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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어느 일몰의 근처에서 나를 만났을 때/ 최인혜 첫 시집 (바람 난 개나리)를 읽고/김부회
「서평」 어느 일몰의 근처에서 나를 만났을 때
최인혜 첫 시집 (바람 난 개나리)를 읽고
글/ 김부회 시인, 문학 평론가
가. 들어가며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질문을 하거나 명확한 답을 얻기를 원한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 답은 정답지와 같은 답을 내놓기 일상이다. 사실은 묻는 사람조차 시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정확하게 설정되지 않았기에 어떤 답이라도 만족할 수 없거나 혹은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 시라는 문학 장르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막연하게나마 시는 이런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시를 쓰는 분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필자에게도 많은 분이 질문을 한다. 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후 발전하여 지금껏 왔다는 식의 학문적인 접근은 최소한 시라는 장르에서는 거론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는 감정의 산물이며 생각과 성찰을 바탕으로 자신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잣대로 삼아야 하는 것이 바른 판단이 아닐까 싶다. 한 편의 일기를 쓴다고 가정해 보자. 늦은 저녁 어느 일몰의 근처에서 오늘을 무엇을 했고, 누구와 어떤 말을 했고, 어느 모임에서 이런 일이 있었고 등등을 헤아려보다 이런 부분은 내가 좀 더 참아야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좀 더 지혜롭게 말해야 했는데 라는 생각을 정리하며 일기를 쓴다. 중요한 것은 쓰는 것이 아니라 반성과 성찰을 한다는 것이다. 오늘 일에 대하여 나를 채근하며 내가 나에게 편지 한 통을 쓰는 것, 그것은 내일을 살아갈 나를 바로잡는 일이다. 시가 중요한 것은 이런 마음 자세를 기본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학적 가치도 중요하고 문학적 기반과 문학이 지향하는 기본 tool을 위배하자는 것이 아니다. 시라는 장르에서 파생하는 결과물에 대해 자기 삶에 대입하여 또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내자는 말이다. 그 결과물로 인해 내가 스스로 감동하고, 내가 공감한 어떤 현상의 영역에 대하여 타인이 감동할 수 있다면 그것이 시의 울림이며 가장 중요한 시 쓰기의 원칙이라는 생각을 배제할 수 없다. 시가 가슴에 들어오는 때, 내 작품 한 편의 어느 구절에서 누군가 눈물 흘리거나 삶의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작품은 성공한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잣대를 들이대고 함부로 재단하여 시적 질감이나 이미지즘에 위배 된다고 하는 등등의 말들은 그저 타인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다. 내 속에서 단단하게 야물어진 단어가 숙성되고 삶의 반경에서 얻어진 소박한 지혜가 영혼의 모음이 되어 당신의 마른 가슴을 보듬어주는 한 줄기 빛이 된다면 그것이 시 한 편에서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가치라는 생각을 해본다. 짧은 시라도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시인은 거듭 생각한다. 오직 하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겹눈을 갖고 세상을 보는 것이다. 같은 풍경을 보고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을 것이며 같은 상황을 보고 누구나 가해와 피해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은 다변화된 물상의 존재들이 얽혀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시인 A와 시인 B의 초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 속엔 무수하게 많은 사랑이 있고 이별이 있고, 삶의 방정식이 있고, 공식화되지 않은 공식이 있으며 측량할 수 없는 무게가 있으며 시인 자신의 영혼이 스며있다. 그것을 꺼내 세상에 보일 때 내가 본 세상에 대해 내 의견을 더할 때 우리는 시인만의 시선에 감사하고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쉬운 삶은 없다. 누구에게도 아릿한 아쉬움과 회한과 그리움이 존재할 것이며, 누구에게도 저릿한 이별과 만남이 있을 것이며, 누구에게도 가족에게, 이웃에게, 친구에게, 주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그 심중의 언어를 기표화 하여, 때론 형상화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잘 다듬어 내어놓을 때 세상은 어쩌면 아주 조금 변화의 모티브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결과는 아주 작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새삼 다가오는 이유다.
총 5부로 편성된 최인혜 시인의 작품을 읽으며 공통으로 드는 생각은 세상을 보는 눈이 참 아름다운 눈이라는 생각이다. 세밀하게 최인혜 시인의 시 세계를 들여다보기 전, 시집 서두에 써 둔 (작가의 말) 몇 부분을 인용해 본다. 최인혜 시인이 시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어떤 자세로 글을 쓰게 되었는지 그 마음을 먼저 헤아려보는 것이 시집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시인의 말
길게 드러누운 노을도 생각이 많아지는 저녁입니다
늘 우당탕거리며 조바심이 일상인 저에게도 쉼표 같은 시간이 예약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낙서처럼
수취인 없는 글에 작은 마음을 담아 보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냥 주저리주저리 생각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는다는 건
최소한 귀찮아하지 않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세상의 일로 데이고 들어 왔을 때
함께 마음 풀어줄 편안한 친구가 되어주기 때문이지요.
그리움이 습관이 되어버린 작은 소녀
항상 고개를 떨구고 있는 저에게 할머니는 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웃어라, 그래야 더 예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생각한 일이지만 나를 반듯하게 지켜낸 원동력은 웃음이었습니다.
웃음에는 긍정이 있고 친화력이 있고 기분 좋아짐이 있었으니까요.
시는 나에게 친구이고 상처 난 마음의 치료제였으며
지친 마음을 순화시켜 주는 치료제였습니다.
이렇게 시라는 형식을 빌려 쓰인 내 생각의 부스러기들을 용기 내 엮어 봅니다.
생각 주머니에 말이라는 옷을 입혀 세상 밖으로 내놓는 일이
이렇게 부끄럽고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알게 합니다.
이 글을 통해서 많은 사람의 생각과 공감이 이어지고
서로 마음이 닿아진다면 너무 기분 좋아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외로움과 함께 해준 이 글들에 무한 애정을 담아봅니다.
『시인의 말 중』 일부 인용
친구라는 말, 수취인 없는 글, 웃음, 상처 난 마음의 치료제, 생각의 부스러기라고 시인은 말한다.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준 것이 글이었으며 시인이 치유한 것처럼 시인의 작품에서 누군가 치유되고, 시인의 생각과 공감이 이어지길 바란다는 소박한 희망을 작가의 말에 담았다. 문학의 가치, 발전, 시적 질감의 질적 윤택과 융합이라는 어려운 미사여구가 아닌, 마음이 하는 말을 민낯 그대로 꺼내 이야기하는,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보고 싶은 순수라는 말의 비 사전적 어휘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최인혜 시인의 시집 속에는 어두운 밤을 홀로 지키는 호롱불이 있고, 질박하지만 사려 깊은 침착이 있고, 빠르지 않지만 제법 느린 나름의 속도가 있고, 지켜야 할 자기만의 기준이 또렷하게 내재 되어 있다. 말이라는 옷을 입혔다고 한다. 일반적인 언술행위에 시라는 장르가 갖는 알레고리를 이용하여 주제를 드러내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최인혜 시인만의 시적 알고리즘 algorithm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몇 편의 작품을 통해 그녀의 시 세계 속으로 몰입해 본다.
2. 들여다보기
독백
참 웃긴 거 알아
해바라기 곁에 서성이는 바람 말이야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보고 있고
바람은 해바라기 주변을 서성이고,
사실은
바람이 해바라기 주변만 맴도는 건 아닐 거야
이리저리 왔다가 해바라기 주변에 머무는 것인지도
해바라기는 말이야
늘 한 곳만 향하는 듯하지만
자기를 향해서 밝음을 주는 쪽을 향해 있는 거야
해 바라기 하다 꽃잎이 떨어지고
씨앗이 익어 갈 때쯤
해바라기는 말하지
너를 기다리다 난 속이 까맣게 썩었다고.
바람은 말하지
너에게 다가가기 위해 난 거칠고 험해졌다고
차운 바람이 부는 어느 날 해바라기는 중얼거리지
네가 있어서 참 좋았다고
바람도 답하지
네가 있었기에 외롭지 않았다고.
「독백」 전문 인용
자기 모습을 해바라기에 투영해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해바라기를 흔드는 바람과 해 바라기 하는 해바라기의 모습. 아마 해바라기는 자기를 향해서 밝음을 주는 쪽을 향해 있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밝음을 주는 쪽이라는 문장에 주목해 읽는다. 내가 밝음을 향해 있다면 누군가가 나를 밝음이라고 인식하고 나를 향해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 사는 일은 대개 그렇다. 내가 밝음을 의지하고 살 듯, 누군가 나의 밝음을 인식하고 사는 주고받는 밝음의 온기가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법이다. 공존, 공생이라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삶의 진리는 이렇듯 내가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적정한 배열을 유지하며 사는 법이다. 해바라기는 속이 까맣게 썩고, 바람은 거칠고 험해졌다고, 하지만 그 모든 고통의 시간이 결국 외롭지 않게 만든 시련의 계절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네가 존재함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공존의 의미는 무척 큰 무게를 갖고 있다. 서로 도와서 함께 있는 것을 공존 共存이라고 한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때론 그 더불어의 상대방이 곤혹스럽게 하고 아프게 한다 해도 결국 그것은 우리들의 생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시제를 독백이라고 한 것이라는 심증이 든다.
보이지 않는 마음
카톡 카톡
어느 모임방에서
늦은 시간
이른 시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카톡 알림 때문에 화를 내는 이모티콘이 올라오곤 한다
난 무음으로 해놓고 하루에 몰아서 보곤 한다
카톡을 안 본다고 짜증을 듣기도 하지만
나의 자유로움에 고쳐나갈 생각이 없다
어느 날 늘 푸른 소나무와 차를 마시는데
좋은 글이 있으면 제일 먼저 동생이 생각나고
"이런 음악, 이런 그림도 좋아하겠지!" 해서 보내주는 관심이라고 한다
순간 햇볕에 말라버린 지렁이처럼 온몸이 말라붙었다
바쁘다는 핑계가 궁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보이지 않는 마음」 전문 인용
꽃이라는 작품에서 김춘수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꽃의 움직임이나 생과 소멸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을 때는 꽃은 그저 무생물의 하나지만 내가 관심을 두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된다는 의미. 관심은 그런 것이다. 작은 것 하나도 소홀하게 보지 않고 너를 떠올리고, 너와 관계를 맺는 것.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마음이다. 어쩌면 말을 하면서부터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더 치중하게 된 것이 우리네 삶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속을 읽어주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사람 읽기라는 과목인데 단순히 말에 기반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편견을 갖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좋은 글이 있으면 동생이 먼저 생각나고, 음악, 그림 모두 동생이 생각나는 것은 마음이다. 보여줄 수 없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읽는 연습을 해야 한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시인만의 페르소나 Persona, 지혜로운 삶의 방정식이다.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사랑은 진행형
할미가 좋으냐
응
얼마큼
이~만큼, (두 손을 활짝 벌려) 내가 보이는 거 다만큼
오구 ~ 내 새끼
작은 가슴 끌어안고 숨죽여 떨구는 냇물
이유를 모르는 손녀는
그 상황이 자기 잘못인 것 같아 따라 운다
이제 할미가 된 그 손녀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라고 손주에게 묻는다
엄마
엄마만?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최면에 걸려 주문을 외는 듯 노래한다
내게는 엄마였던 할머니
지나간 슬픈 상념들 뒤로하고
단풍잎 같은 작은 손을 조물거리며 따뜻함을 품는다
오징어잡이 불빛이 밤하늘에 반사되어
불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목마른 밤바다
사랑은 진행형이다.
「사랑은 진행형」 전문 인용
진행형이란 말은 완결되지 않고 계속 행해지는 어떤 상황이나 상태를 이야기한다. 동사 시제의 하나로 나아감꼴이라고 하기도 한다. 쉬운 말인데 구태여 국어 사전적 설명을 붙인 것은 결구의 사랑은 진행형이라는 말에 눈길이 가서 그렇다. 살다 보면 완결이란 말은 종료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 종료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종료의 의미로 완벽한 것인지는 필자도 잘 모른다. 비록 여기에는 없지만 내가 수시로 그리워하고 마음에 담아두고 언제나 꺼내 볼 수 있다면 그것을 완료라고 볼 수 있을 것인지? 죽음은 물리적이다. 하지만 물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감성적인 완결은 누구에게나 현재진행형이 될 것 같다. /오징어잡이 불빛이 밤하늘에 반사되어/ 불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목마른 밤바다/그 불빛 어딘가를 어룽거리는 따듯한 마음들, 유년의 어느 한때의 아궁이를 달구던 정과 사랑이라는 장작불을 기억하는 시인의 마음이 그 자체로 한 편의 시라고 한들 누가 뭐라 할 것인지. 손녀, 할미, 엄마, 내 새끼, 이 모든 평이한 단어 속에 숨어있는 가장 위대한 말, 사랑. 시인의 말처럼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세상이 어떻든 간에 진행형이다.
아들
임신한 뒤태가 예쁘다며 아들인가 보다
입덧을 안 하니 효자인가 보다
동네 어르신들의 말씀이었다
우렁찬 울음소리 터트리던 날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큰 감동을 준 아들
젖꼭지 물릴 때 가슴속 뭉클함에 뜨거운 눈물 짓게 하던 아이다
병원에서 나와 목욕시킬 때 나를 긴장시켰던 첫아이다
4개월쯤 지나서인가 아이와 옹알이 할 때
잇몸에서 하얀 이가 나온 것을 보곤 그 경이로운 감동이란...
학교 다닐 때 똑똑하여 나에게 기쁨을 준 아이
사춘기 지날 때 나에게 절망과 아픔을 주었던 아들
기대치를 낮추니 비로소 아이가 예쁘게 보이고
기대치가 높아 항상 부족하게만 생각되었던 아들
믿어주고 기다리면
스스로 알아서 다 한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이제야 알겠다
울 아들에게 난 사과한다,
미안해 엄마가 너무 조급증을 내서...
그리고 고마워.
「아들」 전문 인용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속엔 셈법이 따로 없다. 무조건 손해 보는 장사다. 한 푼의 이문이라도 남길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주었다고 반대급부로 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물이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듯 그저 흐르는 것이다. 사랑이 흘러내려 아들에게 가는 것이다. 수태 후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아들. 너 때문에 힘들었지만 결국 너 때문에 행복했다고 말하게 만드는 것이 자식이다. 핏덩이 붉은 얼굴로 나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다 사춘기 접어들어 어미 속을 있는 대로 긁어 놓다가 때론 어미를 절망 속에서 휘청거리게 하기도 하다, 그런 것이 인생이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자식이라는 아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아이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것은 아닌지? 내 자식이라는 이유로 남의 아이들과 특별하게 생각한 것은 아닌지? 오히려 그것이 더 아이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해서 그 스트레스의 상승작용이 내게 다가와 나를 힘들게 만든 것은 아닌지? 시인은 그런 반성을 하고 있다. 아들에게 보내는 마음을 자신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서로 극복해 보자는 의미로 들린다. 아들에게 사과하는 엄마. 그 모습을 쉽게 보기 어려운 것이다. 현대사회의 모럴은 많이 변화했다. 사과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자기로부터의 반성이 수반될 때 가족은 행복해지고 보다 환한 미래가 찾아올 것이라는 지혜를 시로 표현한 것이다. 시가 그래서 중요하다. 뒤돌아볼 수 있다는 것. 아니, 뒤돌아봐야 봐야 한다는 것. 그래서 뒤안길의 어느 지점에서 미래의 우리를 그린다는 것에서 시를 쓰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시는 다분히 미래지향적이다. 시는 말로 하지 못한 말을 토해내는 것이다. 글을 통해 글의 기교가 아닌 마음을 통해 온전한 나를 전달하고 전승하는 것이기에 시인은 위대한 것이다.
세 잎 클로버
강변 뚝 무리 지어 핀 클로버
존재감 없는 클로버는
당당히 무리 지어 자기만의 세상을 만든다
습관처럼 찾는 네잎클로버
짓밟혀진 꽃들과
꽃반지 사이로 해가 진다
일상에서 만나는 소소한 행복
수많은 세 잎 클로버 속에
네잎클로버가 숨겨진 것은
행운은 행복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일 거다
어쩌면
이 작은 아름다움이
나의 빈 가슴을 채우고 있을 거야
침묵하며 나를 강하게 만들겠지
행복은 가진 자의 것이 아니라
느끼는 자의 것이기에.
「세 잎 클로버」 전문 인용
누구나 공감하는 일. 세 잎 클로버 사이에서 네잎클로버를 찾는 것.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시인은 말한다. /수많은 세 잎 클로버 속에/네잎클로버가 숨겨진 것은/행운은 행복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일 거다/ 라고 말한다. 생각해 보면 정확히 맞는 말이다. 동시에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엿보이는 말이기도 하다. 살아온 경륜에서 얻어진 평범한 진리. 어쩌면 그것이 일상에서 만나는 소소한 행복의 몇 가지 중 하나일 지도 모른다. 대단하고 가치 있는 행복이 아닌, 소소한 행복. 우리가 원하는 행복의 조건은 소소한 이라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소하기에 누구나 꿈꿀 수 있고 소소하기에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작은 것들의 의미. 무게는 어느 것이 무거운지 모른다. 소소한 것과 소소하지 않은 것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기에 측량할 수 없다. 그래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작은 행복에 가치를 더 두면 삶이 조금은 더 가벼워지고 홀가분해진다. 세 잎 속에서 네 잎을 만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 네 잎이 행운을 주는 것인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발견 당시는 행복하다. 행운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기는 했지만, 그 순간의 기쁨이 나를 기쁘게 한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이 거친 세상에서 더 얻을 것이 없다면 소소한 행복에 가치 기준을 두고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자세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든다. 욕심이 과하기에 망하는 것이며 탐욕이 강하기에 쓰러지는 것이 인생의 법칙이다. 주어진 대로 아니, 쥘 수 있을 만큼만 손에 쥐면 차고 넘치는 것이 손바닥인데 더 얹은들 모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최인혜 시인은 말한다. 행복은 가진 자의 것이 아니라, 느끼는 사람의 것이라고.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세상 아무것도 부럽지 않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몫의 행복을 만끽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시인이 말한다. 귀 기울여 듣자.
바람난 개나리
봄을 기다리는
백운산 자락에는
강아지풀 빨대로
노란 물감을 올리는 중이다
손 흔들어 반겨주는
이름 모를 잔가지들
더 깊은숨을 쉬며 힘겨운 초록을 빨아올리고
떠나지 못하는 잔설은
햇님에게 불려 간 서러움에 울고 있다
그 서러움은 계곡에서 만나
실로폰으로 작은북을 치는 푸른 물소리
오두방정 개나리
급하게 햇님 마중 나왔다가 사랑에 빠져 버렸네
그대는 나의 별
밤하늘 별님을 유혹하다가
지나가던 바람에게 들켜 버렸네
아, 어쩌면 좋아.
「바람난 개나리」 전문 인용
이 시집의 제목으로 명명된 작품이다. 바람난 개나리라는 알레고리가 소박하게 재밌다. 작품의 면면이 어린 시절의 어느 한때를 연상시키는 순수함이 묻어있고 시인이 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이 맑고 청명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로폰으로 작은북을 치는 푸른 물소리/아, 어쩌면 좋아./ 이런 표현에서 풋풋한 글 향이 느껴진다. 완숙한 작가의 글보다 더 진한 향이 느껴지는 것은 온전하게 전달되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전령 때문일 것이다. 은근하게 때론 유구하게 풀어내는 바람난 개나리에서 시인의 감성을 정확하게 알게 되는 것 같다. 누구나 일독하면 마음 한 부분이 청량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시가 할 수 있는 존재 이유다. 이제 곧 봄이다. 노랗게 빛나는 개나리를 보면서 최인혜 시인의 바람난 개나리를 곁들여 읽는다면 이 봄이 그렇게 야속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목련이 피고 지는 사이에 햇살 한 줌 손에 그러쥐고 시집 한 권 들고 여유 있게 나들이해보자. 개나리처럼 우리도 바람이 날 것이다. 봄의 미풍에, 봄의 화사함에, 봄의 느긋함에, 그렇게 우리 같이 동화하며 사는 것이다.
너라는 이름
이름이란
대답이 없어도
끊임없이 부를 수 있는 특권인가 봅니다
메아리라면
되돌아올 수도 있으련만
공허하게 부르는 내 안의 웅얼거림
사람들은
이것을 슬픔이라 말하겠지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간섭하게 되고 집착하다 보면
내 안의 울렁거림으로 인하여
상처로 남는 것임을,
서로에게 상처임을
가끔은
그런 것을 그리움이라고
그리움이었다고
포장하고 싶어집니다
「너라는 이름」 전문 인용
누구나 이름이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불릴 수 없는 이름도 있다. 아니, 이름을 부르는 자체로 눈물부터 나는 사람이 있다. 그리움의 실체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리움은 나를 거짓된 위선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포장하여 만든 포장지 속 알맹이는 맹탕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가진 그리움의 실체를 내보이기 싫어서. 실체로 인하여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부득이 포장해야 할 때가 있다. 분명한 것은 그리움이 그리움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남은 상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 상처로 인해 그리움의 상흔이 더 큰 것인지도 모르지만 너라는 이름이 내게 준 것, 혹은 남기고 간 것은 몫이다. 그리움은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와중에서 너를, 네 이름을 그리움이라고 포장하고 싶을 때, 이전의 그 집착이 안타까운 회한이 될 때, 삶은 지금보다 더 감상의 그늘 밑에서 자라는 기생식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버려두는 것이다. 몰래 이름도 불러보고 몰래 눈물도 훔쳐보고 그러다 지쳐 하늘 한 번 쳐다보는 것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그리움과 나 사이 지근거리는 늘 적당해야 한다. 그 거리의 이격 속에 당신과 내가 존재하는 것이기에, 더 그리운 법이기에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3. 맺으며
몇 편의 작품 감상을 통해 시인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알게 되었다고 하면 위증이다. 최인혜 시인이 살아온 궤적을 내가 모르며 감상의 밑바닥을 내가 모르며, 시인이 소유한 아픔의 크기를 내가 모르며, 삶의 고단한 무게를 감히 짐작할 수 없기에 이렇다며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꽤 오랜 시간을 글과 함께 자신을 다독이며 살아온 것과 글을 통해 자기반성을 많이 했다는 것. 그런 연유로 조금 더 가치 있는 말을 자식에게 남겨주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들은 전혀 예상하지 않은 시간에 전혀 예상 못 한 나를 만나기도 한다. 이 시집의 서평에 부제로 놓은 어느 일몰의 근처에서 나를 만났을 때라는 부제를 붙인 이유다. 그렇게 인식하지 못할 사이에 나를 만나고 내 이야기에 솔깃하게 귀 기울이는 나를 만나고 내 기억보다 오래돼 버린 이야기 속의 어린 나를 만나고, 힘들고 어려운 삶의 여정을 버티고 살아온 나를 만나서 한바탕 울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최인혜 시인의 작품이 그렇다. 기교적으로 화려한 수사나 달필의 문장력이 아닌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하는 말의 크기가 크고 온유하다면 맞는 말일 것 같다. 때로는 서사가 아닌, 생활에서, 현장에서, 뒤안길에서 더 많은 나를 만나게 된다. 내가 만난 내가 솔직하고 진솔할수록 내 삶은 정당하고 바른길을 살아낸 것이다. 최인혜 시인의 시집 「바람난 개나리」에서 시인이 말하는 시인과 내가 만나 우리가 된다면 이 봄을 좀 더 환하게 빛을 수 있을 것이다. 시는 마음에 쓰는 편지다. 내 마음에 당신 마음에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에 쓰는 편지라는 생각으로 일독을 권한다. 최인혜 시인의 첫 시집 상재를 축하드리며 5부에 수록된 시 한 편을 소개하며 맺는다. (김부회)
이해한다는 것은
최인혜
하느님도 외로워 산 밑으로 내려와 그늘을 만든다는 저녁
마음의 화를 참을 수 없어 애마와 동행을 합니다
해님도 집을 찾아가는 길
가난한 나와 함께 합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 어깨와 나란히 하면서
성난 나를 토닥이며 속삭입니다
이해란
남의 생각을 완전히 아는 게 아니라
다르게도 생각할 수 있다는 걸 공감하는 것 이라고요
하늘 저쪽 기러기 떼 한 가족 무리도
엄마 아빠 앞세우고 집을 찾아갑니다
함께 하던 햇님도 친구를 찾았는지
산 너머로 발그레 물들이며 축제를 합니다.
최인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