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우리나라 가수 김수희 씨가 부른 “멍에”란 노래가 있었다. 노랫말에는 멍에란 단어는 한 번도 안 나오는 데 제목이 멍에라서 참 이상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노래 가사의 내용이 사랑에 대한 것이었고 사랑은 상처를 남기는 멍에라는 뜻이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사랑은 멍에가 맞는다. 사랑은 또 다른 책임을 수반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멍에를 지는 것이다.
멍에란 나쁜 것이 아니다. 멍에는 축복이다. 그래서 결혼하고 멍에를 메는 사람에게 축하하고 행복을 비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멍에란 일을 하기 위해 지는 것인데 주님은 오히려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하신다. 우리가 지고 따를 멍에란, 십자가의 멍에, 사랑의 멍에가 아니겠는가? 멍에를 지는 것은 분명 더 많은 제약과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된 자유와 쉼과 행복이 동시에 보장되어 있다.
레위기 21장은 제사장과 대제사장에 대한 규례가 나온다. 그들은 남들보다 더 큰 멍에를 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삶에 제한도 훨씬 많았다. 일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었고 대제사장은 일반 제사장이 할 수 있는 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었다.
(레 21:4)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레 21:8)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레 21:10) 자기의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를 풀지 말며 그의 옷을 찢지 말며 (레 21:11)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
그들은 아무나하고 결혼할 수도 없었다. 가족이 죽어도 함부로 슬퍼할 수도 없었으며 성소를 떠나서도 안 되었다. 그들은 백성들의 본이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구별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멍에를 멘 사람으로 그의 모든 선택과 행동의 반경이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만이 누리는 특권이 있었다. 오직 제사장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 성소에 들어가서 오직 그들만이 거룩한 성구를 만지고 하나님 영광의 빛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일반 사회에서 고위 공직자가 되거나 혹 종교인으로 목회자가 되거나 또한 신앙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멍에를 메는 것과 같다. 남들에게 흉이 안 되는 것이 흉이 될 수 있고 또한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누리면서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결혼하고도 아무 사람이나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성경은 말한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제사장들은 죽음으로부터 부정하게 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가족의 초상에도 참여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생명이 넘치는 부활과 용서를 경험했고 자신들의 영역인 성소를 떠날 수 없었지만 언제나 은혜 넘치는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었고 아무나 하고 결혼할 수 없었지만 순결한 아내를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의 사랑의 메인 자발적인 십자가의 포로들이다. 과거 죄악의 사슬에 메여 있을 때 우리는 지금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마음대로 하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과거에 할 수 없었던 더 많은 사랑의 일들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그리고 마음에 참된 쉼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따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에 치중하지 않고 우리에게 넘치는 특권에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과 넘치는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하시고 그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십자가의 포로가 되어 사랑의 멍에를 메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일꾼들 되게 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