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사후에 재평가된 율곡 이이
백성 부담 줄이려 '공납'을 쌀로 받자… 30년 뒤 실현
입력 : 2024.03.07 03:30 조선일보
사후에 재평가된 율곡 이이
▲ 우리나라 5000원권 지폐 앞면에 실린 ‘율곡 이이’ 초상화. 화가 김은호가 1965년 그렸어요. /한국은행
지난달 14일 파주시와 해군이 조선 시대 인물인 '율곡 이이'를 함께 기리자는 업무 협약을 맺었다고 해요. 두 단체와 율곡 이이는 어떤 접점이 있을까요? 대한민국 해군의 두 번째 국산 이지스함 이름이 바로 '율곡이이함'이에요. 임진왜란을 내다보고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 율곡 이이의 정신을 해군이 계승하겠다는 의미로 이름 붙였다고 해요. 또 경기 파주는 율곡 이이의 아버지 본가가 있는 곳이에요. 이이의 호인 '율곡'도 아버지 본가의 마을 이름이랍니다. 1536년 어머니 신사임당의 본가인 강릉에서 태어난 율곡 이이는 여섯 살 때부터 파주로 와서 자랐어요. 파주시는 일찍부터 율곡 이이와 관련된 역사 유적을 조성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고 합니다.
율곡 이이는 우리나라 5000원권 지폐에 초상화로 그려져 있죠. 그만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지금까지도 시대를 앞서간 정치가이자 대학자로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이가 살아있을 당시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이이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변화하는 모습도 따라가 보겠습니다.
"불교 믿었으니 성균관 출입 금지"
성리학자로 유명한 이이는 한때 불교에 몸담았던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어요. 유교 사상의 일종인 성리학에서는 불교를 배척하기 때문에 이례적인 일이죠. 이이가 16세 되던 해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이때 인생에 대한 무상감을 크게 느끼고 절로 들어가 승려가 되기로 합니다. 성리학을 중시한 조선에서는 금기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승려 생활은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다고 해요.
이후 이이는 성리학자 사이에서 늘 이단이라는 혐의에 시달렸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이이가 마음을 다잡고 유교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하는 시험을 보려 했을 때, 성균관 유생들이 그의 출입을 막아서기도 했어요. 이이가 한때 불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성균관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를 들었죠.
세상의 냉대는 오히려 그를 더욱 발전시켜 주는 토대가 됐어요. 직접 불교를 경험한 그는 불교의 핵심 뜻이 유교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판단했어요. 그리고 불교는 현실을 초월한 종교로, 유교를 현실에 바탕을 둔 경세학(經世學)으로 구분했죠. 불교와 유교는 서로 다른 분야를 다루고 있을 뿐이라는 거죠. 그렇지만 그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실천할 것을 강조하는 유교에 뜻을 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성찰은 유교와 불교 모두에 몸을 담은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이는 이이가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대시키면서 적극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배경이 되었고, 이후 자신의 성리학 사상을 더욱 독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왕에게 세금 개혁 건의… '대공수미법'
이이는 관직 생활을 하면서 당시 국왕이었던 선조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꾸준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피력했어요.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는 세금 제도를 점진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특히 당시 백성들이 가장 부담을 느끼던 공납(貢納) 문제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공납이란 농민들이 세금을 낼 때 관청과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직접 가져다 바치도록 한 제도를 뜻해요. 그런데 바쳐야 하는 공물을 직접 구해 납부하는 방식이 까다롭다 보니, 상인들이 농민들에게 대가를 받고 대신 물건을 납부해 주는 방납(防納)이 성행했어요. 문제는 방납 과정에서 상인들이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고 관리들과 부정하게 결탁했고, 백성들이 정상적으로 납부할 수 있는 것마저 막아 가면서 방납의 대가를 터무니없이 비싸게 징수하기 시작했습니다.
1569년 이이는 이를 해결하고자 백성들에게 공물을 현물 대신 쌀로 거두자고 건의했어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시행하자고 한 것이죠. 이런 주장에는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방지해 국가 경제를 튼튼하게 하고, 나아가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이의 제안은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방납으로 큰 이익을 얻고 있던 관료와 상인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인 파벌이라고 할 수 있는 당파 간의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이이의 개혁안은 더욱 실현이 어려워졌습니다.
대공수미법은 수십 년이 지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에야 조정에서 다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600년대 초에 들어서 대동법(大同法)이라는 이름으로 지역별로 조금씩 도입이 진행됐습니다.
'특정 편 든다' 부정적 평가받기도
이이가 살았던 당시 이이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크게 엇갈렸어요. 정치인들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라는 두 파벌로 나뉘어 싸우는 붕당이 출현했습니다. 이이는 붕당 간 대립이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양측을 조정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보는 이이가 오히려 특정 붕당 편을 드는 것으로 비쳐 거센 공격을 받았어요.
사후에도 이이에 대해 차가운 시선이 있었다는 점을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록에는 '졸기(卒記)'라고 하는,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들이 죽었을 때 그의 생애 전반과 그에 대한 평가를 서술하는 부분이 있어요. 이이에 대한 졸기는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데, "이조 판서 이이가 졸(卒)하였다"는 한 문장뿐입니다. 정승까지 지낸 인물의 졸기를 이처럼 짧게 쓰는 경우는 이례적이었어요. 선조실록은 당시 왕이던 광해군을 지지하던 붕당인 북인(北人)이 주도해 쓴 것이에요. 이이의 후학과 제자들은 대체로 서인에 포함된 것으로 여겨져요. 그와 대척점에 있던 동인을 계승한 북인의 입장에서는 이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효종이 왕에 오르자 서인이 '선조수정실록'을 새롭게 편찬했는데, 이때는 이이의 졸기를 상세하게 서술해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인은 이이의 제자와 그 후학들을 중심으로 한 당파였어요. 반면 동인에서 북인과 함께 갈라져 나온 남인(南人)은 이황의 제자와 그 후학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당파였어요. 퇴계 이황은 지금은 1000원권 지폐에 얼굴이 실려 있는 조선 시대 대표 학자이죠. 후학들은 각자의 스승인 이이 또는 이황의 뜻을 이어받겠다며 서로 공격했습니다. 23세의 젊은 나이였던 이이는 이미 대학자로서 수많은 선비의 존경을 받고 있던 58세의 이황을 찾아가 학문과 시세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습니다. 이황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두 사람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은 사이이기도 했어요.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황과 이이의 인간적인 관계는 정치적 갈등 속에서 잊혀 갔습니다.
☞ 공납과 방납
공납: 현물을 바쳐 세금을 내는 제도.
방납: 현물을 직접 바치기 어려운 경우, 관료·상인이 대가를 받고 공납을 대신해주는 일.
▲ 경기 파주에 위치한 ‘자운서원’. 율곡 이이 사후인 1615년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어요. 1650년 조선 왕 효종이 직접 이름 붙여준 ‘자운’은 부처님이 타던 상서로운 자줏빛 구름이랍니다. /한국문화백과사전
▲ 우리나라 1000원권 지폐 앞면의 ‘퇴계 이황’ 초상화. 지폐에 실릴 그림을 마련하기 위해 1974년 화가 이유태가 그렸어요. 역사적으로 이황의 후학들이 중심이 된 당파 ‘남인’과 5000원권에 실린 율곡 이이의 후학들이 중심인 ‘서인’은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서로 공격했답니다. /한국문화백과사전
▲ 2010년 취역한 대한민국 해군의 구축함 ‘율곡 이이함’. 1000㎞ 밖도 탐지하는 최첨단 능력이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대책 마련을 주장했던 율곡 이이를 닮은 모습이죠. /한화오션
김성진 서울 고척고 교사 기획·구성=장근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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