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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 구하는 것을 허락하심 (대상4:10)
히틀러 통치 시대에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 시몬느 베이유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주에는 커다란 두 개의 힘이 존재한다. 하나는 중력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런데 보면 이 두 힘에는 서로 공통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평소엔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중력이 있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중력의 세상 속에서 살지라도 믿음의 사람이라면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도 의심하지 말아야 진정한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은혜를 사모해야 하고 그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믿기만 하면 받는 걸까요?
예. 받습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실 때면 항상 적용하시는 원칙이 ‘믿음 대로’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라도 은혜를 받습니다.
다만, 이때 받게 되는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보편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가 원하는 나만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자 하면 믿음에 더하여 한가지가 더 있어야 합니다.
물론 믿음 안에 포함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게 뭘까요?
그 한 가지가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는 특별한 은혜를 받는 통로가 기도입니다.
이렇듯 기도가 은혜의 통로이기에 나의 ‘기도 통로’는 다른 이름으로는 나의 ‘응답 통로’가 된다는 것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수도꼭지를 생각해 보세요. 이미 정수장으로부터 물은 통로를 통해 우리 집 안의 수도꼭지에까지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물이 필요하다 싶으면 수도꼭지만 틀면 되는데, 기도와 응답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만약에 평생에 수도꼭지를 틀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평생에 거기서 나오는 물은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누군가에게서 신앙이 살아있는지를 확인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는 것도 기도입니다.
기도가 없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믿는다 해도 사실상 은혜의 통로는 막힌 것입니다.
반대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은혜의 통로가 열려 있고 그렇기에 기도 후의 은혜는 언제나 ‘나를 향해 오고 있는 중!’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젠 기도하셨다면 이렇게 믿으세요.
예전 유행가 가사 중에 ‘어디쯤 가고 있을까?’라는 것이 있었는데, 말을 살짝 바꿔서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은혜받을 것을 확신하시되 하나님의 은혜가 기도 통로 즉 응답 통로를 따라 나를 향해 이동하는 중이니, 기도했다면 그다음에 있어야 할 믿음은 나를 위한 응답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은혜 주실 때면 적용하시는 원칙이 ‘믿음 대로’이지만 또한 ‘기도한 대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에 있어서는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데, 오늘 본문에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야베스의 기도’ 나옵니다.
본문에서 그의 기도 제목을 보면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구하는 내용만 놓고 보면 누구라도 가져봤음 직한 소원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유머집을 보니까 한 남자가 죽어 염라 대왕에게 신고를 하는데 명부를 보던 염라대왕이 깜짝 놀라며 ‘자네가 여기 오려면 아직 십 년이나 남았는데 저승사자가 착각을 한 모양이네. 다시 세상으로 보내줄 텐데 미안하니까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게.’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남자가 ‘그저 처자식하고 넓은 집에서 아픔이나 근심 없이만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염라대왕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이 ‘이 사람아. 그렇게 좋은 자리가 있었으면 내가 벌써 갔겠다.’라고 하더랍니다.
어떤가요? 야베스의 기도는 불신자들이 높이 보는 염라대왕도 어찌해 볼 수 없는 그런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꿈같은 얘기고,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희망 사항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는 ‘꿈은 이루어진다!’입니다.
흔히 꿈이 있는 자를 향해 세상 사람들은 쉽게들 ‘꿈도 야무지다.’라고 하는데, 꿈같은 일이기에 ‘될 리가 없다’는 뜻이겠지요.요셉이 형들로부터 고통받은 이유도 바로 꿈이 너무 야무졌기 때문 아닌가요?
그런데 본문 10절 후반부를 보면 그렇게 ‘야무진 꿈’을 이루어달라고 하는 야베스를 향해 하나님은 어찌하셨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꿈은 누구라도 꿀 수 있고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룸에 있어서 내가 하려고만 하면 그 꿈은 야무진 일장춘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꿈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한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도 이렇게 간증하게끔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 상항을 좀 더 자세히 보자면 10절은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쉽게는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엔 야베스가 기도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고, 마지막은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말로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0절에서 야베스의 기도 내용들을 괄호로 묶어 보세요. 그러면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와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가 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기도 제목을 묶은 괄호가 들어갑니다. 맞지요?
그럼, 이번엔 묶은 괄호 속에 여러분의 ‘기도 제목’들을 넣어 보세요. 그리해서 우리도 본문 10절 말씀처럼 해보면,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로 시작해서, 그다음엔 ‘내 기도 제목들’이 들어갈 거고, 그러면 그다음은 뭘까요?
“하나님이 내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가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런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사이의 상관관계를 잘 기억해 두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있어야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다.
이는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는 일종의 믿음 공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식대로 하면 되는 것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 복 받은 것 중에 가장 큰 것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도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나와서 ‘아뢰는 믿음’ 즉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도 보면 요한일서 5:15에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앞서 본문 10절에서 야베스가 했던 기도 제목들을 괄호로 묶었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함에 있어서 ‘무엇이든지’에 해당되지 않아서 내 기도 괄호 안에 들어가지 못할 기도 제목은 무엇이 있을까요?
다시 말해 당장에 여러분이 기도해 오신 소원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무엇이든지’에 들어갈까요? 못 들어갈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괄호로 묶은 중반부의 기도 제목들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괄호 안에 들어간 것들은 하나님이 다 얻게 하실 테니까요. 따라서 10절에서 중요한 건 전반부와 후반부인데, 전반부는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이고, 후반부는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전반부의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와 후반부의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를 믿는 믿음’이 함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범사에 주가 만족하게 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된다, 안 된다.’를 생각하고, ‘가능, 불가능’을 따지기 전에 우선은 ‘무엇이든지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다음은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한번 따라 하세요.)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그리되면 이후로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기도한 대로’와 ‘믿음대로’의 은혜와 응답이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야베스의 기도로 알려진 본문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본문을 뒤에서부터 읽어가야 합니다. 즉 본문은 기록된 것처럼 ‘야베스가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가 아니라, 거꾸로, ‘하나님이 허락하심을 믿었기에 야베스가 기도했더니’라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기도가 이리되지 못하면 사람들은 자칫 기도하다가 시험에 들게 됩니다. ‘야베스는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면서 나는 기도했는데도 왜 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가?’라고.
누구라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또한 기도하면서 이런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응답에 있어서는 기도가 먼저가 아닙니다. 백번 천번을 기도만 하면 뭐합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을 믿지 못한다면 백날 천날 구했던 것들은 한낱 야무졌던 꿈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언제든 기도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믿음이 먼저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복 주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먼저 할 일이 제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즉 ‘기도했더니 응답받았다’가 아니라 ‘복 주실 것을 믿고 기도했더니 응답받았다’가 돼야 하는 겁니다.
이때 ‘믿고 기도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믿고 기도할 때라야만 ‘믿고 기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시는 분들 중에도 기도하는 건 잘 알고 잘하시면서도 의외로 기다리는 것은 잘 모르고 잘 못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기도하고 나서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의미하는 게 뭐길래 그간 몰랐고 못 했던 걸까요?
본문에서 괄호로 묶었던 야베스의 기도 제목들을 다시 보세요.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이라고 하면서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것이,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는 야베스의 당시 사는 형편은 어땠을까요?
아마도 누군가가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했다면 그는 지금 병든 형편일 거고, 일하고 돈 벌 직장 주시기를 기도한다면 그의 형편이 지금은 실직자일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야베스의 기도도 그런 인과관계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야베스가 하나님을 믿었기에 야베스의 기도가 됐지 만약 그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본문에는 기도가 아닌 야베스의 탄식이 기록됐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상으로나마 야베스의 기도를 야베스의 탄식으로 바꿔 보자면,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탄식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지 않으심으로 나의 지역이 좁디좁으며, 주의 손으로 나를 돕지 않으시기에 내가 환난을 벗어나지 못하며 늘 근심하며 살아가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듯 인생에서의 기도와 탄식은 딱 하나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과가 달라집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셨다면 이제부터는 복 받기까지 기다리는 것에서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지요? 기도하는 야베스의 당장의 형편은 탄식뿐이었다는 것을.
이런 이유에서 ‘복 받는 믿음’에 있어서는 ‘기도하는 믿음’과 ‘기다리는 믿음’이 같이 있어야 비로소 복 받는 믿음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여러분이 복 받기 위해 기도해 오셨다면 이제부터는 계속 기도하시는 중에 복 받기까지 기다리는 믿음도 키워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믿음은 기도하면 되겠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행여라도 ‘기다리는 믿음’을 ‘어떻게든 해 주시겠지.’라거나, ‘뭐라도 되겠지.’라는 식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현실을 회피하며 기다리는 건 기다리는 믿음이 아닙니다. 염려하며 불평하는 것도 기다리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구약의 요셉을 다시 보면, 인신매매에, 노예로, 죄수까지. 소위 ‘죽어라. 죽어라.’ 하는 형편을 거치면서도 요셉은 지금 노예가 됐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자기를 그렇게 만든 형들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지금 죄수가 됐다고 해서 탄식하거나 자기를 그렇게 만든 보디발의 아내에게 분노하지도 않았습니다.
노예 땐 노예로서 최선을 다했고, 죄수 땐 죄수이면서도 매사에 성실하게 살았기에 그의 기다리는 믿음 끝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 최악의 형편에서일지라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기도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최악의 형편에서라도 세상에서는 당장에 내게 주어진 일들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내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믿음’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청년 시절에 성공을 꿈꾸고 무작정 서울로 왔는데, 당장에 할 일이 없다 보니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중에 어느 회장님 댁의 청소부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일은 고됐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고 특히나 직장이 있게 됐고 숙식이 해결된 것에 대해 늘 감사하는 마음에 맡은 일을 더 열심히 해내던 중에 하루는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도록 닦은 계단에서 하필이면 회장님이 미끄러져 다리가 골절되었다고 합니다.
큰일 났다 깊어 사직서를 써 들고는 회장님을 찾아가 죄송하다고 하면서 책임지고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회장이 무슨 말이냐고. 사람이 미끄러질 정도로 청소한 걸 보면 자네처럼 맡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면서 아예 자기 소유의 건물 2채의 청소를 맡겼고, 그렇게 시작해서 현재의 청소 업체 사장까지 되었다고 하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린 이분의 간증에서 두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첫째, 힘든 상황에서도 믿음을 놓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과 또 하나, 힘든 상황에서도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믿음을 가진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현재의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결과를 내려 하는 ‘열심’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이 길든 짧든 간에 하나님은 왜 기도와 응답 사이에 간격이 있게 하신 걸까요?
우리가 그냥 구하는 것인지, 믿고 구하는 것인지를 보려 하심입니다. 믿고 구했다면 당연히 구한 것을 받기까지 기다리는 믿음도 있을 테니까요.
이렇듯 하나님이 복 주시는 분이신 것을 믿는다면 믿음으로든 세상에서든 매사에 기도와 더불어 ‘믿음으로 열심히’ 살아야만 하나님이 복 주실 때 그 복을 세상에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손으론 기도하는 믿음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론 기다리는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야베스에게 허락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구하는 모든 것도 허락하실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며 노파심에서 한 말씀만 드리자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을 적당히 살려고 하지 마시고, 기도한다는 이유로 세상을 대충 살려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형편에서든 하나님이 복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를 쉬지 마시고, 현재 주어진 일에서 열심을 다해 살면서 하나님의 응답의 때를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야베스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꿈들을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꿈이 이루어지게 해 주셨습니다.
이젠 우리 차롑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꿈을 ‘나의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세요. 야베스의 기도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기도에도 응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 안에서 무엇이든지 소원하는 모든 꿈들을 이루어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