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메모:
루카는 자신의 복음서 15장과 16장에서 네 가지 비유를 보도하였다. 제15장에서는 양, 은전, 아들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비유 이야기로, 제16장에서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로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강조하셨음을 전해주었는데, 이 모두가 루카가 고유하게 보도하고 있는 자료들이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루카 16,19-31)에서 재물을 많이 소유했으면서도 그릇되게 사용한 지옥행 인물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뒤 자신의 말로 자신을 심판하였다. 자신은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이 찾아가서 특별히 경고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며, 가난한 이들과 나눔을 거절한 대가로 가게 된 지옥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절대로 가서는 안 될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옥이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을 덜어주러 가기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수렁이 너무 깊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죽기 전에 회개하여 가난한 이들과 가진 재물을 나누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비유에서는 여러 가지로 대조적인 소재들이 날카롭게 대비되어 있다. 부자와 거지, 현세와 내세, 천국과 지옥이 대비되는 것은 기본이다. 게다가 부자의 사치스러운 모습은 짧게, 가난한 라자로의 고통은 길고 자세히 소개된다. 또 부자의 죽음은 길고 자세히, 가난한 라자로의 죽음은 짧게 소개된다. 더군다나 죽은 후 부자의 고통은 길고 처절하게 묘사되지만 가난한 라자로의 행복은 아브라함의 곁에 있다는 간단한 표현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이 묘사된다. 마지막으로, 부자는 이름도 없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라자로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그 이름은 병들어 죽었다가 예수님께서 소생시켜주신 당신의 절친한 벗 라자로의 이름과 같기도 하다(요한 11,1-44).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강조하고자 하시는 초점은 분명하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간극이 벌어져 있듯이, 마치 현세의 경제 질서에서 생겨나고 있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받아야 하는 고통을 지금 여기서 좁혀야 한다는 역설적 메시지이다. 내세의 간극은 하느님의 힘으로도 좁힐 수 없지만, 현세의 간극은 인간의 힘으로 얼마든지 좁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황 바오로 6세도 이 비유의 핵심을 이렇게 간파하였다: “빈곤의 극복이 시급하다. 인종이나 종교나 국적의 차별 없이 누구나 다 타인과 자연의 예속 상태에서 해방되어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 명실상부한 자유 세계, 가난한 라자로도 부자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인간 공동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민족들의 발전, 47항).
부자의 이야기는 부유하면서도 인색했던 바리사이 유다인들을 빗대어 가르치시기 위해 예수님께 지어내신 비유 이야기였지만, 가난한 과부가 바친 헌금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일이었다(루카 21,1-4). 이를 풀이하는 교부들의 주해가 이러하다.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은 주님께 바치는 것과 같다고 가르치신다(키프리아누스). 부자의 예물이 액수로 따지면 과부의 예물보다 훨씬 많겠지만, 그는 남아도는 것에서 조금 내놓았을 뿐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는 적절한 재물 사용에 대한 가르침을 되풀이하신다. 여기서 과부는 가난한 이를 보살피는 교회를 나타낸다(암브로시우스).”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경계하신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기울어져 가는 유다교와 바야흐로 막 떠오르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신자들이 이룩한 공동생활이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어 주님께서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를 보태어 주셨듯이”(사도 2,47), 정성된 나눔으로 가난해진 교회야말로 하느님의 기쁨이다. 2014년에 124위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리러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교단과의 만남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라는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맥락이 바로 이 지점이다. 신자들이 바친 헌금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쓰는 것이 곧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고, 이렇듯 재물에 초연하고 복음적 원칙을 앞세우는 교회의 표양 앞에서라야 부유한 신자들도 교회의 진정성을 알아보고 군말없이 그 표양을 뒤따를 것이다.
흔히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부유하지도 않은 신자들에게 헌금을 많이 바치도록 권유하는 근거로 삼거나, 적어도 부유한 신자들을 일깨우려는 소재로 삼는 수가 많은데 이는 성경의 맥락을 매우 편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교부들의 견해는 이보다 더 철저하였다. 교회가 가난한 과부를 본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부유한 신자들을 비롯하여 일반 중산층 신자들에게 정성어린 헌금을 바쳐달라고 호소하려면, 먼저 이미 거두어진 신자들의 헌금을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정성껏 쓰는 표양을 보여야 한다. 사회에서도 어느 단체이건 수입의 1/10 이내에서 자체 운영비로 사용하고 나머지 9/10는 지출한 이의 의도에 충실하게 사용하는 것이 건전한 재정의 원칙이다. 그렇게 보면, 신자들이 십일조를 해야 한다면 교회는 구약 시대 레위 지파와 사제들의 관행에 따라 십구조를 가난한 이들에게 써야 옳다.
본시 구약의 전통에서 십일조 전통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히브리서가 밝혀주고 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히브 7,17).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히브 7,2)을 사제 멜키체덱을 통해 하느님께 바쳤던 것이다. 이 말씀은 히브리인 신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계승해야 할 신앙의 전통으로서 자신의 삶 가운데에서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제직을 위해 살아야 함을 명심하라는 뜻에서 나왔다.
그 후 모세가 확립한 유다교의 전통에서 사제 직무는 열두 지파 중 레위 지파에서 맡게 되면서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이라는 전통이 ‘수입의 십분의 일’로 좁혀진 채로 제도화되었다. 레위 지파는 토지를 분배받지 않고 성전과 제단에서 봉사하는 대신에 이미 토지를 분배받은 나머지 열한 지파로부터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받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래서 열한 지파에 속한 백성이 십일조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면, 사제는 그 중에서 십분의 일을 자기와 제단 봉사자들의 몫으로 하고, 십분의 구는 성전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레위 지파와 이방인, 과부, 고아 등 토지를 분배받지 못해 가난한 이들의 몫으로 주었다(신명, 14,22-23.28-29). 이것이 사제직을 통하여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십일조 제도와 십구조 질서였다(히브 7,2). 이 십구조는 가난한 이들 개인에게 돌아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공유경제의 기금으로 활용되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금고요 하느님의 곳간이었던 것이다.
본당사목이건 사회사목이건 교회는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세상의 빛’(마태 5,14)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선교에 반드시 필요한 영적 매력이 발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발적으로 입교했다가 슬그머니 냉담하는 신자의 비율이 무려 80%에 이른다는 당혹스러운 교세 통계 속에 감추어진 함의 속에는 교회의 방만한 운영 실태에 대한 실망도 없지 않을 것이며, 영혼이 없는 듯이 살아가고 하느님을 잊어버린 채 태연히 살아가는 비신자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 속에는 교회가 세상의 탐욕스러움을 닮지 말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대로 ‘돈 사용의 거룩함’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암묵적 갈망도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강의 메모:
1. 이 비유에서 귀족은 먼 길을 떠나면서 열 사람에게 각각 한 미나씩을 나누어주었다. 당시의 화폐가치로 1미나는 1미나는 그리스의 화폐 단위인 드라크마로 환산하면 100드라크마에 해당하고 이에 해당하는 로마의 화폐 단위가 데나리온이다. 그러니까 1미나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2. 이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 바탕이 되고 있다. 기원전 4년에 헤로데 대왕이 죽고 세 아들 아르켈라오스와 안티파스, 필리포스가 아버지의 영토를 나눠 차지하게 되었다. 맏이 아르켈라오스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차지하면서 왕이라는 칭호를 받기 위해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만나러 로마에 가지만, 아르켈라오스의 잔인함이 싫었던 신하들은 유다인 50명을 사절로 로마에 파견하였다. 결국 아르켈라오스는 왕이라는 칭호는 얻지 못하고 영주(또는 분봉왕)라는 칭호를 얻고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와서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이들에게 잔혹하게 보복하였다. 그러다 결국 그는 기원 후 6년에 쫓겨나고 말았다.
3. 예수님께서는 이 역사적 비극 실화를 하느님 나라의 통공과 역할에 관한 비유로 삼으셨다. 세례 받을 때에 모두가 공평하게 은총을 받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수행한 사도직의 몫에 따라서 사후에 천상에서 지상의 남은 이들과 통공하며 도울 수 있는 책임 범위가 정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