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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7 of the May 1, 1981 article here considered presents this example
of flawed deductive reasoning:
1981년 5월 1일자 파수대 기사 제 7항(영문)은 연역적 추론의
예에서 오류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7 There is no denying that Satan has a mighty organization with invisible and visible parts. Satan the Devil is a mimic for the purpose of deception, and the fact that he has an organization argues, in effect, that his chief opponent, Jehovah God, also has an organization. So Satan the imitator has deceived multitudes of people into thinking that they are accepting, adopting and joining the right and proper thing. (2 Cor. 11:13-15) Just call to mind Jesus’ parable of the wheat and the tares, or darnel, as an illustration of this. The early appearance of the tares, or darnel, was so much like that of the wheat that there was danger at that early stage of growth that, instead of the Devil-sown tare, or darnel, plantlets, the wheat plantlets might be uprooted. (Matt. 13:24-30, 36-43) Jesus explained that the tares, darnel, or weeds, pictured “the sons of the wicked one, and the enemy that sowed them is the Devil.” 7 ‘사단’에게 보이지 않는 그리고 보이는 부분의 능한 조직이 있다는 것은 부인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사단’ 마귀는 속임수를 위한 모방자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조직이 있다는 사실은 사실상 그의 최상의 적대자 여호와 하나님께도 조직이 있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그러므로 모방자인 ‘사단’은 수많은 사람들을 속여 그들이 옳고 바른 것을 수락하는 것이며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였읍니다. (고린도 후 11:13-15) 이것은 예수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 처음 싹이 났을 때의 가라지의 형태는 너무나도 밀과 같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는 마귀가 심은 가라지가 아니라 밀을 뽑아 낼 위험성이 있었읍니다. (마태 13:24-30, 36-43) 예수께서는 그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라고 설명하셨읍니다. |
This is an unusual form of argumentation. It says in so many words that what Satan does is a guide for us to know what God does. It is true that the Scripture text cited shows that Satan presents himself as an “angel of light,” so that in that sense he may said to mimic God’s angels. But to use that one statement as a basis for assuming that whatever Satan does is necessarily in imitation of God is false deductive reasoning, a hasty, unwarranted generalization. Satan is also “the father of the lie,” a murderer, the arch practicer of deception. Whom is he “mimicking” in this? Certainly not God. In reality, the Scriptures show that Satan most often uses methods, not typical of, but directly opposite to God’s. The antagonism of light versus darkness, of truth versus falsehood, of honesty versus deception, of love versus hate, of unselfishness versus greed, and of many other opposites, is vividly presented in Scripture. In view of that, how should we reasonably react to the claim regarding Satan’s development of a ‘mighty visible and invisible organization’ as relates to the validity of a highly organized religious authority structure? Should it guide us or repel us? It is, indeed, a most unusual form of argumentation that points us to Satan’s mode of operation as a means to teach us about the things of God.16 이것은 이상한 형태의 논증이다. 사탄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알 수 있게 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는다. 인용한 성경 본문은 사탄이 자신을 '빛의 천사'로 나타내므로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천사들을 흉내낸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진술을 가지고 사탄이 무엇을 하든지 반드시 하나님을 모방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허위의 연역적 추리, 즉 성급하고 근거 없는 일반화다. 사탄은 또한 "거짓의 아버지"로서, 살인자, 기만행위의 앞잡이이다. 그는 이 일에 누구를 모방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실제로 성경은 사탄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정반대의 방식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빛과 어두움, 참과 거짓, 정직과 기만, 사랑과 증오, 비이기심과 탐심, 그리고 그 밖의 많은 대립적 구도가 성경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점에 비추어 볼 때, 고도로 조직화된 종교적인 권위 구조의 타당성과 관련있는 사탄의 '유능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조직'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합리적으로 대응해야 하는가? 그러한 주장을 지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배척해야 하는가? 그것은 실로 하나님께서 사물을 다루시는 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탄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우리에게 지적하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논증이다.16 Along the same line, an article titled “Jehovah’s Organization Moves Ahead—Are You Moving With It?,” published in the December 1, 1982, Watchtower begins thus: 이와 같은 맥락에서 1982년 12월 1일자 파수대에 발표된 "전진하는 여호와의 조직—당신은 그와 보조를 맞추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
YOU cannot read the Christian Greek Scriptures without being impressed by the fact that Christians were organized for worship. In particular, they were organized to preach, to spread the good news of God’s kingdom.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인들이 숭배를 위해 조직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특히, 그들은 전파하도록 즉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널리 전하도록 조직되어 있었다. |
Anyone reading the Christian Greek Scriptures (or New Testament) would certainly be impressed with the fact that early Christians were motivated to worship and share the good news. But motivation and being “organized” are not the same thing. Today Jehovah’s Witnesses have organized meetings, five a week, each with its organized program; they have organized semiannual circuit and annual district or regional assemblies, with their organized programs; they have organized “field witnessing” activity with organized “group witnessing,” organized territory coverage, organized “magazine day” activity, a “Field Overseer” to organize this activity and keep watch on the reports of activity turned in each month by each Witness, and circuit and district overseers on organized weekly schedules with the prime responsibility of overseeing and promoting this organized congregational activity. Where does one find in the inspired Scriptures anything even remotely resembling such a systematized, institutionalized, programmed approach to worship and to the sharing of the good news?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또는 신약성서)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숭배를 드리고 좋은 소식을 나누려는 동기가 생겼다는 사실에 감명을 분명히 받을 것이다. 그러나 동기부여와 "조직화"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오늘날 여호와의증인들은 조직화된 프로그램으로 주 5회 집회와 1년에 2회의 순회대회와 그리고 년 1회의 지역대회를 조직하였다; 조직된 증거 집단, 구역 그리고 잡지 배부의 날을 조직하였으며 이 활동을 조직하고 각 증인들이 매월 봉사보고를 살필 야외 감독자 그리고 순회 및 지역 감독자를 임명함으로써 이런 조직화된 회중 활동을 감독하고 촉진시킬 매주의 계획을 세운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숭배와 좋은 소식의 공유에 대한 체계화, 제도화, 프로그램된 접근법과 같은 조직화된 방침 중 그 어떤 것을 영감 받은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가? In actuality, the lack of any formal program and the apparent spontaneity and individual motivation of the first-century Christians are what are most remarkable in the accounts we do find in the Bible. We find only the barest of suggestions of what their meetings were like and no indication of any methodology or systematization in their proclaiming of the good news. 사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공식적인 프로그램이 없었으며 분명한 자발성과 개인적 동기부여가 우리가 성서에서 발견하는 설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모임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가장 순수한 모습만을 추정할 뿐, 그들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방법론이나 체계화에 대해 지적되는 어떤 분명한 점도 발견할 수 없다. I recall that during the years I served in circuit and district overseer activity I used to puzzle over this when preparing the “service talks” that were a regular feature of the weekly program when visiting congregations. I wanted to prepare talks that were Scriptural, but it seemed so difficult to find scriptures that even faintly reflected the kind of “organized service” urged by the headquarters in its publications. I found it hard to understand how the apostles Peter, Paul and John and the disciples James and Jude, could write entire letters to congregations and never say anything stressing the need for the readers of those letters to get out and go from door to door, nothing about organized witnessing arrangements at scheduled times, about putting in more hours in the “field service” or similar approaches or topics, all things regularly stressed in the Watch Tower Society’s publications. The letters of the apostles and disciples seemed deficient according to the viewpoint that had been developed in me. 나는 몇 년 동안 순회 및 지역 감독 활동을 하면서 회중을 방문했을 때 주간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였던 "봉사 실연"를 준비할 때 이 문제에 대해 어리둥절했던 것을 기억한다. 성경적(Scriptural)인 담화를 준비하고 싶었지만, 출판물에서 본부가 강권하는 일종의 '조직적 봉사'를 희미하게나마 반영할 정도의 성경 구절도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과 제자인 야고보와 유다가 회중에 편지를 써고서 그 편지를 읽는 수신자들이 계획된 시간에 야외로 나가 조직화된 증거 활동을 위하여 호별방문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결코 묻거나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ㅡ "야외 봉사"에 더 많은 시간을 내야 한다든지, 또는 비슷한 내용이나 화제와 같은 오늘날 워치타워 협회에서 정기적으로 강조하는 것들ㅡ사도들과 제자들의 편지들은 내가 배워 왔던 관점에 따르면 조직화된 전도 방식이 부족해 보였다. It eventually became clear, after some decades, that the real problem lay with the viewpoint inculcated in me, a viewpoint that actually perverted the first-century record, manipulating it to make it say something it did not actually say. False deduction is employed. From the broad principle that all Christians should share the good news, deductions are made to support and cover virtually every aspect of the organization’s systematized approach to worship and preaching. But those deductions are unjustified, as indicated by the absence of corroborative evidence in the Scriptures themselves. The systematized, highly programmed approach to Christianity that has developed bears greater resemblance to that of a large sales organization than to the first-century Christian congregation and its simple, uncomplicated approach to worship and service to God. 몇 십 년 후에야 결국 분명해졌지만, 1세기 기록을 왜곡시키고, 실제로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도록 조작시키는, 내게 주입된 관점에 실제 문제가 있었다. 내게는 잘못된 추론이 있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좋은 소식을 공유해야 한다는 넓은 원칙에서, 숭배와 전파에 대한 조직의 체계화된 접근방식의 모든 측면을 사실상 지지하고 커버하기 위해 추론된다. 그러나 그러한 추론은 성서 자체에 확증적 증거가 없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올바른 것이 아니다. 발전된 그리스도 정신에 대한 체계화되고 프로그램화된 고도의 접근방식은 1세기 그리스도인 회중이나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숭배와 봉사보다는 대규모 영업조직의 접근방식에 훨씬 더 흡사하다고 본다. As has been shown, the strong organizational attitude developed has a definite molding influence on the thinking of Jehovah’s Witnesses. Loyalty to the organization becomes the touchstone, the criterion, the “bottom line,” when it comes to determining whether one is a faithful Christian or not. It is the absence in the inspired Word of God of that kind of attitude and spirit—not the absence of a mere word—that today causes many Witnesses to express serious concern.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발전된 조직의 강력한 태도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고의 틀을 고정시키는 영향을 미쳤다. 조직에 대한 충성은 충실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는 시금석, 표준, '하한선'이 되었다. 오늘날 많은 증인들이 심각한 우려를 하게 하는 것은, 단지 조직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종류의 태도와 영(=조직에 대한 충성:역자 추가)이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다는 것이다. The message of the Bible as a whole is against placing one’s faith in any earthly organization or any group of men or a single man. To do so is to endanger the personal relationship with God that the Scriptures do inculcate. Reading the history of God’s dealings with humankind one can see that God regularly dealt with individuals— Abel, Enoch, Noah, Abraham, Isaac, Jacob, Job and a host of others. 전체로서의 성서 메시지는 지상의 어떤 조직이나 어떤 인간 집단이나 한 인간을 믿는 데에 대해 반대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성경이 심어주는 하나님과의 개인의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와 거래하신 역사를 읽으면 하나님께서 정기적으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욥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관계하셨음을 알 수 있다. It is probably in calling on examples in the Hebrew Scriptures for support of its organizational concept that the Watch Tower literature most frequently resorts to the fallacy of false analogy. We may remember that in this fallacy the analogy fails, not because there are no similarities whatsoever, but because they are not sufficient to give validity to the analogy. In reality, in many cases of Watch Tower application, the similarities are far outweighed by the differences. 워치타워 간행물이 가장 자주 거짓 유추의 오류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조직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마도 히브리 성서의 예를 드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이 오류에서 유추가 실패하는 것은 유사점이 전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유추에 타당성을 부여할 만큼 근거가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수대에 적용된 많은 사례에서 차이점보다는 유사점이 훨씬 더 많다. The only actual example we have of an “organization,” in the sense in which the term is used in Watch Tower literature, is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nation of Israel. Whatever comparison may be made with the Christian congregation, it is clear that Christianity marked a notable break with the past, that God’s dealings with his servants were placed on a new footing through Christ, in an eminently superior and distinctive way. The shadows have given way to the reality.17 To try to establish the relationship of Christians to God and Christ on the basis of analogies with the Israelite national framework is no more proper than to equate Christ’s sacrifice and what it accomplishes with the animal sacrifices made back then. The difference is far, far greater than the similarity. 워치타워 간행물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조직"의 유일한 실제 예는 이스라엘 나라의 설립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스도인 회중과 어떤 비교를 해도 그리스도 정신은 과거와 주목할 만한 결별을 기록했다는 점과 하나님이 자신의 종들을 다루는 방식이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지위에 놓였다는 점은 대단히 우월하고 특색 있는 방식임이 명백하다. 그림자는 실체에 예속된다.17 이스라엘 민족적 틀의 유추를 근거로 그리스도인과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의 관계를 확립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것이 성취한 효과를 그 당시 행해진 동물적 희생과 동일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차이는 유사성보다 훨씬 더 크다. Nothing illustrates more clearly that one’s loyalty and one’s trust in God cannot safely be bound with an organization than does the history of that nation. God established an official priesthood for the nation and, later, at the people’s request he established a human kingship, though making plain that the people’s petition for some visible sign of government was evidence of a lack of faith in Him, the true King.18 Over a span of some five centuries, faithful kings were rare in Judah and completely lacking in the later northern kingdom of Israel. Out of some 24 Judean kings, the reigns of only six are described favorably in Scripture, and even these were tarnished with deviations from the divine will. Similarly, the priesthood provided no consistently reliable guide for the people, the priests frequently going along with the kings in their deviations from the divine will and thus contributing to the degeneration of the pure worship of God. It is little wonder that the psalmist admonishes: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신뢰가 조직과 안전하게 결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만큼이나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공식적인 제사장을 세우셨고, 후에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 인간 왕을 세우셨는데, 비록 어떤 가시적인 통치의 징조를 요구하는 백성들의 요구가 진짜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라는 증거를 분명히 하셨다.18 몇 세기에 걸친 역사는 유다에서는 충실한 왕들이 드물었고, 후기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전무했다. 24여 명의 유대 왕 중 6명만이 성경에 호의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마저도 하나님의 뜻에서 일탈하여 퇴색되었다. 제사장들도 마찬가지로 백성들에게 한결같이 믿을 만한 길잡이를 제공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왕들과 자주 결탁하여 하나님에 대한 순결한 숭배를 타락시키는데 기여했다. 시편에서 다음과 같이 훈계하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
Do not put your trust in princes, in mortal men, who cannot save. When their spirit departs, they return to the ground; on that very day their plans come to nothing. Blessed is he whose help is the God of Jacob, whose hope is in the LORD [Jehovah] his God.19 너희는 힘있는 제후를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멸성의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사람은 숨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여호와]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19 |
The history of those five centuries shows that, despite the existence of that national organization and its priesthood, Jehovah continued to deal with individuals and that more often than not, those individuals were persons clearly out of favor with what might be called the established “organization” Jehovah dealt with David even when the head of the “organization,” King Saul, made David an outcast from the organization. David chose to reside outside the boundaries of Israel for a time, at one point even finding it safer to live among the pagan Philistines at Gath; yet Jehovah continued to deal with him.20 그 오백년의 역사를 보면 여호와께서 그 민족의 조직과 제사장직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개인적 관계를 이루었으며, 더구나 개인들은 흔히 이미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 "조직" 밖에 있던 사람들이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는데, 조직의 수장인 사울 왕이 다윗을 조직에서 쫓아 냈을 때,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음이 이를 입증한다. 다윗은 한 때 이스라엘 국경 바깥 지역인 갓에 거하면서 이교도 블레셋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와 계속 개인적 관계를 이루셨다.20 Aside from what David and Solomon wrote, most other scripture was written by men who either were not part of the established official organizational structure or who were at odds with it, viewed by it with disfavor—prophets whom God raised up and who neither got their assignment or instructions from some organizational “channel,” nor submitted their speeches and writings to that structure for its stamp of approval. They openly expressed disharmony with the ones heading and guiding the organizational structure, both kings and high priests. Because of this these prophets were often viewed as subversive troublemakers for the congregation of Israel. They followed the counsel of Psalm 37 in “waiting on Jehovah” in that they did not resort to unrighteous acts or to violence in retaliation for the injustices they suffered, leaving it to God to execute his judgments on that national organization and its straying leaders. But such “waiting on Jehovah” was only in that sense, for they did not hold back from openly and publicly making known the “organization’s” deviations from the Word of God. They felt no obligation to “go along” with the organizational structure and its officials in their erroneous course or to accept and support its misrepresentations of God’s Word. Their loyalty to Jehovah and to his truth superseded loyalty to any earthly system, even one initially established by God, as was the nation of Israel. 다윗과 솔로몬이 쓴 글과는 별도로, 대부분의 다른 성경은 확립된 공식 조직 구조의 일부가 아니거나 그 구조에 의해 승인되지 않아, 사이가 벌어진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다.ㅡ 하나님께서 일으키셨으나 조직적인 "채널"에서 그들의 임무나 지시를 받지 못한 예언자들, 그리고 조직에 의한 승인의 도장을 받으려고 그들의 말이나 글을 제출하지 않았던 예언자들에 의한 것이다. 그들은 조직 구조를 지휘하고 지도하는 사람들인 왕과 대제사장 모두에게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표현을 공공연하게 했다. 이 때문에 이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회중에 파괴적인 말썽꾸러기로 흔히 취급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입은 불의에 대한 보복으로 부당한 행위나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그 민족적 조직과 방황하는 지도자에 대한 심판집행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점에서 '여호와를 기다림'이라는 주제의 시편 37편의 조언을 따랐다. 그러나 그러한 '여호와를 기다림'은 폭력적 보복을 삼가고 심판 집행을 여호와께 맡긴다는 의미였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조직'의 일탈을 공공연히,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까지 제지한 것은 아니었으며, 잘못된 행로에 들어선 조직 구조와 그 관리들을 "따라갈" 의무도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대표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지할 의무도 느끼지 못했다. 여호와와 그의 진리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은,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처음에 세우신 하나라도, 어떤 지상의 제도에 대한 충성보다 우선되었다. Today most of Jehovah’s Witnesses take virtual pride in supporting “the organization” no matter what it does or where it leads or what it teaches. In this they have no support from Scripture. In the national congregation of Israel, it was those who submissively followed the organizational officials (kings and priests) no matter what, who were the ones led into false worship, and their “loyalty” to that national organization’s leaders caused them to accuse falsely and persecute men innocent of any wrongdoing.21 They viewed such conscientious servants of Jehovah as “anti-establishment.” Thus, their loyalty to an organization actually put them in opposition to God. This stands as a warning to us to this day. 오늘날 대부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조직'이 어떤 일을 하든, 어디로 이끌든, 무엇을 가르치든 '조직'을 지원하는 데 모종의 자부심을 갖는다. 하지만 이점에서 그들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 이스라엘 민족 회중에서는 어떤 짓을 하더라도 누가 거짓 예배를 드리든지 조직 관리(왕과 제사장)를 순종적으로 따라야 하는 자들이었고, 그 국가 조직의 지도자들에 대한 '충성'때문에 어떤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거짓으로 고발하여 박해하게 하였다.21 그들은 그러한 양심적인 여호와의 종들을 '반체제의 인물'로 보았다.그래서 조직에 대한 충성이 하나님의 반대되는 위치에 그들을 두게 되었다. 따라서, 조직에 대한 그들의 충성은 실제로 그들을 하나님의 반대 위치에 그들을 두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경고가 되는 것이다. Although the kingship had ceased, the official structure of the priesthood of Israel still operated in Jesus’ day, its priests still functioning as filling the office of God’s appointed representatives. Joined with them were the Jewish elders who helped compose the highest judicial court of the nation. How did this circumstance affect the course of God’s Son, Christ Jesus? He followed a course and spoke in a way that brought upon him the disapproval and opposition of that authority structure and its most responsible members, including the very high priest himself. In reality, it was what might justly be called “the governing body” of the national organization, the chief priest and members of the Sanhedrin, that judged him adversely.22 And it was to that “governing body” that the apostles later declared, “We must obey God as ruler rather than men.”23 The stand they took and the principle they voiced remain valid today. They are in direct conflict with the view of “going along” with an organization simply because it claims to speak for God. 예수의 시절에 비록 왕권은 중단되었지만, 이스라엘 제사장의 공식 구조는 여전히 운영되었으며, 그 제사장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임명한 대표들의 직무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들과 더불어 국가 최고 사법 재판소 구성을 도운 유대인 장로들도 결탁했다. 이런 상황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행로에 어떤 영향을 미쳤겠는가? 그는 그러한 권위 구조와 그것의 가장 책임감 있는 구성원들, 즉 바로 대제사장 자신을 포함한 권위 구조의 불승인과 반대를 불러 일으키는 방식으로 행동을 취하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그를 부정적으로 판단한 것은 당연히 국가조직인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회원들의 '통치 기구'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다.22 그리고 사도들이 나중에 통치자로서"우리는 인간보다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그 '통치 기구'에 대한 것이었다.23 그들이 취한 입장과 그들이 표명한 원칙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단순히 조직이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조직을 '따라 간다'는 견해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To make organizational loyalty the criterion for judging anyone’s Christianity is, then, clearly a perversion of Scripture. To urge, even to insist, that persons put faith in any earthly system, is totally without foundation in Scripture. Read the whole of those Scriptures and it is clear that what we are called on to do is to put faith in God, faith in his Son, faith in the Word of God as brought to us by those whom He inspired, but nowhere are we taught to put faith in men or in an earthly organization, unquestioningly following its lead. Such faith is misplaced and leads to grave consequences. The facts of history bear that out throughout all the centuries and our twentieth century is no exception. Far from encouraging such faith in imperfect men, the entire Bible record is a continual reminder of the danger inherent in that kind of trust. 조직적 충성심을 어떤 사람의 그리스도인 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심지어 사람들이 지상의 어떤 조직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그 성경 전체를 읽어 본다면 우리가 요구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의 아들을 믿는 믿음, 하나님께서 영감을 준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두는 것이지, 성경 어디에서도 인간에게나 지상 조직에게나 또 그 조직의 안내를 무조건 따르라는 가르침은 없다. 그런 믿음이 잘못되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역사의 사실들은 수 세기 동안 그리고 현재 20세기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 전체 기록은 불완전한 사람들에 대한 그러한 믿음을 장려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그러한 신뢰에 내재된 위험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고 있다. |
16 In the same article, on page 15, portions of issues of the Watch Tower back in 1883
and 1884 are reprinted, as though supporting the idea of a visible organization such as
that which now exists among Jehovah’s Witnesses. The word “organization” does appear
a number of times in the quotations. But that is all. When examined, these quotations
prove to be in reality a direct contradiction of the present-day organizational concept.
That nineteenth-century material actually argues against any developing of a highly
structured earthly religious organization and insists that there should only be a heavenly,
invisible organization formed of Christ’s congregation. As has been shown in Chapter 4,
pages 70-77 of this book, the editor of the Watch Tower, Charles Taze Russell, was
opposed to the formation of the very type of earthly, visible organizational structure
that began to develop after his death. There is not the slightest reference to these facts
in the article in question and the reader is led to believe that there is harmony between
those century-old quotations and the modern-day concept of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Adverse facts and information are suppressed, glossed over, manipulated or ignored.
16 같은 기사, 15면에는 파수대의 발행 일부가 1883년과 1884년으로 거슬러 보이는 조직
개념을 지지하는 것이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조직의 사상을
지지하는 것처럼 재인쇄된다. "조직"이라는 단어는 인용문에 여러 번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검토했을 때, 이 인용구들은 실제로 오늘날의 조직 개념과 직접적으로
충돌 된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 19세기 자료는 사실 고도로 구조화된 종교 조직의 발전에
반대하였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회중으로 구성된 천상의 보이지 않는 조직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제4장 70-77면에서 보았듯이, 파수대의 편집자인 찰스 태이즈 러셀은
그가 죽은 후 발전하기 시작한 바로 그 유형의 지상의 가시적인 조직 구조의 형성에 반대했다.
문제의 글에는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언급이 조금도 없으므로 독자는 그 세기에 있었던
인용문과 워치타워 조직의 현대적 개념 사이에 조화가 있다고 믿게 된다. 부정적인 사실과
정보는 가리워지고, 얼버무리고, 조작되거나 무시된다.
17 2 Corinthians 3:7-10; Colossians 2:17; Hebrews 9:7-11, 23.
17 고후 3:7-10; 골 2:17; 히 9:7-11, 23.
18 1 Samuel 8:4-7; Isaiah 33:22.
18 삼상 8:4-7; 이사야 33:22.
19 Psalm 146:3-5, NIV.
19 시 146:3-5, 새번역.
20 1 Samuel 21:10.
20 삼상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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