하는가 하고 화를 내고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부하들이 말린 바람에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고 어린 아이처럼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는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처럼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순종했더니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는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는 말씀을 100% 믿고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본문은 요5:52-53절의 말씀을 첨가시킴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초원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란 듯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 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요 4: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어느 날 밤에 선교사가 원주민들로부터 위협을 당했습니다. 그 선교사는 불안 때문에 뜬 눈으로 그 밤을 새웠습니다.
아침이 되자 한 원주민이 선교사를 찾아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사실 엊저녁에 우리는 당신을 해치우려고 이 집에 왔는데 7명의 장정들이 이 집을 지키고 있어서 할 수 없이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선교사가 안식년이 되어 고국에 돌아와 이 사실을 교우들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교우가 날짜를 물어보았습니다.
“언제 그런 경험을 했습니까?”
그 교우가 무릎을 치면서 바로 그 날에 성령께서 강하게 감동하셔서 6명의 친구들과 함께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얘기입니까? 우리의 기도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역사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불신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한 신하는 아들이 치료받는 놀라운 은혜를 입고 더욱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적을 체험함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음에서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며, 말씀을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현실의 필요를 위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적 필요를 충분히 채워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필요를 채워주시기 전에 우리가 먼저 바른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하십니다. 바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혹시 말씀보다 다른 것을 우선시하거나 요구하는 믿음은 아닙니까?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아니라 반석 위해 세운 집이 되기 위해서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보고 들은 말씀이 나의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말입니다.
√말씀의 성취자를 믿는 믿음(54절)
√요 4: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사건 후에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요 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하지만 요한복음은 가나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이 치유된 기적을 이전의 혼인 잔치 사건과 연관시켜 두 번째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적 사건들은 비슷한 흐름을 보여 줍니다. 요청-거절-명령과 순종-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알게 되는 예수님의 능력과 영광이 그것입니다. 이 두 번째 표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나에서의 치유 사건을 두 번째 표적이라고 말하면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성도가 궁극적으로 가져야 할 바른 믿음은 십자가 죽음으로 말씀의 성취를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예수님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신 사건은 ‘표적’(세메이온)입니다. 이 표적은 가나 혼인 잔치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사건과 같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는 표지판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신자들을 더 온전하고 깊이 있는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기적과 말씀의 성취는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하셔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언약의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가 기적만을 바라는 것은 위험한 믿음입니다. 기적이 우리의 마음을 끌 수는 있어도 우리 마음에 온전한 믿음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넘어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참된 기적과 말씀의 근원되신 예수님 그분을 온전히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우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대한 감격과 감사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 신앙의 내용과 실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동기와 방형성이 신앙의 결과를 결정합니다. 성도는 보이는 기적을 넘어 말씀을, 나아가 기적의 근원되시고 말씀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