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関東)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橫浜)를 중심으로 한, 일본 간토지방(関東地方)에 최대 진도 7.9의 대지진이 일어나, 도쿄의 60%, 요코하마의 80%가 파괴되자, 다음날인 9월 2일 제22대 야마모토곤베에(山本權兵衞,1852∼1933,A-급전범 장인) 내각이 출범하여, 1924년 1월 7일까지 재임하면서 대지진을 수습한다.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간토 지방은 민심이 흉흉해지고 사회 질서가 무너지자, 일본 내각은 내무성을 통해 계엄령을 선포하는데, 당시 내무대신은 A-급전범의 장인인 고토신페이(後藤新平,1857∼1929)였다.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각 경찰서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는데, 특히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공문을 하달하고, 일본 신문들은 사실 확인도 없이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는데, 관언(官言) 합작품이었다.
이후 몇 번의 기사를 더 냈으나, 일본인들이 동요하지 않자, 내무성은 신문사를 압박했으며, 일본의 거의 모든 신문들은 더 과격한 내용을 내보냈고, 그제서야 약발이 먹혔는지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라는 거짓 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고, 이에 자경단(自警団)을 조직한 일본인들은 조선식 복장을 한 사람은 바로 현장에서 살해하였으며, 일본 옷을 입은 사람 중에서 의심이 나면 <주고엔 고주고센엔(十五円 五十五錢円)>이라는 말을 따라 해보라고 시켰고, 발음이 어수룩하면 현장에서 바로 죽였다.
여기에서 통과된 사람에게는 더 어려운 발음인 <つ 발음(쯔・쓰의 중간발음)>을 시켰는데, 조선인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발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약간 긴장만 해도 제대로 낼 수 없는 발음이어서, 그들도 학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본 치안 당국은 이를 방치하며 즐기다가,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 공권력을 위협하자 그제야 개입하였으나 이미 6,600∼8,000여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한 후였다. 자경단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되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에는 도쿄 시내를 관통하며 흐르는 스미다가와(隅田川)와 아라카와(荒川), 두 강에는 떠다니는 조선인 시체로 가득 찼다고 했다.
일본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라고 공식 발표하면서도, 조선인들의 사상자의 수는 끝까지 줄여 2∼3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건이 워낙 컸던지라, 일본정부는 학살을 주도한 자경단원의 일부를 연행하여 조사하였으나,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무죄로 방면하였다. 8,000여 명이 넘는 죄 없는 조선인들이 살해된 이 사건은 사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 책임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는데, 그러나 엉뚱한 데서 이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학살하면서 그 혼란을 틈타 조선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일본 사회주의자들도 함께 학살했는데, 일본인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회주의자 오스기사카에(大杉栄,1885∼1923)와 그의 처 이토노에(伊藤野枝,1895∼1923), 그리고 6살짜리 그의 조카 다치바나무네카즈(橘宗一)등을 도쿄헌병대(東京憲兵隊) 소속 고지마치(麹町) 헌병대의 분대장(分隊長) 헌병대위 아마카스마사히코(甘粕正彦,1891∼1945)가 그들을 비밀리에 체포하여 죽을 때까지 구타한 후, 우물에 버려진 사건이 알려지면서였는데, 이렇듯 자국민도 백주대낮에 아무 거리낌 없이 살해한 자들이 어찌 힘없는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거리낌이 있었겠는가? 아마카스(甘粕)는 3년 후 가석방되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아마카스(甘粕)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후쿠다마사타로(福田雅太郎,1866∼1932,육군대장)가 해임되고, 야마나시한조(山梨半造,1864∼1944)가 부임하는데, 야마나시한조(山梨半造)는 조선인의 대량 학살을 수습한 공로로, 이후 제4대(1927∼1929) 조선총독으로 영전한다.
1923년 12월 20일 제47회 일본 제국의회가 열리는데, 다부치도요키치(田渕豊吉,1882∼1943)의원과 나가이류타로(永井柳太郎,1881∼1944)의원이 제국의회에서 일본정부에게 조선인 학살 문제를 제기해,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 후 일본인들은 이날 9월 1일을 <방재의날(防災の日)>로 정하고, 온갖 설레발을 치면서, <재난・재해에 대한 훈련>을 실시해 오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죄도 없이 일본인들의 기분 풀이로 학살당한 조선인들에 대한 자발적인 묵념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일본정부 차원의 단 한 번의 진상조사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100년이 지난 2023년 5월 23일 일본 참의원에서 입헌민주당 소속 스기오히데야(杉尾秀哉,1957∼,2025년・현역) 의원이 당시 일본 치안 최고 책임자인 국가공안위원장 다니고이치(谷公一,1957∼,2025년・현역)에게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 때 헌병과 경찰 등 공권력의 관여 여부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자, 다니(谷)는 “정부가 사실관계를 확인할 기록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해 조사할 수가 없어 조사가 불가능했다”라고 답변하는데, 이에 스기오(杉尾)는 “일본중앙방재회의(日本中央防災会議)의 보고서가 있고, 또 국립국회도서관에도 관계자들이 쓴 문서가 다수 존재하고 있다”하고 추궁했지만, 다니(谷)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라는 답변만 짜증이 나도록 반복하면서, 1923년 당시 조선인 대학살과 관련해, 당시 동물원에서 도망친 사자를 죽였어야만 했던 사건에 비유하는 발언을 하는 등 100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조선인을 비하하는 발언은 여전했다.
간토대지진 당시 경찰 총책임자는 경시총감(警視總監)이었던 유아사구라헤이(湯浅倉平,1874∼1940)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냈던 자였다. 당시 지진과 관련해서 도쿄지역 경찰 책임자는 경시총감이었고, 현장 경찰서는 고지마치(麹町) 경찰서가 맡았는데, 고지마치(麹町) 경찰서장에 대한 정보를 찾지 못했다.
요코하마(橫浜)는 가나가와현・경찰부(神奈川県・警察部)가 책임을 맡았으며, 서장은 모리오카지로(森岡二朗,1886∼1950,A-급전범)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을 지낸 자였다. 그리고 헌병대도 경찰과 함께 지역 치안을 담당했는데, 당시 일본헌병사령관은 시바야마시게카즈(柴山重一,1876∼?,육군중장)였으며, 요코하마(橫浜)지역은 도쿄헌병대에서 관할했는데, 도쿄헌병대장은 미야케아쓰오(三宅篤夫,1879∼1961,A-급전범)였고, 현장 관할 헌병대는 도쿄 고지마치(麹町) 분대로, 분대장은 상기에 소개한 헌병대위 아마카스마사히코(甘粕正彦)였다.
같은 달 12일 일본인들이 순종황제에게 간토대지진 일본인 구호금으로 30,000엔(円=元)을 강제적으로 뜯어갔는데, 2020년 니혼은행(日本銀行)기준 113,999,032엔(円)의 가치이다. 조선인들은 간토(関東) 지역에서 지진의 화풀이로 일본인들에게 대규모로 학살당하고 있는데, 학살하고 있는 일본인들을 도와줘야 한다며 돈을 뜯어 간 것이었다.
또 같은 날 <일본애국부인회>가 순종황후에게 간토대지진 구호금 1,000엔(円=元)을 뜯어갔으며, 이어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이은(李垠) 황태자의 거처가 있던 요코하마(橫浜)부근 오이소마치(大磯町)의 일본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해, 구호금 명목으로 1,000엔(円=元)을 줘야 했으며, 다음날 또 <일본애국부인회>가 간토(関東)대지진의 일본인 부상자들를 치료해야 한다며, 목면 붕대 60반(反)을 뜯어갔는데, 1반(反)은 360보(步)로, 1보(步)는 면적으로 3.3㎡(1평)였으므로, 따라서 21,600평 면적의 목면 붕대를 뜯어간 것이었다.
이어 같은 해 12월 4일에는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신문사 경성지국이 <간토대지진 인명구조대> 모집을 주최한다고 순종황제에게서 50엔을 뜯어갔는데, 이렇듯 일본인들에게 조선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2025.9.2
김강열 <왜구인명사전> 중에서, @-광주의 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