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교토 마지막 날이다.
은각사,철학의 길, 남선사를 갔다가
점심 먹고 교토를 출발,귀국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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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사온 고등어 초밥은)
(개봉해보니)
( 통고등어 말이 밥이다.)
(묘한 게 처음엔 약간 비린 듯 했으나 씹을수록 맛났다.)
아침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혼자 헤이안신궁을 다녀왔는데
(골목엔 아직 야마보코가 보이고)
(버스 기다리며 보니 380엔이면 밥,국,반찬.. 한끼는 먹을 듯..)
(버스는 정확하게 유도리 없이 그시간에 온다.무션 인간들..)
일단 가보니 신궁은 은각사,남선사 가는 길목에 있어
일찍 혼자 올 필요도 없었고...
어제 술이 덜 깼는지 한 정거장 미리 내려
신궁을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한참이나 돌아서 간다.
(멋진 소나무..신궁 정원쪽인가?)
헤이안신궁(平安神宮, 평안신궁)은
교토로 천도한 간무 덴노와
교토의 마지막 덴노인 고메이 덴노(메이지 덴노의 아버지)를
제신으로 모신 신사이다.
호족들 등쌀 피하려 교토로 천도했고
승려들 등쌀 땜에 교토를 떠나 동경으로 천도한 것..
1895년 헤이안천도 1100주년 기념 박람회를 열 때
헤이안천도 당시의 궁을 5/8로 축소하여 만들었는데
(원래 황궁)
응천문과 대극전,백호루와 창룡루만 복원하여..
(헤이안 신궁)
신문은 응천문, 외배전은 대극전,
백호루와 창룡루는 신원으로 통하는 출입구로 삼았다.
그리고 대극전 뒤에 내배전과 본전을 지었다.
박람회가 끝난 후 간무 덴노의 신궁이 되었고
1940년 고메이 덴노의 신체를 합사하였다 한다.
(응천문)
(거대한 도리이)
원래 궁의 5/8로 축소하여 지었다는 데도
크기가 어마하다.
응천문에서 300m 떨어진 곳에 대형 도리이가 보이는데
여기서 박람회를 하였던 모양..
(테미즈야-참배 전 손과 입을 씻는 곳)
(문에서 본 외배전과)
(도리이)
(백호루-외배전인 대극전-창룡루)
(백호루)
(대극전)
(창룡루)
신전 정원(신원) 출입구인 백호루와 창룡루는
우지의 평등원을 참고했다 한다.
(정원은 아직 문을 안열음)
(씻는 곳이 경내에도 있고)
(대극전 좌우에는 문신과 무신의 상징- 귤과 벚꽃 나무가 있다.)
(오마쿠지를 묶어 놓은 나무)
오마쿠지란 제비뽑기식 점을 친 점괘이다.
길한 것이면 몸에 지니고 흉한 것이면 신사의 나무에 묶어둔다고.
그러면 신이 알아서 처리해준다고..
(모래마당)
숙소로 돌아가 체크아웃하면서 짐을 맏긴 다음
다시 버스를 타고 은각사 쪽으로 간다.
(숙소 근처 빵집)
원래는 은각사를 갔다가 남선사까지
철학의 길을 걸을 예정이었는데
은각사 근처의 유명한 우동집에서 점심을 먹자하여
남선사 부터 들린다.
(노무라 미술관- 문 안열었다.)
(영관당-단풍과 뒤돌아보는 불상이 유명한데 유로이다...패스)
원래 이곳은 고사가 덴노의 별궁이였는데 절로 바뀌어서
북쪽 구역은 정토종인 영관당, 남쪽은 임제종인 남선사가 되었다.
정토종의 정토사상은 자력이 아닌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
정토(극락)에 도달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타력신앙(他力信仰)이고,
임제종은 우리의 조계종과 같은 선종으로
참선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중시하는 자력신앙(自力信仰)이다.
임제종 남선사는 우리나라 고려대장경 수백 권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관당과 남선사 사이로 난 길로 들어가 우턴하면)
(칙사문과)
(방장이 나온다.)
방장의 정원과 장벽화가 유명하지만 유료이다.
입장료 내는 것은 은각사에서 하기로 하고
남선사는 삼문과 법당,수로각등 경내만 돌아본다.
(안내문.호조=방장)
(단풍이 들면 얼마나 이쁠고, 하지만 영관당 단풍이 여기보다 더 유명하다.)
방장에서 법당쪽으로 가면 좌측으로
로마시대의 것과 비슷한 수로가 보인다.
(비와호 수로각)
19세기 말 도쿄 천도 후 침체된 교토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비와호의 물을 교토로 끌어들여
수력발전과 식수 공급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수로이다.
(법당; 불전이 보인다.)
법당은 설교를 하는 곳인데 불전이 있다.
아마 상국사처럼
불당이 소실되어 부처님을 법당에 모신듯..
(갑자기 진지한 모드..법당앞 향로에서 뭔 기도를?)
임제종 6가람 배치에 의하면
법당과 삼문 사이에 불당이 있어야 하는데
불당이 사라져 법당에서 그냥 삼문이 보인다.
남선사 삼문은 교토 3대 삼문중의 하나로
올라가서 보는 교토 전망이 좋아서.. 일본 가부키에도
대도둑인 이사카와 고에몬이 처형되기 전 삼문에 올라
'절경이로다, 난젠지 삼문이여'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삼문도 유로)
(갈길이 바쁘니 사진 찍고 출발)
대적문으로 나와 영관당 앞으로 가서
철학의 길을 따라 간다.
(수로)
철학의 길은 일본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산책하던 길이라 하는데
은각사~남선사 사이의 약 2km 수로를 따라 난 길이다.
(마당에 무궁화를 심어 놓은 집의 강쥐)
(막내가 벼르던 요지아 카페 본점은 휴업중)
(니시다 기타로 시비)
(우리 아파트에도 피었던데.. 무궁화)
(요지아 카페는 못들어 갔지만 오멘 우동집은 들어간다.)
(50년 전통..)
(우동면을 양념 간장에 담갔다가 먹는데..)
(여름에는 냉우동을 추천.. 더운 것 먹고 땀이 나서 혼남)
철학의 길은 은각사교에서 끝난다.
(붐비는 은각사 가는 길)
무로마치 시대로 들어가면서
그동안 축적된 공가문화에 중국의 선종 영향을 받은
새로운 무가 문화가 생겨났다.
그 것을 무로마치 문화라고 하는데
시기에 따라 북산문화와 동산문화로 나누어서
각자 대표로 금각사와 은각사를 들수 있다.
전기의 금각사에는 공가문화의 귀족적 우아함이,
후기의 은각사에서는 내면적 깊이를 지닌
선가의 기품이 나타난다고 한다.
특히 동산문화는 와비(侘) 사비(寂)와 유현(幽玄),등으로 표현되는
‘유한(有閑)한 정취, 조용하고 은근한 정취’, ‘깊고 오묘한 정취’가 특징인데
현재 대부분의 일본 문화나 의식주에 영향을 끼쳤다고...
은각사는 아시카가 요시마사 쇼군이
금각사를 만든 할아버지 요시미츠를 그리며 지은 별궁으로
그의 사후 절이 되었다.
관람 동선은 중문으로 들어가 방장 앞 정원을 보고
동구당 앞을 지나 뒷산의 이끼 정원을 둘러보고
은각 옆으로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총문)
(참도)
참도 양쪽은 동백나무 울타리인데,
동백나무 하단은 대나무와 치자 나무로 가려놨다.
(중문)
(향월대)
(은사탄)
(은각을 배경으로..)
(얼굴이 어두어서 다시 찍는데..아줌마가..)
(방장과 동구당 사이의 마당)
(동구당)
동구당은 요시마사가 거처하던 곳으로
다실 중의 최초의 다다미 다실로
초암다실(다다미 4장반,차가이다나,도코노마등이 있는)의
원조이다.
무로마치시대 다도의 거점이였던 여기서
쇼군이 사용하던 다도구를
히가시야마(동산)어물이라고 한다.
(동구당 앞 연못의 백학도)
(동구당)
(또 동구당..)
은각 못지않게.
아니 은각보다도 동구당에 눈이 자주 갔다.
(다리를 건너간다.)
(금경지의 대내석..말 그대로 안에 있는 큰돌이란 뜻?)
(무로마치 시대부터 있던 것이라고 한다.)
(세월천)
(동구당)
(변재천 사당)
(또..동구당)
변재천사당에서 뒷산으로 올라간다.
(은각)
(차의 우물, 요시마사가 이물로 차를 끓였다고..)
(그 옆 옛 정자 발굴터)
(이끼 정원)
(백사탄과 은각..)
(빨간 표시가 원폭 피해지역의 나무들 후손을 심어놓았다 한다.지금은 빼곡..)
조망터에서 금경지쪽으로 내려간다.
(이끼 정원)
금각사의 찬란한 금각이 인상적이였다면
은각사에선 수수한 동구당과
은은한 이끼 정원이 인상적이였다.
(금경지 안의 섬을 선인주라 한다.)
금각과 자주 비교되는 은각은 2층인데
1층은 심공전(서원조) , 2층은 조음각(선종풍)이라 하며,
조음각에 관세음보살 상이 있어 은각의 정식 명칭이 관음전이다.
이에 비해 3층으로 된 금각에는 선종양식,서원조 양식외에
귀족의 공가 양식(침전조)이 더 있다.
침전조 양식이란 밀폐된 부부의 침실 주위 공간을
칸막이나 눈가리개 판, 휘장등으로 나누어
일상 생활이나 손님접대,
가족의 공식적인 제의(祭儀)와 연회를 하는
막부시대 이전의 왕실의 건물 양식이고
이에 비해 서원조 양식은
원래 승려가 독서하는 방을 서원이라 하였는데
독서를 해야 하니 실내 채광을 위해 벽에 창문을 만들고
다른 한편에는 바닥을 높여 만든 도꼬노마와
높이가 다른 선반인 찌가이다나를 설치한
다다미 사랑방 건물 양식을 말한다.
대개, 도꼬노마 위에는 불화를 걸어놓고
찌가이다나 위에는 족자와 다기(茶器) 등을 진열하였다 하는데
무로마치 막부 이후, 일본 주택 건축의 주류가 된 양식이다.
침전조,서원조,선종풍..구분은 요란하지만
정작 금각이나 은각 내부는 비공개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은각은)
(나무에 가려 전체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이렇게 예술적 취향이 남 달랐던 요시마사는
걸출한 동산문화를 꽃피웠지만
정치적으론 무능하고 우유부단하여
쇼군의 후계자 문제를 일으켜서 오닌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그결과 10년간의 전쟁으로 교토 유물의 90 %가 파괴되고
쇼군의 권위는 떨어지고 막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센코쿠다이묘들이 맹위를 떨치는 전국(戰國)시대가 열리는데
좌우간 이시기에 잦은 전란을 피하여
지방으로 옮겨간 귀족,무사,승려등에 의하여
동산 무로마치 문화가 전국적으로 퍼지게 된다.
은각사를 대충 돌아본 다음
교토역의 본원사(혼간지)를 들려볼 욕심으로
혼자 먼저 라쿠버스를 타고 출발하고...
아내와 막내는 느긋하게 더 근처를 둘러보다
숙소에서 짐을 찾아 나중에 교토역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라쿠버스-관광지 위주로 다녀 일반 버스보다 빠르다.)
교토역 근처에는 동,서 본원사 두개가 나란히 있는데
둘 다 정토진종의 사원으로 그 내력을 알아보니...
가마쿠라 막부 전,후부터 전란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정토 사상이 널리 퍼져 현실의 세계보다 내세의 극락에 대한 염원으로
아미타여래를 위한 사찰을 짖고 불사를 통해 극락 세계를 꿈꿨는데..
양인(良忍)이라는 스님이 염불을 중심으로 수행해도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융통염불의 개념을 성립시켰고
이것을 더욱 단순화하여 법연(法然)스님이
일정한 교리와 불상, 불화가 없어도 오직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정토종을 세웠다.
이러한 단순화된 교리는
하층 무사와 서민들에게는 환영을 밭았지만
기존 불교계와 정치세력의 반발을 사서 탄압을 받았고
그에 대응하여 친란(親鸞)의 정토 진종이 나온다.
정토진종에서는 공식적으로 승려가 결혼을 할수 있었고
(일본 승려도 독신이였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에나 결혼 할 수 있게됨.)
창시자의 혈족을 통하여 대를 이어가며 주지가 되어
거대한 성과 같은 사찰을 짓고 자체적인 무력을 가지는 등,
사실상의 영주가 되어 탄압에 대응하였는데
실제로 쉬운 교리와 출가의 용이함 때문에
많은 농민과 하급 무사가 신자가 되어 그세가 매우 커졌다 한다.
이들이 오사카지역에 거대한 사찰을 지었는데,
오다 노부나가도 이 절을 무려 10년간이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타협하여 포교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고
수도였던 교토에 본원사(니시혼간지)를 세워주고 옮겨가게 했고
노부나가의 사후 권력을 승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들이 떠난 절터에 성을 지었는데 그것이 오사카 성이다.
이들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후계자 문제에 간섭하여 동본원사(히가시 혼간지)를 새로 만들고
원래 본원사는 서본원사로 하여서 그 세력을 둘로 나누었는데..
그후로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출발 시간이 촉박하니 서본원사에선 유네스코에 등재된 당문,
동본원사에선 신도들 머리카락으로 만든 대형 밧줄..
딱 두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먼저 서본원사로 간다.
(서본원사)
(길 건너편에 총문이 있다.)
(아미타 당문)
정토종계 사원은
자신들의 개조(開祖)인 법연을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여기고
법연을 모신 어영당을 불당 대신 본당으로 삼는데
정토진종은 더욱 독특하여
개조인 친란(親鸞)의 어영당과 아미타당을 나란히 병렬로..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가급적 크게 짓는다고 하며
두건물 뒤에 방장과 정원이 있는 가람배치를 가진다.
(아미타당)
(아미타당 옆에 어영당-병렬배치)
(부리나게 아미타당 옆으로 돌아가니)
(서원)
(당문은 수리중..ㅠㅠㅠ)
후시미성서 옮겨온 당문인데 국보이면서 유네스코 문화재이다.
정교한 문의 조각품을 일일이 보려면 하루 종일 봐야 한다는데..
(그래서 별명이 종일문이라고..)
공사천막도 유도리가 없이 한치 빈틈이 없어..
구경할 방법이 전혀 없다.
아미타 당문을 되돌아 나와 길 건너 총문으로 가니,
(아미타 당문과 총문)
총문 근처에 서본원사의 수도원 건물이 있다.
(수도원 건물)
이제 동본원사로 간다.
(동본원사 담 뒤로 교토 타워가 보인다.)
(칙사문인 듯)
(한참을 걸어서 가까워진 어영당문..)
(어영당문은 커서 한 컷에 안찍힌다.)
(어영당-세계 최대급 목조건물이라나..)
(아미타 당)
(손과 입을 씻으라는..)
아미타당으로 올라가 어영당으로 간다.
(어영당과 아미타 당을 잇는 회랑에는 )
(머리카락으로 만든 로프가 전시되어 있다.)
(일반 밧줄로는 커다란 나무기둥을 옮길 수가 없어서)
(신도들 머리카락으로 밧줄을 만들어서 옮겼다고.)
(아미타당서 본 어영문)
(종루)
서둘러 교토역으로 가서 식구들을 만나 귀국길에 오른다.
(구멍 뚤린 건물이 교토역)
(인천공항 장기주차장)
2019.07.21 일요일. 무덥고 흐림.
교토는 794~1868년까지
천년 이상이나 일본의 수도였으니
단 4일간의 일정의 여행으로
교토를 보고 오기엔 무리일 것이다.
역사 유물 태반을 가보지 못했고
비공개 이외의 막상 가본 곳도
요새 유행하는 말처럼 파고 파도..까고 까도 끝이 없어
한번 방문으로는 다보았다 할수 없으니..
후일에 또 기약을 해보며
장님 코끼리 다리 만져본 기록을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