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체칠리아( ? ~ 230년?)는 기독교 박해 시절 로마제국에서 순교한 가톨릭 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영어로는 ‘세실리아’라고 부르는데, 중세의 어원론에 따르면 ‘체칠리아’라는 이름은 하늘(치엘로)과 백합(질리)의 합성어인 ‘천상의 백합’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녀는 로마제국의 유서 깊은 명문 귀족 집안의 딸로, 가톨릭이었던 부모의 영향을 받아 그녀 역시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랐는데, 나이가 차자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발레리아누스’라는 청년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결혼식이 진행되는 순간에도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동정 서약의 기도에 완전히 빠져 있어서 정작 식장에 울려 퍼지는 환호와 음악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결혼식이 끝난 후 그녀는 남편에게 가톨릭 신앙의 이유를 들어 자신이 하느님에게 종신 동정 서원을 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자신의 동정을 유지하게 해달라고 간청함과 동시에 수호천사가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있음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교도였던 남편은 그녀가 말한 수호천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다며 그녀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그 요청을 받아주겠다고 약속했고,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당시 교황이었던 ‘우르바노 1세’에게 남편을 보내어 가톨릭의 교리를 공부하게 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청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남편까지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후 남편은 그녀의 수호천사를 또렷이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 자리에서 남편은 천사로부터 장미관을, 그녀는 백합관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순교 연대는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박해 기간 도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 발레리아누스는, 역시 가톨릭으로 개종한 동생 ‘티부르시우스’와 함께 사치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재산을 팔아 빈민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전념하며 노예들을 해방시켜 자유인으로 만들면서 열심히 전교 활동을 벌이게 되는데, 당시 행정관이었던 ‘알마치우스’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그들을 체포하여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이교 신전에 절하라며 배교를 강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그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결국 심한 매질을 당한 뒤 로마 근교의 파구스 트리피오에서 ‘막시무스’라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과 함께 참수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녀 또한 남편을 포함한 3명의 순교자 장례를 치른 후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되는데,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밝히며 행정관의 갖은 위협과 감언이설에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리겠노라고 의연하게 대답하였고, 결국 그녀의 믿음을 도저히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행정관은 그녀에게도 사형을 명하게 됩니다. 그녀에게는 뜨거운 탕 속에 가둬 죽이는 처형법이 적용되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탕 속에 갇힌 그녀는 만 하루 동안 뜨거운 열기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고, 그녀의 죽음을 예단한 병사들이 문을 열어 보았으나 멀쩡히 살아있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한 행정관은 그녀 역시 남편과 같은 참수형으로 처형할 것을 명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형리가 세 번이나 칼을 휘둘렀으나 그녀는 죽지 않았고, 이후 모진 고통 속에서도 3일 동안이나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오른쪽 손가락 3개와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삼위일체인 하느님을 믿고 그를 위해 죽는다는 것을 표시하여 자신의 굳센 믿음을 알렸으며, 교황에게 자신의 집을 교회로 개조해 줄 것을 마지막 유언으로 남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4일째 되는 날 그녀는 마침내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게 순교한 그녀에 대한 공경은 여러 세기를 거치며 교회 안에서 보편화되었는데, 동시에 그녀의 행적들도 수많은 전설이 되어 전해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순교 연대에 관해서는 옛 로마 순교록이 ‘성녀 체칠리아와 성 발레리아노 등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222-235년 재위) 치하에서 순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들의 순교 연대를 어느 정도 추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9세기(서기 821년)에 이르러 교황 ‘성 파스칼 1세’는 로마의 트라스테베레에 있던 그녀의 집터에 그녀를 기념해 새로 성당을 건립하고 카타콤바에 있던 그녀의 유해를 옮겨 안치하게 되는데, 유해를 확인하기 위해 무덤을 다시 열었을 때 그녀의 모습은 살아생전의 모습 그대로였으며 손가락의 형태도 예전 그대로였다고 합니다. 이에 감복한 교황은 정중히 예의를 갖춰 그녀를 성녀로 인정하고 그녀에게 봉헌된 ‘성 체칠리아 대성당’의 지하 묘소에 유해를 안치했다고 합니다. 이후 1599년 성당을 재건축하면서 유해를 확인하기 위해 관을 열었을 때도 성녀의 유해는 변함없이 마치 살아 있는 듯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새로 마련된 무덤 위로는 이탈리아의 조각가 ‘스테파노 마데르노’가 대리석으로 만든 성녀의 순교 당시 모습을 재현한 동상을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성녀 체칠리아는 교회 음악과 음악인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는데, 이는, 원치 않았던 결혼식 때 울려 퍼지던 노랫소리와 환호성을 듣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순교록의 기록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성녀는 음악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고 여겨졌고, 1584년 로마에 음악원이 세워질 때 그 학원의 수호자로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성녀 체칠리아를 교회 음악의 수호자로 공경하는 것이 점차 보편화되었으며 성녀의 문장은 오르간이 되었고 교회 미술에서 천사들 곁에서 오르간이나 비올라 등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11월 22일 목록에서 성녀의 순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으며, 고대부터 로마의 ‘트라스테베레’에 그녀의 이름으로 봉헌된 성당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