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과 화요일, 양일에 걸쳐 인수봉 인수a 변형 루트를 두 번 올랐다. 원래는 두 번 모두 인수b 루트를 등반할 계획이었다. 지난 일요일에는 인수b 루트 첫 번째 피치 확보점에 등산학교 교육생이 한 무더기 대기하고 있길래 영도 선배가 ‘힐링 삼아’ 인수a 변형 루트를 가자고 했다. 비가 한바탕 내린 다음날이라서 그런지 날씨도 그 어느 때보다 맑았고 첫 번째 피치까지는 과연 힐링이 제대로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두 번째 피치 트래버스(비탈면을 횡단하는 일) 구간이 지나고부터는 힐링이 아니라 킬링의 시간이었다.
우리 팀은 4명이 두 자일 파티로 나눠서 2인 1조로 등반했다. 1조: 박봉영(선등), 장영조, 2조: 권용득(선등), 김영도. 먼저 출발한 조의 선등자(봉영 선배)가 킬링 구간에서 한참 애를 먹었다. 크랙 사이로 물이 줄줄 흐르고 있어서 발이 너무 미끄러운 탓이었다. 그래도 봉영 선배는 십수 년의 등반 짬빱으로 어려운 킬링 구간을 잘 넘어갔다. 내 차례가 되자 영도 선배한테 선등을 교체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봉영 선배가 고전하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고스란히 목격한 다음이니 첫 발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영도 선배는 웃으며 말했다. “얼른 가. 발만 잘 보고 가면 쉬워.”
발만 잘 보고 가면 쉽다던 트래버스도 잘 안돼서 퀵드로우를 잡고 말았는데 물이 줄줄 흐르는 크랙에 들어섰을 때는 흐르는 물 따라 그저 울고 싶었다. 발을 아무리 잘 보고 딛어도 발이 그대로 죽죽 미끄러졌고, 크랙에 째밍을 했던 손가락도 흐르는 물 때문에 쑥 빠졌다. 그나마 봉영 선배가 크랙에 남겨 둔 캠이 아니었다면 시계추처럼 펜듈럼을 치면서 추락할 뻔했다. 게다가 등반을 계속 이어가려는데 캠까지 쑥 빠지면서 말 그대로 멘탈이 와장창 무너졌다. 캠을 다시 치느라 기운을 다 빼고 두어 번 크게 미끄러지고 나니까 등반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영도 선배가 웃음기 가신 얼굴로 앞서 간 조의 후등자(영조 선배)에게 로프를 고정해서 내리라고 했다. 그때 로프를 잡고 오를 때의 굴욕감은 아마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나는 당연히 영도 선배가 선등을 교체할 줄 알았다. 거울이 없어서 내 몰골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내 눈에는 이미 두려움이 가득했을 텐데 영도 선배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기부터는 정말 쉬워.”
선등을 시원하게 조진 내게 선등을 계속 맡긴 영도 선배가 새삼 고마웠다. 만일 그날 그렇게라도 선등을 이어가지 않았다면 무너진 멘탈을 회복하기 어려웠을 텐데, 가까스로 화요일에 다시 등반을 나설 정도는 됐다.
다만 인수a 변형 쪽으로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차라리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인수b 루트를 등반하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평일임에도 등반객이 제법 있었고 하필 그쪽으로 또 한 팀 먼저 올라갔다. 앞서간 팀은 인수b와 다른 루트를 등반하긴 했지만 중간 확보점을 같이 써야 했고 그 팀의 인원수가 꽤 많았다. 우리 팀은 3인 1조였고(권용득, 최황, 김도미), 또 우리 팀에는 인수봉 등반이 처음이라는 친구(김도미)도 있었다. 그렇다면 정상까지 등반하는 걸 목표 삼아야 했는데 그 넓은 인수봉에서 내 깜냥에 그럴 만한 루트가 잘 보이지 않았다. 취나드b 루트는 도미 씨한테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결국 등반자가 아무도 없던 인수a 쪽으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몰랐다. 그동안 골수산악회 선배들 같은 베테랑과 등반을 주로 다니다 보니(그것도 2인 1조로) 선등은 등반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다. 등반 시스템까지 일일이 챙겨본 적 없다는 얘기다. 후등자가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다. 인수봉 등반이 처음이라던 도미 씨도 괜히 걱정했다 싶을 만큼 등반을 잘했다. 3인 1조 시스템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중간에 우리 팀을 추월하려는 팀까지 끼어들어서 대기 시간도 길어졌다. 그만큼 체력도 빨리 떨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와 발끝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물길 트라우마 때문에 변형 루트 말고 오리지널 루트를 등반하려고 했지만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린 크랙을 비비고 오를 자신이 없었다. 복습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다시 인수a 변형 루트를 택했다.
다행히 크랙에 물은 모두 말라 있었고 암벽화도 바위에 잘 달라붙었다. 트래버스 구간에서 발이 또 고이는 바람에 퀵드로우를 한 번 잡았지만 나머지 구간과 일전에 킬링 구간을 모두 자유등반으로 마쳤다. 아, 상단 슬랩 구간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추락을 한 번 먹었다. 얼마나 홀가분하던지. 오히려 마지막에 하강할 때 가장 힘들었다. 60m 로프 두 동으로 두 줄 하강을 했는데, 멍청하게 크랙에 낀 로프 두 동 중 한 동만 빼고 그대로 하강하다 더 이상 하강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 무렵 지상에 가까워지면서 집중력이 많이 흐트러졌던 모양이다. 대충 5-6m를 등강과 등반을 반복해서 다시 올랐다. 하마터면 같이 등반한 친구들을 조난자로 만들 뻔했다. 어디 가서 선등 좀 선다고 까불면 안 되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영도 선배 말대로 등반은 늘 어렵다. 내 깜냥에 어디를 등반하든 안 어렵겠나. 힐링은 아직 가당치도 않다. 그런데 그래서 등반이 더 재밌다. 힘들고 무서워서 힐링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남은 인생 동안 등반보다 재밌는 일을 찾지 못할 것 같다.
*인수a 첫 번째 피치 종료지점 확보점 한 군데가 첨부한 첫 번째 사진처럼 파손됐습니다. 누군가 쇠사슬에 낀 자기 카리비너를 회수하려다 망가뜨린 것 같은데, 너트만 다시 끼우면 될 듯합니다. 그쪽으로 등반 시 참고하십시오.
**인수a 변형 쪽 덧장 몇 개가 심하게 흔들립니다. 만일 덧장이 깨지면 오아시스와 대슬랩까지 그대로 굴러떨어져서 등반자를 덮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도 꼭 참고하십시오.
***첨부한 두 번째 사진은 화요일 등반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진 모습인데 이 어쭙잖게 구구절절한 등반 후기보다 더 많은 걸 말해주지 않나 싶네요.
첫댓글 와우`~ 용득형 후기 최고로 재미있습니다.^^ 간현에서 뵈요!
재밌게 봐줘서 고마워요. 이런 후기 남길 시간에 등반을 더 잘하면 좋으련만ㅎㅎ 일요일에 봅시다!
형님 술 안드셨나영? ㅋㅋ
음주 후기는 빛봉영 선배 전문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