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2] 최봉춘(崔奉春) - 일본 개척의 감회 7. 창립예배를 올리면서 - 1
1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은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인 크리스찬 시미즈(淸水)씨를 만나면서부터다. 그는 웅계사(雄鷄舍)라는 시계포를 경영하고 있다.
2 어쩐지 여기를 근거지로 전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곧 신생운동 쪽 일은 그만두고 시계포 일을 거들었다. 아침에는 자동차 회사의 월부 판매를 하고 하오엔 영화관의 시계 스폰서 계약을 했으며 밤엔 영화관의 시계를 수리하는 일도 했다.
3 이렇듯 초기엔 전도 시간을 가질 수 없었으나 얼마 후부터는 상오 간에만 일을 하고 그 낮에는 전도를 할 수 있었다. 목사, 학생, 일반 교인 닥치는 대로 접촉하며 말씀을 전했다.
4 일본 복귀도 하루빨리 성취해야겠다는 조바심에서 하오에는 웅계사(雄鷄舍) 2층에서 원리 강의를 하게 됐다. 첫번째 밤에 4명이 찾아왔다. 계속 이마만큼이라도 왔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들으러 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5 1959년 12월 2일 하오 7시 15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동경교회라는 이름으로 첫 예배를 보게 됐다. 전단지에도 똑같은 명칭을 찍어 일본 땅에 처음으로 이름을 드러냈다.
6 시미즈씨의 사회로 내가 설교를 함으로써 일본 통일교회 역사의 제1보를 내디딘 것이다. 이날 신학생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모일 예정이었지만 나를 비롯해서 시미즈씨, 스다(煩田)씨, 다무라(田村)씨 4명뿐이었다.
7 어느새 세월은 흘러 1960년을 맞게 됐다. 내가 일본 땅에서 전도의 말씀을 뿌리기 시작한 지 어언 수개월이 지났지만 참된 열매는 하나도 얻지 못해 마냥 걱정스럽고 초조할 뿐이었다.
8 그러한 때에 한국 부인 조정도(曺正道)씨를 만나게 됐다. 이분은 뿌리 깊은 기독신자로서 그 신앙이 매우 독실했다. 원리를 듣고 그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완벽한 교리라는 데 놀라워했고, 전통적 신앙과는 크게 다르다는 데 크게 충격을 받았다.
9 그는 이 새로운 원리와 신앙을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 놀라운 말씀을 가볍게 떨쳐버릴 수도 없어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는 주위의 반대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입교를 결심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