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세이포레 2012년 여름호 계간평
소요의 구심력, 투쟁의 원심력
에세이포레를 읽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현대수필에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주제들 중 하나가 욕망이다. 욕망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르트르를 따르면 욕망은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을 추구하여 결함이 없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정신활동이다. 자크 라깡에 의하면 욕망은 욕구가 요구와의 일치를 위해 나아가고자 하는 에너지를 의미한다. 이때 욕구란 자아의 물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차적 충동을, 요구는 자아를 완전히 충족시켜주기를 원하는 희망사항을 의미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인간은 욕망의 덩어리다. 수필의 여기저기에서 갖가지 욕망들이 넘실거린다.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뚜렷한 요소들 중 하나는 욕망이다. 물론 욕망이란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이기에 이 시대의 발명품은 아니다. 그러나 욕망이 표현되는 구체적 양태들은 각 시대마다 달리 나타난다. 인간은 ‘현실’, ‘가능’, ‘필연’ 등의 양상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리고 이 양상들이 처하게 되는 맥락들과 그것들 자체가 맺는 관계들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 사회가 도래하면서 ‘필연’의 위상은 많이 약화되었다. 대신 ‘현실’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욕망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경제적 불황기를 맞아 더욱 더 기형화되어 가는 우리 시대 욕망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에세이포레 62호에 발표된 수필 중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이란 욕망의 양태가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 중에서도 작품성이 뛰어난 네 수필을 통해 그 형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II.
인간이란 자신의 내부가 의지하는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나 욕망은 과연 누군가의 마음 속에, 내부에 존재하는 것일까? 인간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도는 이를 잘 증명한다. 자신이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것들이 타인들이 욕망하는 것을 내면화한 결과들일 뿐이다. 노혜숙의 <완장>과 김혜식의 <여자의 자격>은 원심력에 의한 투쟁의 욕망 양태를 나타내는 작품이라면, 조춘희의 <바닥>과 김이경의 <숨비소리>는 구심력에 의한 소요의 길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미적 구조로서의 문학적 가치 측면에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 하겠다. 대상 작품으로 선한 근거는 인식과 형상의 복합체라는 문학의 정의에 모두 잘 부합한다는 데 있다.
노혜숙의 경우, 맏이가 책임의식을 갖는다는 명분으로 동생들에게 권위를 부리는 것은 아버지가 거는 맏이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잠재의식의 발로다. 인간은 철저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이다. 타인의 욕망을 가늠하는 잣대, 곧 자신이 타인의 욕망을 간파해내는 잣대는 타인의 눈길이다. 우리는 타인의 눈길을 통해서 자신을 판단한다. 그리고 타인의 눈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한 인간의 눈길 속에는 그 눈길이 향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인식, 판단, 감정, 요구 등이 모두 깃들어 있다. 작가의 아버지는 노혜숙에게 ‘형제우애가 맏이의 본에 달려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나 그녀는 본을 보이는 일보다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을 먼저 배운다.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공감을 받지 못한다. 갈등을 가져오고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타인의 눈길은 자신의 거울과도 같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외모를 판단하듯이, 타인의 눈길을 보고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판단한다. 타인의 눈길에 비친 자기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기이다. 노혜숙의 <완장>은 무의식의 원심력적 욕망과 정반합이라는 삶의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보여주는 수필이라 하겠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해지는 일이었다. 동생의 맹랑하고 대담한 행동은 언니의 부당한 권력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이었을 것이다. 그 사건은 확실하게 사태를 역전시켰다. 그 날 이후 나는 다시는 동생들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여동생은 설렁설렁 비질만 했고, 대청마루를 닦는 일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노혜숙의 <완장>은 위의 예문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맏이로서의 작가가 권위의식을 가지고 동생들을 일찍부터 부려먹다가 은근히 꾀가 많고 당찬 성격의 바로 밑 여동생의 강력한 저항을 받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서, 자신의 잠재의식에 남아있는 책임의식을 ‘완장’이란 제재로 잘 나타낸 수필이다. ‘나는 일찍부터 어린 동생들을 부려 먹었다.’로 시작하는 서두는 이미 저항을 충분히 예견하게 하는 진술이다. 무엇보다도 이 수필이 주는 맛은 진솔한 고백성이다. 여동생의 저항으로 인해무참하게 맏이의 위세를 꺾인 당시의 기억이 가볍지 않은 상처였다고 한 고백과 함께 그녀는 자기 안의 폭력성과 맏이로서의 체질적인 권위의식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때 일로 한 구석 심정의 지기를 펴지 못 하고 있는 것과 본을 보이는 일보다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을 먼저 배웠기에 동생들은 어려서부터 완고한 맏이의 간섭과 닦달을 받아야 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용기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이 글은 구원과 위안이라고 하는 테라피적 기능을 잘 소화한다고 하겠다. 지금은 맏이의 역할을 요구하지 않을 뿐더러 맏이의 권위가 통하는 세상도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의 잠재의식 속에는 맏이의 책임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이로 인해 발생한 동생과의 갈등으로 각인된 동생에 대한 자기 안의 뿌리 깊은 죄의식을 결말부에 가서 ‘완장뿐이었던 맏이의 콤플렉스는 아닐는지’라고 잘 처리으로써 수필의 문학적 특성을 멋지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타인의 눈길이란 반드시 물리적 눈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현존하지 않을 때에도,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을 마주 대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타인의 눈길을 마주대하게 된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회의 ‘대접’은 곧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평균적 눈길이다. 우리 사회를 지탱한다고 여겨지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또는 보이지 않지만 여자는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 등의 관습도 따지고 보면 타인의 눈길에 해당한다. 학교에서 받는 성적표, 회사에서 받는 ‘대우’ 등등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회적 대접, 대우는 곧 보이지 않는 타인들의 눈길이 모두 모여 자신을 쳐다보는 커다란 눈이다. 그 거대한 눈은 타인들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보이지 않는 눈이다. 우리는 그 눈을 ‘사회’라고 부른다. ‘관습’이라고 하는 것도 있다. 같은 행동인데도 생물학적인 성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는 것들이 우리 사회에는 많다.
김혜식의 <여자의 자격>은 이런 편견을 정조준하는 수필이다. 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페미니즘 수필에 속한다. 이 수필에 나타난 그림자 형상은 욕망의 원심력이다. 아버지의 원심력이요, 위반의 원심력이다. 양성에너지의 원심력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원심력과 구심력에 의해 삶이 영위된다고 본다. 추를 실에 매달아서 손으로 돌리면, 바깥으로 나가려는 힘과 안으로 당겨오는 힘이 동시에 작용한다. 그런데 추가 튀어나가지 않고 원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사실 구심력이 더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혜식은 세상의 모든 것이 가장 안정된 모습, 음성에너지 7에 양성에너지 3 정도를 갖추었을 때라고 하는 전통적인 논리를 부정한다.
남자는 일상에서 어떤 행위를 저질러도 그게 용납 되면서 걸핏하면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에는 금기의 잣대를 들이 대곤 한다. 여자는 아무리 생리작용이 급해도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장소에서 볼일을 봐야 여자다운 행동으로 여기고 있다. 어디 이뿐이랴. 흔히 마음 그릇이 옹색한 이를 가리킬 때 ‘앉아서 오줌 누는 여자나 진배없다.’라는 말로 여자의 생리적 배설 행위까지 싸잡아 폄하하기도 한다.
같은 사람인데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가치평가가 달라진다면 이는 분명 성차별이다. 우리 사회의 성 고정관념에 따른 이중적 잣대는 김혜식 같은 의식 있는 작가들의 의식을 일깨운다. 이 보이지 않는 눈, 거대한 눈길은 어떤 이름에 응축된다. 이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적인 명사이지만, 일반적인 명사가 아니라 사회에서의 일정한 자리를 함축하는 이름이다. 사람들은 타인들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에 결국 어떤 이름을 욕망하게 된다. 타인들은 이 이름들을 욕망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들이 욕망하는 이 이름들을 욕망하게 된다. 어디에 가나, 인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이 이름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래서 타인들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욕망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혜식의 생리현상에 대한 인식에는 이런 고정 관념이 무참히 짓밟힌다. 노상방뇨에 대한 나름대로의 과학적 해석은 그럴 듯하다는 공감을 자아낸다. 수필의 출발점이 인식에 있다고 볼 때, 김혜식의 개성적인 해석은 그 자체가 일종의 낯설게 하기다. 잘못된 관습에 대한 재고나 저항이 아니라 반전을 통한 역습이 눈길을 끈다. 앉아서 소변보는 행위를 여인의 자격으로 격상시켜내는 대담한 논리가 다소 엉뚱해 보이기도 하지만 ‘벗는다’는 행위에 대한 다양한 근거와 해설이 설득력을 주는 것 같아 이 수필은 매우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한다고 하겠다.
한낱 허울에 불과한 옷이지만 아직도 남녀 옷 벗기의 가치는 하늘과 땅 차이 인 듯하다. 하여 이런 연유로 여자가 앉아서 소변보는 행위는 소인배의 행위가 아닌 여인의 자격을 매김질하는 우선적 자세이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여자가 앉아서 소변보는 행위에 대해 부정적이다. 작가는 ‘여자는 아무리 생리작용이 급해도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장소에서 볼일을 봐야 여자다운 행동으로 여기고 있다. 어디 이뿐이랴. 흔히 마음 그릇이 옹색한 이를 가리킬 때, 앉아서 오줌 누는 여자나 진배없다는 말로 여자의 생리적 배설 행위까지 싸잡아 폄하하기도 한다.’며 우리 사회의 성차별을 지적한다. 이러한 이름-자리들은 일정한 체계를 구성한다. 이름-자리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일정한 유기적 체계를 구성한다. 체계를 구성하기에 눈길들로 기능한다. 체계를 구성하기 때문에 각각이 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것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관계, 즉 하나의 체계 속에서 차지하는 그것의 자리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체계는 단순한 논리적 구조가 아니라 욕망과 권력의 놀이를 함축하는 체계이기에 차라리 체제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타인들의 눈길은 일정한 체제를 형성한다.
작가는 이런 남성중심주의의 고정관념과 이런 체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무엇이 이런 인식을 만드는 것일까? 이런 차별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왜 우리 여자는 태어나 죽는 날까지 이런 차별의 체제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일까? 이런 차별의 체제를 만들어내고 관리하는 가장 핵심적인 권력은 유교의 이념이다. 가부장제라는 머리를 가진 괴물 안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남성중심주의 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작가는 <여자의 자격>에서 이런 남성중심주의의 허구성을 고발한다.
조춘희의 <바닥>은 위의 두 작품과는 대조를 이루는 작품이다. 위의 두 작품이 원심력을 지향했다면, 이 작품은 구심력을 추구한다. 욕망의 제어를 통해 삶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교훈을 던져주는 멋진 수필이다. 원심력보다는 구심력에 초점을 맞추어 살면서 마이 웨이를 고수하는 것은 전통적 삶의 모델을 따르는 양식으로 거기에는 헌신이나 희생의 가치가 담겨 있어 아름답다.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타락한 이성하고는 거리가 먼 삶의 양태요, 건전한 욕망의 한 형태다. 무의식의 원심력은 감성의 원심력이요, 아버지의 원심력이다. 그러나 작가가 추구하는 바는 어머니의 구심력이요, 준수의 구심력이다. 밖으로 나가려는 힘이 아니라 안으로 당겨오는 힘을 지향한다. 욕망이 넘실되는 세상이 그래도 안정된 데는 사실 구심력이 더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설을 뒷받침한다. 이 수필은 이런 원리를 통해 전통적 가치의 중요성을 말해주고자 한다.
비록 옹색한 삶이었지만 언젠가는 바닥을 치고 올라갈 날 있으리란 꿈 하나 붙들고 남편은 청렴하게 살려고 애를 썼고, 나는 박봉으로 손톱 여물을 썰었다. 바닥은 때로 불편하고 쓸쓸했지만 남편은 비굴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위를 향해서만 치달을 때 남편은 묵묵히 주어진 길을 가며 치안을 담당했고, 자기안의 무성한 욕심의 곁가지를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 바닥에 길들여진 나도 잠시도 쉬지 않았고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며 부지런을 떨었다.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한 사람의 개인이 이 국가장치라는 대타자들에서 어떻게 소주체들로 길러지는가를 규명했다. 학교, 군대 같은 대타자들이 우리를 호명할 때 “조국이 너를 부른다!”고 한다. 우리는 그 대타자들이 길러내는 소주체가 된다. 알튀세의 작업은 푸코의 작업과 상보적이다. 푸코가 우리를 소주체로 길러내는 훈육장치들을 역사, 시간적인 지평에서 규명했다면, 알튀세는 국가장치들을 사회, 공간적인 지평에서 규명했다고 하겠다. 우리의 욕망은 이 훈육장치들 즉 국가장치들 속에서 길들여지고 박제화된다. 마치 타원의 두 초점처럼, 국가장치와 더불어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이다. 그래서 남편은 ‘바닥을 치고 올라갈’ 꿈을 꾸고, ‘바닥에 길들여진’ 아내 작가는 자기 안의 무성한 욕심의 곁가지를 가차 없이 전지한다. 근대적 국가장치와 쌍둥이로 태어난 자본주의 체제는 오늘날 국가와 복잡미묘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한 덩어리를 이루면서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지배하고 있다. 조춘희의 <바닥>이란 수필은 우리의 삶을 구석구석 지배하려는 대타자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바닥’에 길들여졌지만, 결코 자본주의의 욕망에 따르지 않으리라는 결연한 의지가 잘 드러나 있어 감동을 준다. 상징성을 제대로 지닌 제재로 메시지를 잘 형상화시킨 까닭으로 문학적 완성도가 대단히 높다고 하겠다.
김이경의 <숨비소리>도 원심력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수작이다. 이런 수필을 본격수필이라고 한다. 자본주의는 얼핏 우리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는 고대 사회, 봉건 사회 등 기존의 사회들과는 달리 결코 욕망을 부정하거나 누르려 하지 않는다. 대중의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거의 공기나 물과도 같다 해야 할 현대 문화를 창조해냈다. 근대적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대중문화의 발달은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두 날개이다. 자본주의는 테크놀로지들과 대중문화들을 두 날개로 삼아 세계를 제패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욕망을 부추기고 조작해낼 뿐 긍정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돈이 되는 대중의 욕망만을 긍정한다. 자본주의는 대중의 욕망을 쥐어짜듯이 우려내 돈을 포획해 간다. 불가사리 같은 자본주의의 욕망은 대중의 욕망을 식민화해 우려 짜낸다. 천박한 욕망의 파도가 우리의 삶을 뒤덮고 있다.
수필은 자본주의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이는 작가의 사명이기도 한다. 언제까지 수필이 자기 위안에만 머물러 있을 것인가. 욕망을 파헤쳐 우리가 욕망의 주체로 서야 할 것이다. <숨비소리>는 현대의 삶과 욕망을 다루고 있는 수필이다. 삶은 원심력과 구심력의 팽팽한 긴장감 속 줄다리기다. 원심력과 구심력의 절묘한 균형을 신의 의지로 볼 때, 그 중심에 세상이 존재한다. 지구의 생존 시스템은 바로 이 두 힘의 길항 작용에 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원심력은 욕망을 들끓고, 구심력은 욕망을 순화시킨다. 우리는 욕망이 충족되기를 기대하면서도 욕망이 절제되고 통제된 욕망이 이루어지기를 욕망할 수밖에 없다. 욕망이 충족된다면 그건 욕망이라 할 수 없다. 누구나의 삶에도 원심력과 구심력이 작용한다. 이 작가가 지향하는 곳은 구심력이다. 김이경 작가가 걷는 길은 투쟁의 길이 아닌 소요의 길이다.
(1) 해가 막 산을 넘어간다. 지는 해의 각혈에 구름들이 일렁이며 붉은 물이 든다. 살짝 손을 대기만 해도 손바닥이 붉게 물들 것 같다. 하염없이 바라본다. 어둠이 조금씩 선혈을 지우며 사위가 잿빛으로 적막에 잠기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한 가닥 가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2) 하지만 숨비소리는 새로운 물질이 시작된다는 신호이기도 하리라. 숨비소리 한 번 토하고 그동안 내가 떠나보냈던 수많은 배들을 하나하나 돌이켜 보자. 그 사랑스러웠던 눈동자와 고운 웃음과 또랑또랑 맑고 고운 목소리들을 기억에서 꺼내보자. 그러면 찰싹이는 파도소리도 들을 수 있고 턱에 차오르던 숨도 고를 수 있겠지. 그리고 새로운 자맥질을 하자. 그곳이 어떤 바다가 될 것인지는 아직은 모른다. 다만 40년 교단의 해조음이 내가 다시 시작한 자맥질이 숨 가쁠 때 잠시 붙들고 쉴 수 있는 태왁*이 되어 주리라
예문 (1)은 서두에서, (2)는 결말부에서 인용한 것이다. 각각 발단과 결말의 기능과 역할을 잘 소화하고 있는 훌륭한 표현의 문장들이다. 맹자는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 해도 오물을 뒤집어쓰면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고 이를 지나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훌륭한 뜻을 담았다 하더라도 올바른 표현을 얻지 못한다면 독자들은 외면하여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바슐라르는 그가 연구하던 ‘이미지의 현상학’에 대하여 그것은 “혼의 울림, 즉 미적 감동을 추적하는 일 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상상력에 의해서 원형의 이미지에 도달했을 때의 감동이 바로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적 쾌락은 문장의 구조나 묘사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2)는 이 수필에 있어서 생명적이다. 그만큼 이 작가는 표현을 중시한다. 김이경이 구사하는 언어는 적절한 표현의 옷을 입고 있어 감동을 준다.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지는 해의 각혈’, ‘숨비소리’, ‘태왁'등의 어휘는주제의식을 의미화하는 결정적인 인자로 문학소를 형성하고 있다. 이 같은 언어의 적확한 표현은 즐거운 미적 감동을 준다. 주제의식을 이미지로 물화하여 연상과 상상을 통해 감동으로 올라가도록 한 작가의 문학적 역량에 박수를 보낸다.
III.
전통 문화에서 천박한 욕망에의 저항은 대부분 욕망의 제어와 제거를 통해서 추구되었다. 욕망에 대해 어떻게 정의내리건, 그 저변에는 주체의 결핍이 있다. 따라서 현대적 삶과 예술에서 욕망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은 그만큼 현대가 결핍이 많은 시대라는 의미일 수 있다. 실제로, 현대적 삶은 채우려는 집착과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은 욕망의 비어 있는 그릇처럼 보이기도 한다. 매스미디어를 잠식하는 수많은 광고들, 드라마, 영화 들을 보면, 거의 하나같이 결핍을 자극하고 욕망을 부추긴다. 그러나 수필은 다르다.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을 제시한다. 노혜숙의 <완장>과 김혜식의 <여자의 자격>은 무의식의 원심력을, 조춘희의 <바닥>과 김이경의 <숨비소리>는 의식의 구심력을 지향하면서 두 부류가 욕망의 양태에서 상극을 이룬다. 원심력보다 구심력이 더 강하기 때문에 세상이 안정을 유지한다고 하는 건 어쩌면 전통적 기준일지도 모른다. 어떤 작가는 원심력의 욕망을, 어떤 작가는 구심력의 욕망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았다. 중요한 건 중용적 자세이리라.
우리말의 ‘욕망’은 애초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면서 사용되었다. 전통 문화의 영향에 기인한다 하겠다. 그러나 욕망을 제어하라는 고전적인 가르침만으로 현대 사회의 모순들에 대응할 수 있을까? 차라리 우리에게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욕망에 저항하는 다른 욕망, 저항하는 욕망, 건강한 욕망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지배하려는 욕망과 천박한 욕망에 저항하는 위대한 욕망을 꿈꾸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사상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입장에서 ‘욕망의 철학’을 전개했다. 전자의 길, 욕망을 비우라는 전통사상의 가르침을 우리는 ‘소요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길, 권력의 욕망과 싸우라는 들뢰즈·가타리의 가르침을 ‘투쟁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사르트르를 따르면 욕망은 결함이 없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정신활동이다. 자크 라깡에 의하면, 욕망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타낸다. 둘 다 우리가 가능성의 중심에 서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제시해야 하는 수필가들은 이 두 길 사이에서 중용적 가치로 사유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