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풍경과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남해를 다시 찾기로 마음을 먹었던 그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지난번 남해 여행 때 기억에 남을만한 맛집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여수를 여행했을 때에는 모든 음식이 감동적으로 맛있었고 음식 때문에 다시 가고 싶을 정도인데, 남해는 같은 남쪽 지방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기억이 나는 건, 다랭이 마을에서 맛보았던 유자 막걸리와 독일 마을의 특산품인 맥주 정도일까. 분명 여행을 다닐 땐 맛있었다고 느꼈는데... 여행을 할까 말까 고민하게 할 만큼 음식이 형편없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번 남해에 왔을 때에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스케줄이 빡빡한 일정으로 여행을 했더랬다. 더운 날씨에 지쳐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먹어도 그다지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다. 게다가 기껏 찾아놓은 맛집들을 피곤하다는 이유로 가보지 않았다. 그냥 숙소와 가까운 곳, 그리고 영업시간이 우리와 맞는 곳이면 그냥 들어갔다. 그랬으니 남해 음식에 대한 인상이 그렇게 좋았을 리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결론을 내리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냥 이번 여행에서 맛집만 가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남해라면 무조건 먹어야 하는 멸치쌈밥을 맛보았다. 다른 곳보다 배로 큰 멸치와 신선한 채소로 싼 쌈은 입맛을 돋우기 충분했다. 여기에 멸치 쌈밥을 하는 곳이라면 자연스럽게 같이 내놓는 갈치조림 또한 그 못지않게 맛있었다. 이 두 가지 반찬이면 무조건 밥 한 공기는 뚝딱이었다. 바다와 가까우니, 회는 두말할 것 없이 싱싱하고 감칠맛이 났다. 이렇게 하나둘씩 남해 음식에 마음을 여니 백반집에서 파는 소박한 밥상도, 심지어 설렁탕 집에서 파는 삼겹살도 무척이나 맛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남해에는 빵이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단순히 우연이었다. 서울에서 5시간이나 걸려 남해에 도착했을 때, 우리에게 간절한 것은 커피 한 잔과 간식이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제이라운지'라는 곳에 들러 잠시 쉬기로 했다. 검색했을 때 사람들이 남긴 리뷰는 그다지 많지는 않았지만 베이커리 카페로 다양한 빵을 파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그 외에 선택할 카페가 많지 않았기에, 결국 제이라운지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펜션과 함께 운영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곳은 카페 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어 경치를 구경하며 여유 있게 커피 한 잔을 하기 좋아 보였다. 그래서 커피와 빵을 이것저것 주문했다. 소금과 버터 향이 좋은 시오빵, 남해의 명물인 유자 크림이 들어있는 크림빵, 그리고 늘 좋아하는 앙버터까지. 남해까지 오느라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 고른 빵들은 상상이상으로 맛있었다! 한 입 물자마자 피곤한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빵 맛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남해의 음식은 오로지 멸치쌈밥과 유자밖에 모르던 우리의 고정관념을 완벽하게 깨뜨려주는 맛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은 빵 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고,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우연히 들어간 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그다음부터는 열정적으로 빵집을 순례하기로 결심했다.


두 번째로 감동을 받은 빵집은 지족리의 죽방렴 마을에 있었다. 남해에서는 '죽방렴'이라는 전통적인 대나무발 그물을 세워 멸치, 갈치 등을 잡는다. 이렇게 잡은 멸치는 죽방멸치라 불리며 최상급으로 취급받고 있다. 남해군 지족리와 창선도 사이, 약 350m 폭의 해협에는 바다 물길이 좁고 물살이 빨라 이 어구를 설치하기 좋은 편이다. 그래서 지족리에는 지금까지 죽방렴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죽방 체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체험은 여름에만 가능했다. 겨울에는 고기잡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업 사정을 전혀 모르는 우리는 남해에서 유명하다는 관광지를 보기 위해 지족리를 찾았고, 텅 빈 죽방렴을 보며 씁쓸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그냥 떠나기에는 아쉬움이 가득했기에 멸치쌈밥도 먹고, 마을 구경도 했지만 여전히 섭섭한 마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그러다 찾은 빵집이 바로 '샘성'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서울 카페에 온 듯한 세련된 인테리어가 눈에 띄는 이곳은 빵 냄새가 저절로 입맛을 다시게 하는 곳이었다.


카페 중간에 있는 쇼 케이스에는 생각지도 못한 화려한 빵들이 전시되어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유자가 들어있는 페이스트리, 동글동글한 모양이 귀여운 에그타르트, 부드러워 보이는 식빵, 크루아상, 초콜릿이 듬뿍 발려있는 빨미카레... 제이라운지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마을에 숨겨져 있는 보물 상자 같은 빵집이었다. 조금은 놀란 마음을 다잡으며, 빵을 하나씩 맛보았다.


역시나. 맛있어 보이는 빵은 그 모습 그대로 너무 맛있었다. 이미 멸치쌈밥을 먹고서 배가 불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맛있기 그지없었다. 아는 맛인데, 생각했던 그 맛의 두 배 정도는 맛있다. 빵을 먹으며 죽방렴 마을의 명물이 되겠구나 싶었는데, 나만 몰랐을 뿐 이미 유명할 대로 유명한 빵집이었다. 오후 느지막이 가면 이미 빵이 품절되어 먹을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새로운 맛집을 알게 되어 뿌듯한 마음과 터질듯한 배를 부여잡으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마지막으로 감동을 받은 빵집은 현재 남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관광지인, 상주 은모래비치에 있었다. 이곳에는 마을공동체 동고동락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마을 빵집 동동'이 있다.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운영하고 있는 빵집이어서 여행 전부터 관심이 갔는데, 직접 가보니 빵집의 모습도 흥미로웠다. 빵집이 있던 곳은 원래 오랫동안 버려져있던 목욕탕인 '약수탕'이었다고 한다. 목욕탕이었던 것을 기리기 위해 빵집 내부에 있는 화장실에는 각각 '남탕','여탕'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마을 빵집이지만 빵 맛은 마을 수준 이상이라 더욱 놀라운 곳이다. 이곳에서는 인공색소, 유화제, 개량제를 쓰지 않고 천연발효종을 이용하여 빵을 만든다. 그래서인지 다른 곳보다 빵 맛이 훨씬 고급스러운 느낌이 든다. 또한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해서 더욱 빵 맛이 좋았다. 남해 대파를 이용해 만든 남해 대파빵, 올리브가 가득 들어있어 감칠맛이 좋았던 올리브 빵, 크랜베리와 견과류가 들어있어 씹으면 씹을수록 맛있었던 동동 바게트 등, 독특한 특징이 가득한 빵을 만드는 빵집의 기억은 여행을 즐겁게 만들었다.



진짜 마지막으로 감동을 받았던 빵은 은모래비치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남주농산3rd Cafe & pub'이라는 카페에서 커피와 간단히 먹으려고 다쿠아즈를 골랐는데, 여기서 인생 다쿠아즈를 만난 것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빵을 먹으며 너무 많이 감탄했기 때문에 이제 맛있다는 말을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 고른 간식이었는데...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나도 모르게 맛있다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식감의 빵 안에 다양한 맛의 크림, 잼이 들어가 있는 이곳의 다쿠아즈는 한 개만 먹기에는 너무 아까울 정도였다.


기대하지 않은 카페들의 빵이 너무나 맛있으니, 남해는 빵집 순례하기 퍽 좋은 곳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빵 맛만 칭찬했지만 음료들 또한 훌륭한 곳이 바로 남해다. 여기에 가격도 서울에 비하면 무척 저렴한 편이라 감동의 연속이었다. 덕분에 여행 내내 입과 마음이 행복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남해의 맛을 제대로 즐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더불어, 이전에 남해에 왔을 땐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다녔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여행은 하면 할수록 그곳에 대한 진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로, 조만간 다시 남해에 가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빵집 투어가 채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에 가면 더 많이, 더 오랫동안 남해의 빵집을 맛볼 것이다.
*여행지 정보
제이라운지
위치 경남 남해군 설천면 설천로 560
운영시간 09:00-21:00 / 목요일 휴무
https://www.instagram.com/juriiiii_2/
샘성
위치 경남 남해군 삼동면 죽방로 24
운영시간 11:00-21:00 / 화요일 휴무
https://www.instagram.com/cafe_saemseong/
남해마을빵집동동
위치 경남 남해군 상주면 남해대로697번길 10 1층
운영시간 11:00-20:00
https://www.instagram.com/namhaedongdong/
남주농산3rd Cafe & pub
위치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로 6
운영시간 11:00-19:00
https://www.instagram.com/namhae____namjunongsan_3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