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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95:1-5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 칼빈
본 시편의 영감을 받은 기자는 엄숙한 총회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권면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찬양받으셔야 할 두 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의 권능으로 창조하신 세계를 보존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그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교회를 하나님과의 은혜스러운 교제 안으로 맞아들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선적인 입술로 찬송을 부르기에 시편 기자는 백성들에게 예배드림에 있어서 신중하고 진지하며 헌신적으로 임할 것을 권면합니다.
또 그들의 생활자세로 그들이 헛되이 택하심을 입지 않았음을 보여줄 것을 권면합니다
저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위선에 빠지지 못하도록 권면하기 위해 시편 기자는 저들의 조상이 처음부터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나님께 감사할 줄을 모르는 배은망덕한 백성이었던 사실을 언급합니다.
또 시편 기자는 저희 조상에게 임하였던 무서운 징벌을 상기시킴으로서 저희 자손들이 저희 조상의 배역의 자취를 좇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습니다.
1. 본문 1-2절은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 이 부르자
(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입니다.
본 시편은 안식일에 적합한 시편입니다.
안식일에는 신앙인들의 무리가 특히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도록 권면한 대상은 경건한 무리입니다.
시편 기자는 공적인 모임 가운데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도록 권면합니다.
이로서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예배는 주로 찬양의 제사에 있지 죽은 의식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는 무리를 재촉하여 예배에 민활함을 보이도록 합니다.
이는 저자가 ‘우리가 찬송으로 그의 앞에 나아가며 ............’ 등으로 번역한 2절에서 히브리어 קדם(카담)이 ‘서두르다’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속히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라는 요구는 필요한 권면이었습니다.
시편 95 편
우리가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사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저자가 옛 백성에게 지적하는 것이 감사드리는 일에 태만했던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도 역시 감사할 줄 모르는 완악함으로 가득차 있는 만큼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격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저들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고 요구함에 있어서 시편 기자는 예배자들의 열정을 돋우기에도 역시 알맞은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받으시기로 선언하신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사실상 예배하는 자들이 예배를 헛되이 생각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 예배에 참관하시는 것으로 말합니다.
저자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성소에 계셨다는 의미를 설명한 바 있습니다.
2. 본문 3-5절은 “(3)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4)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입니다.
이 말로서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충분한 근거가 무엇이며 우리에게는 수사학자들 혹은 아첨꾼들이 세상의 군왕들에게 돌리는 거짓 찬사들이 얼마나 필요 없는 것인가를 상기시켜 줍니다.
첫째로 시편기자는 하나님과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어 낸 거짓 신들 사이에서 재치 있는 대조를 이끌어냄으로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다”(고전8:5)고 말하는 바와 같이 세상에 항상 수많은 신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 시편에 진술되어 있는 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사람이 허락받지 않은 상상의 산물로 만들어 낸 다른 신들과의 대조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누가 반대한다면 “세상에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고전8:4)는 답으로 족합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 자신들의 어리석은 고안에 따라 신들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헛된 망상을 지적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시편 기자가 신들이라는 용어를 천사들로 이해하고 하나님은 그러한 하늘 존재의 모든 영광 위에 높이 뛰어나신 우월성을 갖고 계시며 신으로 간주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이 땅의 거짓된 신들 위에 뛰어나신 분이심을 주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시편 95 편
그러나 천사들은 실제로 신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 버금가는 존재들이기에 더욱이 사람들이 과도하게, 또 미신적으로 그들을 찬양하기에 그들에게 신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부당한 처사입니다.
만일 하늘의 천사들 자신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위엄 앞에 굴복해야만 할진대 하나님을 단순히 머리로 짜낸 허구인 신들과 비교한다는 것은 모독의 극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증거로 시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라고 명합니다.
시편기자는 세계를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으로 선언합니다.
또 시편 기자는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의 권능에 복종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셔야 할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세계의 창조에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발하셨습니다.
그 세계를 통치하심에서 매일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라는 말씀의 의미는 땅의 깊은 곳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통치되며 하나님의 권능에 종속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땅의 경계들’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심연들’ , ‘깊은 곳들’ 을 뜻하며 “산들의 높은 것” 과 대조됩니다.
그 히브리어는 정확히 ‘수색’을 뜻합니다.
시편 95 편
시95:6-7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더러 하나님께 굽혀 경배하자고 합니다(6,7상).
“굽혀 경배” 한다 함은 몸을 굽혀 경배함을 의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극히 낮아지며 두려워함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데 있어서 참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높인다지만 자신이 낮아지지 않는 것은 모두 다 형식 뿐 입니다.
우리가 낮아져야만 주님이 높아지는 법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티끌과 같은 자라 하였습니다(창18:27).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이 굽혀 경배해야 되는 이유는 7절이 보여줍니다.
7절 초두의 “대저”란 말은 히브리어 י י(키)인데 이유 접속사(理由 接續詞)로서 앞 절의 이유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또 그의 양(羊)인 것만큼, 그에게 굽혀 경배해야 됩니다.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될 것을 말해줍니다(7하 -11).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이 점에 있어서 옛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을 자기 시대의 백성에게 전감(前鑑)으로 기억시킵니다.
1. 본문 6절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입니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은혜로 베푸신 모든 민족들 위에 뛰어난 은혜를 감사하도록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의 말은 점차 열기를 더해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할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특성을 부여해 주셨고 우리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그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다른 모든 인류 위에 뛰어나는 우월성을 주셨습니다.
세 용어들로 시인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지워진 한 가지 의무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곧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할 의무입니다.
여기 언급한 예배는 우리의 온 힘을 요구할 만큼 중대한 문제입니다.
시편 95 편
그러나 우리는 시인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을 특히 지적한데 있음에 주목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은 아바르함의 자손을 영생의 소망 안으로 유일하게 받아들이신
데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내적인 감사만 아니라 외적인 신앙고백도 필요하다는 사실에 유의합니다.
본문 용어들은 주의 백성들이 자기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직접 하나님께 공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무릎을 꿇어야 하며 헌신의 표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여호와 앞에” 라는 말은 저자가 위에서 언급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곧 주의 백성은 언약궤 앞에 엎드려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언급이 율법 아래의 예배 양식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한 가지 단서, 곧 예배하는 자들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영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단서를 붙여서 받아들여져야만 됩니다.
2. 본문 7절은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지음 받은 것이 사실이나 교회만이 특별히 그런 목적으로 부름을 받은 것으로 언급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사61:3)
시편 기자는 특히 그의 백성들에게서 더욱 이러한 예배를 요구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보호하심 아래 두심으로서 그들에게 베푸신 무한한 특권을 상기시키고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실로 모든 인류에게도 그와 같이 행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회의 목자로 주장될 때는 하나님이 온 인류에게 차별없이 베푸시는 일반적으로 기르시고 보살피시며 다스리시는 은총 이상을 베푸신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상과 구분하시고 특별한 아버지로 보살피시기에 목자로 불립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여기서 ‘그의 초창의 백성’(칼빈)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특별하게 보살피시며 온갖 은혜와 복으로 그들에게 채워주십니다.
시인이 ‘그의 초장의 양떼요, 그의 손의 백성임이라’ 했다면 분명해졌을 것입니다.
‘그의 양 떼임이라’ 고 덧붙였어도 일관되고 분명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목적은 고상한 표현에 있었다기보다도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실한 보살핌 아래 살게 하시며 온갖 복과 은혜를 누리고 살도록 부르심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의 의미를 강조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손의 양”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시편 95 편
이는 그들이 그의 손으로 지으심을 입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의 손에 의해 지배를 받기에, 프랑스어 표현을 빌어 쓴다면 le Troupeau de sa conduite 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이 그 표현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는 그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손수 기르시는 데에 얼마나 열중하시는지 삯군 목자를 고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아마도 그 표현의 순수한 의미와는 거리가 멀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가 그 당시 이 한 민족이 누렸던 아주 은혜롭고 친밀한 하나님의 지도와 보살핌을 표현하고 있다는데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선지자, 사사, 그리고 후에 왕들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자기 백성 보살피시는 일을 맡기심으로서 사람의 도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 대하여 목자의 직무를 수행하심에 있어서 나머지 세상에 대해서 베푸시는 일반 섭리와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감독하시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오늘날 너희가 만일 그의 음성을 들을 것이면’(칼빈)이라는 말은 히브리 주석가들에 의하면 이것은 앞 문장과 관련되어 있는 조건절 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시인이 백성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께 계속 순종하는 조건에서만 그들의 특권과 특성을 유지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경고한 것으로 간주된 것이 분명합니다.
헬라어 역본은 이 부분을 다음 문장에 연결시켜서 ‘오늘날 너희가 만일 그의 음성을 들을 것이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말지어다’로 번역합니다.
이렇게 하면 연결은 잘 됩니다.
우리가 히브리 주석가들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시인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나님이 율법을 그들 가운데 두셨기에 하나님의 손의 양떼였다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지팡이였고 이로서 하나님은 자신을 그들의 목자로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만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불변화사 אם(임)은 그 경우에 조건적인 의미보다는 차라리 설명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며 ‘.......때에’ 로 번역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의 음성을 직접 들려주신 것이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주변 민족들 사이의 큰 구별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주지 않으셨다고 지적됩니다(시147:20, 신4:6,7).
모세는 다른 민족들에 대한 자기 민족의 우월성의 근거를 삼기 위해 이 점을 선언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하였습니다.
영감을 받은 성경 기자들은 모세오경으로부터 자주 인용을 하는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시편 기자도 “오늘날” 이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에 있어서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인 사실이 얼마나 강조되고 있는가를 암시합니다.
시편 95 편
이는 그 증거가 멀리 있지 않고 지금 바로 그들 눈앞에 나타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저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만큼 하나님을 목자로 인정할 것을 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셔서 친밀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의 한 단적인 실예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법에 맞지 않는 해석입니다.
본 절은 우리가 지적한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할 것입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계속적인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목자로서 베푸신 돌보심의 증거를 혹은 해마다 돌보신 증거를 주셨을 뿐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러한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양떼로 택함을 받았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시편 95 편
시95:8-11 이르시기를 너희는
하나님에게 순종치 않는 백성의 취한 행동이 여기 몇 가지로 진술되었습니다.
(1) 첫째는 마음을 “강퍅”하게 함입니다(8절).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는 중에 그 은혜를 심상하게 여겨 그 받은 은혜대로 순종하지 않고 마음이 굳어져 버린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런 일은 종교적인 교육이나 행사에 많이 접촉하는 자들에게 있는 죄악입니다.
(2) 둘째는 하나님을 시험함입니다(9절). 이것은 하나님을 의심하는 악한 죄악입니다.
(3) 셋째는 마음이 미혹되었음입니다(10절).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데 굳게 서지 않고, 흔들리며 방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신앙하지 않는 자는 방황하게 되고 그 심령속에 안식이 없습니다(11절)
1. 본문 8절은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이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극진히 찬양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제 저희가 목이 곧고 불순종하는 자들이었으므로 저희에게 하나님의 양떼로서의 의무를 상기시킬 기회를 갖습니다.
저희의 의무란 저희 목자이신 하나님께 유순하고 고분고분히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저들에게 보다 강력히 명심시키기 위해서 저희 조상들의 완악함을 지적하여 저희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מריבה(므리바)는 보통 명사로 ‘다툼’ 혹은 ‘논쟁’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출애굽기 17장 2-7절에 포함된 역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그 말을 지명으로 해석하였습니다.
히브리어 מסה(맛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시험이 있었던 장소는 “광야” 라는 용어로 된 지역으로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으며 누가 맛사 대신 ‘광야에서의 시험의 날과 같이’ 로 번역해도 좋습니다.
어떤 이들은 맛사와 므리바가 서로 다른 두 지역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므로 지나치게 신경을 쓰거나 신중을 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인은 당시 이스라엘 조상들이 보인 마음의 완악에 대해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시편 95 편
또 보다 큰 효과를 얻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으로 소개합니다.
마음의 완악함이라는 말로 시인은 틀림없이 여러 가지 차이는 있었겠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보인 갖가지 시험들을 뜻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어떤 자들은 냉담하고 가볍게 받아넘겼을 것이고, 어떤 자들은 듣고 난 뒤에 바로 잊어버렸을 것이고, 어떤 자들은 교만하게 거절하였을 것이고, 또 어떤 자들은 공공연히 모독과 경멸로 그 말씀에 대해 분노를 쏟았을 것입니다.
시인은 앞서 사용했던 말을 다시 빌어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했던, 또 열광적으로 날뛰며 그 말씀을 반대하였던 이들 배역자, 무분별한 자, 완악한 자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부드럽고 유순한 것으로 판단을 받는 데는 먼저 우리가 그 말씀을 존경심과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의향을 가지고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의 말씀을 아무 권위도 없는 것으로 받고 그것을 중히 여기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한낱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태도가 될 것입니다.
그 원인이야 어디 있든지 간에 우리 마음의 완악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부주의해서 그랬든지, 아니면 교만으로 인해서 그랬든지, 또는 고의로 거역했든지 간에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가증스러운 일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기 위해 가증스러운 용어를 골라 쓰고 있습니다.
율법에서는 ‘간음’ 이라는 말이 온갖 우상숭배와 부정을 가리킵니다.
또 율법에서 ‘살인’ 이라는 말은 온갖 폭력과 상해와 증오와 불화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대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여기서 비록 그가 공공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자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돌같이 굳은 마음을 가진 자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교황주의자들이 이 구절에 그들이 아끼는 의지의 자유 교리의 기초를 두고자 하는 시도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처음부터 돌같이 굳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성경이 그러한 마음의 상태가 몇몇 인간들에게만 국한되어 나타나는 질병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만연되어 있는 질병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겔36:26).
그것은 하나의 선천적인 타락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자발적인 의지의 경향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돌처럼 무감각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복종시키지 않으려는 사람은 이전에 굳어있던 그의 마음을 더욱 더 굳게 하는 것이며, 그 자신의 완고한 감정과 느낌을 확실히 인식하는 상태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95 편
여기서 그 같은 결과는 부드러운 마음, 곧 어느 방향으로든 상관없이 적응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 마음대로 얻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인간의 의지는 본래의 부패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악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의지는 악을 행하는 데로 치닫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마다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합니다.
그들의 잘못에 대한 책임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2. 본문 9절은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입니다.
1) 시편 기자는 우리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부터 마음이 비뚤어지고 고집이 세어서 거의 바로잡을 수 없었던 무리였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조상들의 죄악을 상기시킨 것이 유익한 이유 둘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 조상들의 모범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관습은 하나의 규약을 낳습니다. 옛것은 존중할 만한 것이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가정의 모범에 맹목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 조상이 무슨 일을 했든지 간에 조사해 보지도 않고 그것을 덕으로 간주합니다.
우리는 교황권 안에서 저희 조상들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는 오만무례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모든 면보다도 특히 이 면에서 자칫 속기 쉬웠습니다.
이는 그들이 언제나 자기 조상들을 자랑하는 일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저희 조상들의 말할 수 없는 배은망덕의 죄악상을 지적함으로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저희 조상들로부터 떼어놓고자 했습니다.
둘째 이유는 시인이 저희에게 현 주제에 대해 경고 받을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만일 저희 조상들이 거약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면 저들은 시편 기자에게 저희 민족이 이제까지 유순한 성품을 지속해 왔거늘 무슨 근거로 저희에게 완악한 마음에 대해서 경고하는가라고 반문을 제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저희 조상들은 처음부터 비뚤어지고 완고하였습니다.
시인은 이 특정한 악을 바로잡도록 강력히 촉구할 분명한 이유를 갖고 있었습니다.
2) 그 뒤에 나오는 말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증거를 병적으로 부당하게 요구하는 열망에 빠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본 절이 전체 내용에 관계된 것으로 보고 ‘저희가 나의 행사를 이미 보았음에도 나를 시험하고 탐지하였도다’ 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시편 95 편
하나님의 책망은 매우 정당합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미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에 의해 입증되었음에도 여전히 새로운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탐지하였다’ 는 말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 다른 의미에 따르면 본 절은 ‘너희 조상들은 나를 시험하여 묻기를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희에게 온갖 은혜를 베풀었다. 또한 저희가 나를 탐지하였으니, 곧 내가 저희에게 나의 존재에 관한 공공연한 증거들을 그침 없이 제공하였으므로 저희가 나의 존재를 실제로 체험하였고, 나의 행사를 계속해서 보았도다’ 라고 해석됩니다.
시인의 의도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감취어 있기라도 한듯이, 또 가장 명백한 증거들로 저희를 가르치지 않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의 증표를 찾아내고자 한 행위가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었습니다.
저희가 증거를 받지 못했더라도 저희는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고기와 물을 공급해 주시지 않은 이유를 물었어야 했거늘 오히려 애굽에서 펴신 팔로 저희를 인도하여 내신 이후 가장 확실한 증거들로서 저희에게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입증하셨음에도 그의 임재를 의심하였고, 마치 그의 임재의 증표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가 저희와 함께 계신 사실 자체를 의심하였습니다.
이 같은 의심은 저희의 죄책을 더욱 가중시키는 사악한 건망증을 잘 나타내 줍니다.
대체로 본 절의 의미는 ‘너희 조상들은 저희가 충분한 증거들을 갖고 있었음에도 내가 저희의 하나님이라는 분명하고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로 확증을 얻었음에도 아니 나의 행사가 저희 앞에 분명히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시험하였느니라’ 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교훈입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의 능력과 자비에 관한 증거들을 풍부히 가지면 가질수록, 또 다른 증거들을 요구할 경우 우리가 더욱더 큰 죄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적들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는가?
또 소원들을 이루어 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사람들은 시편 기자가 그밖에 여러 가지 예들을 인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 므리바의 경우를 골라낸 이유를 물을 것입니다.
저희는 홍해를 지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쉬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저희에 대하여 이 한가지의 죄악만을 지적하고 나머지 다른 점들에 대해서는 침묵함으로서 저희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서는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함으로서 그밖에 많은 사실들까지도 아울러 강조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비유를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편 95 편
여기도 많은 사례들에 대표로 하나만 지적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특정 사실이 지적된 또 하나의 이유는 모세에게서 분명히 나타나는 대로 물이 없다고 불평한 때에 백성들의 배은망덕과 거역이 극에 달했다는 데 있었는지 모릅니다.
주석가들이 이 점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때에 저희는 이전 불신앙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저희의 행한 이전의 모든 사악이 극에 달한 행위로 부르짖음이 일어날 때까지는 저희가 저희의 고칠 수 없는 강퍅에 대한 공공연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3. 본문 10절은 “내가 사십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하다 하였도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아무 효험도 없이 그처럼 오랫동안 다투신 것이 바로 저희의 고질적인 완악함이었다고 제시합니다.
때로는 이내 가라앉고 마는 패역의 행위가 튀어나올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십년 내내 그의 백성과 다투지 않으면 안될 고질적인 원인들을 그 백성들이 갖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그 백성들의 고질적인 방자함을 입증해 줍니다.
“세대” 라는 말이 여기서 그 목적으로 사용됩니다.
히브리어 דור(도르)는 한 시대 혹은 사람이 사는 생애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그 말이 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여기서 시인은 마치 하나님이 구원하신 이스라엘 백성은 저희의 온 생애를 통해서도 고칠 수 없는 무리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히브리어 동사 אקוט(아쿠트)는 우리가 ‘내가 다투었다’ 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것을 ‘내가 경멸하였다’ 로 번역합니다.
칠십인역은 προσωχθισα(프로소크티사 ; 내가 무감각해졌다, 내가 노하였다) 입니다.
히브리 주석가들은 순수히 하나님이 계속 저희들과 다투셨다는 의미를 취합니다.
이것은 저희의 극단적인 완악함에 대한 하나의 두드러진 증거였습니다.
본절에서 하나님은 저희에게 공식적으로 심판을 선언하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
하나님은 저희의 불신앙이 갖가지 방법으로 드러난 연후에 저희의 완악한 행위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이 시사되고 있습니다.
‘마음이 빗나갔다’ 는 말은 저희의 행실에 정상을 참작하려고 의도된 표현이 아니라 저희의 행실이 어리석고 미친 것이었다는 사실을 못박아 두려고 의도된 표현입니다.
시편 95 편
하나님께서는 마치 감성과 지성을 가진 인간을 대하여 말씀하시기보다는 차라리 짐승을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저희가 눈앞에 놓인 주의 행사들에 참여치 않았고, 주의 말씀에 순응치 않았습니다.
이는 저자가 “도”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דרך(데레크)가 저희 앞에서 행하신 이적들만 아니라 그의 율법과 반복해서 말씀하신 그의 훈계들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사 저희 가운데 그처럼 친근하게 함께 거하셨고 말씀으로만 아니라 행사를 통해서도 그처럼 밝히 자신을 저희에게 나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저희 눈을 감아 버리고 저희 앞에 된 모든 일들을 지나쳐 버린 것이 저희의 말할 수 없이 완악한 처사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기자가 저희의 어리석음을 미친 행위로 언급하는 이유입니다.
시편 기자는 저희가 그처럼 밝은 빛 아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친 사람처럼 마음이 빗나가서 잘못된 길로 방황하였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4. 본문 11절은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입니다.
우리는 관계사 אשר (아쎄르)가 본래의 의미로 ‘저희에게 내가 맹세하였다’로 해석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습니다.
헬라어 역본은 그것을 ‘내가 맹세한 바와 같이’ 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추론 혹 결론을 뜻하는 것으로 봄이 옳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편 기자는 마치 저희가 하나님을 시험할 때 마침내 약속된 기업을 박탈당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희가 나타내 보였던 완악함에 대해 언급한 다음에 맹세로 저희가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저희가 저희의 거역을 더해 감에 따라 저희가 방자하여 마땅히 하나님의 안식에서 제외되었던 것이 더욱 분명해지게 되었습니다.
과거 완료 시제 ‘내가 맹세하였었다’ 로 해석하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저희와 이처럼 다투시기 전에 저희의 사악한 행위를 내다보시고 저희를 이미 약속의 기업에서 제외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맹세의 생략된 형식에 대하여 설명한 바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그 약속과 관련된 하나님의 “안식”으로 불립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은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가 완전히 이르기까지 방랑의 생활을 계속해 왔었습니다. 애굽은 일시적인 도피처였습니다.
시편 95 편
약속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저희의 합법적인 기업의 땅에 심으실 준비를 하시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의 안식이라 부르시는 것이 매우 당연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능동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큰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자기 본토에서 안연히 거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간 멈추고 사도 바울이 그의 히브리서 3장과 4장에서 언급하는 바를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구절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도가 헬라어 역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못됩니다.
또한 사도가 본 구절을 표면상으로 다루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는 다만 ‘오늘날’ 이라는 말과 “안식”이라는 말에 강조점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먼저 사도는 ‘오늘날’ 이라는 표현이 율법이 주어진 때에 국한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다 공개적으로 말씀하기 시작하신 복음이 주어진 때에 적용되는 것을 당연하다고 진술합니다.
보다 완전하고 보다 충분한 교리의 선포는 보다 큰 주의를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나타내셨고 매일 우리를 그에게로 나아오도록 초청하시며 그러한 기회에 그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지워진 임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다음에 사도는 “안식”이라는 말로부터 우리가 시편 기자의 말이 보장하는 것으로 생각지 말아야 할 정도로 추론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안식” 이라는 말을 제 1의 위치에 두고 있습니다.
곧 사도에 의하면 여기 선언된 형벌에는 하나의 약속이 함축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가나안 땅보다도 더 나은 어떤 안식이 약속되어 있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또 다른 안식을 기대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일하게 하심으로서 우리의 일에서 쉼을 얻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예표적이었던 율법 아래서의 옛 안식일 혹은 안식과 새로운 영적 삶을 비교할 기회를 갖습니다.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이라는 말은 시편 기자가 어떤 면에서 이 형벌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으셨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이 보통으로 가볍게 노하신 것이 아니라 저희의 말할 수 없는 패역이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으며 하나님에게서 이 같은 맹세가 나오도록 자극하였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