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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7장 1-12절
가족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가정은 행복의 동산이 되기도 하고 불행의 터전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 공동체도 예외는 아닙니다. 서로 쥐어짜 내려고 하는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섬김과 환대 속에 따뜻한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도 있습니다. 행복한 공동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 ‘더 나은 삶’에 대해 계속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두 가지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일반 생활에서 이웃에 대한 상호 태도를 가르치시고, 다음으로 상호성의 원리에 따라서 형제와 자매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고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을 강조합니다. 결론적인 황금률을 가르칩니다.
비판에 대한 가르침(1-6)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란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은 생각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나무란다는 의미입니다. 남을 정죄하려고 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용서하고 판단한 대로 용서도 받고 정죄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남도 판단해야 합니다. 나만의 선입견과 제한된 지식으로 누군가를 정죄할 때 누군가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판단을 받고 있습니다.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1-6)
예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천국 백성들이 ‘더 나은 의’을 위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인간관계는 상호성(相互性)의 원리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호성이란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한 그대로 대우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1) 비판에 대한 가르침(1-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완전을 추구하면서도 형제와 자매의 허물과 실수를 해결할 지혜를 제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관계에서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상호성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그 사람을 성급하게 평가하고 임의로 재판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심판받지 않으려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심판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면 최후 심판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말하자면 심판하는 것은 최후 심판 때에 모든 것을 보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실 권한에 속한 것이므로(6:4,6,8,18,32; 참조. 13:36-43, 47-50) 하나님의 심판 또는 비난을 피하려면 타인을 비판(비난)하지 말라, 하나님의 역할을 흉내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종말론적인 상황에서 제한하지 않는다면, 형제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하나님에 의해서든, 사람들에 의해서든) 최후 심판 이전에라도 이 세상에서 비판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만일 비판하게 되면 비판받게 될 것입니다. 평가하는 기준에 따라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2). 여기서 ‘기준’ 혹은 ‘헤아림(μέτρον)’은 시장에서 곡물을 측정하는 도구로서 ‘평가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평가하는 기준이 그날에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사용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말한 ‘비판’은 ‘분별’이나 ‘판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분별이나 판단까지 의미한다면, 교회 공동체 안에 잘못한 자들을 판단해서 권징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비판’은 관계 안에서 자신을 더 낫게 보이려고 상대방의 흠을 찾아내려는 사사로운 분석과 평가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2) 자신을 먼저 돌아본 백성(3-5)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5절의 비유는 1-2절의 교훈은 지원하고 우리가 심판하는 것 대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판단하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문제를 지적하십니다(3).
‘들보’는 건축물의 기둥이나 서까래와 같은 나무입니다. 반면 ‘티’는 작은 나무 작대기입니다. 눈에 통나무가 들어 있으면 당연히 사물을 볼 수 없습니다. 허물이 통나무처럼 커서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형제의 행위를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자신을 들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있는 ‘들보’는 무시하고, 상대방에 있는 ‘티’는 크게 부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판이야말로 외식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주신 성도됨의 거룩함과 고귀함을 포기하는 행동입니다.
특히 3,4절에서 반복되는 형제는 하늘 아버지를 모시는 새 언약 공동체, 하늘나라의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을 가리킵니다. 이중 잣대로 형제와 자매를 비난하고 재판해버리는 행위는 공동체에 엄청난 충격을 가할 수 있으며,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1-2절과 연결해보면, 그 형제와 자매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3-4절은 심판하는 자신을 깊이 성찰할 것을 강조합니다. 자신의 더 큰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웃의 작은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며, 자기기만이 바로 위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 장애물이 들어 있는 눈으로 타인의 문제를 크게 보고, 자신의 자랑거리를 크게 보면, 스스로 속게 되기 때문에 위선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관점이 과연 옳은가 하는 점입니다. 먼저 나의 눈을 깨끗하게 만들고 나서 형제의 눈을 보았는데 티가 있다면 티를 제거해줘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형제를 심판하고 비난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하고 환대하는 나라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이웃의 문제를 다루는 사람은 먼저 자기 눈에 있는 통나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본문은 진실하지 못한 비판자의 모순을 지적하는 비유이므로 형제의 잘못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하늘의 아버지로 모신 형제들과 자매들이기 때문에, 자신을 먼저 점검하고 나서 긍휼의 마음으로 형제를 위해 교정을 시도해야 합니다. 모두 한 가족으로서 하늘나라의 완성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걸어가므로, 그것도 험한 길을 가게 되므로, 서로에 대해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태도를 고치도록 하는데도 불구하고 공격할 태세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개처럼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거룩한 것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한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의 제사와 같습니다. 상대방의 지적이 기분 나쁘게 들려도 하나님의 판단으로 겸손히 받아들이는 삶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집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평가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런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조언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 모르고 적대적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3) 가치 판단(6)
이런 점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6)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분별력에 대한 교훈입니다. ‘더 나은 의’를 행하는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 공동체를 향한 하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러나 완성의 나라가 오기까지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제자들은(7:13-14) 완전을 지향하지만(5:20), 현재는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형제들과 자매들에 의해 행동을 교정받으면서 서로 성장해가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참된 성도라면 자신을 들어내기 위해 형제와 자매의 부족한 부분을 들추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남보다 자신을 낮게 여겨 쉽게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본성을 거슬러 예수님의 명령대로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물론 본성을 거슬러야 하는 일이기에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7-11)
구하기 전에 전제해야 할 것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응답하실 하나님의 선하심과 부요하심 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고 더 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고 진실하고 간절하게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11)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열정적인 기도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고집스러움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1) 구하고 찾는 기도(7-8)
예수님께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기도하라는 명령이며,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8절은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2)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9-11)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마다 얻고 찾고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응답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빵을 구하는 아들에게 돌을 생선을 구하는 아들에게 뱀을 줄 아버지가 없다는 일반적인 상식을 비유로 전하십니다(9-10).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 좋은 것을 구분해서 줍니다. 땅의 아버지에게는 많은 한계가 있지만, 이런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주려고 합니다. 한계가 없는 하늘 아버지께서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11). 그런데 하늘 아버지는 제자들이 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 기도하는 제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누가복음 11:13).
제자들은 높은 수준의 윤리적 요구받지만,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진리는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기도의 핵심과 정의는 하늘 아버지와 자녀의 대화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땅에 있는 자녀 간의 대화입니다. 대화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기도를 격려하시는 데서 나타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반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며,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결론-황금률(12)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삶이 ‘더 나은 의’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웃과 자신의 경계를 지우고 지체를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요구입니다. 자기 부정과 이타적인 사랑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입니다.
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12)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로 불리는 교훈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는 12절 앞 단락의 결론임을 알립니다. 7:12을 근접 문맥인 1-11절의 결론으로 보면 비판하든지, 분별(평가)하든지, 항상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싶은 원칙(황금률)에 기초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써 이미 5:17에 ‘율법이나 선지자’로 언급됐으므로(또한 11:13, 22:40),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는 황금률이 구약이 요구하는 본질을 성취하는 행위와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황금률(12)과 7-11절을 연결해보면,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아버지로서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이웃에게는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황금률(7:12)은 하늘나라의 의(5:17-7:12)를 실천하는 목표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제자들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하는 태도, 즉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마음으로 이웃을 대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제자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가치 판단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지혜롭게 판단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 하는 데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정죄하는 일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용서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한다면 같은 기준으로 자신도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잘못된 일은 용납하지 말해야 하지만, 잘못한 지체에 대해서는 긍휼과 자비로움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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