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광부
김포 공항을 떠난 지 2시간 남짓해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엔 캐나다로 오는 직항 노선이 없었다. 토론토까지 오려면
김포-하네다-밴쿠버-토론토로 3번을 갈아타야 했다. 하네다에서 밴쿠버까지는 CP Air(Canadian Pacific Air Lines; 1986년도에
없어짐)를 타고 와서 토론토까지는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했었다.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치면 아마도 24시간 이상 걸렸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로비 안으로 들어왔다. 무턱대고 여러 사람들이 가는 대로 쫓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나도
그 사람들 뒤에 줄 섰다. 줄이 앞으로 움직이면 나도 같이 움직이다가 내 차례가 되어 어느 창구 앞에 섰다. 여권을 내밀자 창구
안의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머라고 말을 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영어로 말한 거 같아 나도 “파든 미”라고 돼 물었는데..
그 남자는 더 거친 목소리로 어프….. 라 하며 손가락으로 위를 가르쳤다.. 난 그제야 아 업스테어스.. 해외에 나가 본 경험이
없으니 공항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리가 없었다. 나는 무작정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간 것인데 그들은
일본에 입국하는 사람들이라 입국 수속하는 창구에 온 것이었다. 경유 승객이 모이는 장소는 이층에 있으니 그리로 가라는
거였다. 이층으로 올라가자 항공사 직원인듯한 사람이 영어로 사람을 찾는 듯한데 얼핏 내 이름 같았다. 그가 들고 있는
사인에는 내 이름이 한자로 적혀 있었다. 일본에 오자마자 딱 두 마디의 영어를 들었는데 발음이 내가 알고 있는 영어 발음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였다.
어프 스테어…. 처르수 바끄…. 철수 박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일본인들이 아시아에서 영어 발음이 최악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유는 일본어에는 모음 자음이 영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서라 한다..
항공사 직원을 따라간 곳에는 약 7,8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캐나다로 가는 사람들이라 했다. 한두 명은 캐나다로 출장 가는 공무원이고 나머지는 캐나다에 가족 방문으로 가거나 캐나다 교포들인데 고국방문을 하고 돌아가는 사람 들이었다. 그들 중에 토론토에 사는 젊은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들은 독일에서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로 만나 독일에서 결혼하고 캐나다에 2년 전에 정착했다며 한국 떠난 지 5년 만에 부모님을 뵙고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60년대 말 아버지가 일하시던 강원도 탄광에서도 독일로 광부들을 선발해 보냈었다. 나의 여름방학 숙제로 광석 채집을 도와준 형도 파독 광부로 갔던 기억이 떠올라 그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탄광 깊숙이는 아니지만 나도 두어 번 탄광 굴속으로 들어 가본 경험이 있어 그
안의 상황을 조금은 알고 있기에 이야기가 술술 풀렸다.
굴속으로 들어가려면 헬멧트를 쓰고 카바이드램프를 들고 들어가야 했다. 굴속 깊숙이 들어 갈수록 비릿하고 매캐한 냄새가
심해졌다. 굴속 바닥은 질척하고 자주 물이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 갈수록 습도는 높아지고 벽에서 물이 많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석탄 가루가 물에 희석돼 비리고 매캐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양옆과 천장에는 갱목이라 불리는 통나무들이
굴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주는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광산마을을 오고 갈 때마다 갱목을 가득 실은 트럭들을 자주 보았다. 좁고 구불진 광산 도로는 비포장 흙길에 한쪽은 까마득한 낭떠러지여서 갱목을 가득 실은 트럭을 볼 때마다 난 새가슴이
되었었다. 굴 바닥에는 좁은 철길이 깔려 있어 석탄을 채취해 리어카보다 작은 박스카에 실어 굴 밖으로 날랐다. 한 번은 굴속에서 카바이드 불꽃이 내가 입었던 작업복 바지에 붙어 바지를 홀라당 태워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후로는 무서워 다시는 굴속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경험했던 일들보다 파독 광부들이 겪은 일들은 훨씬 더 위험하고 어려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오직 돈을 더 벌기 위해 더 위험하고 더 어려운 일들은 자청해서 했다. 위험도가 높을수록 수당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위험 때문에 사고도 있었고 목숨까지 잃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어느 누구도 불평하거나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당시 한국은
너무나도 가난해 목숨보다 돈이 더 중요했고 휴일도 반납하고 오직 일만 했다고 했다. 덕분에 한국 광부들은 용감, 성실 등을
인정받아 그만큼 더 수당도 받고 돈을 벌 수 있었다고 했다. 그들의 성실함이 독일 정부가 한국에게 차관을 더 내어주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이 번 돈으로 고국의 가족들은 생계를 유지하고 공부도 할 수 있었다. 그들의 희생이 한국의 근대화를
이루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었다.
또 누군가 나를 찾고 있었다. 처르수 바끄.. CP Air일본인 직원이 캐나다행 승객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고 있었다.
드디어 캐나다행 비행기가 출발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