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이 연민으로 / 최미숙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는 21년이 됐다. 엄마는 가끔 꿈에 보는데 아버지는 통 나타나지 않는다. 세상을 떠나는 순간 이승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모든 것이 끝나는데 그래도 아주 가끔은 생각나고 보고 싶다. 살아 계실 때 엄마에게 좋은 남편이 못 됐고, 우리 6남매에게도 존경의 대상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젊어서 엄마 고향인 남원에서 경찰로 근무하다 윗사람과의 충돌로 직장을 그만두고 할머니가 있는 순천으로 왔다고 들었다. 178cm로 키도 크고 검도 축구, 못 하는 운동이 없었으며 극본도 쓰는 등 유능한 사람이었다. 우리 집 책꽂이에 빽빽하게 있었던 세계 명작이 다 아버지가 마련한 책이었을 텐데 가끔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심심할 때마다 한 권씩 꺼내 읽고 내가 책을 가까이한 계기가 됐다.
어쨌든 아버지는 하는 일마다 뜻대로 풀리지 않아 술을 자주 마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니 엄마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양복점을 했지만 기술이 없으니 남 좋은 일만 하고 뒤처리는 엄마 몫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주 다투었고, 술 먹는 일이 잦았다. 나를 제일 곤혹스럽게 한 일은 해마다 학기 초에 하는 가정 환경 조사서 아버지 직업란을 쓰는 것이다. 매번 고민스러웠다. 빈칸으로 둘 수도 없어 ‘상업’이라고 적어 내기는 했지만 거짓말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고 급기야는 번듯한 직업이 없는 아버지가 무능해 보였다. 아침이면 시간에 맞춰 출근하는 아버지가 있는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밤낮없이 바느질하며 가족 생계를 책임진 엄마가 안쓰러워 사춘기가 되면서는 아버지를 원망도 많이 했다. 언니와 동생들도 그랬다.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반을 가르치는 체육 선생님이 집과 마주 보는 미장원에 세 들어 살았다. 그 시절 아버지는 술에 절어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그날도 거나하게 취해 비틀비틀 걸어오다 동네 사람과 시비가 붙은 모양이다. 아버지 싸우는 소리가 집안까지 들렸다. 놀라 엄마와 함께 밖으로 나갔더니 하필 체육 선생님이 나서서 싸움을 말리고 있었다. 혹시나 그런 불상사가 생길까 봐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내가 예상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너무 창피해 당장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체육 선생님이 길거리에서 싸움질이나 하는 아버지를 둔 나와 우리 식구를 가련하게 생각할까 봐 자존심도 상하고 수치스러워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후로 가끔 대문을 나서다 마주치면 얼른 인사만 하고 도망치듯 피했고, 혹시 만날까 봐 문틈으로 망을 보고 나가곤 했다. 내게 양궁을 권하기도 했지만 안 한다고 했다. 사춘기 시절 내내 우리 아버지도 멋진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도 엄했다. 그때는 학교에서도 제약이 많아, 중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문화생활이 거의 없었다. 사복은 입지도 못했고, 영화관이나 빵집을 가면 정학을 당하는 말도 안 되는 시절이었다. 가끔 교회 학생부 활동으로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버지가 무서워 나는 아예 꼼짝도 하지 않고 집과 학교만 오갔으며, 쉬는 날은 할 일이 없어 책장에 있는 문학 전집을 주로 읽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커다란 산 같은 아버지였는데 예순둘에 외할머니 성묘 다녀오다 발을 헛디뎌 목뼈가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했다. 2년여의 재활치료 끝에 전신 마비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으로 12년 동안 휠체어 생활을 했다. 그 큰 덩치로 서너 살 아이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삶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많이 아팠고 괴로웠다. 다른 사람 손을 빌려야만 생활이 가능했던 아버지는 절망했고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턱 막혔다.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했던 마음이 연민으로 변했다. 12년 세월 직장 생활하며 아이들 키우느라 바빠 잊을 때도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항상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무겁고 우울했다. 그래도 힘들어하는 부모님을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해 도왔다.
세월이 약이다. 아팠던 상처에 희미하게 흉터는 남았지만, 새살이 올라 이렇게 글로 한 번씩 어루만진다. 자신의 답답한 삶이 싫어 술로 마음을 달랬을 아버지 마음을 이해한다. 휠체어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미워했던 마음은 버렸다. 미움도 연민도 다 사랑에서 나온다. 혹여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부디 복 있는 인생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살아계실 때 한 번도 건네지 못한 말이다. 아버지 늦었지만 사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