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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좋지 못하면 고생한다? / 조상호 목사
어느 학교에서 미술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시험문제는 “‘조각품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한 작가의 이름으로 쓰시오.“ 였습니다. 정답을 알고 있는 한 학생은 자신 있게 ’로뎅‘이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그 학생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컨닝을 했는데, 눈이 나빠서 ’로뎅‘을 ’오뎅’이라고 잘못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앉아있는 또 다른 학생이 컨닝을 한 후 똑같이 적으면 선생님에게 들킬 것 같아서 ’오뎅’을 ‘덴푸라’라고 적었습니다. 그 옆에 앉아있는 또 다른 학생 역시 컨닝을 한 것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묵’ 결국 컨닝을 한 세 명의 학생들은 탄로가 나서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다고 합니다.
누가 웃으라고 만든 유머인 것 같은데, 이 이야기는 눈이 나쁘면 예상치 못한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길을 가다가 길 건너편에 ‘불량용품 판매점’이라는 간판을 보고서 별 희한한 간판도 다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볼링용품 판매점’이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친구들이랑 바닷가에 놀러가서 술 한잔을 한 후 걷다가 길 건너편에 ‘야구장’이라는 간판이 보이더랍니다. 그런데 길을 건너 가까이 가서 보니 야구 연습장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고 ‘아구탕’이라는 간판만 보이더랍니다. ‘아구탕’ 간판을 ‘야구장’ 간판으로 잘못 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의 얼굴을 못 알아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친구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눈이 좋지 못하면 실수를 할 때가 있고, 상대방에게 오해를 사는 등,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눈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람은 네 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육신의 눈(육안, 肉眼, naked eye)’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이 없는 사람이나 육신의 눈으로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소경 혹은 장님이라고 부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소경이라는 말 대신 ‘시각장애우’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아무튼지 소경이든지 시각장애우든지 눈이 잘 보이지 않으면 생활하는데 매우 어려움을 겪습니다.
둘째로 ‘지식의 눈(혜안, 慧眼, insight)’이 있습니다.
옛말에 ‘낫 놓고도 기억자도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배우지 못해서 생기는 어려움을 묘사한 말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한 커플이 식당에 갔습니다. 식당 한쪽 벽에 ‘塞翁之馬(새옹지마)’라고 쓰여진 액자가 있었습니다. 여자가 물었습니다. “오빠! 저거 뭐라고 쓴 거예요?” 남자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네 글자 중에 끝에 있는 ’지마‘라는 두 글자는 알겠는데, 앞에 있는 두 글자는 아무리 봐도 무슨 글자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퍼뜩 한 가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기지마!‘ 결국 두 사람은 밥알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었다고 합니다. 까막눈이라는 말은 바로 지식의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눈이 좋지 못한 것도 문제이지만, 지식의 눈이 좋지 못한 것도 문제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여 지식이 쌓이면 지식의 눈이 생깁니다.
셋째로 ’마음의 눈(심안, 心眼, mind's eye)‘이 있습니다.
마음의 눈은 자신의 마음이나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의미합니다. 한 여인이 아주 멋지게 생긴 얼짱 남자를 만났습니다. 겉모습만 멋진 것이 아니라 매너까지 좋았습니다. 그래서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부인이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너무나 충격을 받은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잃었습니다. 겉만 보고 판단한 제가 잘못입니다.” 이 여인은 육신의 눈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마음의 눈은 좋지 못했습니다.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어떤 것에서 좋은 점을 발견하려면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영의 눈(영안, 靈眼, spiritual eye)‘이 있습니다.
영적인 눈은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육신의 눈이 좋고 지식의 눈이 좋고 마음의 눈이 좋아도 영안이 뜨이지 않으면 영적인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5절과 16절에 보면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동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은 뜨고 있었기 때문에 엠마오로 가기는 했지만, 영적인 눈이 가리어져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자 비로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처럼 영적인 눈이 닫히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지만, 영적인 눈이 뜨이면 보이지 않던 것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영적인 눈이 닫혔다가 다시 영적인 눈을 뜨게 된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 게하시입니다. 일반적으로 본문을 내용으로 한 설교는 엘리사 선지자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엘리사 선지자가 아닌 엘리사 선지자의 종 게하시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주전 850년 경 이스라엘과 북쪽에 있는 아람 나라가 치열하게 전쟁을 치를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아람나라가 치밀한 계략을 세워 이스라엘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람 왕은 자신들 중에 스파이가 있어 작전계획을 이스라엘 측에 알려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어 그가 왕이 침실에서 은밀하게 하는 말까지도 미리 알고, 그것을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주는 바람에 자신들의 작전계획이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엘리사가 있는 이상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아람 왕은 엘리사를 체포하기 위해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들로 구성된 특별부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엘리사가 숨어 있다는 도단성을 포위하게 했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밖을 나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다같이 15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도단성은 계곡 위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성 밖을 쉽게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게하시는 수많은 군사들과 말과 병거가 도단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더욱이 그는 영적인 눈이 열리 있지 않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이 말을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인님, 큰 일 났습니다. 죽게 생겼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말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가 어떻게 반응한 줄 아십니까?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16절 상반절을 보면, 엘리사 선지자가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Don't be afraid"
엘리사는 게하시와 정반대로 반응한 것입니다. 도단 성을 포위하고 있는 아람 군대를 보고 게하시는 두려워했지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게하시는 두려워 떤 반면, 엘리사는 오히려 두려워 떠는 게하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두려워 떠는 게하시와 달리 엘리사가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과거 기독교가 박해를 당하던 시절 스위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순교자가 장적더미 위에 맨발로 올라갔습니다. 이제 막 불을 질러 화형을 집행하려는 순간, 그 순교자는 자기의 사형집행을 감독하던 치안판사를 가까이 오라고 한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판사님의 손을 내 가슴에 얹어 보십시오. 저는 이제 곧 화형을 당하는 몸입니다. 만약 저의 심장이 평상시보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뛴다면 저의 종교를 믿지 마시고 저의 하나님을 부인하셔도 좋습니다.” 그 말을 들은 판사가 순교자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일반적으로 무슨 일을 당하거나 어려운 일을 만나면 심장이 뛰고 맥박이 빨라집니다. 그런데 그의 가슴은 화형을 기다리는 사람의 가슴이 아니라, 침대에 잠을 자러 가는 사람의 가슴처럼 너무나 고요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디에서 이러한 담대함이 나올까요?
히브리서 11장 36절과 37절을 보면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의 선배들은 엄청난 환난과 학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담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톱으로 켜질 위험 가운데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으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칼에 맞아 죽는 자리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에는 사람을 담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약한 사람을 강하게 만들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당당하게 만들고, 두려워하는 사람을 담대하게 만드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게하시는 ‘죽게 생겼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믿음의 사람 엘리사는 오히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며 게하시를 안심시켜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사가 무엇을 믿었을까요?
그가 무엇을 믿었기에 두려워 떠는 게하시와 달리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엘리사는 자기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군대가 자기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고 있는 게하시에게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군사가 더 많다’라고 위로해 준 것입니다(16절).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를 합니다. “야훼여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O Lord, open his eyes)"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다같이 17절을 보겠습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야훼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야훼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여기 ‘눈을 여시매’라는 말은 앞을 보지 못하던 소경이 육신의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게하시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도단성 주위에 가득하게 진을 치고 있는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보낸 주신 불말과 불병거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서 불말과 불병거를 보내주셨을까요?
아니면 엘리사가 기도하기 전부터 거기에 불말과 불병거가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자, 서둘러라. 아람왕이 보낸 군대에 포위된 엘리사가 지금 기도하고 있다. 그 기도가 끝나기 전에 우리가 도착해야 된다’고 했기 때문에 천사들이 급하게 달려왔을까요?
아니면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체포하려고 몰려오기 전부터 천사들이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었을까요?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엘리사가 하나님께 천군천사를 보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엘리사가 하나님께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엘리사는 그저 ‘야훼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하며 게하시의 영적인 눈이 열리기를 위해 기도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신 후 불말과 불병거를 보내주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기도 전에 이미 불말과 불병거를 엘리사에게 붙여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말과 불병거를 엘리사에게 미리 보내주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미리 천군천사를 보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도단성에 머무르고 있는 엘리사를 보호하기 위해 천군천사를 보내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줄로 믿습니다.
어느 글에서 부부의 변해가는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20대 부부는 포개서 잠을 잔답니다. 그 이유는 옆에 누워 있는 것도 아까워서랍니다. 그런데 30대에 접어들면 손잡고 자고, 40대는 손 놓고 떨어져 자다가, 50대에 들면 서로 돌아누워 잔다고 합니다. 그러면 60대가 된 부부는 어떻게 잠을 자는 줄 아십니까? 남편은 이 방, 아내는 저 방, 각자 따로 잠을 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70대가 되면 또 어떻게 잠을 잘까요? 한 사람은 방에서 자고, 다른 한 사람은 산에서 잠을 잔다고 합니다. 산에서 잠을 잔다는 말은 캠핑 가서 잠을 잔다는 말이 아니라, 산에 있는 무덤 속에서 잠을 잔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며 살겠다고 결심을 해도 사람은 변합니다. 사랑이 식어져서 서로 돌아누워 자던지, 각자 따로 방을 쓰며 잠을 자던지 변합니다. 아니면 사랑이 식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몹쓸 병에 걸려 한 사람은 병원 침대에서 잠을 자고 한 사람은 안방에서 잠을 자든지, 한 사람은 살아있고 다른 사람은 무덤 속에 있든지 세월이 흐르면 부부는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과 다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보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고,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으십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 보혜사 성령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세상 끝 날까지 변함없이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죽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아는 것이네.” 잠시 후 웨슬리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라네.”라고 말한 후 평화로운 얼굴을 한 채 숨을 거두고 천국으로 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체 중에 눈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눈을 뜹니다. 그 이유는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먼저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눈을 감고 움직인다면 이곳저곳, 여기저기에 부딪힐 것입니다. 그리고 이마와 얼굴과 몸에 숱하게 멍자국이 남을 것입니다. 물론 손을 내저어 앞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한 후 움직일 수 있고, 귀로 들어 본다거나 냄새를 맡아서 앞에 무엇이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앞에 무엇이 있는지 완벽하게 알려면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눈을 뜨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육적인 눈을 뜨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사람에게는 영적인 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세계와 영적세계를 모두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로마서 11장 8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에게 보지 못할 눈을 주셨습니다. 즉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또 이사야 43장 8절에 보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분명히 두 분을 가지고 있지만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탐욕으로 어두워져서 인간의 도리와 양심조차도 분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게하시는 앞을 못 보는 소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앞을 볼 수 있는 두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 떨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적인 눈이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와 달리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불말과 불병거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으면 불안합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이 닥쳐도 두려워합니다.
사실 게하시는 자기 주인인 엘리사 선지자 옆에서 여러 가지 기적을 많이 목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기름병에서 기름이 끝없이 쏟아지게 하는 것을 보았고,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는 것도 보았고, 아람나라 군대장관인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친 것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적인 눈은 감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불말과 불병거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엘리사를 아무리 오래 따라다녀도, 아무리 많은 것을 보아도, 아무리 많은 것을 들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감겨 있으면 영적인 세계를 절대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아무리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을 보았다 할지라도, 영적인 눈이 감겨 있으면 게하시처럼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21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이 쫓겨나서 광야에서 울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혀주셔서 아까까지 보지 못했던 우물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창 21:19).
기도를 통해 눈이 열립니다.
어떤 눈이 열립니까?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엘리사가 ‘야훼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O Lord, open my eyes so I may see’라고 게하시를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영적인 눈을 열어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 번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야훼여 원컨대 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만약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이나 친구 등,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야훼여 원컨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여러분, 엘리사처럼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사가 게하시를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눈이 열리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 감겼던 영적인 눈이 떠지고, 기도를 통해 닫혔던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총장인 찰스 엘리엣에게 어느 날 나이가 지긋이 든 노부부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 노부부는 지저분한 옷을 입고 왔습니다.
적어도 하버드대학 총장을 만나려면 예의상 정장을 입던지, 정장이 아니라 할지라도 깨끗한 옷을 입어야 하는데, 그 부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하버드대학에 얼마간의 돈을 기부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기부하면 얼마를 기부하겠는가 생각하고 노부부를 잘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쁘다는 이유로 그 부부를 면담하다 말고,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 노부부도 엘리엇총장과 면담을 하다 말고 “총장님, 바쁘신데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하고 총장실에서 나왔습니다.
원래 그 노부부는 캘리포니아에서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전쟁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아들의 이름으로 하버드대학교에 기부를 하려고 했지만, 엘리옷 총장이 자기들을 무시하자, 노부부는 자기들의 고향인 캘리포니아에 대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대학이 ‘서부의 하버드’라고 불리 우는 스탠포드 대학입니다. 스탠포드는 전쟁에서 죽은 노부부의 아들의 이름인데, 그 이름을 따서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했던 것입니다.
엘리옷 총장은 그 노부부가 가지고 있는 큰돈은 보지 못하고 노부부의 겉모습만 봤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고, 세계 제일의 하버드대학 총장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육신적인 눈으로 보면 오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적인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 번 영적인 눈이 뜨였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죄악 가운데 살다보면, 다시 감길 수가 있고 닫힐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영적인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악한 마귀의 역사인지 성령의 역사인지 분별할 수 있도록 ‘영분별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육적인 눈을 떠는 것도 중요하고, 지식의 눈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고, 마음의 눈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게하시처럼 영적인 눈이 닫혀서 두려워하며 어려움을 겪지 말고, 엘리사처럼 영적인 눈을 가지고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