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보도연맹원A는 아무것도 모르는가
석사논문을 쓰면서 인터뷰한 A는 부자(父子) 보도연맹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이승만정부가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국민에 대한 사상 통제 정책을 강화하고 검거된 좌익 성향의 인물을 교화 및 전향의 목적으로 창설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중앙본부를 설치하고, 중앙본부 산하에 각·도별, 시·군별 및 읍·면동까지 조직을 구성했다. 이후 이들 단체에 가입한 인물 중 대부분이 민간인 신분으로 강제적인 조직 가입으로 인해 한국전쟁 전후 학살 사건의 주요 피해자가 된다. 이러한 보도연맹원에 대한 통념 중에 하나인 ‘국가가 가입하라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가입한 것이 죄가 되었다’라는 말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가 무슨 의미일까? 그 의미를 생각하며 글을 시작한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1931년생 A와는 2020년 6월 7일 자택에서 인터뷰를 했다. 그 후 몇 차례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A가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것은 1948년 4월 무렵 학내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민학’의 조직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된 데서 비롯되었다.
안성농업학교 동맹 휴학을 할 때 내가 3학년 학급 대표를 맡았단 말이야. 상급생들을 한 반의 한 사람씩 오라고 해서 가서 일제 잔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어. 배속 장교란 말이 학교를 병영화 하는 것이고, 병영화 하는 것은 일제시대에 식민지 조선이 미국하고 전쟁할 때 생긴 것이니 이제 그 학생들을 다시 배속 장교를 통해 배속시켜서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은 민족 내전을 향한 음모이다. 학교는 학교일 뿐 병영이 아니다. 그래서 스트라이크를 했어. 그때 학급 대표였어. 학급 회의를 선출한 것도 아니고, “너 나가” 그래서 할 수 없이 참석해서 퇴학하게 된 거지. 그렇게 있다가 서울로 도망가 남산에 가서 노숙하고 배를 곯다가 친척 집에 찾아갔는데 그 친척 집에 문간방에는 북에서 온 난민이 세를 들어 살았어. 내 몰골이 이상해서 신고한 거야. 잡혀가서 몽둥이로 두들겨 패니깐 내가 “안성 농업학교 다녔다”고 이야기하니깐 안성 경찰서에서 반응이 오기를 “도망간 놈이니 철저히 조사해 달라”고 했단 말이야. 죽도록 두들겨 맞고 안성 농업학교 ‘민학’이라고 민주 학생 연맹 조직원이라고 소년원으로 보내졌지.
1949년 8월경 출소해 서울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시골집 안성에 내려갔다가 자신이 보도연맹에 가입된 것을 아버지에게 듣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보도연맹’ 그게 전쟁 나기 전에 만들어졌는데 ‘과거 좌익한 사람이 전부 가입시키라’고 그러더라고. 근데 하도 들볶고 하니 보도연맹에 가입했고 이유는 과거 아버지가 해방 직후 한 3개월 동안 인민 위원회 부위원장을 했으니깐 보도연맹 가입하라고 해서 가입했지. 그리고 너(A)도 가입해야 하니 서울에서 데려오라고 그러기에 “공부하는 자식을 여기까지 데려오면 되느냐고 자식 도장 찍어 줄 테니 내 자식은 내가 써서 가입하마”하고 안성 삼죽 지서에 둘 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거야. 우리가 보도연맹에는 1~2월에 가입하고, 이천 설성면 수산리로 5월에 이사했어. 아버지 말씀이 안성보다 이천 땅값이 싸서 한 9,000평을 사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셨어.
이렇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되었다.
※ 저의 석사학위논문을 중심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