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연습 오영수
밤새워 뒤척이며 쓴 글들이 하늘의 별이 되지 못하고 별똥별로 사그라질 때 방안엔 입산을 만류하는 운무처럼 담배 연기만 가득했다 아이들이 쓰다 버린 노트에 언어를 가득 파종해도 시 대신 꽁초로 쌓이던 밤은 몇 박스나 될는지 문우의 노트에서는 꽃이 뜨고 별이 피고 시냇물이 지저귀는데 내 노트에는 해동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청년을 송두리째 헌납하고 중년도 파해갈 무렵에야 시 뿌리 하나 겨우 캐낼 수 있었다 그걸로 오래된 허기를 추스르긴 어려웠지만 그렇게나마 얻은 싯줄로 이름표를 달았을 때 아무도 내 시를 읽어주지 않았다
오영수의 「시인연습」은 시를 쓰는 행위에 대한 단순한 고백이나 문학청년의 낭만적 자의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작품은 ‘시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긴 좌절과 자기소모, 그리고 침묵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일인가를 처연하게 증언하는 메타시(meta-poetry)이다. 특히 이 시는 문학적 성공이나 등단의 환희보다도, 시를 향해 자신을 소진해 가는 존재의 고독을 전면에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성숙한 시적 깊이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시의 미덕은 ‘시인의 탄생’을 찬란한 개화의 순간으로 그리지 않는 데 있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의 문학적 시간을 실패와 미완, 침묵과 무명의 연속으로 제시한다. 첫 연부터 그러한 정조는 강하게 드러난다.
“밤새워 뒤척이며 쓴 글들이 하늘의 별이 되지 못하고 별똥별로 사그라질 때” 여기서 ‘별’과 ‘별똥별’의 대비는 이 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상징이다. 별은 영속성과 도달의 이미지다. 반면 별똥별은 순간적으로 타오르다 사라지는 소멸의 존재다. 시인은 자신의 글이 문학의 하늘에 항구적으로 남지 못하고, 찰나의 불꽃처럼 사라져 버리는 운명을 절감한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실패가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체험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뒤이어 등장하는 “입산을 만류하는 운무처럼 담배 연기만 가득했다”는 표현은 탁월하다. 담배 연기는 단순한 생활적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길을 잃은 정신의 안개이며, 문학으로 들어가려는 자를 끝없이 망설이게 하는 회의의 형상이다. 둘째 연에서는 시 창작의 노동성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이들이 쓰다 버린 노트에 언어를 가득 파종해도 시 대신 꽁초로 쌓이던 밤은 몇 박스나 될는지” 이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다. 시인은 언어를 ‘쓴다’고 표현하지 않고 ‘파종한다’고 말한다. 이는 시 쓰기를 농경적 노동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언어는 씨앗이고, 시인은 그것을 버려진 노트 위에 뿌리는 농부다. 그러나 수확은 시가 아니라 “꽁초”다. 이 전환은 처절하다. 창작의 결과가 작품이 아니라 소모의 잔해라는 사실, 즉 시 쓰기가 결국 자기 연소의 과정이라는 인식이 응축되어 있다. 특히 “몇 박스나 될는지”라는 표현에는 자조와 체념이 동시에 스며 있다. 청춘의 시간은 작품집이 아니라 담배꽁초의 분량으로 계산된다. 셋째 연은 시인의 내면적 열패감을 보여준다.
“문우의 노트에서는 꽃이 뜨고 별이 피고 시냇물이 지저귀는데 내 노트에는 해동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자연 이미지의 사용이다. 문우들의 노트에서는 꽃과 별과 시냇물이 살아 움직인다. 즉 그들의 언어는 이미 생명성을 획득한 상태다. 그러나 화자의 노트는 아직 “해동의 기미”조차 없다. ‘해동’이라는 단어 선택이 절묘하다. 이는 단순한 미완성이 아니라 얼어붙은 상태를 의미한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가 아직 생명의 온도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이 대목은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비교와 좌절, 그리고 자기혐오의 시간을 매우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 시의 진정한 깊이는 후반부에서 드러난다.
“청년을 송두리째 헌납하고 중년도 파해갈 무렵에야 시 뿌리 하나 겨우 캐낼 수 있었다” 여기서 시는 단순한 습작기의 회고를 넘어 존재론적 차원으로 이동한다. 시인은 문학을 위해 일부 시간을 바친 것이 아니다. 그는 “청년을 송두리째 헌납”했다. ‘헌납’이라는 단어는 매우 비장하다. 이는 자발적 희생이면서도,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함축한다. 더욱이 중년이 “파해갈 무렵”이라는 표현은 세월의 침식을 실감하게 만든다. 시인은 젊음을 잃고 난 뒤에야 겨우 “시 뿌리 하나”를 캐낸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꽃이나 열매가 아니라 ‘뿌리’라는 점이다. 즉 그는 이제야 시의 근원 가까이에 겨우 닿았을 뿐이다. 이 겸허함이야말로 이 시를 더욱 깊게 만든다. 마지막 연은 이 시의 백미다.
“그걸로 오래된 허기를 추스르긴 어려웠지만 그렇게나마 얻은 싯줄로 이름표를 달았을 때 아무도 내 시를 읽어주지 않았다” 이 결말은 처연하면서도 숭고하다. 시인은 마침내 자신에게 ‘시인’이라는 이름표를 달지만, 세계는 그를 외면한다. 여기에는 문단 현실에 대한 서늘한 인식도 배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끝내 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정받지 못해도, 읽히지 않아도, 그는 끝내 자신의 허기를 시로 견디려 했다. 「시인연습」은 결국 시인이 되는 과정에 관한 시가 아니라, 시를 통해 자신을 소진해 가는 인간 존재의 기록이다. 이 작품은 화려한 수사나 과장된 감정보다, 오래 견딘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낮고 깊은 목소리를 지닌다. 그래서 이 시는 문학청년의 낭만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끝없는 불모지를 걸어온 한 인간의 생애 보고서처럼 읽힌다. 무엇보다 이 시가 감동적인 이유는, 시인이 자신의 실패를 미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끝내 “아무도 읽어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문장이야말로 이 시를 읽는 우리에게 오래 남는다. 왜냐하면 진짜 시인은 박수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끝내 쓰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