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5장
1. 환상(5) - 저주와 악(1-11)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 기준은 말씀입니다. 누구든 말씀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는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분명한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자에게 말씀이 주어진다면, 그 말씀은 복이 아니라, 저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 앞에 서 있는,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보게 해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5장에서 선지자가 보게 되는 환상은, 날아가는 두루마리입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온 땅에 내리는, 저주라고 말합니다. 왜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온 땅에 저주가 되는 것일까요?
3절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
이 내용을 보면, 두루마리에는 글이 적혀 있는데, 그 글로 인해서 도둑질 하는 자와 맹세하는 자가 끊어짐을 받습니다.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루마리에 적힌 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말씀이, 도둑질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불살라지는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 또한 불살라지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심판에서 피할 자가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날아드는 현장에서, 불살라지고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저주에 속한 존재로 드러날 뿐입니다. 이것이 날아가는 두루마리, 곧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의 의미입니다.
선지자는 또 하나의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에바입니다. 에바는 곡식을 되는 말인데, 에바 가운데에 한 여인이 앉아 있고, 8절에 보면 이 여인을 악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에바 속에 던져 넣고, 납 조각으로 덮어 버리는 환상입니다. 곡식을 되는 말에 악으로 표현되는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악이 에바에 가득한 것처럼,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또 본 것은, 두 여인이 에바를 들고 옮기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천사에게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11절 “그가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이스라엘의 악의 상징인 에바를 옮기는 것은, 이스라엘에게서 악을 옮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저주를 받아야 하는 악으로 가득한 존재들이지만, 그들에게서 악을 옮기셔서, 저주와 상관이 없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을, 환상으로 보여주시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에바를 들고, 시날 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집을 짓고, 준공되면 옮겨간 에바가 그 처소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시날은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은 이방인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의 가득한 악을 상징하는 에바를, 이방인의 땅으로 옮겨가서 그곳에 집을 짓고, 에바가 그 처소에 머물게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처소는 악을 제거하는 기능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처소, 곧 하나님의 집으로 일컬어지는 성소는, 예루살렘에서 유다에 의해서 건축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날 땅으로, 악으로 옮겨가서 그곳에 집을 지고 준공되면, 악을 머물게 하는 처소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은, 유다가 건축하고 있는 성소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이 내용은 성소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전은 건물에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지만, 비록 성전을 건축한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실상을 밝히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처럼, 유다가 하나님의 성소 앞에서, 악으로 가득한 존재임을 깨닫지를 못한 채 성전을 건축한다면, 그들에게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전에 나와서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들의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의 반복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죄 용서를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성전이 참된 성전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유다 백성이 악으로 가득한 자신들의 실상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다면, 성전을 다시 건축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냥 건물일 뿐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문제는, 자신들을 하나님이 택한 백성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방인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악으로 가득한 것이, 자신들의 실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은 유다와 같은 교만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악으로 가득한 자기 실상에 대해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럴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집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통해서, 악을 용서하시고 덮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보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악으로 가득한 자가 어떻게 해서 악으로부터 해방되고, 심판에서 구원 받는가를 보여주는 환상의 의미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악으로 가득한 자기 실상을 보게 되는 것은, 없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현대 교회는 이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를, 구원 받기 전의 상태로, 끌고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구원 받은 성도가 구원 받은 성도로 머물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악으로 가득한 실상을 깨닫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보답하는 것이고, 은혜의 보답은 교회에서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구원을 말해야 하고, 구원 받은 자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은 구원을 빙자하여, 교회에 충성하는 좋은 일군을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교회에 유익이 되는 교인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탐욕이라는 악으로 가득한 실상을 보여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원하신 주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더욱 깊이 빠져들기 위해서 없으면 안되는 것이, 악으로 가득한 것이 나의 실상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것입니다. 죄를 알수록 은혜의 깊이는 더욱 커져가기 때문입니다.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오늘 우리의 현실로 다가와지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집에, 날아들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 안에서 여러분 자신을 내어 놓고, 곰곰이 생각하십시오.
불살라지는 심판이 여러분께 마땅한 결과라는 것이 인정된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악을, 십자가에 머물게 하셨음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은혜가, 참된 감사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