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71년과 1873년에 표류한 왜선의 구조 및 조사 보고한 장계(狀啓)>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편에는 1871년과 1873년에 표류한 왜선의 구조‧구호 및 조사 보고한 장계(狀啓) 2건을 소개하겠다. 일본 대마도와 마주하는 최전방 거제도는 표류 왜선이 하루가 멀다하고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곳곳에 망대를 세우고 바다를 감시하였다. 거제도 연안에 표왜선(漂倭船)이 발견되면 대응 체계가 있었다. ① 망군이 보고(수군진) → ②수군 만호 출동, 왜선 강제 정박 후 구호 및 구조→ ③고을 수령 및 통역관이 1차 조사 보고(통제영, 경상감영, 부산 왜관) → ④부산 초량 왜관 인계 후 2차 조사 보고 → ⑤ 중앙 정부 지령 → ⑥왜국으로 송환했다. [가덕도나 다대포 부산 등에서 발생한 표왜선은 곧바로 부산 왜관으로 인계함]
이러한 처리 과정에서 거제도는 ①번부터 ④번의 부산 왜관 인계까지 세밀하게 처리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보고가 늦거나 부실한 조사가 이루어지면 해당 수군만호나 고을 수령이 곤장을 맞거나 파직되기도 했다.
○ 장계(狀啓) 2건 중에 먼저 ①「1871년 12월23일 표류 일본 소선(小船) 2척 조사 보고 장계(狀啓)」는 가덕도와 거제도 인근 해역에 정체불명의 일본 소선(倭小船) 2척이 나타나 이를 추적하고 감시한 상황에 대한 보고서다. 처음 한 척은 거제도 방향으로 표류하고, 다른 한 척은 뒤처져 행방이 묘연해졌다. 한 척은 지세포 인근 '지삼도(지심도)'로 표류해 온 것을 지세포 만호 유덕연이 발견하여 수습, 17일 정오에 지세포 강구에 정박시키고 감시했고, 나머지 한 척은 거제 율포 지역의 '도장포' 외양으로 흘러가 가배량, 율포 등의 관리들이 출동하여 17일 저녁에 그곳에 정박시켰다. 표류 왜선은 대마도와 부산왜관을 오가는 통신 및 행정용 비선으로 밝혀져 인도주의적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가덕첨사 강우진과 옥포·조라포·지세포 만호의 보고와, 율포 권관 김경희와 가배량 유진장 김재곤의 보고에서 배를 처음 발견한 보고서상의 시간 기록이 2시간 정도 차이 난다는 점을 문제 삼아 관련 관리들을 문책이 있었다.
다음으로 ②「1873년 1월19일 표류 왜선 구조 및 조사한 장계(狀啓)」는 거제 지세포, 옥포, 조라포의 수군 만호(萬戶)들이 표류해 온 일본 왜선 1척을 발견하고 구조하여 조사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보고서다. 처음에 지세포·옥포·조라포의 망군들이 등불을 켠 정체불명의 왜선 1척이 지세포 구조라 내도 쪽으로 표류해 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각 수군진의 만호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감시하다가 다음 날 구조라 강구(江口) 앞바다에 안전하게 정박시켰다. 이어 거제부사 송희승과 지세포 만호 류덕연, 그리고 일본어 통역관(왜학) 조정질이 현장에서 합동 조사를 벌였다.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상급 부처에 보고했다. 이후 부산 왜관으로 인계하여 무사히 표왜선을 처리했으나, 부실 조사와 보고 지연을 문제 삼아, 통역관과 만호, 아전들을 잡아다가 곤장형에 처하겠다는 강한 처벌 의사를 밝히고 있다.
1) 「1871년 12월23일 표류 일본 소선(小船) 2척 조사 보고 장계(狀啓)」
이 장계(狀啓)」는 조선시대 승정원(承政院)에 보고된 부산첨사 김철균(金澈均)의 치보(보고서) 내용을 담고 있다. 주요 내용은 1871년 12월 16일, 경상도 가덕도와 거제도 인근 해역에 정체불명의 일본 소선(倭小船) 2척이 나타나 이를 추적하고 감시한 상황에 대한 긴급 보고서다. 이 문건은 조선시대 승정원(承政院)에 보고된 공문서로, 1871년 당시 경상도 연안에 나타난 일본 소선 2척의 행방을 추적하고 감시한 상황을 담고 있다.
(1) 최초 발견(16일) : 12월 16일 오후 5~7시(유시)경, 정체를 알 수 없는 배 2척이 바다 위에서 등불을 켜고 나타났다. 이 중 한 척은 거제도 방향으로 표류하고, 다른 한 척은 뒤처져 행방이 묘연해졌다.
(2) 보고 지연 질책 : 가덕도에서 처음 발견한 정보가 다대포를 거쳐 부산에 전달되는 과정이 너무 늦었다(16일 상황이 18일 밤에야 전달됨)는 지적이 있었다.
(3) 추적 및 확인 (17일) : 각 지역 만호(지세포, 옥포, 조라포 등)들이 배를 타고 나가 탐색한 결과, 이 배들은 일본 소선으로 밝혀졌다.
(4) 제1 선박 : 지세포 인근 '지삼도'로 표류해 온 것을 지세포 만호 유덕연이 발견하여 수습, 17일 정오에 지세포 강구에 정박시키고 감시했다.
(5) 제2 선박 : 뒤처졌던 나머지 한 척은 율포 지역의 '도장포' 외양으로 흘러가 17일 저녁에 그곳에 정박했다.
(6) 현재 상황 : 주변 진영(가배량, 율포 등)의 관리들이 출동하여 해당 선박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보고는 당시 이양선이나 외국 선박의 출몰에 대해 조선 수군이 어떻게 망군(望軍, 감시병)을 통해 포착하고, 각 진영 간에 치보(馳報, 급보)를 주고받으며 대응했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기록이다. 당시 조선 수군이 망군(망보는 군인)을 통해 일본 선박의 출몰을 매우 정밀하게 관찰하고, 각 포구의 관리(만호, 권관 등)들이 즉각 출동하여 이를 나포하거나 감시했음을 보여준다.
○ 이어 후속 내용은 표류한 일본 비선(倭飛船, 통신용 쾌속선) 2척의 구체적인 정체와 그 안에 타고 있던 일본인들에 대한 조사(문정, 問情) 과정, 그리고 조치 사항을 담고 있다. 이 배들은 대마도에서 부산 왜관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한 것이며, 조사 결과 거제도 내에 별다른 위협적인 행동은 없었음이 확인된다.
*배의 정체 : 적대적인 군함이 아니라 대마도와 부산왜관을 오가는 통신 및 행정용 비선이었다.
*인도주의적 조치 : 조선 관청은 이들의 돛이 찢어진 것을 확인하고 무명을 제공해 수리를 도와주는 등 외교적 관례에 따라 대응했다.
*상호 정보 교환 :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표류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일본에 머물고 있는 조선인 표류민들의 소식을 전해 상호적인 관계임을 보여준다.
이후 표류한 일본 비선 2척이 조선 수군의 삼엄한 경비와 인계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부산 초량 왜관(館所)에 무사히 도착하는 결말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행정적 착오에 대한 처분을 담고 있다.
○ 다시 한번 더 요약건대 : 거제도에서 부산까지 조선 수군의 여러 진영(지세포→옥포→장목포→천성→다대포)이 릴레이식으로 배를 호송하여 왜관에 안전하게 인계했다.
그리고 일본 배를 잘 구조하여 보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서상의 시간 기록이 2시간 정도 차이 난다는 점을 문제 삼아 관련 관리들을 문책하려 하는 조선시대 공문서의 엄격함을 볼 수 있다. 이 문서를 통해 당시 조선 수군의 치밀한 해안 경계망과 일본과의 외교 관례를 잘 알 수 있다.
* 덧붙여 이번 「1871년 12월23일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거제의 경상좌수영(慶尙左水使) 윤영화(尹永夏) 등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동래부계록(東萊府啓錄)』과 『각사등록(各司謄錄)』이다.
**「1871년 12월23일 표류 일본 소선(小船) 2척 조사 보고 장계(狀啓)」**
승정원에서 열어봄. 이달(12월) 19일 인시(새벽 3~5시)에 도착한 부산첨사 김철균의 보고에 따르면, 막 도착한 다대포첨사 이용익의 통문과 가덕첨사 강우진의 보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달(12월) 16일 유시(오후 5~7시)경, 망군(감시병) 등이 보고하기를 '정체를 알 수 없는 배 2척이 먼바다에서 등불을 켜고 나타났는데, 한 척은 뒤처져 저물녘에 방향을 알 수 없게 되었고, 한 척은 거제도 쪽으로 표류해 갔다'고 하였습니다.“
가덕진에서 이 배를 16일 유시 초에 처음 발견했는데, 18일 해시(밤 9~11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대포에 전달되었으니 보고 체계가 몹시 더디고 늦어졌다는 내용도 함께 보고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날 해시에 도착한 첨사의 보고에 따르면, 가덕첨사의 통문을 근거로 한 다대포첨사의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7일 진시(오전 7~9시)에 망군 등이 다시 보고하기를, 뒤처졌던 배 한 척은 밤사이에 간 곳을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옥포만호 송영순과 조라포만호 김경주 등이 보고하기를, "16일 유시경 망군들이 보고하기를 '정체불명의 배 2척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한 척은 뒤처져 방향을 모르겠고 한 척은 지세포 경계인 지삼도로 표류해 갔다'고 하기에,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는 내용을 보고하고 통문으로 알렸습니다.
21일 묘시(오전 5~7시)에 도착한 첨사의 보고에 따르면, 가덕첨사의 통문을 근거로 한 다대포첨사의 보고에서 지세포만호 유덕연이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16일 유시 망군이 보고하기를 '배 2척 중 한 척이 본 포구의 지삼도로 표류해 왔다'기에 탐색하러 나갔더니, 과연 일본 소선 1척이 표류해 오고 있었습니다. 술시(밤 7~9시)에 그 배를 만나 끌어당겼고, 해시에 그곳에 닻을 내리고 수호(감시)하다가, 17일 사시(오전 9~11시)에 닻을 올려 오시(낮 11~1시)에 본 포구 강구에 정박시키고 지키고 있습니다."
망군이 다시 보고하기를, "뒤처졌던 다른 한 척 역시 일본 소선이었으며, 율포 경계인 도장포 외양으로 흘러가 17일 유시에 그곳에 정박했다"고 하였습니다. 동시에 옥포와 조라포 만호 등이 보고하기를, "망군들이 다시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일본 소선 한 척은 지세포에, 다른 한 척은 도장포에 정박한 경위가 지세포 만호의 보고와 일치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가배량만호 김준환은 통영 문안 인사를 위해 자리를 비웠으나, 율포권관 김경희와 가배량 유진장 김재곤 등이 보고하기를 "16일 신시(오후 3~5시)에 망군들이 보고하기를, 정체불명의 배 2척이 바다에서 나타나 한 척은 뒤처지고 한 척은 떠 있는데 날이 저물어 방향을 알 수 없다"고 보고하였습니다.
17일 사시(오전 9~11시)에 망군 등이 다시 보고하기를, "뒤처졌던 배 한 척은 밤사이에 향방을 알 수 없게 되었고, 한 척은 표류하여 율포 경계인 가도(柯島) 외양으로 흘러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확인차 전진했더니 과연 일본 소선 한 척이 표류해 오고 있어, 오시에 만나 끌어당겼고 유시(오후 5~7시)에 도장포 강구에 정박시키고 감시 중입니다. (다만 가덕도와 율포의 보고에서 배 2척의 발견 시각이 신시와 유시로 서로 달라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미시(오후 1~3시)에 도착한 보고에 따르면, 옥포에 정박했던 일본 비선 한 척이 20일 신시(오후 3~5시)에 출발했습니다. 순풍을 타고 돛을 달아 외양으로 바로 건너가 버려 미처 붙잡지 못하고 그대로 인도해 보냈으며, 21일 인시에 본 진영에 보고되었습니다. 이에 이들을 왜관(館所)으로 인도하기 위해 전선장 윤광은을 파견했습니다. 해당 선박의 조사 결과(문정)와 이동 보고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22일 묘시(오전 5~7시)에 도착한 보고에 따르면, 지세포에 정박한 일본 비선에 대해 옥포의 왜학(일본어 통역관) 조정질, 소통사 이인택이 17일 술시에 도착했고, 지방관인 거제부사 이붕래가 18일 인시에 도착하여 합동 조사를 벌였습니다.
*조사 결과 : 섬 안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으며, 배 안에는 우두머리 왜인 1명, 격군(노 젓는 군인) 5명, 교대하러 가던 관리(중금도, 소금도 등) 5명 등 총 11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통행증(노인, 路引)과 왜관 우두머리(관수)에게 보내는 사적인 편지 1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의 진술 : "우리 비선 2척은 이번 달 16일 사시에 대마도에서 바람을 기다리다 함께 출발하여 왜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다 수지(水旨)에 이르러 풍세가 나빠져 다른 한 척과 떨어지게 되었고, 우리 배는 지세포 지삼도 앞바다로 표류했습니다. 17일 오시에 이곳에 정박했습니다. 또한, 조선 표류민의 배 2척이 일본 대마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조사 후 거제부사와 통역관들은 도장포로 이동했으며, 비선은 계속 감시 중입니다.
또한 도장포에 정박한 다른 비선 한 척도 조사한 결과, 배 구성원(우두머리 1명, 격군 5명, 교대 관리 등)은 앞선 배와 비슷했습니다. 이들도 "대마도에서 함께 출발했다가 헤어져 17일 진시에 율포 가도 외양으로 표류했다"고 진술하며, "조선의 표류민 배 3척이 일본에 있다"고 전했습니다.
특히 이 배의 돛(풍석, 風席)이 바람에 찢어져 수리가 필요했기에, 거제부사가 살펴본 후 율포에 있던 무명(목천) 3필을 내어주어 수리해 주도록 조치했습니다. 조사를 마친 거제부사와 통역관들은 돌아갔으며, 해당 배는 여전히 감시 중입니다. 지세포와 도장포에 정박했던 배들을 부산 왜관으로 넘겨주기 위해, 옥포와 조라포의 만호들이 각자의 경계 구역으로 나갔습니다.
*제1선(지세포 정박선)의 이동 : 19일 낮 12시(오시)에 출발하여 지세포 만호가 호송했고, 오후 5~7시(유시)에 옥포 만호에게 인계되었습니다. 밤 7~9시(술시)에 옥포로 옮겨 정박시킨 후 조라포 유진장 이정기와 함께 감시했습니다.
*제2선(도장포 정박선)의 이동 : 19일 오전 9~11시(사시)에 출발하여 율포 권관이 호송했고, 오후 1~3시(미시)에 지세포 영호장 박경석에게 인계, 밤 9~11시(해시)에 최종적으로 옥포로 옮겨 옥포 만호와 함께 감시했습니다.
*20~21일 상황 : 옥포에서 출발한 비선 한 척이 20일 밤 8시(술시)경 천성진 경계를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이후 다대포의 호송관이 이 배를 인계받아 21일 오전 9~11시(사시)에 왜관에 최종 도착시켰습니다.
*조사 및 확인 : 일본어 통역관(훈도, 별차)들이 조사한 결과, 배에 탄 인원과 대마도 출발 경위는 이전 보고와 같았습니다. 일본인들은 "먼저 출발한 배와 다시 만났으며, 대마도에는 조선 표류민의 배가 총 3척 머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통행증(노인)은 규정대로 동래부에 보냈습니다.
*22~23일 상황 : 뒤처졌던 나머지 비선 한 척도 21일 오전 옥포를 출발해 장목포, 천성진, 마거리 등을 거쳐 제포 만호 정재현에게 인계되었습니다. 서평포 만호 이지수가 이를 최종 호송하여 22일 낮 12시(오시)에 왜관에 도착시켰습니다. 이 배 역시 돛이 찢어져 조선 측의 도움으로 수선받았음을 확인했습니다.
*보고의 결론 및 처분 : 이번 사건은 대마도에서 온 일본 비선 2척이 거제도 지세포와 도장포에 표류했다가 차례로 왜관으로 인도된 사건입니다. 다만, 율포 권관 김경희와 가배량 유진장 김재곤은 배를 처음 발견한 시각을 '16일 신시(오후 3~5시)'로 보고한 반면, 가덕첨사 강우진과 옥포·조라포·지세포 만호 등은 '16일 유시(오후 5~7시)'로 보고하여 서로 차이가 납니다.
이처럼 보고 시각이 일치하지 않고 어긋난 것(差爽)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므로, 이들을 조사하여 처분할 것을 통제사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러한 전말을 정리하여 보고드립니다. 동치 10년(1871년) 12월 23일
[承政院開拆. 本月十九日寅時到付釜山僉使金澈均馳報內, 卽到多大浦僉使李容益馳通內, 加德僉使康祐鎭傳通內, 本月十六日酉時望將等進告內, 朝倭未辨船二隻, 自洋中懸燈出來, 一隻落後, 日暮莫辨指向, 一隻漂向于巨濟島了是如, 傳通據馳通. 而加德鎭之同船十六日酉時初看之報, 十八日亥時始傳於多大浦者, 殊涉稽緩是如, 馳報爲白有旀. 亥時到付同僉使馳報內, 卽到加德僉使傳通據多大浦僉使馳通內, 十七日辰時望將等更告內, 落後船一隻, 當夜間不知所是如爲有旀. 一時同僉使傳通內, 玉浦萬戶宋榮淳, 助羅浦萬戶金景周等馳報內, 十六日向酉時望軍等進告內, 未辨船二隻, 自洋中出來, 一隻落後, 莫辨指向, 一隻漂向知世浦境只森島了是如, 故探知次, 乘船下海是如, 馳報·馳通據馳報爲白有旀. 二十一日卯時到付同僉使馳報內, 卽到加德僉使傳通據多大浦僉使馳通內, 知世浦萬戶柳德淵馳報內, 十六日酉時望軍進告內, 未辨船二隻, 自洋中出來, 一隻落後莫辨指向, 一隻漂向本浦境只森島了是如. 故探知次前進, 則倭小船一隻, 果爲漂來. 戌時逢曳, 亥時同處下碇守護, 十七日巳時擧碇, 午時本浦江口止泊守護. 望軍更告內, 落後船一隻, 果以倭小船, 轉漂于栗浦境陶藏浦外洋, 十七日酉時, 同浦止泊是如爲有旀. 一時玉浦·助羅浦萬戶等馳報內, 望軍等更告內, 倭小船一隻止泊知世浦, 一隻止泊陶藏浦緣由, 與知世浦萬戶馳報一樣是乎旀. 一時同僉使傳通內, 加背梁萬戶金俊煥, 統營門新到陪行次馳往。栗浦權管金璟熙, 加背梁留鎭將金在坤等馳報內, 十六日申時望軍等進告內, 未辨船二隻, 自洋中出來, 一隻落後, 一隻浮留, 日暮莫辨指向是如爲有旀.
十七日巳時望軍等更告內, 落後船一隻, 當夜間不知所向, 一隻轉漂于栗浦境柯島外洋是如. 故探知次前進, 則倭小船一隻, 果爲漂來, 午時逢曳, 酉時陶藏浦江口止泊守護是如爲有矣. 加栗看報未辨船二隻, 以十六日申時塡報, 而加德·知·玉·助等鎭之以酉時擧論者, 殊涉差爽是如, 馳報爲白有旀. 未時到付同僉使馳報內, 卽到多大浦僉使馳通內, 護送將助羅浦萬戶馳報內, 玉浦移泊倭飛船一隻, 二十日申時離發領護, 逢順風掛帆, 以外洋直渡, 勢難挽執, 仍爲領來是如, 當日寅時交付本鎭, 故領付館所次, 護送將二戰船將尹光殷差送是如馳通。而同船問情與移泊之報, 姑未來到是如, 馳報爲白有旀. 二十二日卯時到付同僉使馳報內, 卽到加德僉使傳通據多大浦僉使馳通內, 知世浦萬戶馳報內, 本浦止泊倭飛船一隻亦中, 玉浦倭學趙廷耋, 小通事李寅澤, 十七日戌時馳到, 地方官巨濟府使李朋來, 十八日寅時馳到, 眼同問情。則島中別無他事, 而同飛船良中, 頭倭一人, 格倭五名, 交代次中禁徒倭二人, 小禁徒倭二名, 下代倭一名等, 持路引同騎, 館守倭了私書一度載持出來爲有矣。同倭等言內, 俺等飛船一隻, 他飛船一隻, 今月十六日巳時, 自馬島待風所同發向館, 到水旨風勢不利, 他飛船落後。俺等船轉漂知世浦境只森島前洋, 戌時領護船逢曳, 亥時下碇經夜, 十七日巳時擧碇, 午時止泊此處。而貴國漂民船二隻, 留在府中是如. 問情後, 巨濟府使及倭學·小通事, 馳往陶藏浦, 同飛船仍留守護是如爲有旀. 栗浦權管·加背梁留鎭將等馳報內, 陶藏浦止泊倭飛船一隻亦中, 玉浦倭學·小通事·巨濟府使, 十八日酉時馳到, 眼同問情, 則島中別無他事, 而同飛船良中, 頭倭一人, 格倭五名, 交代次中禁徒倭一人, 小禁徒倭二名, 公下代倭一名等, 持路引同騎, 代官倭了私書一度, 載持出來爲有矣。同倭等言內, 俺等飛船一隻, 他飛船一隻, 今月十六日巳時, 自馬島待風所同發向館, 及到水旨, 他飛船落後. 俺等船洋中經夜, 十七日辰時, 從風轉漂于栗浦境柯島外洋, 午時迎護船逢曳, 酉時止泊此處。而貴國漂民船三隻, 留在府中是乎旀, 所持風席, 觸風裂破, 修補以給亦爲乎等以. 看審後容入木三疋, 以栗浦所在新射木修補以給是如. 問情後, 巨濟府使及倭學·小通事各歸, 同飛船仍爲守護是如爲有旀.
知世浦及陶藏浦止泊船交付次, 玉浦·助羅浦萬戶, 各其境出往是如爲有旀. 知世浦止泊船一隻, 十九日午時離發, 同浦萬戶領護, 酉時玉浦萬戶處交付, 戌時移泊同浦, 與助羅浦留鎭將李正箕, 同爲守護。陶藏浦止泊船一隻, 十九日巳時離發, 同浦權管領護, 未時知世浦領護將朴京石處交付, 戌時助羅浦萬戶處交付, 亥時移泊玉浦, 與同浦萬戶, 同爲守護是如爲有旀. 一時同僉使傳通內, 天城萬戶張忠漢馳報內, 玉浦移泊倭飛船一隻, 離發前進, 從風掛帆, 二十日戌時, 無弊過境是如, 傳通·馳通據馳報爲白有旀. 未時到付同僉使馳報內, 卽到護送將多大浦二戰船將馳報內, 右漂倭飛船一隻, 逢授領曳, 當日巳時, 領付館所是如爲有旀. 追于訓導安東晙, 別差高在健等手本內, 回館倭飛船一隻亦中, 所騎倭人名數, 自馬島發船日時, 同發船相失·漂右緣由, 與止泊問情無異, 自止泊處離發移泊, 到館事情, 與護送將等馳報一樣. 而同倭等言內, 相失船一隻, 移泊處追到相逢落在, 而貴國漂民船二隻外一隻, 又爲留府是如爲乎等以. 所持路引一度捧上上送事手本據, 同路引依前東萊府輸送是如, 馳報爲白有旀.
二十三日寅時到付同僉使馳報內, 卽到加德僉使傳通據多大浦僉使馳通內, 玉浦落後倭飛船一隻, 二十一日巳時離發, 同浦萬戶領護, 酉時長木浦別將車好信處交付, 戌時天城萬戶處交付, 亥時移泊磨巨里。二十二日巳時離發, 同萬戶領護, 午時薺浦萬戶鄭載顯處交付, 領送是如爲有旀. 同船一隻, 同萬戶領來, 戌時交付本鎭, 故領付館所次, 護送將西平浦萬戶李芝秀差送是如, 馳通據馳報爲白有旀。未時到付同僉使馳報內, 卽到護送將西平浦萬戶馳報內, 右漂倭飛船一隻, 逢授領曳, 當日午時領付館所是如爲有旀. 追于訓導·別差等手本內, 回館倭飛船一隻亦中, 所騎倭人名數, 自馬島他飛船同發日時, 相失·漂右緣由, 漂民船留府辭緣, 與止泊問情無異, 自止泊處離發移泊, 到館事情, 與護送將等馳報一樣. 而同倭等言內, 自玉浦先發船一隻, 已到相逢, 而觸傷風席, 自漂抵鎭修補以來是如爲乎等以, 看審則果爲的實. 而所持路引一度捧上上送事手本據, 同路引依前東萊府輸送是如, 馳報是白置有亦. 本月十六日自馬島出來巨濟境知世浦止泊倭飛船一隻, 陶藏浦止泊倭飛船一隻, 次第領付館所問情爲白有在果。栗浦權管金璟熙, 加背梁留鎭將金在坤等段, 同倭船初看之報, 以十六日申時書塡, 而加德僉使康祐鎭, 玉浦萬戶宋榮淳, 助羅浦萬戶金景周, 知世浦萬戶柳德淵等段, 以十六日酉時擧論者, 殊涉差爽是白乎等以. 竝只査處之意, 報于統制使處爲白乎旀. 緣由馳啓爲白臥乎事是白良厼, 詮次善啓向敎是事 同治十年十二月二十三日]
[주] 문정(問情): 남의 나라의 배가 처음으로 항구(港口)에 들어왔을 때 관리(官吏)를 보내어 그 사정(事情)을 묻는 일.
2) 「1873년 1월19일 표류 왜선 구조 및 조사한 장계(狀啓)」
이 문서는 조선시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에 기록된 장계(狀啓)의 일부로, 경상도 거제 지역(지세포, 옥포, 조라포)의 수군 만호(萬戶)들이 표류해 온 일본 왜선 1척을 발견하고 구조하여 조사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긴박한 보고서(장계)다. 이 기록은 표류한 외국인을 구조하고 조사할 때 조선 정부의 대응 체계(망군 보고 → 만호 출동 → 수령 및 통역관 조사 1차 보고 → 부산 초량 왜관 인계 2차 보고 → 왜국 송환)를 아주 상세히 보여준다. 특히 거제의 지세포, 옥포, 조라(구조라) 등 지명이 구체적으로 등장해 당시 남해안 방어 체계와 표류민 처리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1) 표류 왜선 발견(14일 신시~술시) : 1873년 1월 14일 오후 4시경(신시), 지세포·옥포·조라포의 망군(초소병)들이 등불을 켠 정체불명의 왜선 1척이 지세포 구조라 내도 쪽으로 표류해 오는 것을 발견했다. 각 수군진의 만호(柳德淵, 宋榮淳, 金景周)들이 즉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밤 8시경(술시), 바다 위에서 왜대선 1척을 만났으나 바람과 물살이 거세고 날이 어두워 포구 안으로 끌어오지 못하고 일단 그 자리에 닻을 내리게 한 뒤 감시했다.
(2) 표왜선 구조 및 예인(15일~16일 진시) : 15일에도 바람이 계속 강해 배를 옮기지 못하고 현장에서 밤을 지새우며 수호했다. 16일 오전 6시경(묘시), 바람이 잦아들자 배를 끌기 시작하여 오전 8시경(진시)에 구조라 강구(江口) 앞바다에 안전하게 정박시켰다.
(3) 왜선 선원의 문정(問情, 조사) 결과(17일 자시) : 거제부사 송희승(宋熙昇)과 지세포 만호 류덕연, 그리고 일본어 통역관(왜학) 조정질(趙廷耋)이 현장에서 합동 조사를 벌였다. 배 안에는 선주 1명, 사공 1명, 격군(노젓는 사람) 5명 등 총 7명의 일본인이 타고 있었으며, 여러 물건을 싣고 표류해 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 표류한 일본인들을 직접 심문(問情)하여 그들의 인적 사항, 표류 경위, 선박의 크기 및 실려 있던 물품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당시 조선 관리가 일본 표류민을 얼마나 철저하게 조사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다.
*왜선 본디 항로 : 대마도 야스촌(夜須村)에서 출발해 오사카로 가던 상선이다. 당시 대마도는 식량이 부족해 일본 본토(오사카 등)로 쌀을 사러 가는 배가 많았다.
*물품 : 기록된 물품 목록은 당시 일본 상선의 규모와 선원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다. 특히 놋그릇이 아닌 사발(사중발)과 차 도구(다관) 등이 눈에 띈다.
*조사 목적 : 조선 관리는 단순히 구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내부의 지리적 거리나 풍흉(경제 상황)을 물어 정보를 수집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 또한 표류한 왜인들에 대한 최종적인 처우 결정과 조사를 소홀히 한 관원들에 대한 문책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서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상급 부처에 올린 보고의 결론 부분이다.
*인도주의적 처우 : 조선 정부는 표류해 온 왜인들에게 관례에 따라 먹을 것과 땔감을 제공하고, 대마도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다대포 왜관으로 호송할 것을 명령했다.
*부실 조사 문책 : 보고서의 후반부는 분위기가 급반전된다. 일본인들이 "3,000냥이라는 거금"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는데도, 조선 관리들이 이를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점(밀무역이나 다른 의도 확인 부족)을 "매우 소홀하다(疎漏)"고 질책하고 있다.
*지연 대응 징계 : 배가 도착한 지 사흘이나 지나서야 조사가 이루어진 점 등을 문제 삼아, 통역관과 만호, 아전들을 잡아다가 곤장형(棍懲)에 처하겠다는 강한 처벌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 기록은 당시 조선이 표류민에 대해서는 호의를 베풀면서도, 변방의 보안과 규정 준수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덧붙여 이번 「1873년 1월19일 표류 왜선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통제사(統制使) 채동건(蔡東健)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통제영계록(統制營啓錄)』이다.
**「1873년 1월19일 표류 왜선 구조 및 조사한 장계(狀啓)」**
승정원에서 (봉투를) 열어보니, 본월(이달) 15일 진시(오전 7~9시)에 도착한, 14일 유시(오후 5~7시)에 작성된 지세포 만호 류덕연, 옥포 만호 송영순, 조라포 만호 김경주의 치보(급히 올리는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각 지세포 눌일곶(와현)의 망군(초병) 김철공, 옥포 옥산의 망군 이재필, 조라포의 망군 김선원 등이 보고하기를, "오늘(14일) 신시(오후 3~5시)에 아침인지 저녁인지(또는 아군인지 왜인인지) 분간되지 않는 배 한 척이 먼바다에서 등불을 켠 채 나와 지세포 경계인 구조라 내도(안섬)를 향해 표류해 오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해당 배를 탐지하기 위해 만호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추후 14일 술시(오후 7~9시)에 작성되어 도착한 지세포 만호의 보고에 따르면, 정체불명의 배를 탐지하려고 노를 재촉해 구조라 내도 앞바다로 전진해 보니, 그 배는 과연 일본 대선이었고 등불을 켠 채 표류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에 당일 술시쯤에 서로 만나 끌어오려 하였으나, 바람과 물결이 모두 거스르고 날마저 저물어 도저히 끌고 들어올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닻을 내리게 하고 수호(감시)하였습니다.
추후 14일 해시(오후 9~11시)에 작성되어 도착한 옥포 및 조라포 만호의 보고에 따르면, 배를 탐지하러 나갔을 때 망군들이 다시 보고하기를 "그 배는 과연 일본 대선이며, 지세포 경계 구조라 내도 앞바다에서 당일 술시에 지세포의 예인선과 만났으나, 맞바람과 저문 날씨 때문에 끌어오지 못하고 그곳에 떠서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추후 15일 유시(오후 5~7시)에 작성되어 도착한 지세포 만호의 보고에 따르면, 구조라 내도 앞바다에 닻을 내린 왜선은 바람 기세가 더욱 강해져 여전히 끌어오지 못하고 계속 그곳에서 수호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추후 16일 진시(오전 7~9시)에 작성되어 도착한 해당 만호의 보고에 따르면, 그 왜선은 밤새 별 탈이 없었습니다. 오늘 묘시(오전 5~7시)에 바람과 물결이 조금 잦아들어 겨우겨우 끌어내어, 당일 진시에 구조라 강구(포구 입구) 앞바다에 정박시키고 계속 수호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추후 16일 사시(오전 9~11시)에 작성되어 도착한 옥포 및 조라포 만호의 보고에 따르면, 망군들이 다시 보고하기를 "지세포 구조라 내도 앞에 머물던 왜선이 오늘 진시에 지세포 강구 앞바다에 정박했다"라고 하여 만호들은 다시 진영으로 돌아갔습니다.
추후 도착한 옥포 왜학(일본어 통역관) 조정질의 수본(보고서)에 따르면, 지세포 만호의 연락을 받고 금번 17일 자시(새벽 0시경)에 구조라 앞바다에 도착해 보니 왜대선 1척이 과연 정박해 있었습니다. 이에 해당 진 만호 류덕연, 지방관인 거제부사 송희승과 함께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문정(사정을 물음)해 보니, 표류해 온 큰 배 한 척 안에는 선주 1명, 사공 1명, 격군 5명 등 총 7명의 왜인이 물건들을 싣고 타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거주지, 성명, 나이 및 표류해 온 사유를 탐문하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선주(船主) 왜인은 마쓰토시(松年, 40세), 사공 왜인은 로쿠스기(六杉, 30세), 격군(노젓는 인부) 왜인은 이치스케(市助, 35세)일 새벽에 고, 도요키치(豊吉, 32세), 우키치(卯吉, 33세), 규키치(久吉, 30세), 다케키치(武吉, 20세)였습니다.
해당 왜인들이 말하기를, "저희는 본래 대마도 야스촌(夜須村)에 살고 있습니다. 쌀을 사기 위해 전은(돈) 3,000냥과 식량 8말을 싣고 이번 달 14일 이른 아침에 고향을 떠나 오사카성(大阪城)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수로로 3,000리나 되는 먼 길인데, 큰 바다에 이르자 동풍이 몹시 불고 파도가 흉용하여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대양을 떠돌다 바람을 타고 지세포 경계인 구조라 내도 앞바다까지 떠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당일 신시(오후 3~5시)쯤에 그곳 수군의 예인선을 만나 끌려가던 중, 갑자기 서북풍이 일고 파도가 거슬러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녁 술시(오후 7~9시)쯤에 예인선과 함께 그곳에 닻을 내리고 이틀 밤낮을 보낸 뒤, 16일 묘시(오전 5~7시)에 바람과 물결이 잠시 잦아들기에 예인선과 함께 닻을 올리고 겨우겨우 끌려와 오늘 진시(오전 7~9시)에 이곳에 정박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해당 왜선과 실린 물건들을 일일이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① 배의 크기 : 길이 14파(把, 약 21m), 너비 3파 반(약 5.2m).
② 선박 장비 : 돛대 1개(길이 12파), 면포 돛 1개(18폭, 길이 9파, 너비 10파), 치목(키) 1개, 노 5개, 서까래용 나무 40개, 철제 닻 6개, 숙마(삼)로 만든 닻줄 3줄(각 60파), 용층줄(강화 로프) 2줄(각 50파), 짚줄 2줄, 종려껍질 닻줄 3줄, 가마니 120장, 작은 보조 배 1척.
③ 생활 물품 : 솥 1개, 냄비(남비) 1개, 밥통 1개, 물통 1개, 숟가락 7벌, 사발 40개, 나무젓가락 7벌, 소반 7개, 옷상자 7개, 벼루 1개, 붓·먹통 2개, 상자 2개, 흙 화로 3개, 찻주전자 3개 등.
④ 의복 : 입고 있는 옷은 모두 검은색이었습니다.
해당 왜인들에게 다시 힐문(따져 물음)하기를, "너희가 사는 마을에서 오사카성까지 육로로는 얼마나 되며, 부중(대마도 도주의 거처)까지는 수로와 육로로 각각 얼마나 되는가? 또 올해 농사는 풍년인가 흉년인가?"라고 상세히 고하게 하니, 다음과 같이 답하였습니다. "오사카성까지의 육로는 잘 모르겠으나, 부중까지는 수로와 육로 모두 100여 리 정도 됩니다. (농사 형편 등에 대해서도 답함)“
올해 농사 형편은 풍년이라 할 만하다고 그들이 말하였습니다. 이 배는 본래 일본 본토(내지)의 왜선이 아니라 대마도의 표류 왜선이므로, (대마도로) 돌려보내는 절차를 어떻게 거행할지에 대해 해당 진의 만호와 함께 엎드려 처분을 기다린다는 내용의 보고와 서신이 있었습니다.
현재 지세포 구조라 앞바다에 정박 중인 왜대선 1척에 대해서는 이미 사정을 조사(문정)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줄 양식과 반찬, 땔감과 물 등은 전례에 따라 지급하도록 지방관인 거제부사 송희승에게 지시해 두었습니다. 해당 배가 비록 공무 수행 중인 배(공선)는 아니나, 이미 대마도 왜인으로 확인되었으므로 왜관으로 인도하여 돌려보내는 것이 기존의 관례입니다.
이에 순풍을 기다려 왜관으로 호송하라는 뜻을 해당 만호 류덕연에게 엄히 지시하였으며, 다대포로 옮겨 보낸 뒤의 상황은 추후에 다시 보고할 계획입니다. 본래 사정을 묻는 조사(문정)의 법도는 마땅히 엄격하고 세밀해야 하며, 실려 있는 물건을 살피는 일은 더욱 상세히 종합해야 합니다. 저들이 이미 '돈 3,000냥을 싣고 있다'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돈의 실제 유무나 그 액수가 정확히 얼마인지 다시 캐묻지 않았고 논의한 바도 없으니, 변방의 전례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매우 소홀한 처사입니다.
또한 14일에 표류해 온 왜선을 비록 바람 때문이라고는 하나 너무 늦게 끌어다 정박시켰고, 17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사를 시작했으니 그 과정 또한 매우 더디었습니다. 지방관과 주진(主鎭)의 장수들이 이미 함께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조사했으면서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책임은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따라 왜학(통역관) 조정질, 주진의 장수 류덕연, 거제부의 우두머리 아전 등을 모두 본영으로 잡아와 특별히 곤장을 쳐서 징계할 계획입니다. 이러한 사유들을 아울러 보고드리오니 살피어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치(同治) 12년(1873년, 고종 10년) 1월 19일.
[承政院開拆. 本月十五日辰時到付十四日酉時成貼知世浦萬戶柳德淵·玉浦萬戶宋榮淳·助羅浦萬戶金景周馳報內, 卽刻知世浦訥逸串望軍金喆公·玉浦玉山望軍李再弼·助羅浦望軍金先元等進告內, 今日申時, 朝倭未辨船一隻, 自洋中懸燈出來, 際[漂]向于知世浦境舊助羅浦內島了是如爲乎等以. 同船探知次, 萬戶等乘船下海是如爲白有旀. 追于到付同日戌時成貼知世浦萬戶馳報內, 未辨船探知次, 促櫓前進于舊助羅浦內島前洋, 則同船果以倭大船一隻, 懸〈燈〉漂來. 故當日戌時量, 相逢領曳之際, 風水俱逆, 且値日暮, 萬無曳入之路. 故同處下碇守護是如爲白有旀. 追于到付同日亥時成貼玉浦萬戶·助羅浦萬戶馳報內, 未辨船探知次, 促櫓前進之際, 望軍等更告內, 同船果以倭大船, 知世浦境舊助羅浦內島前洋, 同日戌時, 相逢同浦領曳船, 風逆日暮, 不得曳入, 同處浮留是如爲乎等以. 馳報是如爲白有旀. 追于到付十五日酉時成貼知世浦萬戶馳報內, 舊助羅浦內島前洋下碇倭船, 風勢益壯, 不得曳入, 仍爲同處守護是如爲白有旀. 追于到付十六日辰時成貼同萬戶馳報內, 同倭船無弊經夜. 今日卯時, 風水稍歇. 故僅僅領曳, 同日辰時, 舊助羅浦江口前洋止泊, 仍爲守護是如爲白有旀. 追于到付十六日巳時成貼玉浦萬戶·助羅浦萬戶馳報內, 望軍等更告內, 知世浦境舊助羅浦內島前洋浮留倭船, 今日辰時, 同浦江口前洋止泊是如爲乎等以. 萬戶等仍爲還鎭是如爲白乎旀, 追于到付玉浦倭學趙廷耋手本內, 因知世浦萬戶馳通, 今十七日子時, 馳到于舊助羅浦前洋, 則倭大船一隻, 果爲止泊. 故與該鎭萬戶柳德淵, 地方官巨濟府使宋熙昇, 眼同問情, 則漂大船一隻良中, 船主倭一名, 沙工倭一名, 格倭五名合七名等, 物件載持, 同騎漂來爲有等以. 探問其居住·姓名·年歲與漂來緣由, 則同船主倭號松年四十, 沙工倭六杉年三十, 格軍倭市助年三十五, 豊吉年三十二, 卯吉年三十三, 久吉年三十, 武吉年二十。同倭等言內, 俺等本以對馬島▼{亻+夜}須村居生, 貿米次, 錢文三千兩, 糧米八斗, 竝以載持。今月十四日晨朝, 自本土向往于大阪城水路三千里是如可, 到于中洋, 東風振吹, 〈波〉濤洶湧, 萬無前進之路, 漂盪大洋, 從風轉漂于知世浦境舊助羅浦內島前洋. 同日申時量, 相逢同鎭領曳船, 仍爲領曳之際, 西北風遽起, 波濤且逆, 前進無路。同日戌時量, 與領護船同處下碇, 經過二晝夜後, 今月十六日卯時, 風水暫歇。故與領護船同爲擧碇, 僅僅領曳, 同日辰時, 止泊此處是如爲乎等以。同倭船長把與所載物種, 一一看審是乎則, 船隻段, 長十四把, 廣三把半, 船械段, 帆竹一箇, 長十二把, 白木綿風席一件十八幅, 長九把, 廣十把, 鴟木一坐, 櫓木五隻, 椽乃木四十箇, 鐵碇六坐, 熟麻碇乼三張, 各長六十把, 龍層乼二張, 各長五十把, 藁旨乼二張, 各長五十把, 棕櫚皮碇乼三張, 各長六十把, 草芚一百二十番, 沒水小船一隻, 長四把, 廣一把, 物種段, 食鼎一坐, 南飛一坐, 食桶一坐, 水桶一坐, 貼匙七立, 沙中鉢四十立, 木著[箸]七件, 小盤七立, 衣籠七坐, 硯石一箇, 筆墨桶二箇, 箱子二坐, 土火爐三坐, 茶罐三坐, 而衣服段, 具帶所着, 皆是黑色而已是乎等以. 同倭人等處, 更爲詰問曰, 自汝等所居之村, 距大阪城陸路幾許, 距府中水陸路各幾許, 且年事, 豊耶歉耶? 竝爲詳細以告亦云爾, 則答以爲大阪城陸路不知, 府中段, 水陸路俱爲一百三十里. 年事段, 可謂豊穰是如云云是乎乃, 同船本非內地之倭, 乃是馬島之漂倭是乎則, 至於發送也, 何以擧行是乙喩, 與該鎭萬戶, 伏俟處分是如. 爲等如馳報及手本是白置有亦. 今此知世浦境舊助羅浦前洋止泊倭大船一隻, 已爲問情爲白有等以. 糧饌柴水依例入給事, 地方官巨濟府使宋熙昇處, 發關分付爲白有在果. 同船雖非公船, 旣是馬島之倭, 則領付館所, 使之還送, 自是已例。故領付次, 待順風護送之意, 申飭於該萬戶柳德淵處是白乎所, 越送多大浦形止, 追于登聞計料爲白乎旀, 問情法意, 本自審克, 物件看閱, 尤當綜詳, 彼旣有錢文三千兩載持之說, 而錢之有無, 數爻幾許, 更不詰問, 亦無擧論, 揆以邊例, 已極疎漏兺除良. 十四日漂到之倭, 雖緣風勢, 而晩時曳泊, 十七日爲始來到, 而問情者, 亦甚稽緩是白遣. 地方官及主鎭將, 旣已眼同問情, 則不善看審之責, 在所難免乙仍于, 同倭學趙廷耋, 主鎭將柳德淵, 巨濟府首吏鄕等, 竝只拿致臣營, 各別棍懲計料。緣由竝以馳啓爲白臥乎事是白良厼, 詮次善啓向敎是事. 同治十二年正月十九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