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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한때는 왕이었던 남자다>
나는 그곳에 있었다. 나는 뱃전에 앉아 허공을 주시하다 말고 문득 고개를 한 곳으로 돌렸다. 먼 발취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균의 모습을 발견한다. 서로의 눈길이 마주치자 균은 가볍게 목례를 올린다.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들어갈 수 없는 궁궐.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조선의 개혁군주인 나, 광해는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신하들의 반정에 내몰려 강화도로 떠난다. 강화물은 거칠었다. 잔잔하던 물결은 높은 파도를 동반하고 온전치 못한 정신은 뱃멀미를 감당키 어려웠다. 울컥한 마음에 속에든 이물질을 겨워 내고 싶었지만 며칠째 먹은 게 없다.
잠시 뱃전에 몸을 기댄 체 눈을 감았다. 아비 선조와 어미인 공빈을 떠올렸다. 그러나 어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의 어미인 공빈은 내가 네 살 되던 해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한다. 모를 일이다. 아비는 나를 후계자로 점찍었다. 하지만 나와 임해 형은 서자였다. 1606년 계비 김씨가 아들을 낳았다. 나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이다. 나는 궁지에 몰렸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아비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나를 어쩔 수 없이 임시방편으로 왕세자를 삼았지만 난이 끝난 지금은 다르다. 똥마려울 때와 화장실 다녀옴은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영상 유영경은 소북당의 당수다. 유영경은 중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더불어 은밀히 세자교체를 꿈꾸고 있다. 나는 불안했다. 월희를 포섭했다. 월희는 나를 품어 장래를 보장받기를 원했다. 나는 선뜻 짐승이 될 수는 없었다. 월희는 아비의 여자가 아니던가. 나는 고민했다. 이건 아니다. 하지만. 권력은 잡아야 누리는 것이다. 나중에 반정으로 강화도와 제주도로 기나긴 19년의 유폐에도 결국 나는 다시는 궁궐로 돌아오지 못했다. 심지어는 왕으로도 불리지 못하고 군으로 강등되었다. 연산군이야 폭군에다 황음무도한 자이지만 나는 결코 무능한 왕이 아니다. 월희는 앵돌아져 동온돌을 나가려 한다. 그의 팔을 놓치면 대사가 그르치고 만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번민케 한다. 그의 눈과 나의 눈이 부딪힌다. 애증의 섬광은 눈을 질끈 감고 어둠을 받아들였다. 월희의 20대 농익은 몸에선 수밀도 냄새가 앙동을 하고 자벌레가 기어가듯 지렁이가 꿈틀거리듯 땅위에서 가장 느린 미물처럼 흐느적거리며 나의 온몸을 먹어간다. 온몸의 경직이 풀리고 어둠이 걷히며 농익은 여인의 체취가 코를 간질이며, 여린 이파리를 간질이는 미풍이 나를 흔들었다. 월희는 아비를 독살할 준비를 마쳤다. 아비가 좋아하는 약밥을 먹였다.
무신년(1608)음력 2월 이튿날, 나는 드디어 왕이 되었다. 영의정 유영경은 나를 힘들게 한다. 그놈의 수작이 밉고 가증스럽다. 당쟁은 이 나라 조선의 절대 악이다. 아비 선조 때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었다. 신진사림의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은 이제 동인과 서인을 넘어 남인, 북인이 생겼다. 대북이나 남인은 그 뿌리가 동인이다. 다시 북인은 대북, 소북으로 갈려 대북이 실권을 잡았다. 대북은 다시 육북, 골북으로 갈리고, 소북은 유영경과 남이공의 사이가 벌어져 독소북, 청소북이 되었는데, 그 독소북의 영수가 유영경이다.
힘들게도 왕이 되었다. 그런데, 명나라에서는 나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한다. 형 임해가 있는데 ‘니가 왜하냐.’ 이건 내정간섭이 아니라 조선임금을 저네가 지명하겠다는 엄연한 통치권 침해다. 나는 ‘내가 살아 있는 한 명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는 마음이 생겼다. 괘심한 지고, 지들이 무엇이라고. 그러나, 나는 참았다. 외교는 상황에 따라 굴욕을 참고 펴나가야 한다. 외교의 단절은 고립을 낳고 고립은 자멸로 이어지는 것은 역사상 만고의 진리라고 나 , 광해는 믿는다.
‘송피는 두들기면 떡이 되고 사람들은 두들기면 역적이 되는데, 시골서는 부역으로 못살고 서울은 호역으로 살기가 어렵소.’ 이 말이 장안에 떠돌아 다녔다. 이듬해 명나라 황제가 웅화를 보내어 비로소 나는 왕이 되었다. 나를 괴롭혀온 명나라 놈들. 조정의 신하들은 나의 형 임해를 죽이자고 난리다. 조정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는 명분이다. 권력을 놓고 힘겨루기에 밀리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하고, 이기면 피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그런 곳이 정치판임을 재위 1년 만에 터득했다. 그놈의 당파에 나는 의욕을 잃었다. 언관제도를 없애자고 하면 나의 독단이라고 신하들은 게거품을 물고 자기당의 인물을 언관으로 심어 놓았다. 언관과의 샅바싸움에서 이겨야 나의 권위가 선다.
나는 유생들과 한판승부를 펼쳤다. 5현의 문묘종사, 오래 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거론되었고 추진되어 오던 사람의 큰 사업이었다. 사림의 학통은 동방 이학의 조(祖)로 일컬어지는 정몽주로부터 시작되어 길재-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로 이어지는 것이 순서처럼 인식되어 있었다. 조선의 통치이념은 숭유억불이다. 유교에서 문묘는 공자를 받드는 사당이다. 문묘는 유교를 집대성한 곳이다. 이곳에 모셔진다는 것은 유학자로서의 최고의 영광이다.
아비 선조 때에 본격적으로 당파가 조성되고 그로부터 조선은 그들의 나라였다. 그들 세력이 이끄는 대로 조정은 움직였다. 아비가 죽고 내가 즉위한지 2년(1610) 6월1일 대신들에게 수의할 것을 명했다. 나는 대부분 그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김굉필, 조광조, 이황의 문묘는 동쪽에, 정여창, 이언적은 서쪽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1570년 성균관 유생이 중심이 되어 4현의 문묘종사를 상소한 후 무려 4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문묘종사를 이뤄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불평분자는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정인홍이 나에게 상소를 올렸다. 정인홍은 조식의 제자였다. ‘회퇴변척소(晦退辯斥疎)’ 회는 이언적의 호 회재에서, 퇴는 이황의 호 퇴계에서 따온 것이다. ‘이황은 과거로써 출신하였으나 벼슬길에 온전히 나간 것도 아니고 온전히 물러난 것도 아니어서 이럭저럭 세상을 마치면서 스스로 중용의 도라고 하지만, 식은 일찍부터 과거 보기를 단념하고 산림 속에서 빛을 감추어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으며 소명을 받았으나 일어나지 않았나이다. 또한 이언적은 학문의 성과 없이 이름 석 자만이 높아 사림의 판단이 엇갈리고,,,’
이황과 조식은 신유(1501년)생으로 동갑내기였다. 이언적은 이들보다 10년 연배로 선배학자였다. 조식은 학자로써 벼슬에 연연하는 이언적을 보는 시각은 냉소적이었다. 또한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지도 않았다. 이언적 또한 자기를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조식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반면 이황은 주리(主理)의 학설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는 서로를 찬사하던 두 사람이 나중에는 서로를 비판하고 나섰다. 자존심 대결이며 경쟁의식의 발로였다.
조식은 누구보다도 명분에 충실했다. 이황은 인을 숭상하고 바다처럼 넓은 학문을 지닌 인물이라면 조식은 의를 중시하고 태산처럼 높은 기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나의 아비인 선조의 조정에서 활동한 벼슬아치 중에는 이황의 문인이 단연 우세했다. 반면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은 조식문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한때는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여 동인이 되었다. 1589년 정여립 사건으로 동인은 남인, 북인으로 갈리고 임진왜란 중에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성룡과 정인홍은 정적이 되었다. 유성룡이 <퇴계집>을, 정인홍이 <남명집>을 발간하여 자기 스승은 높이고 상대방의 스승은 헐뜯는 경쟁을 벌였다.
나는 정인홍의 손을 들어 주었다. 유생들의 반발이 거셌다. 그들은 정인홍을 청금록에서 삭제해 버렸다. 나는 대노했다. 어린것들이 감히 당대 사림의 으뜸가는 학자를 삭제하다니, 유생들의 반란이나 다름없었다. 나와 나라를 짊어진 유생들과의 한판싸움이 벌어졌다. 나는 정인홍을 비호함으로써 대북의 손을 들어준 꼴이 되어 버렸다. 대북은 크게 고무되었고, 다른 당은 자연히 대북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나의 사랑하는 비의 동생 유희분은 회의를 느꼈다. 그는 이 나라의 병권을 손에 쥔 병조판서이다. 직제상 병판이 병권을 장악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독자적으로 군사행동을 할 수 있는 곳은 비변사이다. 비변사의 총책임자는 2품 이상의 당상이 총책임자다. 이항복이 좌의정으로 비국당상이다. 체찰사까지 겸해 명실 공히 병권은 항복의 손에 있다. 정인홍은 이항복을 해임시키라고 꼬드겼다. 나는 듣지 않았다. 왜란을 몸소 겪은 나로서는 이항복의 활약상을 안다. 그는 훌륭한 병권의 적임자였다.
아비가 왕을 너무 오래 해먹는 바람에, 나는 세자 생활만 16년을 했다. 나는 33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왕이 되었다. 그것도 월희를 꼬드겨 약밥을 먹이고서야 겨우 왕이 될 수 있었다. 국사의 흐름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지만 당쟁의 조정은 어렵다. 벽은 두터웠고 골이 깊어 있다. 어느 한쪽을 들어주면 다른 한쪽이 원망하고 또 다른 한쪽은 원한을 품는 당파, 나는 대북의 마수에 걸려들었다.
나를 대북에 걸려들게 한 것은 월희다. 나는 월희를 품었다. 아비를 죽인 월희의 의사를 묵살 할 수가 없다. 대북과 나, 그리고 월희는 먹이사슬로 얽혀 있다. 월희는 또한 이이첨의 뇌물공세에 푹 빠져 있다. 나는 나의 손톱 밑의 때보다는 남의 가슴에 응어리진 어혈을 씻어 줄 수 있어야만 현군의 소리를 듣는데, 나는 나의 손톱 밑의 때만을 보고 있었다.
동대문 밖 광진 나루 주막거리. 강바람이 따갑게 살을 파고든다. 주막 구석방에는 허균이 최봉주, 박응서, 김평손 등과 개다리소반에 탁주와 우거지 술국을 놓고 대낮부터 한판을 벌이고 있다. 허균이 나의 도승지가 되어 내 옆에 있지만 실제로는 나는 그를 가까이 한 적이 없다. 그는 허엽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내 아비 선조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조정에 나왔다. 그는 큰 인물이 될 요지가 보인다. 다만 이이첨과 밀착되어 있는 게 별로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가끔은 경망스럽기도 하지만, 천재성이 번득이고 친화력도 돋보인다. 다만 처세술은 별로인 것 같다. 허균은 요즘 언문 소설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쌍것들이 읽고 희망을 가지라고 언문으로 쓰는데, 얼마 전까지는 최초의 한글소설이라고 치켜세우더니 동북아 정세에 맞춘다고 최치원에게 밀렸다 한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문인들이 할 일이다.
이이첨은 모사와 정보정치의 대가다. 원칙과 명분에 철저한 정인홍도 이이첨의 교언영색과 실리추구에 발목이 잡혀 허둥댄다. 이이첨은 김제세를 미끼로 이참에 실추된 나의 권위도 살리고 남인, 소북의 하위관리들을 모조리 엮어 쓸어버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역모로 몰린 유팽석이 정인홍을 끌고 들어갔다. 이는 대북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이첨은 철저히 단속하고 감시하여 정인홍을 무마시킨다. 판의금부사 박동량이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그마저 묵살하고 나는 이이첨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이첨은 나의 총명을 흐리고 나는 점점 이이첨에게 의지해 가고 있다. 이건 역모사건을 조작하고 있음에도 누구하나 그의 권모술수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왕인 나도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판국에, 다른 신하들은 말해 뭘 하나.
권필의 궁유시를 발견한다. 금부도사를 부른다. ‘그 놈도 잡아들여라.’ 형틀에 묶여 그를 노려보았다. 분노는 이내 측은지심으로 변하고 무엇 하나 자신 있는 신념은 없고, 오로지 남을 딛고 넘어서는 재간 하나뿐인 이이첨에게 권력은 독약 같은 것이다. 나 광해는 이이첨이란 독약을 장기복용하고 있었다. 나는 권필을 북쪽 변방으로 귀양 보냈다. 이이첨은 얼굴이 벌개져 어전을 물러났다. ‘더욱 철저히 대응하고 응징하리라. 오로지 광해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길은 그 길 밖에 없다.’ 요즘도 철저히 수구보수골통은 오로지 충성심하나밖에 없는 인간들이다. 눈 먼 군주 나 광해는 이이첨의 간교한 입안의 혀처럼 부드러운 말에 녹아든다.
달디 단 사탕도 이내 단물이 빠지면 공허한 것을 나는 몰랐다. 나의 왕 시절에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이 있었고 오리대감 이원익도 있었다. 그러나 이이첨은 남인의 거두 이덕형이 싫었고, 그와 둘도 없는 친구 이항복이 껄끄러웠다. 이이첨은 허균을 불렀다. 허균의 재주를 아껴 그를 대북으로 끌어들였다. 글 하는 자는 정치판을 기웃거리면 안 된다. 작금의 정치판에도 시인이, 소설가가 기웃거린다. 그들의 글이 더럽혀질까 두렵다. 글쟁이는 모름지기 글만 쓸 일이다.
이이첨은 능수능란했다. 허균의 다혈질 성격으로는 능구렁이 같은 이이첨을 상대하기는 늘 밑지는 장사요, 몸을 파는 기분이었을 게다. 처음엔 그에게서 개혁의지를 발견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님을 발견 하였지만, 나와 허균은 이미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목까지 빠지고 말았다. 그 놈은 개혁을 꿈꾸는 인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것을 마음껏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차리는 소인배였다. 겉으로는 거인처럼 보이고 속은 빈대 콧구멍보다 좁은 덩치 큰 곰이나 늑대 같은 존재였다. 요즘 mbc 월화드라마 ‘화정’이란 드라마에 내가 나오더라. 영창대군과 그의 누이 정명공주를 다룬, 근데 허균은 정반대의 인물로 나를 배신하고 이이첨에 걸려 사지가 절단되는 거형을 당하고 저번 주에 아마도 죽었지.
악의 마수에 빠져 그것을 알고 도망을 치려면 더 큰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세상은 어차피 거대한 악의 축이다. 깡패 집단도 의리를 숭상하지만 그것도 옳지 못한 일을 함께 도모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불법을 저지르고 감옥행을 선택하는데 뒤를 돌봐주는 것이 어찌 의리인가. 애초에 잘못된 집단이다. 이처럼 악은 악일뿐이다. 세상은 선과 악이 존재한다. 승자와 패자가 존재한다. 살아남았다고 승자이자 선은 아니다. 패자라고 악은 아니다. 승자가 악일수도 있고 패자가 선일수도 있다.
기록은 붓의 방향이 정해놓은 기록일 뿐이다. 기억은 살아있는 동안 존재할 뿐이고 기록은 후세에 전해지지만 그 정확함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정확하기를 믿고 바랄 뿐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조차도 두 눈으로 뻔히 보고도 그것이 진실인지를 알지 못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하물며 지나간 역사는 그저 유추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허구는 아닐 것이다. 있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니까. 다만 누구나가 보지 못한 역사에는 픽션이 가미 될 것이다. 그것이 작가의 상상력이던 누구의 이야기가 정설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이첨은 날마다 내게 와서 영창을 죽이라고 아우성이다. 영창이 성장하면 나의 아들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력들의 다툼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부드럽고 선량하다. 왕실의 안정을 위해 영창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데는 수긍이 가지만, 아비의 유교도 있고 대비가 시퍼렇게 살아서 지켜보는데, 세상인심이 등을 돌릴까봐 두렵다. 나는 영창을 일단 폐서인으로 삼았다. 죽이는 것이 싫었다. 영창을 두둔한 이덕형의 벼슬을 삭탈 시켰다. 영창을 강화로 귀향을 보냈다. 살리기 위해.
이덕형은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로 나날을 보내다 끝내 조정을 떠난 지 열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오성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다섯 살이나 어렸지만 평생을 함께한 지기였다. 조문객들이 모여들었다. 삭탈관직 당한 오리대감도, 판서 이정구도, 이귀도, 김자점도 왔다. 그러나 대북의 중진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사람보다 먼저 당이 있을 따름이었다. 어쩜 세상은 이리도 닮아 가는지, 모를 일이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눈도장 찍을 놈이 없으니 말이다.
나의 즉위 10여 년,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고 벼슬아치들의 독직과 뇌물수수가 판을 친다.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얻는 일이 공공연해지고 과거제도는 문란하여 미리 시제가 나돌아 대북, 소북들의 자제가 한꺼번에 급제하는 일이 다반사다. 이 일은 이이첨과 월희가 짜고 액수의 과다에 품계가 정해졌다.
맑고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공들인 진수성찬은 만백성의 기름이로다.
촛불 눈물 떨어질 대 창생이 눈물짓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드높아라.
나는 점점 폭군이 되어간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말이다. 조선에 왕이면서, 군이 된 두 사람이 있다. 연산군과 나 광해다. 노산군은 복위가 되어 군에서 벗어났다. 그렇지만 나는 억울하다. 어찌 연산군과 나를 비교하다니,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나는 외교군주다. 강화도로 귀향 보낸 이복아우 의, 영창대군이 죽었다. 아궁이에 장작을 처넣어 벽까지 달궈진 방안에는 기름타는 노린내가 새어 나왔다 한다. 이이첨은 광신하였다. 영창대군을 죽인 후 이번에는 폐모론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심했다. 그렇지 않아도 ‘형을 죽이고 아우를 죽이니 어찌 차마 이럴 수 있는가? 사람으로서 무량 한 것이 임금이 되는 줄로 아오.’ 성주사는 선비 이창록이 나를 비판한다. 나는 그를 때려 죽였다.
허균이 역모에 걸려들었다. 이이첨의 밑에 들어간 것이 오늘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허균은 스승 이달의 자유사상과 반항의식이 새삼 돋보였다. 그의 남녀 평등주의와 상호 호혜주의는 그를 파락호로 보이게 만들었다. ‘남여 사이의 정욕은 본능이다. 이것을 검속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성인을 따르기 보다는 본능을 따르겠다.’ 허균의 진보적 사상을 드러낸 일면이다. 허균은 백성들의 혁명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호민론(豪民論)’을 썼다.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백성뿐이며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의 세 종류로 나뉘었다. 허균은 함열 유배시절 <홍길동전>을 쓸 때 호민론을 바탕으로 작중인물을 강변칠우에서 찾았다. 주인공 홍길동이 즉 호민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허균은 호기심이 많았다. 나 광해 역시 호기심이 많았다. 시대를 앞서가는 선지자는 고독의 누더기를 걸치고 난 후에야 속마음을 알아준다.
나의 개혁의지는 허균과 비슷하다. 나의 개혁군주의식 역시 허균과 궤를 같이 한다. 나 그때 내가 좀 더 허균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권간(權奸) 이이첨을 멀리하고 제대로 된 정사를 펼쳤더라면 반정의 덜미에 유폐되어 강화도로, 제주도로 위리안치의 수모와 군으로 강등되는 잔학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을. 나는 뱃전에 기대어 멀리 나를 배웅하는 균의 모습에서 참담함을 느낀다. 우리는 동병상린이다. 나는 군으로, 허균은 아직도 조선시대에서 복권이 되지 않은 유일한 선비다. 허균은 탐관오리가 아니다. 가난이 그가 놓아 버린 권력만큼이나 쓸쓸하고 초라하게 따라 다녔을 뿐이다.
방은 손바닥만 하고
다만 남향의 두문 뿐 일세
해가 비치면 밝고 따스하고
집은 비록 바람벽을 둘렀으나
서적은 사부서(四部書)를 쌓았네...
균은 ‘누실명’의 시를 지어 스스로 청빈함을 부끄러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균은 사신으로 연경을 다녀왔다. 그리고 종계변무가 아직도 개정이 되지 않았다며 북경을 다녀온답시고 안동에 머물며 문서를 조작하여 어보를 찍었다. 온 나라가 균의 농간에 놀아났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균의 행동이 나라를 위한 애국심임을, 균은 중국 대륙의 흐름을 보니 후금이 심상치 않았다. 미리 대비하는 것이 상책이었으나 조정에서는 임진왜란을 겪고도 외침에 대해 무감각이었다. 균은 ‘변방에 역적의 무리가 있어 불원간 일어날 것이다.’ 라고 조정에 투서하고 하수인들을 시켜 남산에 올라가 크게 소리치도록 했다.
그는 나와 생각이 같았다. 그러나 허균은 역적모의에 민심 교란죄로 걸려들었다. 이 두 가지만 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이첨을 만났다. “대감, 시생과 대감이 하자는 개혁은 뭐였소?” “ 개혁은 혁명이 아니라 당대에 알맞게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게야. 나는 늘 개혁을 주도해 왔다고 보네.” 나 광해도, 교산도 참으로 재주가 탁월한 간신이자 자기방어의 호신술과 호신언이 완벽하게 준비된 이이첨에게 꼼짝없이 당했다.
. ‘나는 사상의 편력자인가. 유가들은 나를 방자한 이단자, 천방지축의 경박자, 부모를 모르는 폐륜아, 반역을 꾀한 역적, 이이첨을 따른 아첨꾼, 별의별 수식어를 다 동원하여 매도할 것이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한낱 의협심 많은 개혁가를 바랐던가? 다만 한 가지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살고 싶었던 자유의 보헤미안, 영혼이 자유로운 이방인이었다. 나는 그 자유를 위해 방황하다 제도의 덫에 걸린 한 마리 불나방인 것이다.’ 이이첨은 균의 처형을 서둘렀다. 옥에 갇힌 지 보름 만에 국문도 받지 않은 채 서소문 밖 저자거리에서 거열형으로 사지가 찢겨 죽었다. 조선의 개혁자는 그렇게 죽어갔다.
명나라와 후금의 전면전쟁이 중화에 번져 당장 조선에도 전운이 느껴졌다. 명나라에서는 지원병 요청을 강력히 요구해 왔다. 나는 그 일로 하여 하루에도 몇 차례씩 종적을 감추고 노심초사했다. 아비 선조도 율곡의 십만양병설이나, 황윤길 수신사의 침략설을 믿지 않더니 후일 의주까지 피난을 가고 나를 앞세워 전쟁터를 누비게 하였는데, 왜란을 겪은 나로서도 균의 말을 실행에 옮기지 못함이 통탄스러웠다. 하긴 명(明)에 기댄 사대부들의 막힌 머리를 내가 어찌 뚫을 수 있으랴만. 조정 신료들은 오로지 명나라 신봉자들뿐이었다.
이 일로 나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나와 명나라와는 세자시절부터 앙숙이었다. 세자책봉문제도 나를 엄청 열 받게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명나라는 지는 해요, 후금은 뜨는 해다. 그런 면에서 균과 나는 통했다. 이놈들은 지금 나를 패륜을 저지른 패군으로 몰아가고 있다. 나의 측근들이 명나라 파병문제를 놓고 한자리에 모였다. 정인홍을 비롯하여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 그리고 군사기밀을 탐지해 온 홍문관 교리 이금이 자리를 함께 했다.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부자지간의 관계다. 사대사상은 조선조정에 허울 좋은 명분을 주어 입만 열면 ‘명나라가 왜란이 일어났을 때 온갖 지원을 다해 주지 않았는가. 의리로 봐도 후금과의 교류는 어불성설이다.’ 명나라 파병과 후금의 교류를 놓고 대북과 소북의 대립이 격해 졌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실리외교가 절실한 때다. 명분이 아니라 교류를 통해 입지를 다지는 게 더 중요하다. 나는 명나라를 증오한다. 명나라는 나에게 비판적이었다. 세자책봉을 허락하지 않은데다 등극 후에도 임해군을 핑계로 여러 차례 애를 먹였다.
임란 이후 노골적인 내정간섭에 시달려온 나는 후금에게 호감을 가졌다. 돌아가는 대륙의 정세를 보더라도 명나라가 후금을 토벌할 힘이 없어 보인다. 명분보다는 확실한 보장이 실리외교다. 정인홍이 나의 의중을 제대로 살폈다. 박승종은 반발의 목소리가 높다. 절충을 해서 비변사와 병조의 협의를 거쳐 명나라 파병이 정해졌다. 병조참판 강홍립을 5도 도원수로 임명하고 평안병사 김경서를 부원수로 삼았다. 5도에서 군사 2만 명을 징발했다. 나는 강홍립을 독대했다. 나는 일렀다. “도원수, 우리 군사를 희생시키지 마오. 싸움이 불리해지면 후금과 통하시오. 짐짓 싸우다 화의를 이루시오.”
나의 아비 선조는 전쟁기간 동안 15차례나 양위파동을 일으켰다. 1592년 4월 13일 전쟁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나를 세자에 앉히고 피난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민심은 나의 아비가 가는 곳곳마다 민란이 일어났다. 결국 그 대책으로 신하들은 한 때 아비의 하야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내 후대에 와서도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란 작자는 대전으로 피신을 하고도 서울에 남아 있는 것처럼 거짓 선동을 가했으며 멀쩡한 다리를 폭파해 선량한 백성을 수장 시켰다고 한다. 그러고도 국부로 인정받고 있다니. 얼마 전에는 가정하나 제대로 못 다스리는 서세원이라는 정신병자가 이승만 영화를 만들어 1000만 관객을 목표로 한다니 참 속에서 천불이 날 일이다. 빙신 같은 놈.
역사는 어차피 반복한다. 2014년 4월에도 진도의 팽목항에서 무고한 학생과 시민 300여명이 눈을 빤히 뜨고도 수장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도올 김용옥이라는 기개 있는 선비는 현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나의 아비는 스스로 양위를 선언하면서 흐트러진 민심을 추스르려 하는데, 그것을 밥 먹듯이 했다. 아비는 나를 대타로 세웠다. 종묘사직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나를 세워 자기 몸을 지키려 했다. 요즘은 메르슨가 뭔가가 기승을 부린다. 쉬쉬하다 단번에 퍼져 곤욕을 치른다. 그네는 계속 흔들린다. 바다에서, 육지에서, 병원에서.
조선은 200년 동안 외침이 없었다. 그런데 임진년, 왜의 침략은 정신적 공황상태로 몰기에 충분했다. 그리고는 그 화살을 나의 아비에게 쏟아 부었다. 나의 아비는 전쟁책임을 이산해에게 덮어 씌었다. 지금의 대통령은 국무총리의 사표로 막으려 한다. 제대로 된 총리가 없다. 벌써 몇 명 째인가. 나의 아비는 후궁의 치마폭에 휩싸여 정치적 기교만 부리며 동인을 쓰다 심심하면 서인을 쓰고, 이러길 반복했다. 조선의 당파적 갈등을 가장 먼저 부추긴 왕은 다름 아닌 나의 아비 선조였다.
나의 아비는 발 빠르게 평양까지 잽싸게 도망을 가셨다. 그리고는 종묘사직을 구한다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나와 함께 정부를 둘로 나누는 분조(分朝)를 취했다. 나라를 상징하는 사직(社稷)을 나에게 주며 여차하면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복안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신하들이 전부 나에게 붙어 버린 거다. 아비는 참담했다. 유학 송희록이 ‘임금은 이제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상소를 올렸다. 아비는 성격이 급하고 변덕이 심했다. 그리고 평생을 콤플렉스를 안고 살았는데, 그 이유가 적통승계가 아닌 방계혈통이라는 거다. 곧 명종까지는 그 아비에 그 아들로 이어져 왔던 것이 선조의 아비는 덕흥대원군으로 적통이 아닌 방계였다. 그 뒤로 철종과 고종이 아비처럼 방계에 의해 추대 되었다. 신하들의 꼼수에 의해서 말이다.
내가 월희를 꼬셔 그와는 떡을 치고 아비에게 떡을 먹이게 한 이유다. 아비는 자기의 입지가 좁아질수록 나를 미워했다. 나는 전쟁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의병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자신의 무능을 괴로워하기보다 아들의 유능함에 나를 더욱 멀리하며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달려와 해주 행궁에 엎드려 석고대죄를 했다. <아비보다 잘난 것이 죄라면 죄다>라는 민심을 등에 업고서 말이다. “신은 본래 용렬하고 학식이 없어 장성하긴 했으나 덕이 없습니다. 그리고 분수 넘게 세자가 된 뒤로 능력을 감당하지 못해 밤낮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몇 날을 엎어져 사죄했다. 제기랄.
나는 지금도 나의 하야가 억울하다. 무능한 아비와 내 뒤의 또 무능한 군주인 인조, 이놈은 남한산성에서 항복하고 청나라에 대가리 피가 나도록 엎어진 무능한 군주가 아닌가. 무능한 신하가 무능한 왕을 추대해 보인 추하기 짝이 없는 역사의 한 단면이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지금도 그 나물에 그 밥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겠지? 그놈도 나라를 잃을 번하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볼모로 잡히게 하고 그도 모자라 돌아온 세자를 독살하지 않았던가. 모자란 왕들은 오래도 버티고 오래도 살았다. 선조와 인조는 가장 무능한 존재들이다. 내 앞과 뒤는 그런 놈들이 오래도록 왕 노릇을 해 먹었다. 똑똑한 왕들은 신하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자기 밥그릇에만 욕심을 가지는 무능한 신하들은 지금도 도처에 존재한다. 성완종 게이트로 이름을 알린 8인의 용사들도 메르스의 덕에 조용히 원위치로 복귀해서 소리 없이 잘 산다. 에이 메르스 보다 못한 존재들이여.
1623년3월13일 삼경 무렵, 반정을 도모한 무리들이 홍제원에 집결했다. 반정의 주도세력은 이귀, 이시백, 이시방, 최명길, 장유, 심기원, 김자점 등 서인이었다. 그들은 나의 재임시절, 북인에 의해 권력에서 소외를 당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세력을 결집했다. 반정 군들은 세검정에서 칼을 씻으며 결의를 다졌다한다. 그들은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 곧바로 창덕궁에 이르러 나의 정권을 타도했다. 무엄한 놈들 같으니라고.
나의 아비에게는 8명의 부인이 있었다.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에게는 불행이도 자식이 없었다.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과 정명공주를 낳았다. 유일하게 정비의 아들이라 아비는 영창을 총애했다. 늘 목에 가시 같은 존재였으나 나는 기필코 어린 아우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나의 친형 임해군 역시 충직한 신하인 이이첨일파에 의해 살해된 것이지 나의 죄는 아니다. 나의 어미는 공빈 김씨로 임해 형과 나를 낳았다. 나를 제거하고 왕이 된 능양군 인조의 아비는 인빈 김씨 소생의 정원군이다. 그의 형이 한때 나를 제치고 왕이 될 뻔했던 신성군이다. 하지만 그는 임진왜란 중에 병으로 죽었다.
여자는 요물이다. 월희는 나를 왕으로 만들었지만, 또한 반정군에 붙어서 나를 현혹했다. 술에 취한 나는 허겁지겁 도망쳤다. 그리고 폐주가 되었다. 대비는 나를 죽이라고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그래도 능양군은 한때의 지존이자 3촌인 나를 살려 주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옥쇄를 받들어 서둘러 즉위식을 올려 허둥지둥 치른 대관식으로 나를 왕에서 하야시켰다. 강화도로 유폐된 나는 3년을 버텼다. 그 후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다시는 궁궐로 돌아 올 수 없었다. 밖엔 바람이 분다. 마음이 어지럽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떠나려 한다. 균을 만나야지. 못다 한 이야기는 둘이서 소주나 한잔 하면서 삼겹살에 쌈이나 싸 먹으면서 해야겠다.
아내 유 씨는 강화도로 떠나는 뱃전에서 목숨을 끊으라고 요구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언젠가는 다시 기회가 와서 궁궐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했다. 교동에 내렸다. 위리안치된 나의 아들 지는 땅굴을 팠다.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발각 되었다. 그리고 죽었다. 며느리 박씨도 남편인 아들을 따라 바다에 투신했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은 아들이 묵었던 방에서 목을 매었다. 스스로 자살을 한 것이다.
나는 울었다. 피눈물을 쏟았다. 나에게 부인이 10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서 난 자녀는 정실부인인 유 씨에게 난 폐세자 지가 유일하다. 나는 이제 혼자다. 나는 다시 제주도로 유폐되었다. 19년을 더 살았다. 나의 이름은 혼이다. 아! 혼이라도 살아있다면 못 다 이룬 외교군주의 패기로 지금이라도 중국과의 실리외교를 다시금 펼치고 싶다. 요즘 나를 다시 재조명하는 작업이 한창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재평가됨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나 지나간 역사는 다 부질없는 지나감의 역사다. 다만 그것을 교훈으로 삼아 반복하지 말았음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런데, 역사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지,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