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11
구국 기도 / 한서노회
오늘 우리 모두가 처한 현실은 상당한 위기의 현실입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사회 윤리적으로 위기의 때를 만났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우리에게 갑자기 닥쳐오므로 많은 갈등을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가치관이 흔들립니다. 도덕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온갖 범죄와 부정으로 사회는 병들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어려움의 현실이 우리가 상상하고 알고 있는 보다 더 어려운 현실일 수 있습니다. 이 외적인 면의 어려움보다 내적으로 병든 현실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환경이라는 어려움만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편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가정과 직장을 생각하며 열심히 생활하는데, 이것에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환난을 만나면 더 어렵고 두려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의 진노가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있는 사람은 실은 어떤 환난이 와도 상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현실에 대한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1. 이 위기의 현실을 두려워하여 동심하고 마는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할 수도 있습니다. 어디 피난 갈 곳은 없는지. 어떻게 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을까?
2. 또 우리들의 갈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에 이 세상 나라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잘못된 세계관이 있습니다.
대단한 좋은 믿음 같지만, 치우친 것입니다.
3. 어떤 사람은 위기에 대한 의식 조차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사는데 너무 바빠서 언제 환난이 오는지 상관도 않고 사는 하루살이 인생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4. 우리들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염려해야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사람보다 더 많아야합니다.
왜 이 나라와 민족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처소요, 선물이요,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현장이요, 선교의 대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가 이 나라를 민족을 사랑하고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 보다 우리가 가장 애국애족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오늘 기독자들이 내세를 지향한다고하면서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는 것 같이 하는 것은 치우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저주를 받아 하나님께 끊길 지라도...”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현실에서 취할 행위는 어떤 것입니까?
이 모든 잘못된 모습의 책임은 우리가 져야 마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중대한 위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애국심을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배웁시다.
첫째로, 느헤미야는 민족이 당한 고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알고 기도했습니다.
이 때 느헤미야의 입장은 비록 포로된 백성이었지만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맡은 관원으로서 왕궁의 장관이기에 아주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 하나니를 통해서 황폐된 조국의 소식을 듣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이 본문입니다.
느헤미야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 비보를 듣고 구경만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에 있는 어떤 사람 보다도 더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어떤 것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욕을 듣는데도 가만히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 지금 개인주의 때에 이런 사람은 귀합니다.
다니엘도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조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대단했습니다.
전쟁의 위기에 있을 때에 가진 자들이 영주권을 마련해 놓고 도피이민을 하는데, 이 느헤미야는 자신과 가정만을 생각하면 편안하고 아무 부족함이 없는 생활이지만, 그에게는 이 모든 것 보다 더 조국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조국의 흥망성쇠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는 형제 하나니를 통해서 조국의 성벽이 불타고, 조국의 동족들이 어려움을 당한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많은 동족들이 잡혀가고, 사로잡힘을 면한 자들이 그 것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이 다 불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 그는 남의 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에 그는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는 동족이 당하는 아픔과 능욕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슬퍼했습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에 무관심하지 않아야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을까?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우리들이 너무 이기적이 되어서 자기의 가정의 어려움은 큰 어려움인줄 알고, 제게 당한 어려움을 인해서는 기도도 부탁하고, 위로 받기를 원하고, 함께 의논하기를 원하지만 정작 큰 어려움이 되는 국가의 위기에서는 방관자의 자세를 가집니다.
그물이 작은 그물이던, 큰 그물이던 이미 그물 속에 든 고기는 꼼짝 없이 잡히게 되어있습니다. 단지 워낙 큰 그물은 제 눈에 안보이니 상관없는 것 같지만 전쟁이나 일어나서 국가적으로 어려움이 닥칠 때에는 옆에 나를 돌와주고, 동정할 자 조차 없는 전멸하는 어려움 일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느헤미야에게 배웁시다.
이 국가적인 위기가 내게도 위기인 것을 알고 마음을 아파하고, 이 문제를 하나님께 해결받으려는 애국을 가집시다. 느헤미야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줄 알았기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셋째로 느헤미야는 이 모든 고난의 원인이 죄에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느1:6)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느1:7)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했습니다.
먼저 이는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모든 죄의 책임을 다른 이에게 모든 이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의 가정, 자신에게 이 죄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자세가 그리스도의 자세이며, 성도의 자세입니다.
다른 이를 고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가 있습니다.
자신이 고치고 있느냐? 고치지 않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제 모든 파멸의 원인은 죄 값이요, 그 죄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 있음을 인식할 때에 하나님께서 도우시기 시작합니다.
우리 민족의 이 어려움은 당연히 우리 한국교회가 져야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면 어떤 강한 자라도, 어떻게 준비된 자라도 하나님께서 바다물의 한계를 정하시듯 넘어오지 못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병이요, 병거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몽둥이를 들고 치시겠다면 무엇이, 누가 이를 막겠습니까?
이북이 아니라도 하나님께서 다른 몽둥이를 준비해서 망하게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한국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지금까지 함께하신 놀라운 이적과 역사로 도우신 하나님께서 이제 한국교회가 교만해졌고, 하나님께 건방을 떨면서 우상을 섬기고, 뮤물주의, 인본주의로 타락해 나갈 때에 사랑하신 것 만큼 질투도 강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패망의 원인이 이것입니다.
오늘에 듣기 좋은 화평과 축복의 소리를 전해야하겠지만, 그는 참 선지자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의 소리입니까?
아닙니다.
참 축복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고, 내려 주시는 복이 그치지 않고 계속 받자는 말씀입니다.
넷째로, 느헤미야는 기도만 하지 않고, 실행을 했습니다.
이 조국의 재건이 자기 할 일인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닥사스다 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조국에 돌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므로 왕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슬퍼하고, 하나님께 호소한 것 만이 아니라, 이제는 그 고난의 짐을 제가 지겠다고 나서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치욕을 당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욕이 되는 줄 알고 참을 수 없어서 무엇이든지 할 각오였습니다. 이는 죽을 각오를 하고 왕에게 나간 것입니다. 왜? 이 성벽재건을 방해하는 말을 듣고서 중단시킨 자가 바로 아닥사스다 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이 일을 왕이 안된다고 하면 느헤미야는 왕에게 반역의 죄로 죽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에스더가 한 말 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이 일을 추진 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왕의 마음이 감동되어서 본국으로 일시 귀국하여 이 일을 하도록 허락이 났습니다.
다섯째로, 느헤미야의 구국운동은 신앙회복운동이었습니다.
느혜미야가 성벽재건하는 일을 했습니다. 성벽세우는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은 성벽 세우는 일을 하면서 보이는 이 일을 통해서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모우는 일을 했습니다.
에스라 선지자를 통해서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을 했습니다. 모든 잘못된 신앙의 행위를 말씀과 대조해서 철저하게 고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회개,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이 나라를 구해야합니까?
국민된 의무를 다하는 일도 해야하지만, 우리 교회의 할 일은 다릅니다. 이 때에 우리가 각성해야합니다. 모든 사치와 낭비, 허영의 생활을 정리해야합니다. 음란을 버립시다. 미신을 섬기는 일을 버립시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해야합니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한 것이 우상인데, 이런 거짓된 우상을 다 버려야합니다. 모든 불신과 의심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하나님 경외하는 교회, 가정, 개인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1. 이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들이 방관하면 안됩니다.
구경꾼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면 다 함께 당하는 것입니다.
2. 우리의 흥망성쇠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기도해야합니다.
3. 이 모든 고난의 원인은 우리들이 범한 죄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회개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4. 우리가 기도만 할 것이 아닙니다.
결심하고, 각오하고,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으면 실천을 해야합니다.
5. 우리의 신앙이 회복되어야합니다.
냉냉하고 무감각한 신앙생활 아닙니까? 크게 병든 것입니다.
이를 고치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일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바로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의 의로서 이 나라를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쩌면 나 한사람의 죄를 회개시키려고 이런 위기를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출처 한서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