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림보살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중생의 세계는 모두가 삼세 안에 있고
삼세의 중생들은 모두 오온(五蘊) 중에 있으니
모든 온(蘊)은 업(業)이 근본이요,
모든 업은 마음이 근본이니
마음이란 꼭두각시와 같으며
세간도 그러합니다.
세간은 스스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다른 이가 이룬 것도 아니지만
이루어짐이 있으니
역시 파괴도 있는 것이고,
세간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세간이 파괴도 하거니와
세간을 분명히 통달한 이는
이 둘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세간이라고 하고
어떤 것을 세간이 아니라고 하지만
세간과 세간 아닌 것은 이름만 다를 뿐이며
삼세와 오온(五蘊)을 말하여 세간이라 하고
그가 멸한 것을 세간이 아니라고 합니다.
무엇을 여러 가지 온(蘊)이라 하며
온은 무슨 성품을 지녔는가.
온의 성품은 멸할 수 없으니
그래서 생(生)이 없다고 하며,
이 온을 분별하여 보면
그 성품은 본래부터 공적(空寂)하므로
멸할 수 없으니, 이것이 생이 없다는 이치입니다.
중생도 이미 이러하면
부처님도 역시 이러할 것이며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에
그 성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모든 법이 진실하여
뒤바뀌지 않은 줄을 알면
일체지(一切智)를 얻으신 부처님은
항상 눈앞에 나타납니다.
(<화엄경> 제 16장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設偈品)’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주님, 누가 주님의 장막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혀를 놀려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깨뜨리지 않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높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며,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불경은 반복되고, 그 반복을 보면서도 나의 기억은 소멸해가는구나. 오온(五蘊)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결국 네이버에 의존해 다시 더듬고, 돌아서면 또 잊겠지. 그 모든 것을 공적(空寂)이라 인식하며 나를 위로하겠지. 앞으로 갈수록 더 그렇겠지.
오늘 시편에서 두 가지만 보자.
먼저 “혀를 놀려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혀를 놀려 남의 허물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말하지 않으면 마음에 울화가 쌓여 내가 힘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성경의 말씀들은 실천하기 지극히 힘들다는 생각이다. 변함이 없을 것이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실천 항목을 세세히 말하는 것은 모두가 더불어 사는 공동체 유지를 위해서다. 그렇지만 참으로 어렵다. 늘 말하지만 말은 할 수 있어도 몸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정원가의 열두 달>에 나오는 글이다.
[지금 해내지 못한 일들은 4월에도 일어날 수 없다. 미래란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싹눈 속에 자리하고 있다.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있다. 지금 우리 곁에 자리하지 않은 것들은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 단지 땅속에 숨어 있기에 새싹을 보지 못하듯, 우리 내부에 자리하고 있기에 우리는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러져버린 과거의 잔여물이 풍기는 쇠락의 냄새는 곧잘 맡는다. 하지만 이처럼 노쇠하고 헐벗은 땅속에서 끝없이 움트는 하얗고 통통한 새싹은 왜 보지 못하는지!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순간이다.
얼마나 많은 씨앗들이 비밀스럽게 싹을 틔우는지, 얼마나 많은 힘을 끌어 모아 새로운 싹눈을 품는지, 생명을 한껏 꽃피울 순간을 그네들이 얼마나 고대하는지. 우리 내면에 자리한 미래의 비밀스럽고도 분주한 몸짓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멜랑콜리와 불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덧없는지를, 또한 살아있음이, 인간(시간에 따라 성장할 수 있는 존재)으로 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식물의 씨를 보면서 우리 내면에서 언제든 피워날 수 있는 싹눈이 있다는 것, 그걸 보는 것이 내면을 본다는 것, 그 순간은 늘 바로 지금이라는 것, 대단한 연결이고, 깊이 공감하는 글이고, 나도 인용해서 해설할 내용이다. <정원가의 열두 달> 작가에게 감사드린다. 감사합니다.
<꽃은 알고 있다>에 나오는 글이다.
[관련 문헌을 뒤지고 나서야 비로소 꽃가루가 춤을 추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 전기 현상이었다. 꽃가루는 음전하를 띠며, 그에 따라 모든 양전하에 끌린다. 반면에 벌은 양전하를 띠며(놀라운 사실이다), 그에 따라 가장 강한 음전하를 지닌 꽃에 끌린다. 예전에 나는 줄곧 꽃가루가 벌에 달라붙는 이유는 벌의 몸에 털이 많고 꽃가루가 끈적이기 때문이라고만 추측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꽃가루가 꽃에서 수분 매개자가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정전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이제 분명하다. 음전하를 띤 꽃가루는 전기적 끌림을 통해 양전하를 띤 벌의 몸으로 펄쩍 튀어 오른다.]
위 글을 이렇게 해석해 볼 수도 있을까? 꽃은 음전하를 띠고, 사람은 양전하를 띤다고 말이다. 잠시 검색을 해보았는데, 못 찾았다.
모든 생명현상은 물리 화학 현상이다. 이를 정확히 이해하려고 연구하는 분야가 과학이다. 현미경으로 세포 한 번 본 적 없는 나는 여기에 이끌리기는 하지만 엄두가 안 난다. 입문하기에는 늦은 나이다. 이것도 핑계라고 할 수 있지만, 과학자들 책을 보며 그렇구나 하며 넘어가자. 그게 낫다.
헤세의 <싯다르타>에 나오는 글이다.
[“저는 빈털터리이지요.”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의미대로라면 말입니다. 확실히 저는 빈털터리입니다. 그렇지만 그건 제가 좋아서 한 일이고, 저는 곤궁한 것은 아닙니다.”]
멋진 삶이다. 배우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빈털터리에서 벗어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상대적인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싯다르타처럼 빈털터리이지만 곤궁하지 않다는 생각을 만들어가야겠다. 헤세에게 감사드린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꽃은 아름다운 생명
사람은 꽃을 보고 배워야 하는 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