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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숙재집(私淑齋集) 강희맹(姜希孟)생년1424년(세종 6)몰년1483년(성종 14)자경순(景醇)호사숙재(私淑齋), 운송거사(雲松居士), 무위자(無爲子)본관진주(晉州)시호문량(文良)특기사항서거정(徐居正)과 교유
私淑齋集卷之十二附錄 / 附錄 / 私淑齋集附錄
南原盧上舍亨泰答晉州韓營將翼世借細柳書。略曰。昔姜晉山某。使于中朝。折得渭城柳。裹土而來。植其門外南大門外。卽其家也。當世人。不以爵號稱其家。而以渭城柳宅稱焉。唐詩所謂渭城朝雨浥輕塵。客舍靑靑柳色新者。正謂此也。今將軍欲粧細柳營。求得一枝。敢不以所得於姜氏家者奉副 云云。韓翼世爲南原營將時。求植於鎭營前。至今南原府。多細柳云。
奉使南京。移植錢塘紅於安山。仍號曰蓮城。正宗大王歷幸安山。時試士。應製御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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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南京)에 …… 하다 : 세종 때 문신이자 농학자인 강희맹(姜希孟)이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연꽃 씨를 가져와 안산(安山)에 심었는데, 연이 널리 퍼져 이 지역을 ‘연성(蓮城)’이라 부르게 된 것을 말한다. 《私淑齋集 卷12 附錄, 韓國文集叢刊 12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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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1년 정사(1797) 9월 12일(무인)
21-09-12[11] 10개 고을 유생들의 응제 시권(應製試券)을 채점하여 내리고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 이에 앞서 장릉(章陵)에 행행(幸行)할 때 어가(御駕)가 지나갔던 10개 고을의 유생들은 제목이 내리기를 기다려 응제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예로부터 신풍은 구풍과 같다.〔自古新豐猶舊豐〕”로 화성(華城)의 부제(賦題)를. “낙남헌에 술을 차려 61세 이상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다.〔置酒洛南軒 宴群老六十一歲以上〕”로 시제(詩題)를, “지지대(遲遲臺)”로 명제(銘題)를 삼았다. “만번 꺾여도 봉우리에 말을 세우겠다는 말을 잊지 말라.〔萬折毋忘立馬峯〕”로 광주(廣州)의 부제를, “어가가 남한산성을 지날 때에 사신에게 명하여 ‘기해주필’이라고 동문의 바위 위에 큰 글자로 쓰게 하다.〔駕過南漢 命詞臣 大書己亥駐蹕於東門巖石之上〕”로 시제를, “침과정(枕戈亭)”으로 명제를 삼았다. “백성이 부유하고 정치가 공평한 것도 좋지만 누가 무성의 현을 다시 이을 수 있을까.〔民富政平斯可矣 誰能更續武城絃〕”로 부평(富平)의 부제를, “《석호가정별업도》에 제하다.〔題石湖佳亭別業圖〕”로 시제를, “계양산(桂陽山)”으로 송제(頌題)를 삼았다. “어느 곳에서 융중을 찾을까.〔何處訪隆中〕”로 남양(南陽)의 부제를, “용백산에 제갈무후를 향사하다.〔龍栢山祠諸葛武侯〕”로 시제를, “몸소 남양에서 농사짓다.〔躬耕南陽〕”로 찬제(贊題)를 삼았다. “혹 그 안에 숨은 인재가 있지 않을까.〔儻非中有隱淪才〕”로 인천(仁川)의 부제를, “자연도에 올라 서해의 관방을 정비하다.〔陞紫燕島以備西海關防〕”로 시제를, “능허대(凌虛臺)”로 명제를 삼았다. “살기는 안산이 가장 좋다는데 게다가 다시 큰 풍년까지 들었구나.〔生居最說安山好 況復穰穰大有年〕”로
안산(安山)의 부제를, “남경에 사신으로 가서 전당의 붉은 연을 가져다 심고 연성이라 하다.〔奉使南京 取錢塘紅種之 號曰蓮城〕”로 시제를, “평근루(平近樓)”로 명제를 삼았다.
“장강(長江)과 연한 항구엔 배로 화물 운반하고 물결 위에 달 솟으니 다시 수루를 오르네.〔港連楊子仍漕舶 波湧金輪更水樓〕”로 김포(金浦)의 부제를, “금릉군으로 옮기다.〔移金陵郡〕”로 시제를, “포구를 파내다.〔掘浦〕”로 논제(論題)를 삼았다. “사방 들녘의 누런 벼이삭을 보기 위하여 삼십 리 양천에 잠시 군사를 머물게 하다.〔爲看四野黃雲色 一舍陽川小駐兵〕”로 양천(陽川)의 부제를, “선유봉에 지주라 제하다.〔仙遊峯題砥柱〕”로 시제를, “공암(孔巖)”으로 명제를 삼았다. “산과 강의 기운이 저절로 좋으니 백성의 기운이 한창 창성(昌盛)하다.〔山川氣自好 民物運方昌〕”로 시흥(始興)의 부제를, “밤에 시흥현에 이르러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서 살펴보다.〔夜抵始興縣 見大星降人家 往視之〕”로 시제를, “관감정(觀感亭)”으로 명제를 삼았다. “남충의 부로들 나를 맞기에 익숙하여라.〔南充父老慣相迎〕”로 과천(果川)의 부제를, “관악산 정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그 대를 염주라 하다.〔登冠岳山頂上北望 名其臺曰念主〕”로 시제를,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으로 명제를 삼았다. 10개 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가지고 가서 시취(試取)하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각 고을 수령들이 시권을 거두어 올려보냈기에 직접 점수를 매겨서 내렸다.
○〔화성〕
부(賦)에서 삼하일(三下一)을 맞은 유학(幼學) 유현복(兪鉉復), - 감시(監試) 회시(會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초삼하(草三下)를 맞은 유학 조유존(趙裕存) 등 5인, - 각기 대본(大本) 《규장전운(奎章全韻)》 1건(件)을 주었다. - 차상(次上)을 맞은 유학 윤우동(尹佑東) 등 10인이다. - 각기 소본(小本)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시(詩)에서 삼상(三上)을 맞은 유학 정세풍(鄭世豐),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초삼하를 맞은 유학 심양채(沈亮采) 등 11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임우상(任禹常) 등 5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명(銘)에서 초삼하(草三下)를 맞은 유학 이노신(李魯新),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이운원(李運元) 등 3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광주〕
부에서 삼하일을 맞은 유학 강지영(姜志永),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삼하를 맞은 진사 김기(金玘) 등 2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한세철(韓世喆) 등 17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시에서 삼하를 맞은 유학 이홍묵(李弘默),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남약중(南若中), -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초차상(草次上)을 맞은 유학 이증연(李曾淵) 등 7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명에서 차상을 맞은 유학 이혜묵(李惠默)이다. - 《오륜행실(五倫行實)》 1건을 주었다. -
〔부평〕
부에서 이하(二下)를 맞은 생원 변혁조(卞赫祚), - 문과(文科) 회시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삼상을 맞은 유학 유종영(柳宗永), - 《오륜행실》 1건을 주었다. - 삼중을 맞은 유학 변규조(卞奎祚) 등 2인, - 각기 《육주약선(陸奏約選)》 1건을 주었다. - 초삼하를 맞은 유학 한양겸(韓養謙) 등 2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신대제(申大濟) 등 10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시에서 이하일(二下一)을 맞은 유학 유지굉(柳之翃),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이하를 맞은 유학 양정현(梁廷賢), - 《사기영선(史記英選)》 1건을 주었다. - 삼상을 맞은 유학 유지익(柳之翊) 등 2인, - 각기 《오륜행실》 1건을 주었다. - 삼중을 맞은 유학 한주신(韓柱臣) 등 2인, - 각기 《육주약선》 1건을 주었다. - 초삼하를 맞은 유학 양성눌(梁性訥) 등 3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이수각(李需慤) 등 6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송(頌)에서 이하를 맞은 진사 양성묵(梁性默), - 문과 회시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초삼하는 유학 유지학(柳之翯) 등 2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유지습(柳之習) 등 4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남양〕
부에서 삼하일(三下一)을 맞은 유학 정헌유(鄭獻猷),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삼하를 맞은 유학 이성원(李聖元) 등 4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유종해(柳宗澥) 등 7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시에서 삼하를 맞은 유학 오성장(吳成章),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초삼하를 맞은 유학 이사현(李思玄) 등 2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이정직(李廷直) 등 8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찬(贊)에서 초삼하를 맞은 유학 최의교(崔義敎),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채홍인(蔡弘仁)이다. -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인천〕
부에서 삼하를 맞은 유학 박사간(朴師簡),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초삼하를 맞은 유학 이승열(李升說), -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은 유학 하상정(河尙貞) 등 9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시에서 삼하를 맞은 유학 엄사조(嚴思祖),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초차상을 맞은 유학 유재순(劉在淳) 등 4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명에서 삼하를 맞은 유학 이철환(李喆煥),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초차상을 맞은 유학 송휘재(宋徽載) 등 3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안산〕
부에서 삼상일을 맞은 유학 김집(金
),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삼상을 맞은 유학 이재명(李載命) 등 2인, - 각기 《오륜행실》 1건을 주었다. -삼중을 맞은 유학 최명귀(崔命龜), - 《육주약선》 1건을 주었다. - 삼하를 맞은 유학 이정현(李正賢) 등 3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초차상을 맞은 유학 윤렴(尹稴) 등 8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시에서 삼하일을 맞은 유학 권중술(權中述),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삼하를 맞은 유학 최맹진(崔孟晉) 등 3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유중록(柳重祿) 등 4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명(銘)에서 초삼하를 맞은 진사 최홍진(崔鴻晉), - 문과 회시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초차상을 맞은 진사 조정규(趙正逵)이다. -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김포〕
부에서 삼중을 맞은 유학 박필신(朴弼愼),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삼하를 맞은 유학 양중현(梁重顯) 등 2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심기현(沈耆賢) 등 7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시에서 삼중일을 맞은 유학 황응규(黃應奎),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삼중을 맞은 유학 신필현(申必顯) 등 2인, - 각기 《육주약선》 1건을 주었다. - 삼하를 맞은 유학 이명후(李明垕) 등 4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초차상을 맞은 유학 정탁(鄭鐸) 등 3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논(論)에서 삼중을 맞은 진사 심옥현(沈玉賢), - 문과 회시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삼하를 맞은 유학 이영풍(李永豐) 등 2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초차상을 맞은 유학 홍건유(洪建猷) 등 2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양천〕
부에서 이하일을 맞은 유학 김달하(金達河),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이하를 맞은 유학 정언희(鄭彥熙), - 《사기영선》 1건을 주었다. - 삼중을 맞은 유학 이영승(李永升) 등 4인, - 각기 《육주약선》 1건을 주었다. - 삼하를 맞은 유학 이송(李淞), -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엄석삼(嚴錫三) 등 8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시에서 삼중일을 맞은 유학 원정로(元正魯),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삼중을 맞은 유학 엄박(嚴𩅿), - 《육주약선》 1건을 주었다. - 삼하를 맞은 유학 이영복(李永復), -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이동빈(李東彬) 등 2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명에서 삼하일을 맞은 유학 권석(權奭),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삼하를 맞은 유학 조현국(趙顯國) 등 2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이정빈(李鼎彬) 등 2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시흥〕
부에서 삼상일을 맞은 생원 이수연(李脩演), - 문과 회시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삼상을 맞은 유학 강수일(姜壽一), - 《오륜행실》 1건을 주었다. - 삼중을 맞은 유학 최흥화(崔興和), - 《육주약선》 1건을 주었다. - 삼하를 맞은 유학 김정진(金鼎進) 등 3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진사 엄철(嚴喆) 등 8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시에서 삼하일을 맞은 유학 이언승(李彥承),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삼하를 맞은 유학 이지학(李志學), -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이재선(李載璿) 등 6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명에서 삼하일을 맞은 전 찰방 이장연(李長演), -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복직시키도록 하였다. - 삼하를 맞은 유학 이시좌(李時佐), -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차상을 맞은 유학 이원현(李源玄)이다. -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과천〕
부에서 삼중일을 맞은 유학 윤대익(尹大翼),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삼중이(三中二)를 맞은 유학 김수문(金秀文), - 《육주약선》 1건을 주었다. - 삼하를 맞은 유학 고진항(高鎭恒) 등 13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정인양(鄭仁養) 등 25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시에서 삼상을 맞은 유학 이상덕(李象德),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삼중을 맞은 유학 오성률(吳聖栗), - 《육주약선》 1건을 주었다. - 삼하를 맞은 유학 정홍수(鄭弘綏) 등 2인, - 각기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차상을 맞은 유학 이인상(李仁尙) 등 2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명에서 초삼하일(草三下一)을 맞은 유학 홍석조(洪奭祚), - 감시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 초삼하를 맞은 유학 윤득길(尹得吉), - 대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초차상을 맞은 유학 이시형(李始亨) 등 2인이다. - 각기 소본 《규장전운》 1건을 주었다. -
○ 화성에서 거둔 시권이 285장, - 부에서 초삼하를 맞은 자가 6인, 차상을 맞은 자가 10인이고, 시에서 삼상을 맞은 자가 1인, 초삼하를 맞은 자가 11인, 차상을 맞은 자가 5인이며, 명에서 초삼하를 맞은 자가 1인, 차상을 맞은 자가 3인이다. 총 입격자는 37인이다. - 광주에서 거둔 시권이 277장, - 부에서 삼하를 맞은 자가 3인, 차상을 맞은 자가 17인이며, 시에서 삼하를 맞은 자가 2인, 차상을 맞은 자가 7인이고, 명에서 차상을 맞은 자가 1인이다. 총 입격자는 30인이다. - 부평에서 거둔 시권이 73장, - 부에서 이하를 맞은 자가 1인, 삼상을 맞은 자가 1인, 삼중을 맞은 자가 2인, 초삼하를 맞은 자가 2인, 차상을 맞은 자가 10인이고, 시에서 이하를 맞은 자가 2인, 삼상을 맞은 자가 2인, 삼중을 맞은 자가 2인, 초삼하를 맞은 자가 3인, 차상을 맞은 자가 6인이며, 송에서 이하를 맞은 자가 1인, 삼하를 맞은 자가 2인, 차상을 맞은 자가 4인이다. 총 입격자는 38인이다. - 남양에서 거둔 시권이 120장, - 부에서 삼하를 맞은 자가 5인, 차상을 맞은 자가 7인이고, 시에서 삼하를 맞은 자가 3인, 차상을 맞은 자가 8인이며, 찬에서 초삼하를 맞은 자가 1인, 차상을 맞은 자가 1인이다. 총 입격자는 25인이다. - 인천에서 거둔 시권이 53장, - 부에서 삼하를 맞은 자가 2인, 차상을 맞은 자가 9인이고, 시에서 삼하를 맞은 자가 1인, 차상을 맞은 자가 4인이며, 명에서 삼하를 맞은 자가 1인, 초차상을 맞은 자가 3인이다. 총 입격자는 20인이다. - 안산에서 거둔 시권이 74장, - 부에서 삼상을 맞은 자가 3인, 삼중을 맞은 자가 1인, 삼하를 맞은 자가 3인, 차상을 맞은 자가 8인이고, 시에서 삼하를 맞은 자가 4인, 차상을 맞은 자가 4인이며, 명에서 초삼하를 맞은 자가 1인, 차상을 맞은 자가 1인이다. 총 입격자는 25인이다. - 김포에서 거둔 시권이 93장, - 부에서 삼중을 맞은 자가 1인, 삼하를 맞은 자가 2인, 차상을 맞은 자가 7인이고, 시에서 삼중을 맞은 자가 3인, 삼하를 맞은 자가 4인, 차상을 맞은 자가 3인이며, 논에서 삼중을 맞은 자가 1인, 삼하를 맞은 자가 2인, 차상을 맞은 자가 2인이다. 총 입격자는 25인이다. - 양천에서 거둔 시권이 67장, - 부에서 이하를 맞은 자가 2인, 삼중을 맞은 자가 4인, 삼하를 맞은 자가 1인, 차상을 맞은 자가 8인이고, 시에서 삼중을 맞은 자가 2인, 삼하를 맞은 자가 1인, 차상을 맞은 자가 2인이며, 명에서 삼하를 맞은 자가 3인, 차상을 맞은 자가 2인이다. 총 입격자는 25인이다. - 시흥에서 거둔 시권이 58장, - 부에서 삼상을 맞은 자가 2인, 삼중을 맞은 자가 1인, 삼하를 맞은 자가 3인, 차상을 맞은 자가 8인이고, 시에서 삼하를 맞은 자가 2인, 차상을 맞은 자가 6인이며, 명에서 삼하를 맞은 자가 2인, 차상을 맞은 자가 1인이다. 총 입격자는 25인이다. - 과천에서 거둔 시권이 136장이다. - 부에서 삼중을 맞은 자가 2인, 삼하를 맞은 자가 13인, 차상을 맞은 자가 25인이고, 시에서 삼상을 맞은 자가 1인, 삼중을 맞은 자가 1인, 삼하를 맞은 자가 2인, 차상을 맞은 자가 2인이며, 명에서 초삼하를 맞은 자가 2인, 차상을 맞은 자가 2인이다. 총 입격자는 50인이다. -
○ 전교하기를,
“이번 행행 때 어가가 지나간 고을 유생들의 응제에서 수석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소정의 분수(分數 점수)를 주라. 그 가운데 전 찰방 이장연은 전함(前銜)이 6품(品)이었다고 하니, 이조로 하여금 복직시켜 조용(調用)하게 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주-D001] 이에 …… 명하였다 : 관련 내용은 《일성록》 이달 6일 기사에 보인다.[주-D002] 예로부터 …… 같다 : 한 고조(漢高祖)가 고향인 풍(豐)을 그리워하는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풍의 모습 그대로 거리를 조성하고 집을 지어 고향의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신풍(新豐)’이라 한 것을 가리킨다. 《漢書 卷28上 地理志上》 여기서 ‘신풍’은 화성(華城) 행궁(行宮) 정문의 누대 이름인데, 한 고조가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신풍을 조성했듯이 정조도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화성을 조성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주-D003] 낙남헌(洛南軒)에 …… 베풀다 : 1795년(정조19) 정조가 화성 행궁이 완공된 뒤에 회갑을 맞은 혜경궁(惠慶宮)을 모시고 행궁의 낙남헌에서 화성 지역의 회갑이 넘은 노인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푼 일을 가리킨다. 《正祖實錄 19年 閏2月 14日》[주-D004] 지지대(遲遲臺) : 수원에서 서울 쪽으로 오는 길에 미륵현(彌勒峴)이라고도 불리는 사근현(沙斤峴)이 있는데, 그 위에 세워진 누대(樓臺)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고 돌아올 때면 떠나기가 아쉬워 이곳에서 서성대면서 누대의 이름을 지지대라고 하였다. 《日省錄 正祖 16年 1月 26日, 19年 閏2月 16日》[주-D005] 만번 …… 말라 : 정조의 어제시 〈응란헌에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바라보다〔凝鑾軒望南漢〕〉에 나오는 구절이다. 남한산성의 장대(將臺)에 ‘잊지 말라’는 뜻의 무망(毋忘)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시에서 남한산성의 장관에게 이렇게 부탁한 것이다. 《弘齋全書 卷7 詩3, 韓國文集叢刊 262輯》 ‘봉우리에 말을 세우겠다’는 말은 금(金)나라 군주 완안량(完顔亮)이 “백만 대군을 몰아 서호(西湖) 위로 옮겨서 오산(吳山) 제일봉에 말을 세우겠다.”라는 시를 쓰고 중원(中原)을 병탄할 뜻을 나타냈다는 고사(故事)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는 남한산성을 함락한 후금(後金), 곧 청(淸)나라를 잊지 말라는 뜻이다.[주-D006] 어가가 …… 하다 : 정조가 기해년(1779, 정조3) 8월에 남한산성에 행행할 때에 시문을 짓는 대신 산성 동남문 밖에 비석을 세우고 ‘기해주필(己亥駐蹕)’이라 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어, 다음 해 5월에 수어사 김종수(金鍾秀)를 시켜 동문 밖의 바위에다 써서 새기게 한 것이다. 《日省錄 正祖 3年 8月 24日, 4年 5月 26日》[주-D007] 침과정(枕戈亭) : 남한산성 행궁 안에 있는 정자이다. 산성을 쌓는 과정에서 발견된 누각을 1751년(영조27)에 광주 유수(廣州留守) 이기진(李箕鎭)이 중수(重修)하고 침과정이라 하였다. 《국역 임하필기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광주부(廣州府)》[주-D008] 백성이 …… 있을까 : 정조의 어제시 〈부평부의 관아에 주정하면서 운자를 불러 읊다〔富平府治晝停呼韻〕〉에 나오는 구절이다. 《弘齋全書 卷7 詩3, 韓國文集叢刊 262輯》 ‘무성(武城)의 현(絃)’이란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의 재(宰)가 되어 예악을 통한 교화를 중시했던 것을 가리킨다. 《論語 陽貨》[주-D009] 석호가정별업도(石湖佳亭別業圖) : 세종 때 이조 판서를 지낸 조서강(趙瑞康)이 사직한 다음 부친 조반(趙胖)의 별장이 있는 부평(富平)의 가정(佳亭)에 은거하자 세종이 궁중의 화사(畫師)를 보내 가정의 모습을 그리도록 하였는데, 이후 이것을 주제로 한 시들이 많이 나와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이 그림과 시들을 모아 서화집으로 만든 것이다. 《인천문화재단 http://www.ifac.or.kr 검색일:2012. 3. 26.》[주-D010] 계양산(桂陽山) : 부평과 김포에 걸쳐 있는 산이다.[주-D011] 어느 …… 찾을까 : 정조의 어제시 〈남양의 도중에서 읊다〔南陽路中〕〉에 나오는 구절이다. 《弘齋全書 卷7 詩3, 韓國文集叢刊 262輯》 융중(隆中)은 제갈량(諸葛亮)의 집이 있던 곳을 가리킨다. 《한진춘추(漢晉春秋)》에 “제갈량이 남양(南陽)의 등현(鄧縣)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등현은 양양(襄陽)의 성(城)에서 서쪽으로 20리에 있고 융중이라 불렸다.”라고 하였다.[주-D012] 용백산(龍栢山)에 제갈무후(諸葛武侯)를 향사하다 : 남양(南陽)에 있는 용백사(龍柏祠)가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을 모신 사당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용백사는 1666년(현종7)에 세워졌는데, 송나라의 명신 호안국(胡安國)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순국한 윤계(尹棨)도 함께 향사하였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9권 경기(京畿)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주-D013] 몸소 남양(南陽)에서 농사짓다 : 제갈량이 촉한의 유비(劉備)에게 발탁되기 전에 남양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던 것을 가리킨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여기서는 제갈량이 살던 남양과 경기도 남양의 이름이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주-D014] 혹 …… 않을까 : 정조의 어제시 〈인천으로 가는 도중에 읊어서 부아에 걸도록 명하고 고을 수령 황운조로 하여금 쓰게 하다〔過仁川路中有吟 命揭府衙 使邑倅黃運祚書之〕〉에 나오는 구절이다. 《弘齋全書 卷7 詩3, 韓國文集叢刊 262輯》 인천(仁川)의 소래산(蘇來山)에 군자봉(君子峯)이라는 봉우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읊은 것이다.[주-D015] 자연도(紫燕島)에 …… 정비하다 : 자연도는 영종도(永宗島)의 본래 이름이다. 이곳에 수군방어사(水軍防禦使)를 두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주-D016] 능허대(凌虛臺) :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부터 문주왕(文周王) 때까지 백제의 사신들이 중국 동진(東晉)을 왕래할 때 출항하던 곳이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주-D017] 살기는 …… 들었구나 : 정조의 어제시 〈밤에 안산의 아헌에 임어하다〔夜御安山衙軒〕〉에 나오는 구절이다. 《弘齋全書 卷7 詩3, 韓國文集叢刊 262輯》[주-D018] 남경(南京)에 …… 하다 : 세종 때 문신이자 농학자인 강희맹(姜希孟)이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연꽃 씨를 가져와 안산(安山)에 심었는데, 연이 널리 퍼져 이 지역을 ‘연성(蓮城)’이라 부르게 된 것을 말한다. 《私淑齋集 卷12 附錄, 韓國文集叢刊 12輯》[주-D019] 평근루(平近樓) : 안산 관아의 정문이다.[주-D020] 장강(長江)과 …… 오르네 : 정조의 어제시 〈금릉관에 제하다〔題金陵館〕〉에 나오는 구절이다. 《弘齋全書 卷7 詩3, 韓國文集叢刊 262輯》[주-D021] 금릉군(金陵郡)으로 옮기다 : 인조가 즉위한 다음 양주(楊州)에 있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의 묘소를 김포(金浦)로 천장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주-D022] 포구를 파내다 : 인천 쪽의 서해와 김포 쪽의 한강을 파내어 운하로 연결하려 한 것을 가리킨다. 고려 시대 이후 조운(漕運)하는 중도에 강화의 손돌목〔孫石項〕 같은 험로를 피할 방도로 강구되었는데, 조선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가 착수하여 양편에서 동시에 공사를 진행시켜 40리에 이르는 운하를 팠지만 중간에 가로놓인 원통현(圓通峴)을 뚫지 못해 중단되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주-D023] 사방 …… 하다 : 정조의 어제시 〈양천의 관각에 제하다〔題陽川官閣〕〉에 나오는 구절이다. 《弘齋全書 卷7 詩3, 韓國文集叢刊 262輯》[주-D024] 선유봉(仙遊峯) : 한강 선유도(仙遊島)에 있던 봉우리를 말한다.[주-D025] 공암(孔巖) :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시조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이 깃든 양천 탑산 기슭의 바위 동굴이다.[주-D026] 산과 …… 창성(昌盛)하다 : 정조의 어제시 〈시흥현재에서 읊다〔始興縣齋〕〉에 나오는 구절이다. 《弘齋全書 卷7 詩3, 韓國文集叢刊 262輯》[주-D027] 밤에 …… 살펴보다 : 강감찬(姜邯贊)이 태어난 곳인 낙성대(落星臺)의 전설을 가리킨다. 고려 때 한 사신이 밤에 시흥군(始興郡)에 들어오다가 큰 별이 민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했더니 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 아이가 강감찬이었는데, 나중에 송(宋)나라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나서 자신도 모르게 두 번 절하면서 “문곡성(文曲星)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지금 여기에 있다.”라고 하였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0 경기(京畿) 금천현(衿川縣)》[주-D028] 관감정(觀感亭) : 청백리(淸白吏)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 노후를 보낸 시흥(始興)에 있는 집의 이름이다. 1631년(인조9)에 벼슬에서 물러난 이원익이 비바람이 들이치는 퇴락한 집에서 끼니 걱정을 하며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인조가 그 청백리 정신을 신민이 보고 느껴야 한다〔觀感〕는 의미에서 집을 하사하였다. 1694년(숙종20)에 자손들이 그 집터에 사당을 세웠다. 《梧里集 別集 卷2 引見時奏事, 續集 附錄 卷1 年譜, 韓國文集叢刊 56輯》[주-D029] 남충(南充)의 …… 익숙하여라 : 정조의 어제시 〈안양의 발사에서 이것을 써서 남충의 부림헌에 걸도록 명하다〔安養撥舍書此 命揭南充之富林軒〕〉에 나오는 구절이다. 《弘齋全書 卷7 詩3, 韓國文集叢刊 262輯》 부림(富林)은 과천(果川)의 옛 이름이고, 부림헌은 과천 관아의 동헌(東軒)이다. 남충도 과천을 가리키는 듯하다.[주-D030] 관악산(冠岳山) …… 하다 : 관악산에 있는 절인 연주대(戀主臺)를 가리킨다.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태종의 뜻을 안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이곳에 머물면서 경복궁(景福宮)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正祖實錄 13年 12月 30日》[주-D031]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 정조가 수원의 현륭원(顯隆園)에 가기 위해 노량진(鷺梁津)에 주교(舟橋)를 설치하고 건너가서 주필(駐蹕)하던 강가의 작은 정자이다. 그 정자의 옛 이름은 망해(望海)였으나 정조가 그곳의 경치가 용이 굼틀대는 것 같고 봉황이 훨훨 나는 듯하다고 하여 ‘용양봉저정’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弘齋全書 卷14 龍驤鳳翥亭記, 韓國文集叢刊 262輯》[주-D032] 규장전운(奎章全韻) : 정조의 명에 의해 이덕무(李德懋) 등이 편찬한 한자 운서(韻書)이다. 조선음(朝鮮音)과 중국음(中國音)을 함께 표시하였는데, 이덕무가 1792년(정조16)까지 주로 편찬하고‚ 윤행임(尹行恁)ㆍ서영보(徐榮輔)ㆍ남공철(南公轍)ㆍ이서구(李書九)ㆍ이가환(李家煥)ㆍ성대중(成大中)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 등이 교정한 다음 1796년에 간행되었다. 그 뒤 방각본(坊刻本)으로도 많이 인행(印行)되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2. 2. 23.》[주-D033] 육주약선(陸奏約選) : 정조가 평소 육지(陸贄)의 주의(奏議)가 정치와 교화에 보탬이 된다고 여기고 있다가, 즉위한 초기에 교서관에 명하여 전집(全集)을 인행(印行)하여 반포하도록 하고 그중에서 핵심적인 29편을 직접 뽑아서 이황(李滉)의 《주서절요(朱書節要)》의 의례(義例)를 모방하여 자구(字句)를 다듬어서 읽기 편하게 만든 책이다. 1797년(정조21) 윤6월에 다시 고쳐서 2편(編)으로 만들고 각신 서유구(徐有榘) 등에게 명하여 교정을 거쳐 활자로 인쇄하게 하였다. 《正祖實錄 21年 閏6月 12日》[주-D034] 사기영선(史記英選) : 정조의 명에 의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중에서 주로 세가(世家)와 열전(列傳)을 중심으로 선집하여 편찬한 책이다. 1796년(정조20)에 간행되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2.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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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 京畿道 安山郡
樓亭
平近樓。 郡衙正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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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집(息山集) 이만부(李萬敷)생년1664년(현종 5)몰년1732년(영조 8)자중서(仲舒)호식산(息山)본관연안(延安)특기사항이재(李栽), 이형상(李衡祥) 등과 교유. 남인(南人) 학자(學者)
息山先生別集卷之一 / 陋巷錄 / 魯谷草木誌
蓮。爾雅曰。其莖茄。其葉荷。其本蔤。其花菡萏。說文曰。蓮。荷實也。一曰菂薂。又曰。藕荷根也。一曰蔤。乃莖下
白蒻。在泥中也。爾雅又曰。其實蓮。其根藕。其中菂。菂中薏。花有紅白及鶴頂紅。鶴頂紅者。以白房上尖有紅暈。故稱。或謂出於錢塘。故一名曰錢塘紅。又古有碧蓮。非碧也。太白則成碧故云。離騷言。緝以爲裳。取其芳也。濂溪先生著說愛之。比之君子焉。其實服之。益氣强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