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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40
6월28일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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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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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YdNIkCshpE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53167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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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십자가가 다가올 때면>
갑작스런 호출을 받고 심야에 병자성사를 드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죄송한데요, 지금 위독하신데, 신부님을 모실 수가 없어서요."
사제들에게는 담당구역이 확실하기에 신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병자성사는 관할 본당 신부님들이나 원목신부님들께 부탁하도록 안내합니다. 그러나 정 상황이 안 될 때는 사제 양심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당장 돌아가시기 직전이라는데…. 신속히 가방을 챙기고, 재빨리 시동을 겁니다. 신호도 어깁니다.
병자성사를 드리러 부랴부랴 집중치료실에 도착해 보니 한 형제분께서 거의 임종 직전에 도달해 계셨습니다. 온 몸은 응급조치를 위한 각종 호스며 전선들로 복잡했습니다. 얼굴에는 핏기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연신 숨을 가삐 몰아쉬고 계셨습니다.
숨이 너무도 가쁜 나머지 괴로워 어쩔 줄 모르는 환자분을 바라보는 가족들 역시 함께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저 역시 안타까운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제발 저 답답한 호흡곤란 증세를 완화시켜 주셔서 마지막 가시는 길, 편히 가실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단말마의 고통을 겪고 계신 형제님,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던 형제님 얼굴에 예수님 얼굴이 겹쳐졌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도 지독한 호흡곤란 증세로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꽝꽝' 대못이 박힌 손과 발의 통증도 이루 말로 다 표현 못할 고통이었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체중이 아래로 쏠리는 현상으로 인한 심장 압박, 그로 인한 호흡곤란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호흡이 곤란했던 예수님께서는 그때마다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힘을 다해 온 몸을 위로 뻗으셨습니다. 그러면 잠시나마 호흡곤란 증세가 완화됐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다시 내리누르는 체중 압박으로 되풀이되는 호흡곤란…. 십자가 위에서 몇 시간은 정녕 혹독한 고통의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세상이 통곡하던 그 성 금요일로 되돌아가 봅니다.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셔서 호흡곤란에 헐떡이시는 예수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전지전능하셨던 분, 죽은 사람마저도 다시 살리셨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비극적 죽음, 피하고자 마음 먹었으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그 고독한 길, 죽음과도 같은 형극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십니다. 그 치욕의 십자가 위에 자진해서 매달리십니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뜻을 단 한치 오차도 없이 실천하신 예수님, 그분의 순명으로 세상 구원이 왔습니다. 우리 죄인들도 희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결국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하느님 나라도 없습니다. 자기희생을 동반한 십자가 외에 천국으로 향하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한 세상 살다 보면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십자가들, 절대로 바라지 않았던 십자가들이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 그 어떤 십자가는 지독하게도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삶 전체를 휘감습니다. 어쩌면 평생 우리가 지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물론 한평생 십자가를 예방하면서,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살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무작정 십자가를 피해 다닐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 수용' '십자가의 가치 인정' '십자가에 대한 의미부여'입니다. 결국 십자가 앞에 대범해지는 길입니다. 십자가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고 십자가를 친구처럼 여기자는 것입니다. 십자가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매일 걷는 십자가의 길 그 도상 위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십자가의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지고 가는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와 수용, 의미부여가 가능합니다.
번민과 고통의 십자가가 엄습해오는 순간은 하느님 만날 준비를 하는 순간으로 생각하십시오. 치욕의 십자가가 다가오는 순간은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은총의 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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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상대가 나를 진정으로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rxzZoJD0N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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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나를 진정 사랑해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고 다가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이용하려 다가오는 사람도 사실 자신이 그런 줄 모르는 때도 있습니다. 자신은 사랑한다고 다가오지만, 자신의 본성이 아직 저급한 상태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내가 에너지를 더 쏟아야 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나의 몫입니다. 이 구분을 잘하지 못하면 모기에게 속아서 피를 빨리느라고 평생을 허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중에, 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전에 다니던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하다가 저의 치아를 갈라지게 한 의사 선생님이 있습니다. 어찌나 미안해하던지 저에게 모든 것을 해 줄 기세였습니다. 제가 사제라고 말하니까, 신자가 아님에도 자신의 남편의 친구 중에 사제가 있다고 하며 문밖에 나갈 때까지 저에게 관심을 주었습니다. 우선은 갈라진 치아를 임시로 붙여서 크라운을 씌웠습니다. 쓸 수 있을 때까지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 치아가 조금 아파서 같은 치과에 찾아갔습니다. 그분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저를 대하는 것도 이전과는 딴 판이었습니다. 그리고 치아가 갈라져 있으니 빨리 뽑고 임플란트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해 놓고 잊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제 치아를 이렇게 갈라지게 한 분이 당신입니다.”라고 말하여 기억을 되살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제가 그때 찾아왔던 신부입 ... .”
그분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오늘 뽑고 가실래요?”
자신의 의도가 너무 앞서니 제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잠시 제 치아와 이별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며 그 치과를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그 치과에 가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치아를 정상적으로 잘 쓰고 있습니다. 쓸 수 있을 때까지 쓸 생각입니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려면 나의 말을 경청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할 때는 나의 말을 잘 들으려 합니다. 그러나 건성으로 듣거나 듣지 않으려는 모습이 있으면서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입니다.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저는 몇 년 동안 제 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저를 좋아하는 줄 착각하여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나가는 것은 무엇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말을 듣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에 관심이 없으면 그 말하는 사람에게도 사실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관심이 생겨야 그 사람이 말하는 것에도 관심을 두게 됩니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일화라고 합니다. 버나드 쇼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각가 로댕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귀한 로댕의 그림 스케치를 구했다고 하며 그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로댕을 좋아하는 그 친구들은 그 그림만 보며 예술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온갖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때 버나드 쇼가 “아, 미안합니다. 이 그림은 로댕의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것이었네요.”라고 말했을 때 장내는 정적만이 흘렀다고 합니다.
[출처: ‘말의 품격’, 이기주, 유튜브 ‘책 읽는 다락방 J’]
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이 하는 말도 싫게 들립니다. 모든 것이 싫게 들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을 바꾸어 잘 보이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지난 복권을 사려고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빨리 포기하고 나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는 새로운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이 삶을 허비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물론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 참아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쫓아갈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지, 가족이나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을 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으면 아버지에게도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누군가를 알리기 위해 파견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입으로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도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내가 예수님을 더 좋아하는지, 아니면 이용하기 위해 다가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파견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곧 파견한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교회에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이고, 교회가 하는 말과 가르침에 관심이 없다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교회의 권위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신자들은 모이면 주로 누구에 대해 말을 많이 하나요? 아마 본당의 사제와 수녀님들에 대해 말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잘하면서도 뒤돌아서면 그분들을 굳이 안 좋게 말하는 신자분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들어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주님께서 왕으로 뽑으셨다는 것 하나 때문에 끝까지 그를 공경하였습니다.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결코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손을 댈 수 없다며 자신의 원수지만 용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태도는 그분이 파견하신 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렸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 파견하신 이도 사랑합니다. 그 인품에 상관이 없습니다. 인품이 좋으면 더 좋겠지만, 그분이 파견하신 분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라도 공경한다면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매번 인사이동 때마다 주님께서 파견하시는 이들 앞에서 주님께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시험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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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다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회’요 ‘장소’이다. 특히 하느님께서 전교사명을 통해 특별히 존재하는 사람들 즉 ‘예언자’나 ‘옳은 사람’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제1독서: 2열왕 4,8-11.14-16a: 엘리사와 수넴의 여인
수넴의 여인은 그 지방을 지나다녔던 예언자 엘리사를 극진히 환대하고 남편에게도 그것을 설득한다(9-10절).하느님께서는 이 여인의 열성을 엘리사를 통해 갚아주신다. 즉 그 여인은 아들이 없었고 남편도 나이가 많아 아기를 낳을 수가 없는 나이였는데도 아들을 갖게 되리라고 예언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14-17절). 나그네를 대접한다는 것은 생명의 가치를 지닌 행위이다. 그것은 ‘생존여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나그네 대접을 받지 못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의 행위이며,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나그네 대접’에 대한 보상으로 주시고 계시다.
제1독서의 ‘나그네 대접’에는 인간적 차원 외에 ‘거룩한’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 수넴의 여인은 그 점을 확언하고 있다. “틀림없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9절) 이제 ‘신앙’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나그네 대접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가 되게 해줄 것이다.
복음: 마태 10,37-42: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박해를 야기할 뿐 아니라, 복음선포 사명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결단력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해시켜주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37-39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면 끊어버려야 할 인간관계의 범위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그리스도만이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신앙 안에서 심리학적 측면이나 광신적 행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영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38절). 또한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단순한 가정이 아닌 분명한 현실로서의 십자가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느님과 진리에 충실하신 그분 존재의 본질적 차원이었다. 즉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형제들을 위해 행동하셨던, 그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역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분의 길을 철저히 따라야하기 때문이며, 생존을 위한 타협이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의 힘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예수께서는 당시 전통적으로 인식되고 있던 합법적인 ‘대리권’의 원리에 따라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당신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물론 파견 받은 자와 파견하신 분은 다르다. 선교사명에 있어서도 주관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명 자체에는 ‘연속성’이 있다. 이 ‘대리권’외에 다른 원리는 사도들을 ‘맞아들임으로써’ 복음선포를 돕는 사람은 복음선포 그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41-42절)
여기서 ‘맞아들이다’는 말은 물질적 차원에서의 ‘맞아들이기’ 즉 수넴의 여인이 예언자 엘리사에게 했던 것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한 ‘나그네 대접’의 의미이기도 하다. 즉 물질적 의미 외에 ‘신앙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하느님의 도구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 ‘예언자’는 예언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옳은 사람’은 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기에 사도로 사명을 받지 못했지만 사도들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사도적’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 ‘옳은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들’(41-42절)은 모두 복음 선포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연계된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요구되는 ‘성성’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복음선포 사명이다. 자신은 죽음을 당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셔야 한다.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철저한 자기 포기이다.
제2독서: 로마 6,3-4.8-11: 세례를 받고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점에 대해서 세례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세례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묻힘’에 참여케 함으로써 ‘부활’에 참여케 해준다. 십자가는 십자가로만 남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3-4.11절).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11절)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죽음’과 ‘생명’의 상징적 의미를 윤리적 행위의 개념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신자의 죽음과 생명 두 순간이 동시적(同時的)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말한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는 죽음과 생명이 끝없는 투쟁을 벌일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매일의 십자가를 안겨준다.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23).
우리는 모두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복음 선포자들에게 협조함으로써, 그들이 더욱 복음을 선포하는데 잘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같은 상을 받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선포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하나하나 없애면서 절대가치이신 그리스도를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될 때, 우리의 삶도, 이 사회도 아름답게 변화되어 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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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후배 신학생들이 한국 식료품을 소포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묵상은 후배들에게 쓴 제 답장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대들이 참으로 어리석은 이들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도 한국 식료품을 살 수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기어이 소포를 보내고야 마는 그대들은 어리석습니다. 12시간 넘게 걸리는 이곳에 소포를 보내면 고추장 용기가 깨질 수 있다는 사실보다, 이 사람이 고추장 한 숟가락 먹지 못할까 걱정하는 그대들은 어리석습니다. 시험, 논문 등으로 바쁜 시기인데 귀한 시간 쪼개서 보답도 없는 소포를 보내는 그대들은 어리석습니다. 세상은 그대들처럼 그리 어리석지 않습니다. 받을 것 다 받고, 자기 앞가림부터 챙기고, 손익 계산에 재빨라야 살 만하다는 것을 그대들처럼 모르지 않습니다.
그대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저는 어리석은 또 다른 사람들을 기억하였습니다. 가족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을 어린 사제에게 털어놓았던 교우분들, 타지에서 고생한다며 봉투를 쥐어 주시던 선배 신부님들, 세상 좋은 것들을 마다하고 울타리 속에서 기도와 노동으로 살겠다고 세속의 옷을 벗은 젊은 처자들 ……. 프란치스코 성인도 그렇게 어리석어 한평생 거지로 살았고, 가타리나 성녀도 긴 머리를 잘랐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도 자신의 젊은 생명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죄없이 고통을 받고 돌아가시면서도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을 용서하시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달리시고야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이들이여, 그대들의 어리석음이 하느님께 큰 찬양이 되었으리라,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것이라, 그대 자신들을 살릴 것이라 믿습니다. 어리석은 그대들에게 제 어리석은 사랑을 고백합니다. 사랑합니다. 함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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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버림과 따름>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말씀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세속적인 것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세속적인 것들’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소홀히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은, “내가 주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표현이 아니라 뜻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는 가르침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가족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사랑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예수님 말씀은 가족을 버리라는 가르침도 아니고,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가족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이고, 신앙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또 가장 옆에 있는 영적 동반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가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가정을 이루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2) 무조건 잘해 주고, 좋아하고, 아끼고, 보살피는 것, 그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선을 바탕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이고, 선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입니다. (선의 실현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집착일 뿐입니다.) 따라서 악을 물리치고 선만 지향하는 것,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만일에 가족이 어떤 죄를 짓고 있을 때, 그리고 그 죄 속에서 살면서 멸망을 향해서 갈 때, 가족을 따라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가족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막고, 선과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3) 구원은 일차적으로 ‘내가’ 받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내가’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 혼자서’ 받고, ‘나 혼자서’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가족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또 이웃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관심 갖지 않고, 자기 혼자서만 구원받으려고 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고 한다면, 그런 식으로 얻은 구원은 구원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만 있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일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받아야 하고, 영원한 생명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려야 합니다. 특히 가족과 함께 받아서, 가족과 함께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족을 맺어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구분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또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모두 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우리가 보기에 십자가처럼 보이는 고난을 감수하고 인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인내와 고행은 그리스도교^신앙과는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는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어려움은 다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들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만일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들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십자가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하면, “날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다.”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십자가들을 만나게 되고, 그 십자가들이 무겁든지 가볍든지 간에, 또 크든지 작든지 간에, 그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신앙생활이 완성됩니다. 만일에 십자가들이 싫어서 피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꼭 십자가가 필요한가? 예수님의 십자가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인가? 십자가 없이 그냥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7) 이 말은, “사람마다 각자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정화하고 단련하기 위한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어떻든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갈 수 있을 만큼의 십자가만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 말씀의 뜻은, “현세의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 집착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집착이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현세의 삶과 현세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입니다. 신앙생활은 본성을 누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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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6월의 마지막 주일이고 전 세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애쓰시는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교황 주일입니다. 권위는 있지만 권위주의적이지 않게, 신자들 위에 군림은 하지만 오직 사랑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다스리기는 하지만 오직 봉사하는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유튜브는 다양한 동영상을 볼 수 있는 플랫폼입니다. 저는 주로 강의를 듣거나, 미국 뉴스를 듣기도 하고, 음악을 듣습니다. 동영상을 다 보면 유튜버들이 ‘좋아요와 구독’을 눌러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눌러주신 좋아요와 구독은 더 좋은 영상을 올리는데 도움이 됩니다.” 저도 마음에 드는 영상물이 있으면 좋아요를 누르곤 합니다. 잠깐의 관심이 모이면 몇 백만, 몇 천만이 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있으면 부정과 부패가 자라지 못합니다. 깨어있는 시민이 깨어있는 지도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은 그 나라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에 따라서 정해집니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방역 수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깨어있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입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지키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의심증상이 있으면 즉시 검사를 받고, 자가 격리를 하는 것입니다. 정부의 방역 대책과 국민들의 참여가 함께하면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을 수 있고,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지난 예수 승천 대축일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날을 홍보주일로 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라고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코로나19로 홍보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신문 홍보를 하였고, 구독을 부탁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보내는 것이 귀찮을 수 있습니다. 구독료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신문구독을 신청해 주셨고, 후원금도 보내 주셨습니다. 기도해 주시고,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희 신문사는 신협과 거래를 합니다. 가깝기도 하고, 광고주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협이기에 가능한 범위에서 편의를 봐주기도 합니다. 신협의 정신은 ‘일인은 만인을 위해서, 만인은 일인을 위해서’입니다.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신협의 정신은 초대교회의 신앙생활과 비슷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고, 가난한 이들을 먼저 도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그분의 십자가와 죽음으로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인 성녀들의 전구와 우리들의 기도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는 참된 위로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사는 나이가 많은 부부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부부는 기쁜 마음으로 엘리사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엘리사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예언자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엘리사는 부부가 원하는 것이 자녀의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엘리사는 내년에는 부부에게 자녀가 생길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고 합니다. 좋은 일을 하는 집안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노부부의 선행은 그렇게 바라던 자녀의 축복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와이에서 사는 젊은이가 사제관으로 먹을 것을 보내왔습니다. 이곳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지금은 하와이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을 위한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젊은이를 보지 못했지만 좋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문 앞에 마스크를 놓고 가셨습니다. 어떤 분은 과일과 음식을 놓고 가셨습니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어두운 우주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두운 우주를 비추는 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나눔의 빛을, 희망의 빛을, 사랑의 빛을 비추는 아름다운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행을 넘어 희생과 봉사를 이야기 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 질병, 어려움의 십자가 상황에서 ‘그렇습니다.’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외로 많습니다. 딸을 교통사고 잃어버리고 불쌍한 어린이를 돌보는 데 전 생애를 바치는 아버지, 민주화를 외치다 죽어간 아들을 대신하는 어머니, 그 모습들은 십자가를 지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은 십자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지는 않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 십자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찾는 것도 아니고 바라만 보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짊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삶 안에 받아들여 주님처럼 등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삶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비록 시작은 작을지라도 가정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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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를 위한 나>
마태오 10,37-42 (버림과 따름,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너를 위한 나>
나를 위한 나는
너를 위한 너를
만날 뿐이지만
너를 위한 나는
나를 위한 너를
만날 수 있지
나를 위한 나와
너를 위한 너는
나와 너로 갈리지만
너를 위한 나와
나를 위한 너는
나와 너를 뛰어넘지
나를 위한 나는
내 안에 갇혀
나와 함께 죽지만
너를 위한 나는
나를 넘어 너에게서
나 죽어도 살지
나를 위한 ‘나’들이
넘쳐나는 곳이
지옥이라면
너를 위한 ‘나’들이
빚어내는 세상이
천국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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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 13주일이자 교황주일입니다. 교회는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가장 가까운 주일을 교황주일로 보냄으로써 교황님이 세계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나라에 오셨을 때 많은 분들이 직접 광화문에 가서 혹은 대중매체를 통해 교황님의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연일 나오는 기사와 교황님에 대한 정보 속에서 우리는 모두 종교에 상관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그분의 행로를 지켜보았습니다. 사실 그 때 저는 이탈리아에서 유학중이었으므로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교황님이 한국에 온다는 것은 역사 안에서도 손꼽힐 만한 드문 사례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태리의 시골 수녀원에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오늘은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어떤 일정을 소화하셨는지 인터넷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태리 신자분들과 수녀님들께 소개하며 함께 즐거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교황님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긴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멀고 먼 존재입니다. 전 세계 약 13억 가톨릭 인구의 수장이고 베드로의 후계자이니 한 없이 거룩해 보이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아주 어린 아이들이 저에게 물어봅니다. “신부님, 신부님은 언제 교황님이 되요?” 그러면 저는 당연히 “신부로나 잘 살 수 있도록 기도해주렴”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꼭 덧붙이는 말이 있는데, “악담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일이 있지도 않겠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교황>이라는 역할은 인간이 할 법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8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로 지구 반대편에서 돌아온 지 하루도 안 되어 시차 적응할 새 없이 공무를 수행하시는 모습, 수많은 각계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수백 명이 아닌 수천 명 수만 명 앞에서 긴 미사를 집전 하시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교황님은 그야말로 개인의 일정을 소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 한 복판에 있는 사람입니다.
전쟁의 위협이 있는 모든 국가의 원수들에게 화해를 청해야 하며, 정치적인 사안을 건드려야 합니다. 난민 문제를 비롯해 소외된 이들을 위해 간절한 목소리를 내야하고 환경문제, 가정문제와 같은 갖가지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적합니다. 이러한 와중에 사소한 행동, 사소한 발언 하나도 뉴스거리가 되고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지역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 보다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매일매일 보고 받아야 하고 이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교황이 되는 순간 특정 국가의 이익을 방지하기 위해 출신 국적을 포기하므로 고향에서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방문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철저히 고립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이 말씀을 얼핏 보면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계명과 상충되는 말씀인 듯 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양육하는 정성을 포기하라는 말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견주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보다 가족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안에 욕심과 집착이 자리하게 되고 하느님은 내 가족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하느님께 의지하며 도움을 청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으로 하느님이 의지의 대상이 아닌 수단으로 여겨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발견합니다. 내 뜻대로 가정사가 이뤄지지 않을 때 종종 우리는 하느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등을 돌리거나 하느님이 정말로 계실까 질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분명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십자가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의지하며 예수님의 희생에 깊이 동참할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겸손되이 주님께 의지할 때 그만큼 더욱 더 큰 은총이 주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국적을 포기하고 늙은 몸을 이끌고 세계를 짊어지고 있는 교황님의 삶을 상기해 보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황님의 역할은 비단 한 사람에 맡겨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 역시 저마다의 십자가를 가지고 세상을 위해 애쓸 때 우리는 비로소 교회의 참다운 구성원이 되고 함께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강론을 마무리 하며 이태리에서 교황님을 만났던 순간을 기억해 봅니다. 저는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내내 멀찍이 교황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커다란 존경심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유학생활을 하던 어느 날 학교에서 한통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저는 윤리신학을 유일하게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교황청립 대학에서 공부를 했는데, 교황님께서 학교 기념일을 맞이해 저희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교황님을 멀리서가 아닌 단독으로 뵙고 인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한참 이야기를 나눈 것 같지만 사실 이 순간은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교황님께 한 마디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저는, “아직까지 우리 한국인들은 교황님이 보내주신 애정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교황님이 다른 손으로 저의 손을 감싸시며 “정말 고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보여주신 교황님의 따뜻한 온기와 미소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의 뒤에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희생이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우리에게 이러한 힘이 되어 주시는 교황님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아가 저마다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는 우리 역시, 주님께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주길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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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경모 야고보 신부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럴[때마다 제자들은 애써 못들은 척, 안 들은 척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 탐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잊을만하면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시곤 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이 별로 듣고 싶어 하지도 않는 당신 십자가에 대하여 말씀 하셨을까요?
겉으로 나타나는 십자가는 분명 고통이요 아픔이요 괴로움입니다. 이 세상에 십자가를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주님조차도 죽음이 다가오자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을까요? “아버지, 이 쓴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이 기도를 하실 때 예수님은 피땀을 흘리셨다고 성서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쓴잔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인류의 죄사함, 우리들의 구원은 과연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은 끝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당신이 져야 하는 당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지고 가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되었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어느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병원 수녀님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바로 병원에 와 달라고 하는 전화였습니다. 바로 가방을 챙겨 병원에 갔더니 한 환자가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누워있었습니다. 몰골은 까맣게 변했고 배는 복수가 차서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태중에는 아기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어려서 몹시 어렵게 살았고 천신만고 끝에 가정을 가져 행복한 생활을 살려던 그때 갑자기 병원에 오게 되었는 데 간암 말기라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분은 외쳤습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나는 열심히 살았고 정직하게 살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건가? 나는 하느님이 원망스럽다.”
그는 하느님의 성사를 거부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끝까지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병자성사도 기도도 마다하고 자신의 현실도 부정하였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사제관에 막 도착하였는데, 그분의 선종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지는 크고 작은 자기 십자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십자가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소중하게 인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십자가를 내팽개치고 하고픈대로 자기 멋대로 대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지워진 십자가는 무겁고 무섭고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치워달라고 기도하셨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은 처음에는 당신의 십자가를 없애 달라 기도하셨지만 곧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십자가의 힘으로 구원되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 역시 우리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그 십자가를 통하여 나를 구원하고 주님의 집에 갈 수 있게 하는 보증수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우리가 목표를 세운 뒤 겪어야 하는 피땀, 수고, 고통 등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밑거름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지워진 우리들의 십자가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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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문봉한 야고보 신부님]
먼저 프란치스코 형제를 교황님으로 모실 수 있는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두 손 들어 감사의 찬양을 올립니다. Viva PaPa! Viva Paco!
지상에서는 가장 위대한 부름을 받은 한 분만이 설 수 있는 그 엄중한 자리에서, 위대한 교황님이 나약하게 모든 이의 기도를 청하면서 거룩한 직무를 시작하셨지요. 너무나 겸손하고 솔직해서 당신이 서신 발코니가 마냥 높으신 분의 자리만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랑의 위엄이 흘러내리는 천상의 층계가 되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죄인에게나 선인에게나 가진 자든 없는 자든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로 청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모든 이의 모든 것인 착하신 주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상은 당신에게서 희망을 받아안으며 한 마음으로 새 교황님을 위해 기꺼이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 날 이후 온 인류가 마주한 위대하면서도 겸손한 친구인 당신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저희보다 한 발 앞서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어려운 문제를 푸는 열쇠는 자본과 권력을 이용한 계략이 아니라, 자신을 순수하게 내어주는 사랑임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공격이 하느님의 사랑을 몰아낼 것처럼 이 땅에서 기승을 부리는 날, 비에 젖은 성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홀로 인류를 위해 기도하시던 당신에게서, 또 다시 희망을 보았습니다.
희망은 막연히 기대만 하는 자의 몫이 아니라 성실히 준비하는 자의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그렇게 내리던 비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공포는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의 예표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당신은 늘 고통 속에서 함께하는 친구로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교황님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사랑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자들을 찾으라고 하셨지요. 말이 아니라 실천을 통한 사랑입니다.”
구체적인 실천 없는 사랑은 자신을 내어 주지 않는 이기적인 변명에 불과함을 깨우쳐 주셨지요. 이렇듯 사랑의 산증인이신 당신과 함께함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새삼 느낍니다.
오늘 교황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새롭게 다짐해 봅니다. ‘변명과 핑계가 아니라 구체적이며 신속하게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의 친구이신 교황님과 함께하며 행복하겠습니다.
Viva PaPa! Viva P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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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박혁진 요셉 신부님]
<하느님의 축복이 내리는 이웃 사랑의 삶>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자 교황 주일입니다. 그 직책에 맞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려지겠지만 교황님 자신도 짓누르는 중압감과 책임감 때문에 늘 고뇌와 시련 중에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지혜와 영육간의 건강을 주시도록 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마태 10,4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의 참 본분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뜻을 분명하게 전해 주는 것이었지요.
예언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남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 자선과 선행을 베푸는 삶이 그리 쉽지는 않지만 그러한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옆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에게 베푸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수넴 여인의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 엘리사 예언자를 친절하게 대접하고 맞이한 이 여인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내려 아기를 갖게 됩니다. 이웃에 대한 선행의 결과로 하느님의 축복이 내려진 것이지요.
우리가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과 착한 행동 하나 하나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느님께서 다 기억하시고 알아주시어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위안 삼아 기쁜 마음으로 이웃을 위한 선행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위한 선행을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 죄악의 삶에서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부활의 삶이요, 주님 안에서 함께하는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삶, 그리하여 서로가 깊은 친교와 사귐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깨달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요, 그 길을 통해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평화를 맛보고 아름답고 고귀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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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모래를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공사장에 쌓여 있는 모래 더미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모래성을 쌓으며 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한참 동안 쌓아 올린 모래성을 발로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놀면 안 돼. 이곳은 위험하니 나가 놀아.” 같이 놀고 있던 친구와 그 자리에서 쫓겨나면서 우리는 이 아저씨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정성을 다해 쌓고 있는 모래성을 발로 부쉈다면서 말이지요.
어른이 된 지금, 아직도 그 무너진 모래성을 안타까워할까요? 이제는 별것 아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공사판에서 노는 우리를 쫓아내기 위한 아저씨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아까워하고 억울해하는 일들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 일들 역시 시간이 지나면 별것 아닌 것으로,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는 어떨까요? 부족함이 전혀 없는 만족으로 가득한 곳에서 지금의 아쉬움은 특히 별것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현재 아까워하고 억울해하는 일을 비롯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장차 갈 하느님 나라에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하신 주님의 말씀에 더욱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사랑보다 가족 사랑을 앞에 두지 않도록, 즉 모든 관계에서 사랑의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족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보다 하느님 사랑이 더 위에 있으며,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도 더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죽어서 영원히 사는 것이 인간적인 이익을 위해 살다가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자신의 몸과 함께 죄스러운 버릇과 즐거움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하느님께 두는 사람에게 합당한 상이 주어집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힘듦이 사라지는 나라, 더는 억울하지도 않고 아까워할 것이 없는 나라, 커다란 기쁨 속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나라, 이 나라를 향한 우리의 노력을 늘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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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집중하고 있는가?>
사람은 자신의 계획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때,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없을 때 힘들어하거나 괴로워하고 화를 냅니다.
어떤 자매님의 고민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침기도는 성실하게 바칠 수 있는데, 저녁기도는 늘 빼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침기도 할 때는 가족들이 아직 깨어 있지 않아서 혼자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데, 저녁에는 가족들 식사를 비롯한 각종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고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냥 잠들게 된다는 것이었지요. 가족만 없어도 저녁기도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가족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마음 때문입니다. 이 마음으로 사소한 기회만 생겨도 뒤로 미루거나 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어야 내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제약, 예속 등의 이유를 들어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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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멋진 주님 제자의 삶>
-사랑, 추종, 환대-
오늘 강론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참 멋진 주님 제자의 삶’입니다. 제 요즘 취미가 뭔지 아십니까? 휴대폰 사진찍기입니다. 하여 자칭 제 별명을 ‘사랑의 사진사’라 부릅니다. 참 멋진 사진을 찍으면 지인들과 나누곤 합니다. 어제도 멋진 청년이 가족과 함께 자동차 축복차 방문했기에 자동차 축복후 요셉상 앞에서 가족 사진을 찍은후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전송했습니다.
“모두 멋지고 평화로워 보이네요! 멋지고 평화롭게 사세요!”
‘멋지다’를 사전에서 찾아봤더니 썩 훌륭하다 였고 우아하다와 비슷한 말이라 씌어 있었습니다. 아름답다와 더불어 참 좋은 말마디로 요즘 제가 참 많이 쓰는 어휘이기도 합니다.
엊그제 저는 참 멋지게 산 분의 부음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의 대표 생태운동가, 회색문명, 녹색으로 맞선 생태적 인간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별세’란 기사엔 감동적이 내용이 가득했습니다. 녹색평론은 제가 정기 구독해 보는 유일한 국내 격월간 나오는 잡지입니다. 전북 진안에서 생태마을 공동체를 운영하는 최종수 신부의 추모사에 나오는 두분의 우정도 멋졌습니다.
-“신부님, 힘드시죠. 우리 신부님이 큰 일을 하고 계십니다. 농촌이 희망입니다. 생태적인 삶, 자급자족 생태공동체가 대안입니다. 흙과 함께 단순소박하게 사는 것이죠. 내가 도울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통장 번호 문자로 주이소.”
“아버님, 감사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후원을 하셨어요. 녹색평론 발행도 쉽지 않는데요. 너무 큰 금액이라 손가락을 세 번이나 확인했어요. 아버님 큰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아버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이고 그리 많지 않아요. 생태마을 초창기에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겠나. 밑빠진 독에 물붓기 아닌가요. 종자돈 알지요. 힘내고 용기 내라고 보낸 겁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우정입니다. 제 주변에는 참 멋진 삶을 살아가는 꽃같이 예쁜, 별같이 빛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이 꽃을 선물할 때 저절로 나오는 싯귀입니다.
“꽃을 꽃을 가져 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방금 부른 화답송은 얼마나 멋집니까? 제가 참 좋아하는 화답송으로 산책때 마다 노래로 되뇌이며 바치는 짧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누구나 ‘멋지다’라는 찬사를 받으면 좋아할 것이며 믿는 이들이라면 참 멋진 제자의 삶을 살고 싶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참 멋진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그 방법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려드립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운명이요 사랑입니다. 성 베네딕도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방향이자 중심이자 의미이신 그리스도를 우선적으로,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비단 우리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이들에 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세상과 이웃에 대해 집착에서 초연한, 눈밝은 사랑에 참 멋진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가족만을, 세상만을 사랑할 때 눈먼 맹목적 사랑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무엇이 참사랑입니까?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없는 무사한 순수한 사랑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이런 사랑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모든 수행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 기도의 수행입니다. 하여 우리 수도자들을 평생, 매일,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시편공동성무일도와 미사공동전례를 바칩니다.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런 기도의 수행이 공동체의 일치는 물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날로 증진시켜 참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며 참 멋진 제자의 삶을 형성합니다.
둘째, 추종입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합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인생 여정입니다. 다 각자 고유의 인생여정이지만 함께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여정입니다. 길은 다 달라도 방향과 목표는 일치합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영원한 방향이자 목표입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표를, 삶의 방향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무수한 정신질환도 여기 서 기인합니다. 아무리 빨리 가면 뭣합니까? 제대로 제방향으로 가야지요. 주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생각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주절주절 말할 수는 있어도 생각없이 글을 쓸수는 없습니다. 글쓰는 습관이 생각을 키우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주님을 생각없이 제 십자가 없이 추종할 때 말짱 헛일입니다. 비교하여 우열과 호오를 말할 수 없는 각자 고유의 십자가입니다.
‘내 인생 내 어깨에 지고’, 누가 대신 져줄수도 없고 내려 놓을 수도 없는 십자가입니다. 참 사람됨의 표지가 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제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를 사랑하여 지고 가야합니다. 참으로 제 책임의, 제 운명의 제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충실히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참 멋진 제자들입니다. 마지막 천국의 열쇠도 각자의 십자가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그리스도의 추종도 원활해 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자발적 기쁨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바오로의 말씀처럼 파스카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힘의 원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바로 세례성사와 이 거룩한 성체성사 은총을 통해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사랑의 샘, 생명의 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을 항구히 추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사랑의 기적입니다. 다음 복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역시 역설적 영적진리를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 주님 때문에 목숨을 잃어가는 삶같지만 오히려 목숨을 얻는 자기실현의 구원과 생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얻다’에서 얻다의 그리스어의 일차적 뜻은 '발견하다'라 합니다. 그러니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여정은 그래도 자기를 잃어가면서, 비워가면서 참 자기를 발견해가는 ‘발견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환대입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입니다. 환대의 반대는 냉대입니다. 참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는 냉대의 추억일 것입니다. 환대의 제자들, 참 멋진 주님 의 제자들입니다. 우리 분도회의 정주서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환대 영성임은 다음 고백시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분도성인도 그의 규칙에서 환대의 영성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손님들을 받아들임에 대한 제53장 서두의 말씀입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새삼 환대의 영성이 얼마나 복음적인지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와 제1독서 열왕기 하권 내용도 환대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이웃을 환대함이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또 환대에 반드시 보답이 있을 것을 확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환대의 사람치고 잘못되는 경우는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바로 사람 환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혐오와 차별의 시대에 환대 자체가 고귀한 덕이자 그 자체가 보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녹색평론의 편집인 고 김종철님이 꿈꿨던 세상이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였고, 바로 우리 수도공동체는 물론 교회가 꿈꾸는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지극 정성 환대하는 수넴의 한 부유한 여자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엘리사는 그곳을 지날 때 마다 그의 집에 들러 음식을 먹곤 하였다하며 마침내 한 아들을 안게 되리라는 축복의 약속도 받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환대의 영성입니다.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환대의 모범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과, 주님을 환대하는 우리가 만나는 참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자 교황주일이기도 합니다. 참 멋진 제자의 모범을 보여주시는 시대의 예언자, 가톨릭 교회의 자랑이신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멋진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 주셨으니 바로 사랑과 추종, 환대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참 멋진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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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추구해야 할 가치>
서로의 의견은 다를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다르다’는 것이 서로 ‘틀리다’는 것으로 인식되어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부모와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집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그가 ‘가출’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집을 나간 행위이지만 어떤 뜻을 품고 구도의 길을 걷겠다고 나가면‘출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야말로 ‘출가’의 길입니다. 집착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두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대립하고 등진다는 것이 아니라 더 곰곰이 더 열심히 추구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탑을 세우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듯 우리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민감하게 식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식별의 결과는 다른 여러 유대관계를 뒤로하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첫째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맥에 매이게 되면 자유를 잃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주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이신 주님께서 다음 일을 안배하십니다.
가출한 사람은 온갖 것에 마음을 쓰며 궁리합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은 지금 당장은 집을 버린 것 같지만 결코 집안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따르는데 어찌 사랑을 외면하고 자기 실속만 챙기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출가한 사람을 존경하고 우러러 봅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길을 가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참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과 자녀의 출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훌륭하다고 한 그 길에 자기도 가지 않고 자녀도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은연중에 지니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속죄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희생정신을 잊지 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세상이 부와 출세의 유혹이 갈수록 심해지는 험한 세상의 일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선택한다는 것은 이미 십자가의 길이고 구도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신자들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신앙과 현실사이에서 방황하지 않고 제대로 따라야 하겠습니다.
제자의 길에 신중함이 있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단호한 결단과 응답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느님의 선택받은 자녀입니다. 세상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걷겠다고 나선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출가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인식하고 산다면 매일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출가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많아지길 기도하며 그 길에 은총이 충만하길 빕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에 서 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더 챙기고 더 채우는 준비가 아니라 더 내려놓고 더 비우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시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소망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탈란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0,39)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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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주일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우리로서는 사실 가슴이 서늘해지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합당하지 않다면 나름 애쓰며 걸어온 신앙 여정이 다 헛것이었나 허탈해지지요.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보다 당신이 더 사랑받길 바라십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모든 사랑을 다 독점하시겠다는 욕심은 아니지요.
"받아들이는 이"(마태 10,40-41)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사도들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을,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거라고 하시네요. 또 예언자와 의인을 받아들이는 이는 그들이 받은 보상까지 받는다고 하시니 과연 받아들임의 공로와 결과가 엄청나다는 걸 알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인간이 기울어지게 마련인 본능적 가족애를 넘어서라고 초대하십니다. 가족을 소홀히 하거나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사랑으로 시야를 확장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로서, 역시 하느님의 귀한 피조물인 모든 사람을 편애와 애착, 차별 없이 존중하고 받아들이라는 권고지요.
이런 보편적 사랑에 눈을 뜨면 가족을 덜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기심과 대리 만족의 도구로 소유물처럼 이용 또는 집착하지 않고 온전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소유로서 존중과 사랑을 받아 마땅한 고귀한 존재임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엘리사와 수넴여인의 일화를 다룹니다.
"이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2열왕 4,9)
여인은 엘리사에게서 하느님의 기운을 감지하고 먼저 청을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을 알아보는 그녀의 눈이 놀랍지요 그녀는 엘리사에게서 하느님과의 연결고리와 거룩한 분위기를 알아채고 사심 없는 헌신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녀의 봉헌을 기억하시지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다시 한 번 일깨웁니다.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 6,11)
사랑하는 벗님!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고, 특별히 세례를 통해 죄에 죽고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숨 쉬고 살아갑니다. 저마다 드러나는 지향은 제각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본질은 하느님과 그분 나라지요.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나뿐 아니라 벗님도, 타인도 그런 사람입니다!
삶의 질곡을 헤치며 살아오느라 우리의 본성적 아름다움은 허물과 죄악, 가면과 변형으로 가리워지거나 일그러져 버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두꺼운 껍질을 뚫고 그 사람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 모상성을 발견하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지요.
그래도 우리는 믿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귀한 만큼 타인도 귀하고, 내가 거룩한 만큼 타인도 거룩함을 아니까요. 그래서 나를 둘러싼 이들을 하느님 사람으로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셔들입니다. 게다가 예언자나 의인처럼 처절한 희생적 여정을 걷지 않고도, 그들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자체로 예언자와 의인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따르는 삶에서 절대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좀 속된 표현입니다만, 밑지는 장사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 거룩한 주일,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거룩한 이가 누구인지 가슴 설레며 찾아보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에게 보내는 존경의 눈빛과 미소, 시원한 물 한 잔까지도 하느님께 올라가는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니까요. 아멘.
오늘은 교황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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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3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파견한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숙소를 제공하고 대접한 수넴 여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자비를 들려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함께 죽고 묻혔으니, 그분과 함께 살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서는 특히, 예수님께서 파견한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들에게는 상이 베풀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0,40)
이 말씀은 당신께서 제자들을 단순히 당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당신의 이름으로 파견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 안에는 하느님이 계셔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과 같이, 당신이 파견한 제자들은 당신의 이름으로 나아가 당신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당신의 제자를 제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제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파견 받은 이들, 곧 예언자들과 의인들과 제자들은 핍박을 당하면서도 섬기는 “작은이들”로 간주하며, 이 “작은이들”을 받아들이고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에게는 “상”이 베풀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저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정말 작은이로서 제자인가? 제자로서 작은 자인가? 곧 섬기는 이가 아니라 섬김 받기를 좋아하지는 않는가? 또 핍박당하고 거부되는 것을 못 견뎌하고 오히려 상대를 윽박지르고 짓누르지는 않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받아들여 대접해주는 신자들의 선의를 마치 정당한 권리인 영 당연히 여기고 오히려 기대하고 즐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스도에 대한 대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대접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가? 진정, 나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인가?
오늘 <복음>의 또 하나의 주제는 당신의 제자 혹은 파견 받은 이가 지녀야 할 태도와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로서 합당하지 못한 태도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부모나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부모나 자녀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라”는 말씀은 가족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혈연의 자연적 인간적인 사랑(φιλεω)보다 신적인 사랑(αγαπαω)을 앞세워 우선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예수님을 ‘앞세워 먼저’ 더 사랑하는 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겪게 될 시련과 치욕을 지고서 따르라는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곧 당시의 십자가는 죄수 중에도 노예죄수나 반란죄를 지은 이의 처형도구였듯이, 대단히 불명예스럽고 치욕적인 죽음까지도 지고 따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로서 합당한 태도를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 말씀은 박해에 대한 제자들의 자세를 당부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이 땅에서의 삶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주님 안에서의 생명의 상실은 오히려 더 귀한 생명의 얻음이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가치를 위해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잃는다면, 결국 자기의 영혼을 잃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역시, 오늘의 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앞세워 살아가고 있는가? 대체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 하느님인가, 나 자신인가? 또 제 십자가 지기를 기꺼이 하는가, 오히려 피하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내 자신을 따르며 내 뜻을 실현하고 있지는 않는가? 진정 내 목숨을 내어놓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목숨에 연연하며 상처받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려 온갖 안전과 보호 장치를 꾸미고 있지는 않는가? 정말,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고,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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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마태 10,40)
주님!
아침처럼 어김없이 찾아온 당신을 저녁처럼 그저 흘러 보내지 않게 하소서.
반겨 맞아들여, 상처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부둥켜안고, 눈물 흘릴 줄을 알게 하소서.
넘어지고 쓰러지신 당신과 함께 아파할 줄을 알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지나가는 행인처럼 무심히 흘러 보내지 않게 하소서.
찔리고 못 박히신 당신과 함께 거부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조롱당해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억울해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수없이 거부당하면서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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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5d9wqcssO8Q&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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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는 합당하지 않다."(마태 10, 38)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의
우선순위는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더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해야 할
우리들 사랑입니다.
우선순위를
새롭게 하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에서
오늘도
십자가를 질
힘을 얻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너무나 잘
가르쳐 줍니다.
사랑없이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십자가와
사람의 길은
모두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뒤바뀐
사랑의 순서를
바로잡는
사랑의 멋진
주일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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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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