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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좋은 전시 발견하는 방법
이제 좋은 전시회 기준과 취향을 찾기 위한 준비는 되었다.
그렇다면 직접 미술관에 찾아가기 전에 좋은 전시를 알아보고 방문할 방법은 없을까?
물론, 심도 시작한 초심자가 공개된 포스터나 정보만 보고 사전에 좋은 전시를 판독해 내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서 소개한 탤컷 파슨스의 미적 인식 능력의 발달 단계에서 자율성의 단계, 즉 최고 수준의 안목을 갖고 미술관을 찾는 데까진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이는 단순히 많은 전시를 본다고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많은 정보를 읽었다고 도달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오랜 시간을 투자해 전시를 보고 사유하 며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이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한 정보를 탐독 및 수집해 봐야 하며, 그 과정들이 서로 융합되어 자신만의 취향과 비평이 생겼을 때 비로소 미술을 즐기는 안목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심자인 우리는 그렇게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자신이 없으니 포기해야 하는 걸까?
혹시라도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다면 마음을 편치 갖고 걱정은 적어두길 바란다.
지금부터 미술계에서 20여 년간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현업 도슨트로서 탤컷 파슨스의 미적 인식 능력 발달 단계를 적용해 좋은 전시를 찾는 방법을 공유해 보겠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상대적으로 익숙한 문화생활인 영화감상을 예로 들어보겠다.
거리에서 혹은 온라인에서 우연히 시선을 끄는 영화 포스터를 발견됐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그 호기심의 시작은 제목이나 포스터 디자인에서 오는 직관적인 느낌에 의한 반응일 것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1단계 천성적 애호의 단계에 해당한다.
더 호기심이 생긴 경우 주연 배우를 포함한 출연진이 누구인지를 영어 선택의 기준에 두는 경우도 있다.
좋아하는 외모를 가진 배우나 훌륭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이 포진되어 있다면 아무래도 더 믿음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쉽고 빠르게 판독되는 표면적 정보로 대상을 파악하는 2단계, 즉 아름다움과 사실성의 단계로 분류할 수 있겠다.
좀 더 신중하게 영화를 고르는 성향이라면 대략적으로 어떤 내용 혹은 어떤 주제의 영화인지 정보를 참고할 텐데, 이러한 과정을 대상에 대한 관심과 이해로 자신의 취향이 발현되기 시작하는 표현의 3단계로 정의해 보자.
보통의 경우라면 이 정도의 정보 수집 상태에서 영화관 방문 의사를 결정하고 영화를 직접 감상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 진심인 영화광이라면 이 영화의 감독이 누구인지, 원작이 있는지, 시나리오는 누가 썼는지, 더 깊게는 촬영 감독이나 음악 감독까지 확인한 후 확신을 갖고 영화관으로 향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세부 정보와 연출 능력 등을 통해 대상을 파악하는 4단계, 매체*형태*양식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5단계인 자율성의 단계가 이 모든 것을들을 누적해서 경험하며 명확한 기준과 취향, 안목이 생겨서 앞선 정보들을 통해 스스로 비평할 수 있는 전문가나 비평가의 영역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그대로 전시 선택에 대입하면 좋은 전시를 찾고 즐기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다.
자, 동일한 예시로 거리나 온라인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빅토르 바자렐리-반응하는 눈, 전시 포스터를 우연히 발견했다고 상상해 보자.
우선 아무런 정보 없이 포스터에 들어간 대표적 이미지를 봤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멋지다.' '색이 이쁘다.' '잘 그렸다.' '디지털아트 같다.' '뭔가 취향이 아니다.' 등 어떤 의견이라도 좋다.
만약 어떤 형태로든 호기심이 생겼다면 전시의 주인공인 빅토르 바자렐리가 어떤 예술가인지 체크해 볼 것이고, 그 외 어떤 작품이 전시되는지 혹은 다른 예술가의 작품도 같이 전시되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여기에 이 전시가 어떤 주제의 기획 전시인지, 즉 작가의 인생을 소개하는 연출인지 혹은 미술사의 흐름에 맞춰 미술 작품의 변화를 보여주는 기획인지, 또는 특별한 주제나 연출 없이 다양한 작품을 걸어 놓기만 하는 전시인지 등 전시 구성 정보까지 확인하고서 관람 여부를 결정했다면, 이미 1~3단계를 수행한 것이고 전시를 즐기는 애호가로서 기본을 다 지켰다고 할 수 있다.
미술 전시들은 보통 기획의 방향성이나 주제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 제목을 지으려 노력하기 때문에 빅토르 바자렐리-반응하는 눈은 빅토르 바자렐리 한 명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개인전이고, 그의 작품 가운데 눈의 반응과 관계된 것들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제목이 모두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도는 앞선 영화 선택의 예시와 마찬가지로 전시를 몇 차례 관람해본 적 있다면 누구나 생각보다 쉽게 알고 체크할 수 있다.
여기에 전시를 선택할 때 실패 확률을 좀 더 줄여주는 4,5단계의 노하우를 덧붙이자면, 감독 즉 전시를 누가 만들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전시는 누가 이 전시를 만든 총괄 감독인지 외부에 공개된 정보만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전시를 많이 즐기다 보면 이를 알아낼 수 있는 감식안이 생기는데, 사실 매우 간단한 방법이다.
바로 포스터 하단부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시 포스터 하단부(상단부에 표기되는 경우도 있음)에는 주최*주관사를 표기하여 전시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기관 혹은 기획사가 어디인지 알려주고 있다.
빅토르 바자렐리-반응하는 눈의 포스터를 보면 오른쪽 하단부에 주최는 가우디움 어소시에이츠, 경향신문이, 주관은 지에이아트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세 개의 기관 중 어느 곳이 전시 기획과 연출을 직접적으로 했는지는 현장에서 도록 마지막 장에 있는 참여 인력 및 내용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포스터만 보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미술 전시를 많이 봤거나, 미술계를 좀 아는 애호가라면 미술 전시업계에서 경향신문은 보통 CJ나 디즈니처럼 전시 제작 지원을 하는 제작사의 역할을 주로 한다는 걸 알고 있고, 가우디움 어소시에이츠가 작품을 섭외하고 기획을 하는 기획사의 역할을, 지에이아트가 가우디움 어소시에이츠의 자회사로서 현장에서 전시 운영을 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전시를 기획한 감독이 누군지 알아냈다면, 감독의 전작들을 알아보면 된다.
지속적으로 전시를 선보여온 기획사라면 이름 검색 및 기획사 홈페이지를 통해 그동안 선보여온 전시 포트폴리오를 확인해 볼 수 있을텐데, 예로 든 가우디움 어소시에이츠의 홈페이지에 방문해 보면 2017년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2019년 매그넘 인 파리-문득, 파리. 눈앞의 파리, 2021년 앙리 마티스-라이프 앤 조이, 2023년 라울 뒤피-색채의 선율 등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서양 미술 대가들의 원작을 국내에 꾸준히 선보여온 전시 기획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이들 중 직접 감상한 전시가 있고 그 경험이 좋았다면, 이번 전시 역시 정성껏 구성했으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치 '봉준호 감독 영화는 믿고 본다!'라는 심리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종종 포스터 상*하단부에 주관 및 주최사를 표기하지 않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런 경우 전시가 진행되는 미술관의 홈페이지 및 티켓을 판매하는 사이트의 전시 상세 정보 하단부를 보면 주관*주최사뿐만 아니라 투자사나 협력사, 후원사까지 확인 가능하니 방문 전에 확인해볼 수 있는 정보는 생각보다 많다.
이제 중요한 건 반복과 숙달이다.
위의 정보들을 한눈에 빠르게 판독하기 위해선 그만큼 많은 전시를 보고, 좋았던 전시 혹은 나빴던 전시를 기억해 해당 전시를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차근차근 시간과 경험을 쌓아 가며 나만의 빅데이터를 갖게 되었을 때, 자신의 취향에 맞는 좋은 전시를 발견하고 감상할 수 있는 기회 역시 자연스럽게 늘어간다.
만약 반복과 숙달에 시간을 들일 자신이 없다면, 다양한 전문가와 애호가가 운영하는 전시 리뷰 사이트나 페이지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 역시 토커바웃아트란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는데, 미술계 종사자들의 설문을 통해 볼 만한 전시와 미술관을 데이터화해 추천하는 'What's on'이란 카테고리를 선보이고 있으니 참고해봐도 좋을 것이다.
작품이 많으면 좋은 전시일까?
국내에서 진행되어 온 전시들을 유심히 살펴보다 보면, '유명 미술관 소장품 200점', '대가의 원화 150점' 등 몇 점의 작품이 전시되는지를 강조하면서 홍보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모든 전시에서 같은 수준과 질의 작품이 전시되고 미술관의 입장료도 모두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면, 작품 수가 더 많은 미술관일수록 더 많이 보고 즐길 수 있으니 더 좋은 평가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미술관이 영국박물관처럼 무료로 개방하면서 방대한 양과 고품질의 작품을 소장하여 선보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 만큼 '많은'이 '좋은'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전시 작품이 많다고 할 때 많다는 것의 기준도 천차만별이다.
영국박물관은 약 800만 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고 그중 8만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으며, 루브르 박문관은 50만 점 이상의 소장품 중 3만 5000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공개되어 있다.
국내의 경우 국립중앙박물관은 150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그중 1만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은 근래 이건희 컬렉션 기증을 받으면서 1만여 점의 현대미술품을 소장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규모가 큰 미술관은 보통 수만여 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기에 사실 수백여 점의 작품이 전시된다는 게 결코 많은 작품이 전시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초대형 미술관들의 경우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선 하루 이틀 투자하는 것으론 부족할 정도로 전시 작품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내의 미술관에서 대중적인 기획 전시를 진행할 때 수백여 점의 작품이 전시된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보통 작품들을 해외나 다른 공간에서 대여해 오는 경우가 많고, 한정된 규모의 기획 전시실에서 일정 기간 동안만 선보이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작품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국가간의 외교적 목적이 있거나 큰 자본이 투자된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면, 해외 대형 미술관이나 유명 작가의 대표작이 국내에 대여되어 들어오는 경우는 희박하다.
국내에서 루브르 박물관 전시가 이뤄진다고 한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들어오는 일은 웬만해선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미술관 방문 전에 꼭 확인해야 할 요소는 '어떤 작품'이 '얼마나' 전시되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전시 작품의 개수가 적어도 유명 미술관이나 해당 작가를 대표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작품이 한 점이라도 전시된다면 충분히 관람할 가치가 있다.
또 마스터피스급의 대표작은 전시되지 않아도 훌륭한 완성도를 가진 주요 작품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면 역시 전시를 관람할 이유가 충분하다.
예를 들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되었던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영국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은 '영국 내셔널 갤러리를 대표하는 52점의 명화를 선보이는 국내 첫 전시'라는 홍보 문구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런데 막상 내셔널 갤러리는 2600여 점의 회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기에 국내에 소개된 52점의 작품은 내셔널 갤러리 소장 작품의 2% 수준에 불과하다.
더불어 내셔널 갤러리를 대표하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암굴의 성모>, <대사들>, <해바라기> 등 미술사의 상징적인 작품들이 대여된 것도 아니었기에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직접 방문했을 때 느끼는 감동과 압도감을 기대한 이들에겐 아쉬움이 남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라파엘로, 렘브란트, 마네, 모네, 반 고흐 등 여러 대가들의 작품이 드로잉이나 판화가 아닌 유화 원화로 국내에서 전시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절대다수의 관람객에게 호평을 받기 충분했다.
또 다른 예로 2024년 인천 파라다이스 아트스페이스에서 진행되었던 [뱅크시&키스 해링] 전시를 들 수 있다.
이 전시는 20세기와 21세기를 상징하는 스트리트 아티스트 두 명의 작품 32점으로 구성 되었는데, 2018년 소더비 경매에 출품되어 15억 원에 낙찰된 직후 절반이 파쇄되며 이슈가 되었다가 2년 반 후 다시 경매에 출품돼 300억 원에 재낙찰, 21세기 최고의 이슈작 중 하나가 된 <풍선과 소녀>(이후 <풍선 없는 소녀>로 제목 변경)가 원화로 전시된다는 것만으로도 현대미술 애호가라면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었다.
심지어 입장료까지 무료였으니 만족도가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감상의 재미나 감동을 주지 못하는 저품질의 작품 수백수천 점이 있는 전시보단, 직접 관람할 가치가 있는 좋은 작품이 소수 정예로 구성된 전시가 나을 수도 있다.
단, 이 말이 판화나 드로잉, 사진, 미디어아트 전시가 나쁜 전시라고 이야기하는 건 절대 아니다.
다양한 판화를 연구하며 《재즈》라는 아트북을 통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한 앙리 마티스, 다채로운 석판화 기법을 통해 거리의 포스터 및 삽화의 새 지평을 열었던 툴루즈 로트레크,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판화를 찍으며 목판화 기법을 연구한 에드바르 뭉크, '결정적 순간'이라는 용어를 통해 20세기 사진 미학을 정립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프랑스의 레보드프로방스에 선보인 빛의 채석장처럼 미디어로 재해석된 대가의 작품을 성공적으로 선보인 사례 등 주어진 콘텐츠를 훌륭히 소화하여 감상할 가치가 있는 전시공간을 구성하는 예시는 많다.
결국 작품의 개수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과 기획의 조화인 것이다.
유명한 연기파 배우가 주연을 맡고 뛰어난 조연들이 재미를 더하며, 훌륭한 감독이 이를 조화롭게 연출했을 때 최고의 영화가 탄생하듯, 앞서 언급된 좋은 전시를 찾기 위한 요소들을 나에게 맞게 체득하여 양질의 작품과 기획, 운영,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시를 찾는 나만의 안목과 기준을 가지길 바란다.
미술관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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